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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귤레귤레>팀이 튀르키예 출국을 한달 앞둔 어느 날, 서예화는 배우 이희준의 캐스팅 콜을 받아 여주인공으로 낙점되었다. 전화 통화를 마친 뒤, 대본을 펼쳐보기도 전에 그녀는 성당으로 향했다. 무엇이 됐든, 일단 감사하다고 기도드리고 싶었다. “너무 사랑하는 동료랑 작업할 기회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무대에서 함께해 행복했던 이와 현장에서 다시 만날 수 있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고등학생 시절, 학교가 있던 일산에서 매일 혜화동 대학로를 오가며 극단 ‘공연배달서비스 간다’(이하 ‘간다’)의 작품들을 보았고 그렇게 무대에 빠져들었다. 서예화를 “연극에 미치게” 만들었던 배우들이 당시 극단의 얼굴이었던 이희준과 진선규였다. “‘간다’의 공연을 한회차라도 놓친다는 건 말도 안되는 일이었다. 매회차 다른 매력을 보여주는 배우들의 연기를 보는 게 얼마나 좋은지 누구보다 잘 알기에, 연극·뮤지컬계의 ‘회전문’ 팬들의 마음을 잘 알고 있다. 나 역시 그 회전문 팬의 시초 중 한
[WHO ARE YOU] 꿈을 모아서, <귤레귤레> 배우 서예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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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년, 장뤼크 고다르의 9번째 영화 <미치광이 피에로>가 필름 복원을 거쳐 미국에서 재상영된 순간. 영화평론가 조너선 로젠봄은 <시카고 리더>에 당대 주류영화를 향한 질책을 경유해 고다르를 향한 흠모를 남긴다. “끝없는 장난기, 하지만 그것이 의존하는 과부하의 미학은 대부분의 현대영화들의 단순화된 과잉 살상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인디아나 존스: 최후의 성전>(1989)의 감각적 폭격은 새로운 것은 아무것도 가능하지 않다는 전제에 근거하지만 <미치광이 피에로>의 창조적 과부하는 모든 것이 아직 해야 할 일로 남아 있다는 전제에 근거한다.” 로젠봄의 감상으로부터 35년이 훌쩍 넘은 지금, <미치광이 피에로>의 국내 개봉에 관해 어떤 말을 적어야 할까. 여전히 관객의 해방에 기여하는 이 고전은 영화가 무의미와 광기를 포착하는 가장 적절한 매체일 수 있다고 말을 건다. 우리는 페르디낭(장폴 벨몽도)과 마리안(아나 카리나)이 충
[리뷰] 재개봉 영화 <미치광이 피에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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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 그동안 너의 이름을 선뜻 부르지 못했어. 너에 대해 무지했지.” 대마를 ‘풀’이라 부르며 오래된 친구를 소개하듯 시작하는 다큐멘터리 <풀>은, <재춘언니> 등으로 노동자의 파업 현장을 기록해온 이수정 감독의 신작이다. 의사였던 권용현은 공황장애에 CBD가 효과가 있음을 스스로 경험하고 아픈 이에게 대마초를 건넸다가 징역형을 선고받는다. 농부 천호균은 남북 접경지역에서 ‘평화’라는 구호 아래 대마를 재배한다. 일년생 풀인 대마는 물과 비료 없이도 빠르게 성장하여 탄소를 흡수하는 친환경적 식물이다. 그러나 한국에서 대마는 ‘금지된 식물’이라 높은 철망으로 둘러싸인 밭에서 재배해야 하고 수확한 대마는 공무원의 참관 아래 줄기를 제외하고 땅에 묻어야 한다. <풀>은 대마 합법화에 찬성하는 사람들의 대안적 삶을 따라가며, 해외 사례와 전문가 인터뷰, 애니메이션 등을 통해 그간 금기시되어온 대마의 진실을 친근하게 풀어낸다.
[리뷰] 목가적 풍경과 평온한 얼굴로 대마초라는 금기를 깨다, <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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낚시 유튜버 호준(김호원)이 촬영차 지방의 한적한 낚시터를 찾는다. 곧이어 영화감독인 남 감독(성환), 그리고 그에게 잘 보이기 위해 먼 길을 떠나온 배우 희진(임채영)이 등장한다. 호준은 처음엔 둘에게 아무런 관심이 없는 듯 보이지만 머지않아 그의 과거가 밝혀지며 조용했던 낚시터가 소란스러워지기 시작한다. 박중하 감독의 <잔챙이>는 하고 싶은 말을 에두르지 않는 영화다. ‘잔챙이’는 선택받는 것을 기다려야만 하는 처지에 놓인 인물에 대한 노골적인 비유이며, 감독과 배우라는 특수 관계에 얽혀 있는 세 인물의 대화는 어차피 ‘영화 이야기’로 귀결된다. 다 필요 없고 하고 싶은 말 원 없이 뱉고 싶은 심정의 배우들을 응원하는 마음이 느껴진다. 한정된 장소에서 펼쳐지는 세 인물의 대사 주고받음이 인상적이다. 주연이자 각본, 제작을 맡은 김호원 배우는 24회 전주국제영화제 한국경쟁 부문에서 올해의 배우상을 수상했다.
