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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물아홉의 가을이 소리없이 찾아왔다. 그리고 올 가을도 어김없이 청첩장이 하나둘씩 책상 위에 쌓이고 있다. 올해부터는 유난히 후배들의 청첩장이 많아짐을 느낀다. 오늘도 엄마는 어느 집 아들 얘기를 꺼내신다. 이럴 땐 그저 영화나 한편 보면서 한곳에 집중하는 것이 최곤데….
지금까지 한 서른번은 족히 보았을 영화. 오늘도 난 결국 그 비디오를 집어든다. 낭만의 공간 베니스를 배경으로 운명의 끈을 밀고 당기는 사랑 이야기, <온리 유>. 어릴 적 놀이동산 점쟁이에게 운명의 이름을 듣게 된 여주인공, 페이스. 그녀는 오랜 세월 동안 조금의 의심도 없이 그 운명의 이름을 믿어왔고, 또 그 운명의 사람을 기다린 로맨티스트였다. 그리고 그녀에게 첫눈에 반해버려 그 운명의 이름을 뺏어버린 귀여운 거짓말쟁이, 피터. 둘의 만남은 이렇듯 이름 하나 때문에 이어지긴 했지만, 어쩌면 두 주인공은 더 큰 운명의 힘으로 머나먼 이국에서 서로를 발견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만약 우리가 태어나면
붉은 점이 있나요, <온리 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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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예비군 Y는 한때 ‘영화’비평가가 꿈이었다. Y는 이 꿈을 접은 이유가 “인용할 수 없기 때문”이라 했다. 문학비평가는 작가의 글을 동일한 글로 인용하지만 영화비평가는 동영상과 사운드를 사진과 글로 ‘대체’한다. Y는 비평가의 ‘지면’이 싫다고 했다. 그럼 ‘지면’ 대신 ‘화면’(예컨대 모니터)을 이용한다면 결론. 기술적으로는 긍정적이나 제도적으로는 부정적이다. ‘영화’비평가는 자신의 비평을 비디오 카메라로 촬영하고 비평할 영화들을 (화질과 음질, 화면비율은 일단 무시하자) 파일 형태로 전환한 뒤 인용해서 편집하면 된다(홍보와 비평이 한자리에 놓인 <출발! 비디오 여행>이나 <접속 무비월드> 등의 프로그램은 일단 논외로 하자). 문제는 이제부터다. 이것을 어딘가에 보내 상영하려고 해보자. 당장 저작권 문제가 걸릴 것이다. 문학비평이 글을 인용하는 것은 저작권을 해치지 않지만 영화비평은 그렇지가 않다. 저작권자나 대행사로부터 사용허가를 얻고 비용을 지불해야 한
`영화` 비평가와 저작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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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다버리기는 아깝지만 그렇다고 갖기는 그런, 또는 어떤 상황으로 그렇게 돼버린 남자들과 대체로 이성친구가 되는 것 같다. 이런 친구들과는 서로의 애정관계에 대해서 조언하고 파트너를 구해주기도 하면서 "둘 다 몇살까지 결혼 못하면 우리끼리 해결하지 뭐" 하는 시덥잖은 농담도 곧 잘한다. <내 남자친구의 결혼식>에서 마이클과 줄리언처럼.
그런데 남자친구와의 관계는 여자친구들과는 다른 이상한 딜레마가 있다. 한달 열흘 동안 같은 침대를 써도 별일 없을 것 같은 사이였건만 어느 날 갑자기 친구가 “결혼할 친구야”라고 떡 하니 여자를 소개하는 순간 그가 남자로 보이기 시작한다. 것도 푹 찌그러진 찹쌀 도넛이 마술봉을 한대 맞고 갑자기 삼단 생크림 케이크로 변하는 것처럼 멋진 왕자님으로 변신하는 것이다. 어제까지 전화로 듣던 목소리는 틀림없이 개골개골이었는데 말이다.
