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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행은 규칙적으로 배송된다. 긴 컨베이어 벨트 위로 일정한 간격을 둔 불행들은 한갓지고 무료해질 때를 잊지 않고 찾아온다. 어쩌다 컨베이어 벨트가 고장나는 날이면 박자를 잃고 한자
리에 쌓여버린 우편물처럼 한꺼번에 꾸역꾸역 밀려온다. 그레이스와 길버트의 컨베이어 벨트는 어린 시절 일찍이 고장났다. 이란성쌍둥이 형제인 둘은 태어나자마자 어머니를 여의고 알코올중독자인 아버지의 서툰 관심을 받으며 자랐다. 구순구개열을 갖고 태어난 그레이스는 또래 아이들로부터 짓궂은 괴롭힘을 받았고, 그걸 지켜본 길버트는 악을 쓰고 형제를 위해 싸웠다. 결국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쌍둥이는 엄마 뱃속부터 함께해온 시간이 무색하게 각기 다른 가정으로 입양되어 이별을 맞이한다. 속도를 늦추지 않는 불행들이 쌍둥이에게 도달할 때마다 그레이스와 길버트는 숨 쉴 틈조차 없이 오롯이 혼자, 속절없이 모든 것을 감내한다. 애덤 엘리엇 감독이 그려낸 세계관은 기괴한 방식으로 농담적이고 장난스럽지만 동시에 음울하고 현실적
[기획] 오늘은 잠시 불행할지라도, <달팽이의 회고록> 애덤 엘리엇 감독 인터뷰부터 제작 비하인드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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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민주주의로
전주영화제가 6편의 다큐멘터리를 한데 모아 ‘다시, 민주주의로’ 향하는 길목을 안내한다. 2024년 12월3일 이후 대한민국이 입은 내상과 유사한 혼란을 앞서 겪었거나 지금도 겪고 있는 세계 곳곳이 상영작들에 담겨 있다. 2021년 트럼프 탄핵에 찬성표를 던지며 당원들에게 배신자로 낙인 찍힌 하원의원 애덤 킨징어를 조명한 <마지막 공화당원>, 2022년 두테르테 다음을 뽑는 대선을 앞두고 펼쳐진 민중운동을 포착한 <필리핀 민주주의의 불씨>, 2023년 의회·대법원 점거 사건 전후의 정치 지형을 탐구한 <브라질 대선의 기록>과 같이 각국이 통과한 비교적 최근의 역사를 들여다보는 작품에 특히 주목할 만하다. <슬로바키아의 희망, 주자나 차푸토바> <노르웨이식 데모크레이지> <수단, 우리를 기억해 줘> 또한 혐오에 맞서는 힘의 양식을 숙고하게 한다. 다른 나라의 사례를 통해 우리의 6월 이후를 상상해보
제26회 전주국제영화제 주요 특별전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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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티넨탈 ’25> - 개막작
라두 주데/루마니아, 스위스, 룩셈부르크, 브라질, 영국/2025년/109분
오늘도 우리의 도시는 조용히 사람을 청소 중일까? 무엇을 위해, 누구를 시켜? 당대 유럽 감독 중 세계 앞에 가장 격분한 인물일 라두 주데는 충격으로 일갈하는 새 풍자극을 통해 이 질문을 대신한다. 재개발이 한창인 루마니아의 도시 클루지, 법학자 오르솔야(에스터 톰파)는 실직 후 집행관으로 일한다. 그의 새 임무는 독일 부동산 기업이 사들여 콘티넨털이란 이름의 부티크 호텔로 재건축 예정인 낡은 아파트를 철거하는 것이다. 그곳 지하실에는 한 남성 노숙인이 산다. 오르솔야는 곧 자신이 퇴거시킨 이가 자살한 현장을 마주하게 된다.
로베르토 로셀리니의 <유로파 51>(1952, 아들의 자살 이후 자선 활동을 시작한 여성을 그렸다)을 비튼 <콘티넨탈 ’ 25>는 신자유주의적 횡포 앞에 공모자로 전락한 이가 펼치는 참회의 발라드다. 오르솔야가 다
제26회 전주국제영화제 추천작 10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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숫자 6에 달린 동그라미가 영사기마냥 돌아간다. 필름만 있다면 언제든 굴러가겠다는 이 든든한 모양새가 제26회 전주국제영화제(이하 전주영화제)의 포스터를 채웠다. 올해도 달릴 준비를 마친 전주영화제가 오는 4월30일부터 5월9일까지 열린다. 57개국 224편의 영화 중 개·폐막작을 비롯한 프로그래머 추천작과 <씨네21>이 주목한 작품을 더해 총 10편의 프리뷰를 전한다. 픽션과 다큐멘터리의 균형을 고려해 선정했으며, 국적과 테마도 다채로울 것이다. 민주주의라는 화두, 독립영화라는 실천을 묻는 특별전들의 면면도 덧붙인다. ‘선 넘는 영화제’를 지향해온 전주의 향취가 짙게 밴 이 영화들을 환영해주시길 바란다.