[리뷰] 일찍이든 늦게든 일어난 낚시꾼에게 기회가 온다, <잔챙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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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라카미 에츠코(아마미야 소라)는 초등학생 시절 달리기 선수를 목표로 살아왔으나 이제 평범한 고등학생으로 살아가고 있다. 어느 날 그녀가 다니는 미츠히가시 고등학교에 도쿄에서 전학생 타카하시 리나(다카하시 리에)가 온다. 그녀의 꿈은 조정부를 부활시키는 것이다. 조정부가 부활한다는 소식에 곧바로 부원이 모이고 이들은 다 함께 대회에 나가려 한다. <기빗올: 우리들의 썸머>는 사쿠라기 유헤이 감독의 애니메이션으로 안시국제애니메이션페스티벌 등 여러 영화제에 초청되었다. <최애의 아이>에서 호시노 아이로 분한 다카하시 리에 등 유명 성우가 참여했다. 작품은 3D로 연출되었으며 전형적인 스포츠 동아리 영화의 공식을 따라간다. 해안가 풍광을 살리는 작화와 인물의 감정선을 과장하지 않는 소박함이 인상적이다. 조정을 사실적으로만 그려 애니메이션만 줄 수 있는 쾌감이 살아나지 않아서 아쉬움이 남는다.
[리뷰] 청춘이여 청량한 오늘과 쨍쨍한 내일을 향해 노 저어 나가라, <기빗올: 우리들의 썸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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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식민시대인 21세기에도 언어가 정치 투쟁의 도구로 자리할 수 있을까. <니캡>을 보고 나면 누구든 민족 고유의 언어를 힙합 비트에 실은 채 세상을 향해 소리치고 싶을 것이다. <니캡> 속 항거의 주체는 니시(모 차라)와 리암(모글리 밥) 그리고 오도허티(DJ 프로비)다. 아일랜드 벨파스트에 사는 니시와 그의 친구 리암은 영어가 아닌 아일랜드어를 수호하며 아일랜드어로 랩메이킹을 한다. 이들은 우연히 아일랜드어 학교에서 음악 교사로 일하는 오도허티과 연을 맺고, 힙합 밴드 니캡을 결성해 아일랜드에 파란을 일으킨다. <니캡>은 힙합과 마약, 섹스가 내러티브 내에서 질펀하게 뒤엉키고 불안정한 청춘의 1인칭 내레이션과 힙노시스풍의 타이포그래피가 범람하는 영화다. 이같은 특성으로 인해 <트레인스포팅>의 추억을 떠올리는 관객도 적지 않을 것이다. 영화 속 세 주인공은 실제 2017년부터 활동 중인 밴드 ‘니캡’의 멤버들이다.
[리뷰] 필요한 도발, 유효한 저항. 우리 시대의 <트레인스포팅>이 될 자격이 충분해, <니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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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타 강사 유정(한채영)은 지인에게 명품 의류를 수입하는 CEO 선희(현우성)를 소개받는다. 선희의 정체는 불법을 일삼는 건달이다. 그는 유부녀인 유정에게 명품 의류를 선물하는 등 적극적으로 다가간다. 유정의 친한 동생 강수(장의수)는 선희의 사악한 계략을 알아차리나 때는 늦었다. <악의 도시>는 아침드라마의 황태자로 불린 현우성 배우의 입봉작이다. 한채영 배우가 8년 만에 스크린으로 복귀했다는 사실만으로 이목을 끈다. 영화의 만듦새는 전반적으로 아쉽다. 우선 범죄물로의 매력이 떨어질뿐더러 각 캐릭터의 이야기가 제대로 그려지지 않는다. 플래시백으로 캐릭터의 서사를 보충하려고 애쓰지만 되레 서사의 중심을 흩뜨려뜨는 역효과를 낳는다. 약물 강간 등 성폭력을 재현하는 태도도 문제다. 성폭력이 용인 되는 현실을 구체적으로 다루는 대신 인간에 대한 믿음이란 추상적인 문제로 갈무리하며 아쉬움을 남긴다.