“안녕하세요 이야기 많이 들었어요.” 말은 우아하게 하지만 머릿속에서는 듣고 흘렸던 정보의 조각들이 그제
김은형의 오!컬트 <내 남자친구의 결혼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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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를 낳고서 직장을 쉬고 있는 후배가 전화해 컴퓨터가 다운됐다면서 울었다. 바이러스를 먹었는지 하드에 있는 파일들이 다 날아갔다고 했다. 몰래 써놓은 비장의 원고가 날아간 것도 아닌데, 후배는 더이상 살아갈 의욕을 잃은 사람처럼 울었다. 그러고보니, 최근에 하나뿐인 딸을 미국의 남편한테 보낸 린야밤에 술 마시다가 전화해서는 대성통곡을 했다. “외로워 죽겠어.”언젠가 이들에게 느닷없이 전화해서 사소하기 짝이 없는 일로 징징 짰던 경력은 까맣게 잊은 채, 나는 정신과의사 또는 학교선생님의 의기양양한 태도로 처방과 훈계를 전달했다. 음, 말이지. 컴퓨터가 다운된 건 하나의 계기일 뿐이고 너는 지금 너무 외로운 거야. 이제 그만 쉬고 직장을 가져야겠다. 그리고 너는, 아무래도 딸을 도로 데려와야겠구나. 안 된다고 아님 말고. 음, 외로운 것도 좀 지나면 적응이 될 거야.내가 직장을 그만둔 뒤 지난 2년 반 동안 가장 힘들었던 건, 돈이 궁한 것도, 소설 쓰는 것도, 아이들 뒤치다꺼리도 아
발톱의 때 같은 고독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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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믹물을 만들고 싶어하는 한국 영화감독들에게 20세기 초엽은 그리 좋은 시대 배경이 아니다. 코앞에 닥친 망국이 한국인 관객의 웃음에 어쩔 수 없이 그늘을 드리우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영화 속의 웃음 폭탄에 마냥 몸을 내맡기기가 뭔지 찜찜한 것이다. <YMCA야구단>의 김현석 감독도 아마 그것을 의식했을 터이다. ‘순국열사’의 유서 에피소드를 포함해 몇 군데 아슬아슬한 대목이 있지만, 이 영화의 익살은 한국인의 학습된 역사적 상상력을 맞대고 거스퇐않을 만큼 절제돼 있다. 작품이 ‘암행어사 출두’ 장면에서 ‘컷’되는 것도 그런 맥락에서 이해할 만하다. 어떤 식의 마무리도 관객 모두에게 흔쾌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연출자는 그 마무리를 관객 개개인의 상상력에 떠넘겨버린 것이다.도입부의 흑백영상에 담긴 서울은, 다소 어설프게 재현된 영화 속 20세기 초 풍물들과 어우러져, 지난 한 세기 동안 서울이, 그리고 더 나아가 이 나라 전체가 얼마나 변했는지를
아저씨,을 보고 `황성`의 추억에 젖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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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영화계의 신예 프랑수아 오종 감독의 <워터드롭스 온 버닝 락>은 파스빈더가 남긴 유작의 해묵은 먼지를 털어내고 영화화한 것이다. 파스빈더는 1999년 베를린 영화제 최고의 화제작 가운데 하나인 이 영화를 통해 죽음으로부터 귀환한 듯 보인다. 파스빈더의 삶과 매우 흡사하게, <워터드롭스 온 버닝 락>은 한편의 비극적 광대극이자, 일말의 감정적 동요도 없는 기괴한 러브스토리다.
오만하고 위압적인 레오폴드(베르나르 지로도)는 자기 나이의 반도 채 안 되는 프란츠(말릭 지디)를 유혹해 집으로 데리고 오는데, 자신들이 겪어온 여인들에 대해서 이야기하거나 말판 놀이를 즐기다가 불쑥 “너 남자랑 자본 일 있니”라는 말을 건넨다. 그리고 프란츠는 그 질문에 못지않은 놀라운 반응을 보인다.속으로는 늘 꿈꿔 왔지만 실현될 수 있으리라 생각조차 해보지 않았을 이 관계가 시작되며 이야기는 전개된다.
<워터드롭스 온 버닝 락>은 파스빈더적 주제를 전달하는 데서 그치
프랑수아 오종의 <워터드롭스 온 버닝 락><크리미널 러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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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독립영화협회와 애니마포럼, 한국시네마테크 협의회는 90년대 이후 한국사회의 현실을 다양한 관점으로 비춰낸 독립애니메이션을 모아 26-28일 서울 종로구 소격동 서울아트시네마에서 상영한다. ‘제37회 독립영화, 관객을 만나다-한국독립애니메이션특별전'이란 이름으로 소개되는 작품들은 이용배 감독의 <와불>, 이성강 감독의 <넋>, 김홍중 감독의 <소나기>, 정동희 감독의 <오픈> 등 모두 31편이다.
