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영 앤 뷰티풀> 개봉 당시, 어느 인터뷰에서 프랑수아 오종은 “성매매에 종사하고자 하는 많은 여성들의 판타즘을 건드린다”고 말한 적이 있다. 당시의 인터뷰어는 왜 하필 ‘욕망’과 연계되는지를 물었고, 이에 감독은 “섹스의 객체가 되는 것은 추정컨대 매우 분명한 무언가가 있는 경우다”라고 답했다. 한동안 나는 이 인터뷰 내용에 대해서 생각했다. 그리고 두 가지로 그의 대답을 이해했다. 먼저 감독이 설명하듯 인물을 움직이게 만드는 감정의 속성 중에는 분명 ‘수동성의 부류’라 언급할 수 있는 영역이 존재하는 것 같았다. 다만 영화가 극단적으로 특정한 상황에 몰두하기에 이해가 난해할 따름이다.
둘째로 섹슈얼리티 자체가 간접적인 목적으로서 이를테면 추상적 ‘자본의 영역’에 귀속될 수 있단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이 두 번째가 더 흔한 추론일 것이다. 하지만 <영앤 뷰티풀>의 캐릭터는 두 번째 추정에 대해 확실하게 선을 긋는다. 마린 백트가 연기하는 17살의 이사벨은 아무리 보아도 경제적인 이유 때문에 성매매에 빠져드는 인물이 아니다.
한여름의 사랑이 죽어버리고
오종의 최신작 <썸머 85>를 보면서 이사벨이 떠올랐다. 다비드 캐릭터 때문이었다. 이번 영화의 주인공인 16살 알렉스는 우연히 만나 친해진 2살 연상의 다비드와 사랑에 빠진다. 하지만 다비드는 소년의 믿음직스럽고 충직한 연인이 되지 못한다. 어느 누구라도 상관없다는 듯, 그는 길거리의 모든 친구들과 달콤하고 관대하게 속삭인다. 알렉스의 입장에서 다비드의 이러한 태도는 오해를 살 만하다. 그렇게 10대 시절 알렉스의 첫사랑은 참혹한 결말을 맞는다. 영원불멸할 줄 알았던 한여름의 사랑이 너무도 간단히 죽어버린다. 모든 젊음의 에너지가 손쉽게 후회와 환멸의 통로와 연결된다.
그러고 보니 <영 앤 뷰티풀>을 보면서 의아하다고 믿었던 캐릭터의 욕망이 <썸머 85>에서는 다소 평범하게 그려지는 것 같다. 사실 다비드는 상대방의 입장에서, 그러니까 나와 같은 제삼자가 보기에 며칠을 고민할 특이한 캐릭터는 아니다. 즉, 이사벨만큼 극단적이지 않다. 다만 이 인물은 ‘충동’이란 성향에서는 이사벨과 몹시 닮았다. 비견컨대 <영 앤 뷰티풀>이 이성과의 사랑에 기반해 ‘매춘’이란 기괴한 욕망을 다룬다면, <썸머 85>는 ‘남성 대 남성’으로 묶여 있다는 점만이 다르다.
두 경우 모두 각각의 특이점을 강조하지만 이에 얽매여서는 곤란하다. 매춘보다는 간혹 드러나는 ‘수동성’이 더 본질이고, 동성애가 아니라 ‘시간’을 따라 변화하는 상황이 더 중점적이기 때문이다. 간혹 욕망의 크기가 너무 과격하게 드러나기에, 관객이 욕망의 속성보다 형태에 더 치중하기도 한다. 하지만 오종의 영화에서 욕망은 감정의 메커니즘이 아닌 ‘변화’의 지점들로 해석되어야 한다. “너야 행복했겠지. 나도 그랬어. 너랑 행복했는데, 이제 더이상은 아니야.” 다비드의 목소리는 알렉스가 싫어서가 아니라, 그때만큼 행복하지 않기에 떠나야 한다고 설명한다. 말하자면 변화하는 욕망의 실체 때문에 그는 움직이는 걸 택한다.
미장센의 영역에서 ‘리얼리즘’과 ‘인공적 환경’을 번갈아 사용하는 것은 프랑수아 오종의 특기 중 하나다. 굳이 연출적인 톤만이 아니라 의상이나 세트, 촬영이나 음악 등 세부 요소에서도 그는 극단적인 스타일을 형성한다. 사실과 인공의 교차를 통해 규칙을 세우고 파괴하고, 또 세운 뒤 파괴하는 식의 과정을 반복한다. 이번 영화에서도 ‘1985년’이란 특정 시점을 기준으로, 환상의 이미지들과 현실의 이미지들이 병행된다. 소피 마르소가 헤드폰을 쓰던 <라붐>(1980)의 시대를 상상하면서 관객은 당대의 유물들을 사실적으로 끄집어낸다. 그렇게 소유와 자유, 쾌락과 감정, 육체와 정신, 질투와 외로움 등의 형이상학적 이미지들이 완성된다.