[리뷰] 인간혐오로 논점을 얼버무리기, <악의 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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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 북부 산골 마을에 흉흉한 소문이 번진다. 물귀신에게 잡혀간 사람들이 머리가 잘린 채 발견되는 사건이 연이어 발생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에 탐정 키엔(꾸옥 후이)이 조사를 시작한다. 문 부인(응옥 지엡)의 잃어버린 조카 응가를 찾는 것이 주요 목적이다. 수사를 이어가던 키엔은 이 사건에 생각보다 많은 마을 사람들의 과거가 얽혀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러나 문제는 마을에서의 체류 시간이 길어짐에 따라 귀신이 키엔까지 노리게 되었다는 것이다. 빅터 부 감독의 신작 <탐정 키엔: 사라진 머리>는 베트남 산골 마을이라는 독특한 배경에서 펼쳐지는 미스터리 추리극이다. 탐정 캐릭터의 매력을 돋보이게 하려 노력하는 대신 이야기 자체에 공을 들여 정면 승부를 꾀한다. 극이 다소 예측 가능한 방향으로 전개되지만 배경 특유의 음산하고 신비스러운 분위기가 이를 보완한다.
[리뷰] ‘넥스트 키엔’을 기대하게 만드는, <탐정 키엔: 사라진 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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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대 멕시코시티, 작가 리(대니얼 크레이그)는 술과 마약에 중독된 채 방탕한 생활을 즐기고 있다. 리는 곁을 지켜줄 상대라면 가리지 않고 함께 시간을 보낸다. 그러나 동성애자라는 이유로 그의 호의는 종종 불쾌한 추파로 오해되거나 자신을 겨냥한 조롱을 오롯이 견뎌야 하는 상황에 맞닥뜨린다. 외로움으로 방황하던 리는 길거리에서 우연히 유진(드루 스타키)을 발견한다. 아름다운 유진에게 마음을 빼앗긴 리와 달리 유진은 그에게 좀처럼 마음을 열지 않는다. 유진에게 “일주일에 두번 정도만 다정하게 대해달라”며 리는 어떻게든 유진과 마주할 시간을 가지려 한다. 하룻밤을 같이 보낸 뒤로 유진에 대한 리의 갈망은 더욱 강해졌지만 유진은 여전히 모호한 태도를 취한다. 어느 날, 리는 상대와 텔레파시로 소통할 수 있도록 하는 약초 야헤에 관해 듣는다. 어떻게 해서든 유진의 마음을 얻고 싶었던 리는 야헤가 있다는 남아메리카 에콰도르의 정글로 유진과 여행을 떠난다. 그리고 그곳에서 유진의 숨겨진 진
[리뷰] 몽환과 현실 사이를 오가는 사랑의 실험, <퀴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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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작은 보통 천재 예술가 혼자만의 재능으로 탄생하지 않는다. 그 재능을 배양하는 문화적인 토양과 여러 조력자의 도움으로 싹트기 마련이다. 수많은 관객에게 사랑받는 지브리도 예외는 아니다. 올해 6월6일부터 내년 2월22일까지 용산아이파크몰 6층 대원뮤지엄에서 열리는 전시 <아니메쥬와 지브리展>은 지브리가 탄생할 수 있었던 문화적인 토양을 환기한다. 우선 1300점 이상의 방대한 자료를 통해 1970년대 일본 애니메이션의 황금기와 스튜디오 지브리의 탄생을 이끈 애니메이션 전문 잡지 <아니메주>의 역사와 애니메이션 산업의 발전을 한눈에 볼 수 있도록 정리했다. 이어서 <아니메주>의 창간인 스즈키 도시오와 스튜디오 지브리의 관계를 심도 있게 탐구하며 전시회 현장을 생생하게 전달한다.
Q1. <아니메주>는 어떤 잡지인가.
<아니메주>는 일본 애니메이션의 황금기가 한창이던 70년대 중반, 도쿠마 쇼텐 출판사의 투자로 1978년에 창
스튜디오 지브리는 어떻게 탄생했나요? <아니메쥬와 지브리展>, 다섯 가지 질문으로 들여다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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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공지능의 ‘지브리 스타일’ 이미지 제작이 한차례 유행한 뒤,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작품을 평화롭고 밝은 이미지로만 인식하는 경향이 한층 짙어진 모양새다. 하지만 개별 애니메이션을 들여다보면 전쟁의 폐해, 기후 문제, 자연과 인간의 대립 등 그는 자신이 유년 시절부터 마주해온 동시대적 위기와 현실을 면밀히 기록해왔다. 지난 5월 개봉한 다큐멘터리 <미야자키 하야오: 자연의 영혼>을 중심으로 미야자키 감독의 삶과 당시의 시대적 배경이 두드러지게 녹아든 작품과 제작 비하인드를 정리해보았다.