*이어지는 글에서 제26회 전주국제영화제 추천작 소개가 계속됩니다.
[기획] 올해도 전주는 영화처럼 - 제26회 전주국제영화제 추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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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시엘 성이 무너지는 악몽에서 깨어난 쥬쥬(박선영). 평화롭기만 하던 선샤인빌에 무언가 불길한 일이 닥쳐올 것만 같은 예감에 휩싸인다. 친구들을 만나 잠시 기분을 추스르지만, 이내 포악해진 식물들이 마을을 공격하기 시작한다. 마법의 힘으로 식물들을 물리친 쥬쥬는 이번 사건이 앞으로 펼쳐질 일들의 서막에 불과하다는 것을 직감한다. 쥬쥬는 친구들과 함께 크고 작은 사건들을 하나씩 헤쳐나간다. 선과 악의 균형을 지켜온 별의 보석, 쥬비쥬들이 든든한 조력자로 함께한다. <시크릿쥬쥬 마법의 하모니>는 K마법공주물의 아이콘으로 자리 잡은 시크릿쥬쥬가 13년 만에 선보이는 첫 극장 개봉작이다. 선샤인빌에서 벌어지는 다양한 소동을 에피소드 형식으로 풀어낸 이야기는 TV애니메이션 시리즈를 연상시킨다. 모든 사건이 마법의 하모니로 손쉽게 해결되는 단순한 전개가 시청층을 어린이로 한정 짓는다.
[리뷰] K마법공주물의 아이콘, <시크릿 쥬쥬 마법의 하모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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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스(세라 스누크)가 누군가의 무덤 앞에서 자신이 키우던 달팽이 실비아에게 살아온 인생에 관한 이야기를 털어놓기 시작한다. 이야기인즉슨 지금은 외톨이 신세인 그레이스에게도 아끼는 사람들이 있었다. 첫 번째는 자신과 같은 날 태어난 쌍둥이 오빠 길버트(코디 스밋맥피)인데, 불우한 가정환경 탓에 서로 떨어져 살게 된 뒤 관계가 소원해진 상태다. 둘째는 새로운 동네에서 만난 이웃 핑키(재키 위버)다. 핑키는 괴짜지만 그레이스를 아끼는 마음만큼은 따뜻하다. 그레이스는 실비아에게 둘에 관한 얘기를 하는 과정에서 그동안 스스로를 자신이 만든 달팽이 요새에 가두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달팽이의 회고록>은 스톱모션 클레이 애니메이션의 대가 애덤 엘리엇 감독의 신작이다. 감독에게 안시국제애니메이션페스티벌제에서 두 번째 대상의 영예를 안겼다. 8년간의 수공예 작업을 통해 만들어졌으며 특유의 생동감 있는 질감을 만끽할 수 있다.
[리뷰] 앞으로 나아가기 위한 진심 어린 뒤돌아보기, <달팽이의 회고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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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8년 천재 작곡가 모리스 라벨(라파엘 페르소나)은 발레리나 이다(잔 발리바)에게 발레곡을 청탁받는다. 원래 스페인 작곡가 이삭 알베니스의 <이베리아 조곡>을 오케스트라 편성으로 편곡하기로 했으나 저작권 문제가 생긴다. 마감은 겨우 2주 남짓 남았고 라벨은 신곡을 써야만 한다. <볼레로: 불멸의 선율>은 <코코 샤넬> <마담 보바리> 등 문제작을 만든 안 퐁텐의 신작으로 라벨 탄생 150주년에 맞추어 제작되었다. 이야기는 라벨이 <볼레로>를 작곡하는 과정을 담은 1부와 정신질환으로 창작의 동력을 잃은 말년을 담은 2부로 나뉜다. 감독은 라벨의 결벽증에 가까운 성격에 집중해 예술과 육체, 전쟁과 근대화 등 다양한 주제를 펼친다. 에로티시즘을 그리기 위한 방편으로 <마담 보바리>를 오마주한 설정도 인상적이다. 세밀한 고증과 알렉상드르 타로의 연주, 라파엘 페르소나의 호연이 돋보임에도 구심점 없는 산만한 전개가 아쉬움을
[리뷰] 플로베르의 소설을 읽는 듯한 도전적 해석과 세밀한 디테일, <볼레로: 불멸의 선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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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 참사가 발생한 지 11년이 흘렀지만 수면 아래로 가라앉은 진실은 아직도 얼굴을 드러내지 않았다. 침몰의 원인부터 상식 밖이었던 구조 작업까지 풀리지 않는 의혹은 여전하다. <리셋>은 배민 감독이 참사 직후부터 9년간 세월호 유가족들과 함께하며 촬영했던 영상을 기반으로 제작됐다. 박근혜 정권의 취임부터 선체 인양까지. 익숙하면서도 가슴 아픈 이미지가 연대기적 서술로 제시된다. 사건을 기록한 시간 너머로 영화는 한 인물에게 시선을 고정한다. 2014년부터 유튜브 채널 <416TV>를 운영해온 유가족 문종택이다. 그는 매일 작은 카메라 한대와 스마트폰을 연결해 애도와 투쟁의 시간을 녹화하고 있다. 문종택 감독이 직접 촬영한 아카이브 영상은 지난해 영화 <바람의 세월>로 공개됐다. 10년간 진실을 위해 카메라를 들었던 그를 다시 카메라로 찍는 <리셋>은 바라보는 자를 기록하며 기억한다는 의의를 지닌다.