다소 이분법적이더라도, 작품이 나열하는 대립적인 이미지들을 살피는 것은 의미가 있다. 상반된 성격의 주인공들을 비롯해, 영화에는 다수의 이항적 요소들이 배치되기 때문이다. 대표적으로 ‘사랑’과 ‘죽음’이 그렇다. 이 영화에서 사랑은 보이는 것, 다시 말해 행동하는 것이라고 상정되며, 보이지 않는 죽음은 베개 아래에 숨겨져서 캐릭터의 마음을 움직이는 힘으로 가정된다. 따라서 결말부에서 인물이 춤을 추는 이유는 사랑하기 때문이라고 해석해야 할 것이다. 그는 사랑을 행동하지 못하기에 춤춘다. 동일하게 ‘글쓰기’와 ‘말하기’의 방식도 기묘하게 이용된다. 알렉스는 자신이 겪은 일을 말 대신 글로 전달하는데, 이때 그가 쓴 내용은 전부 ‘플래시백’이 된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후더닛(whodunnit) 플롯이 형성된다. 물론 과거 <8명의 여인들>(2002)에서 보았듯, 프랑수아 오종이 만들어내는 범인 찾기 게임은 결말에 포인트가 있지 않다. ‘죽음’을 매개로 한 권력자와 피지배자의 운명적 관계 형성에 열중할 뿐, 관객의 카타르시스는 중요한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오종의 영화를 보는 일은 즐겁다. 수수께끼가 시원하게 해결되지 않고, 너무 많은 관념이 떠다니며, 그 과정에서 정서적인 동조가 형성되지도 않지만, 결코 어둡거나 음침하지 않다. 데뷔 이후 줄곧 그가 ‘악동’이라 불린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일 것이다. <크리미널 러버>(1999), <사랑의 추억>(2000), <타임 투 리브>(2005), <프란츠>(2016) 등 아무리 무거운 소재를 가지더라도 관객은 가벼운 마음으로 극장을 나선다. 죽음의 ‘혼란’을 동력 삼아 ‘자유’를 향해 나아가는 그의 내러티브는 드문드문 ‘유머’를 형성해서 관객을 가볍게 한다.
예전에 나는 오종 특유의 미니멀리스트한 태도가 욕망의 변형을 감추어준다고 믿었다. 한데 <썸머 85>를 보면서 생각이 바뀌었다. 무덤 위에서 춤추는 기이한 상황에 대해 영화는 바로 이런 식의 아이러니가 ‘세상의 미친 본질’이라고 이르고 있었다. “기다려, 다시 기다려, 항상 기다려”라고 명령하는 가상의 목소리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억눌리지만, 오종의 세계에서는 결코 정서적 환상이 포기되지 않는다. 환상성 자체가 스스로 생겨나지 않으며, 반대되는 것 때문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적나라한 ‘탐욕’이나 ‘금지된 욕망’의 수준에서도, 마침내 ‘후회’에 관한 의견을 드러냄으로써 보편적 세계는 유지된다.
순진하고 단순한 보편성의 이야기
지난해 여름 팬데믹 상황에서 영화가 극장에 개봉하던 당시, 오종은 “젠더영화가 아니라, 모두가 공감할 수 있는 러브스토리로 받아들여달라”고 요청했다. 그리고 ‘시네마에 대한 믿음을 떠올릴 수단’으로 이해해달라고 말했다. 그의 발언은 어떤 면에서 영화의 본질적인 내용과도 상통한다. 지난 일년의 예기치 못한 상황이 OTT 플랫폼의 성장을 이끌었지만 시네마에 대한 욕망 또한 되뇌게 만들었다. 죽음과 처벌이 아무리 극단으로 치닫더라도, 순진하고 단순한 보편성의 이야기가 결국 승리할 것임을 이 영화는 말하고 있다. 그런 면에서 <썸머 85>는 스스로의 필모그래피에 대한 회상이면서, 동시에 절망에 빠진 세계에 대한 희망을 내포한다. 지나간 여름에 대한 낭만적인 회상을 알렉스의 글쓰기는 이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