<하울의 움직이는 성>
1941년 일본에서 태어난 미야자키 감독에게 가장 강렬하게 각인된 이미지는 제2차 세계대전 중 벌어진 맹렬한 폭격의 기억이었다. 유년 시절 자신이 살아가던 우쓰노미야에서 폭격을 겪은 경험은 <하울의 움직이는 성>과 <바람이 분다>의 전쟁 장면에 녹아 있고, 이후 미국이 원자폭탄을 투하한 것을 바라본 경험은 <천공의 성 라
우리가 직면한 중요한 문제를 다룬다는 것 - 스튜디오 지브리 대표작 제작 비하인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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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과 인간다움, 공동체와 고립감, 자연과 문명화.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작품은 그간 인류가 빚어온 이념들을 반영해왔다. 세계사적 사건과 그 궤를 함께해온 스튜디오 지브리의 일화를 모았다. 인간의 일을 외면하지 않는 애니메이션의 다정한 생명력을 느낄 수 있다.
1945년 - 일본 우쓰노미야시를 향한 미국 공습.
차후 <천공의 성 라퓨타> <하울의 움직이는 성> <바람이 분다> 등에 영향을 준다.
1984년 - <바람계곡의 나우시카> 개봉.
스튜디오 지브리 설립 이전이기 때문에 <바람계곡의 나우시카> 원 제작사는 지브리가 아니다. <바람계곡의 나우시카> 성공으로 스튜디오를 설립할 수 있었다.
1985년 - 스튜디오 지브리 설립.
1986년 - <천공의 성 라퓨타> 개봉.
이 시기 미야자키 하야오는 일본 전통 녹나무에 흠뻑 빠져 있었다.
1987년 - 일본 버블경제의 시작.
1988년 - &
세계사의 궤적을 좇아온 스튜디오 지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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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세계는 그곳에 진입했다는 이유만으로 더이상 전과 같을 수 없다. 만화잡지 편집장이 극장용 애니메이션 스튜디오에 합류한 순간이 그렇고, 요란한 세상에서 우직하게 자기 생각을 관철하는 애니메이션영화를 본 순간의 관객들이 그렇다. 빗자루를 타고 날 수 없는 마녀, 엄마와 아빠가 돼지가 되어버린 여자아이, 인간을 사랑한 해양생명체, 숲을 지키는 경계심 높은 투사, 엄마를 병상에 둔 어린 자매…. 스튜디오 지브리 세계관은 세상의 결핍을 딛고 선다. 그 결핍으로 빚어진 주인공들은 우리가 원하는 것과 필요한 것이 어떻게 다른지 구분하게 한다. 동시에 희망도 준다. 자연과 공동체, 양심과 윤리, 미움과 사랑이 인간사에 얼마나 순수한 연료가 되는지 이 심지 굳은 스튜디오가 꾸준히 보여줬다. 일본 애니메이션 잡지 <아니메주> 전 편집장이자 미야자키 하야오의 오랜 친구, 그리고 스튜디오 지브리 초창기 멤버인 스즈키 도시오 프로듀서와 함께 오래된 시간을 되돌아봤다. 종국엔 선한 것만이 살
다만 이것은 선한 세상을 향한 질문, 스즈키 도시오 스튜디오 지브리 프로듀서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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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계곡의 나우시카>가 25년 만에 재개봉한다.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 초기작의 화풍을 큰 스크린으로 만날 수 있다는 점 외에도 극장에서 다시금 관람해야 할 이유는 자막이 전면 수정됐기 때문이다. 세로 자막에서 가로 자막으로 표기법이 달라지면서 한줄에 최대 8자에서 12자로 대사량이 바뀌었고 그에 따라 <바람계곡의 나우시카> 세계관을 더 세세히 표기할 수 있게 되었다. <바람계곡의 나우시카>를 새롭게 접할 관객을 위해 달라진 자막의 주요 특징에 관해 정리해보았다.
그냥 ‘곤충’이 아니었다고?
<바람계곡의 나우시카>에는 수많은 종류의 동식물이 등장한다. 특히 다종다양한 벌레들이 묘사되는데 과거 자막에선 전부 ‘곤충’(몸이 머리, 가슴, 배로 나뉘고 다리가 6개인 동물)으로 아울러 표기했으나 새 자막에선 ‘벌레’(곤충을 비롯하여 기생충과 같은 하등동물을 통틀어 이르는 말)로 전면 바뀌었다. 나우시카가 오무와 소통할 때 사용하는 피리 또한
‘전투기’를 ‘건십’으로, <바람계곡의 나우시카>의 자막 변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