[리뷰] <바람의 세월>의 응시를 곁에서 담은 것만으로, <리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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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병모 작가의 소설 <파과>가 새로운 생명력을 얻는다. 이제 60대 초로에 접어든 킬러 조각(이혜영)은 바퀴벌레 같은 인간들을 조용히 처리하는 ‘신성방역’의 전설이다. 희끔해진 머리칼과 왜소해진 체격은 주인 모르게 흘러버린 시간을 보여주지만, 노화된 손떨림에도 유연하게 미션을 처리하는 모습은 그의 건재함을 증명한다. 하지만 세월이 무디게 한 것은 그의 외형만이 아니리라. 작은 기척에도 빠르게 칼자루를 쥘 만큼 예민한 경계심을 지닌 그는 어쩐지 평소와 다르게 노쇠한 개 한 마리를 그냥 지나치지 못한다. 게다가 다정한 태도로 개를 치료한 수의사 강 선생(연우진)이 차 안에서 기절한 자신을 도와줬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조각은 과거 스승 류(김무열)의 구원을 겹쳐 느낀다. 아무래도 나이듦을 통과 중인 여자는 따뜻한 온기를 더이상 거부하지도 외면하지도 못하는 듯하다. 그리고 멀찍이서 이 변화를 탐탁지 않게 바라보는 이가 있다. 같은 조직의 킬러 투우(김성철). 행동이 재빠르고,
[리뷰] 참신한 캐릭터가 익숙한 서사의 늪을 벗어나지 못한다, <파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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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마를 숭배하는 세력이 점차 늘어난 도시는 거리 한가운데서 잔혹한 연쇄살인이 발생해도 무감해질 정도로 혼란스럽다. 공권력마저 이들의 폭주를 막아내기에는 역부족이다. 어둠의 힘을 빌려 폭발적인 주먹을 휘두르는 바우(마동석), 영험한 능력으로 구마를 담당하는 샤론(서현), 든든한 조수 김군(이다윗)으로 구성된 해결사 집단 ‘거룩한 밤’은 의뢰인들의 부탁을 받고 악을 처단하는 데 앞장서고 있다. 어느 날 신경정신과 전문의 정원(경수진)이 ‘거룩한 밤’ 사무실에 찾아와 이상증세에 시달리는 동생 은서(정지소)를 구해달라고 부탁한다. 은서의 몸을 차지한 악령이 도시를 지배하는 사악한 ‘루키페르’와 관련이 있다는 사실을 안 바우 일당은 거대한 악의 손길과 맞설 준비를 한다. 범죄자와 좀비마저 진실의 방으로 보내던 마동석의 주먹이 영적 세계를 향해 뻗어간다. 농담처럼 떠돌던 ‘물리적 퇴마’가 <거룩한 밤: 데몬 헌터스>를 통해 드디어 스크린 위로 옮겨진 것이다. 액션 아이콘과 오컬트의
[리뷰] 차라리 귀여운 마석도가 악마를 찢었다면, <거룩한 밤: 데몬 헌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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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오 소라의 첫 번째 장편 극영화 <해피엔드>가 개봉을 앞두고 있다. <해피엔드>는 근미래 일본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디스토피아 SF물이다. 동시에 고등학교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학원 청춘 성장물이기도 하다. 얼핏 모순된 것처럼 보이는 두 장르가 이 영화에서는 자연스럽게 공존하고 있다. 무게는 후자에 더 기울었다. 음악 동아리를 운영하는 고등학교 3학년생 유타(구리하라 하야토)와 코우(히다카 유키토)는 어느 날 불법 운영 클럽에 몰래 잠입한다. 두 사람은 클럽이 단속으로 해산되는 와중에도 자리를 지키다 경찰에 잡히고, 이를 눈여겨본 DJ가 두 사람에게 USB 드라이브를 건넨다. 아타, 밍, 톰까지 포함해 총 5명으로 구성된 음악 동아리는 학교 동아리방에 몰래 숨어들어 DJ가 준 EDM을 마저 즐긴다.