오후 3시, 5시, 7시 등 하루 세 차례 상영되며 입장료는 5천 원. 문의 ☎(02)334-3166, www.kifv.org
(서울=연합뉴스)
한국독립애니메이션 특별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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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오아시스>가 대단히 훌륭한 영화이고, 상업영화로서 도달하기 힘든 지점에 이른, 우리 영화사의 커다란 획득이라고 생각한다. 그 이유는 그러나 이 영화가 장애자의 현실을 다룬 감동적인 영화이기 때문이 아니다. 그렇다면 이 영화는 정성일씨가 지적하듯이 ‘누구라도 하여튼 지지할 수밖에 없는’ 소재를 가지고 ‘하나마나한’ 이야기를 거쳐 ‘뻔한’ 결말에 이르는 영화에 그치기 쉬웠을 것이다. <오아시스>는 그러나 그와는 정반대의 지점에 서 있다. 즉 <오아시스>의 구조는 매우 다층적이고, 그 의미망은 단순치 않으며, 그 내용과 형식은 수미일관하게 삶의 일원적 의미, 영화의 일방적 의미를 강요하는 시각의 부당함을 드러내는 데 맞춰져 있다. 그리고 그 전략도 크고 힘준 외마디 구호로서가 아니라, 마치 공주의 듣기 힘든 목소리처럼, 종두의 횡설수설과 갈지자 걸음처럼, 낮고 드러나지 않게 스며들어가 있다. 그것이 내가 <오아시스>를 최상급의 형용사로 부
정성일의 <오아시스> 비판이 놓치고 있는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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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 영화의 연대를 위한 세미나가 한국, 중국, 싱가포르, 일본, 말레이시아 등 아시아 10개국이 참가하는 가운데 부산국제영화제 기간 개최된다. 영화진흥위원회(위원장 이충직)가 주최하고 부산국제영화제의 프리마켓 PPP(부산 프로모션 플랜)와 공동주관하는 ‘아시아 영화계의 네트워크 구축을 위한 패널디스커션&컨퍼런스’가 11월19-20일 부산 해운대 파라다이스 호텔에서 열린다.이번 행사에서는 아시아 각국의 영화인들이 모여 아시아 영화계 네트워크(AFIN:Asia Film Industry Network)의 구축을 위한 방안을 모색하고 각국 영화 산업의 현실과 지원정책에 대해 의견을 나누는 자리를 마련한다. 19일 오후 4시에 열리는 패널토론에서는 한국의 김홍준 감독, 싱가포르 필름커미션의 세토 락 인 위원, 대만 신문국 영상부장 리 치안 리와 프랑스 CNC해외부장인 자비에 메를랭, 박경신 국제변호사 등이 발제자로 참가해 ‘아시아 영화지원정책과 WTO의 영향’이라는 주제로
영진위, 아시아 영화계 연대 위한 콘퍼런스 개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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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t Metheny Group: More Travels Limited Edition 1993년, 화면포맷 4:3오디오 PCM stereo지역코드 3출시사 씨엔엘뮤직영화도 마찬가지지만, 음악이라면 특정한 장르에 대한 별다른 집착없이 골고루 듣는 것을 좋아하는 편인 나로서는, 최근 속속 나오는 각종 음악 DVD 타이틀들이 반갑기만 하다. 가장 큰 이유는 물론(음악 DVD 마니아라면 뭔가 다른 방법들이 가득 있겠지만) 바쁘게 생활하는 까닭에 생각보다 접근하기가 어려운 뮤직비디오나 공연실황을 최상의 음질로 마음껏 즐길 수 있기 때문이다.그중에서도 어린() 시절부터 은근히 좋아했기 때문인지, 최근 들어 여러 개가 동시에 출시된 팻 메시니 그룹의 DVD 타이틀들을 보고는 행복감에 마냥 빠져 있는 중이다. 특히 93년에 발표되었던 그들 최초의 영상물이라고 기억되는 <More Travels>가 DVD 타이틀로 출시되었다는 사실은 더이상 말이 필요없게 만들 정도다.이 DVD는 10여년이