문제는 두 사람이 학교를 빠져나가던 중 교장 나가이의 자동차를 직각으로 세우는 장난을 쳤다는 것이다. 화가 난 교장은 학교에 AI 감시 체계를 도입하고, 복장 불량
[리뷰] 멋지고 새로운 학교의 리더즈, <해피엔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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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간 30주년 커버에 오를 주인공을 찾는 셀럽챔프 투표에서 압도적인 1위를 차지했다. 부지런히 투표를 도모해준 팬들의 모습에 뭉클할 것 같다.
믿기지 않는다. 투표에 참여해준 모든 팬들에게 감사한 마음을 전하고 싶다. 언제나 나에게 너무 크고 과분한 사랑을 주는 분들이다. 앞으로 더 좋은 연기, 더 성장한 모습을 보여드리는 것만이 내가 보답할 수 있는 일일 것 같다.
- 지난해 많은 사랑을 받은 <선재 업고 튀어> 이후, 드라마 차기작으로 <오늘부터 인간입니다만>을 선택했다. <오늘부터 인간입니다만>은 어떤 부류의 재미를 누릴 수 있는 작품인가.
차기작에서는 구미호 역할을 맡았다. 인간이 아닌 캐릭터는 처음인데, 그런 만큼 더 자유롭게 해석하고 연기할 수 있어 좋았다. 900살 구미호인 은호가 인간 시열이를 만나 좌충우돌 소동을 벌이는 로맨틱코미디다. 많은 분들이 즐겁고 편안하게 볼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
- 배우 김혜윤이 거
셀럽챔프 1위 차지한, 배우 김혜윤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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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네21>은 창간 30주년을 맞이하여 셀럽챔프와 특별한 이벤트를 개최했다. 창간 30주년 표지 모델을 직접 내 손으로 뽑아보는 이색적인 투표를 진행한 것. 그리고 그 결과는 압도적이었다. 52.85%(1만6705명 집계)가 배우 김혜윤을 선택했다. 24.07%를 차지한 2위와도 쉽게 전복하기 어려운 격차를 벌이며 굳건한 1위에 올랐다. 지난해 연말 <씨네21> 1488호에서 진행한 ‘우리가 사랑한 2024년의 배우들’ 특집에서도 앤드루 스콧, 잔드라 휠러, 틸다 스윈턴 사이에서 김혜윤이 언급되기도 했다. 많은 사람들이 김혜윤을 사랑하는 데에는 여러 이유가 있다. 그중에서도 자신의 본업인 배우의 몫을 출중하게 수행해내는 점은 대중의 시선이 그를 좇을 수밖에 없게끔 만든다. 눈에 보이지 않지만 강도 높은 힘을 지닌 일종의 장력. 그는 그것을 지녔다. 새로 마주하는 캐릭터의 빛과 그림자를 성실하게 분해할 줄 아는 배우는 자연스러움의 미학과 유연함의 즐거움을 계속해
[커버] 이러니 사랑할 수밖에, 배우 김혜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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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진목 지음 난다 펴냄
영화감독, 시인, 에세이스트. 어느 쪽으로 불려도 어색하지 않은 시간을 작업하는 데 쏟아온 유진목에게 재능이란 뭘까. 경고. 실질적인 도움을 구하는, 데뷔를 갈망하는 창작자라면 <재능이란 뭘까?>를 불태우고 싶어질 수 있다. 추천의 말. 데뷔는 했고, 작품도 쌓였고, 대기 중인 작업도 있지만 번아웃에 시달리는, 다음달의 공과금을 걱정하는, 지속가능성만 생각하면 부정적인 생각에(때로는 죽음에) 사로잡히는 창작자라면 책장을 뜯어 먹어도 소화가 잘될 것이다. 당신에게서 나온 이야기 같을 테니까.
“지금은 그냥 불을 끄고 누워서 어릴 때의 오만을 흘러가는 구름처럼 바라보는 중이다”라는 문장에 밑줄을 긋고 다시 보니 책의 부제가 ‘쓰기에서 죽기까지’이다. 그 중간에는 무엇이 있는지가 유진목의 관심사다. 읽다보면 알 수 있다. 질문이 선행했다기보다는, ‘결론’으로 질문이 존재한다. 예컨대 “기회는 눈앞에 써 있는 것을 읽는다”는 문장은 “이 글은 충분
[culture book] 재능이란 뭘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