팻 메시니 그룹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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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ube Tales, 1999년 감독 이완 맥그리거 출연 레이첼 와이즈, 제이슨 플레밍, 톰 벨, 짐 카터, 켈리 맥도널드, 한스 매더슨 장르 드라마 (SKC)지하철에서 일어날 수 있는 모든 일. <튜브 테일>을 한 문장으로 설명하면 그 정도가 된다. 영국에서는 지하철을 튜브라고도 부르니까, 제목 자체가 ‘지하철 이야기’가 된다. 9명의 감독이 참여한 <튜브 테일>은 지하철을 무대로 벌어지는 갖가지 상황들을 담아낸 단편을 모은 옴니버스영화다. 할리우드에서 <프레데터2>와 <고스트 앤 다크니스> 등을 찍었던 스티븐 홉킨스, <모나리자>를 연출한 영국 출신 배우이자 감독 밥 호스킨스 같은 중견도 있고 배우로는 이미 세계적인 스타인 이완 맥그리거와 주드 로도 연출에 참여했다.사실 지하철은 그리 만족스러운 탈것이 못된다. 공기는 탁하고, 창 밖으로는 아무 풍경도 보이지 않고, 시간이 흐를수록 세월의 티가 너무 난다. 길이 막히지만 않
튜브 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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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 프리츠 랑 오딧세이-프리츠 랑 회고전’(문화학교 서울, 주한독일문화원 공동주최)이 10월18일부터 10월25일까지 서울아트시네마에서 열린다. 이 영화제는 지난 2001년 2월 베를린에서 시작해, 뉴욕, 파리를 돌며 열렸던 프리츠 랑 회고전의 일환으로 기획된 행사다.프리츠 랑은 <메트로폴리스> <마부제 박사> 등을 만든 두말할 것 없는 독일 표현주의영화의 대가다. 나치를 피해 망명한 미국에서 만든 <사형집행인 또한 죽는다> 등으로 할리우드 필름 누아르에 족적을 남기기도 했다. 이번 회고전에서는 그의 대표작 13편이 상영되는데, 디지털로 복원해 새로 태어난 <메트로폴리스>를 비롯하여, 프리츠 랑의 세계를 진하게 드러내는 신비로운 영화 <마부제 박사>와 <달의 여인> 등이 역시 복원된 프린트로 한국 관객 앞에 선보인다.편집자히틀러가 막 정권을 잡은 1933년 독일. 괴벨스의 호출을 받은 프리츠 랑은 그의 관저로
독일 표현주의영화의 대가 프리츠 랑 회고전(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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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당대의 시대적 본질을 드러내야 한다”바이마르공화국 시절 독일 표현주의영화의 전통 속에 놓여 있는 랑은, 그러나 특정한 스타일만을 고집하지는 않았다. 그의 작품 속에는 단순화된 강조와 왜곡을 특징으로 하는 표현주의적 요소들과 더불어 과학적 자연주의라고 할 수 있을 만한 객관적 사실성, 로맨틱하고 감상적인 시적 이미지들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고 이질적인 것들이 혼재되어 있다. 이러한 다양한 요소들은 어떤 일관된 발전단계를 보여주거나 작품의 제작순서에 따라 차례로 드러난 것도 아니었다. <메트로폴리스>에서는 미래 거대도시의 모습과 암울한 지하세계의 모습에서 표현주의적 요소들이 발견되지만, 바로 뒤에 만들어진 <달의 여인>에서는 소재의 판타지적 특성과는 달리 철저한 사실주의가 추구됐다. 그런가 하면 연쇄살인자의 추적을 다룬 <엠>에서는 다시금 어두운 조명과 극단적 대조 그리고 그림자의 극적 사용과 같은 표현주의적 요소들이 두려움과 긴장감을 배가시킨
독일 표현주의영화의 대가 프리츠 랑 회고전(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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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명> Der Mu de Tod/1921년/ 82분/ 독일결혼을 앞둔 처녀가 갑자기 죽은 약혼자를 구하기 위해 저승세계를 찾아가고, 저승사자가 세 사람의 생명이 꺼지는 것을 막을 수 있다면 약혼자를 돌려주겠다고 제안을 하며 벌어지는 이야기. ‘6연으로 된 독일 민요’라는 부제대로, 현실 재현보다는 환상의 시각적 구현에 영화의 본질이 있다고 믿던 당시 독일영화가 단골소재로 삼던 민화를 영화화한 작품이다. 독일 낭만주의 시대의 전형적인 이야기구조인, 하나의 이야기가 다른 이야기를 틀처럼 감싸고 있는 ‘틀구조’(Rahmenhandlung)와 그리피스의 <인톨러런스>에서 영향을 받은 옴니버스 형식을 결합해 이야기구조가 독특하다. 개인의 자유의지와 숙명적 결정론이라는 랑의 핵심주제를 알레고리적 영상을 통해 형상화함으로써 랑에게 국제적인 명성을 가져다준 작품.<마부제 박사> Dr. Mabuse/2001년 복원판/1922년/127분(1부),92분(2부)/독일노베
프리츠 상영작 13편 미리 보기(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