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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론토국제영화제③] 탐욕과 증오를 경계하다
김혜리 2019-09-26

제3제국부터 탈세까지, 토론토의 성난 영화들

<조커> courtesy of TIFF

<조커>의 고담시는 1970년대 말 80년대 초 마틴 스코시즈 영화 속 뉴욕을 빼닮았다. 그러나 그곳의 지옥도는 2019년 관객에게도 생경하지 않다. 유명한 악당 캐릭터의 기원을 묘사하는 토드 필립스의 <조커>는 <다크 나이트> 3부작의 리얼리즘을 이어받은 DC 확장 우주(DCEU) 영화지만, 초능력을 가진 캐릭터가 전무하다는 점에서 사회문제 드라마로 보기에 무리가 없으며 나아가 호러에 가깝다. 마블 스튜디오와 확연히 차별화된 강렬한 세계를 구축했다는 면에서 <조커>는 일단 성공적이다. 폴 토머스 앤더슨의 <마스터>(2012), 린 램지의 <너는 여기에 없었다>(2018)가 간접적으로 활용한 배우 호아킨 피닉스의 불안한 에너지를 감독 토드 필립스는 전면으로 끌어내 관객과 대치시킨다. <코미디의 왕>의 루퍼트 펍킨(로버트 드니로)처럼 홀어머니와 사는 코미디언 지망생 아서 플렉(호아킨 피닉스)은 가정적으로, 직업적으로 실패하고 성적으로 좌절한 남자다. 어릿광대 아르바이트는 그에게 존중보다 모욕을 가져다주기 일쑤고, 긴장하면 웃음이 터져 통제할 수 없는 신경병 증세는 그를 더욱 고립시킨다. 키득거림으로 시작해 토악질에 가까워지는 발작적 폭소는, 이번만큼은 호아킨 피닉스가 작심하고 오페라적 연기를 하고 있음을 알린다. 상상을 뛰어넘는 감량으로 뼈가 드러난 그의 몸은 말랐을 뿐 아니라 뒤틀려 외화된 내면을 보는 듯하다. 실직하고 정부 예산 긴축이 그에게 정신과 약물을 지원하던 공공의료 서비스마저 없애버린 어느 날 아서는 시비를 걸어온 화이트칼라 남자들에게 과도하게 반격하고 군중은 광대 마스크로 얼굴을 가리고 그를 추종하기 시작한다. <조커>는 표면적으로는 브루스 웨인과 조커가 왜 상극의 존재인지 설명하는 기원담이지만, 동시에 사회적 박탈감을 특권층뿐 아니라 사회 최약자에게도 무작위적 폭력으로 발산하는 청년들이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보여주는 케이스 스터디이기도하다.

<조조 래빗> courtesy of TIFF

<토르: 라그나로크>로 할리우드 주류가 된 작가·배우·감독인 타이카 와이티티는, <인생은 아름다워>의 전철을 밟는 것이 아니냐는 우려를 무릅쓰고 제3제국 풍자 코미디 <조조 래빗>을 공개했다. 2차대전 막바지, 전쟁터에 가서 돌아오지 않는 아빠를 둔 10살 독일 소년 조조 베츨러(로만 그리핀 데이비스)는 아돌프 히틀러 총통(타이카 와이티티)을 상상의 친구로 두고 있다. 멋진 남자, 모범적 나치를 꿈꾸는 소년은 유겐트 캠프에 가지만 토끼를 죽이라는 명령을 이행치 못해 웃음거리가 된다. 상상의 친구에게 부추김을 받아 폭탄 투척 훈련에 용기를 낸 조조는 다리에 영구적 부상을 입고 엄마(스칼렛 요한슨)에게 돌아온다. 그리고 집 벽장 안에 살고 있는 유령과 마주친다. <문라이즈 킹덤>을 방불케 하는 동화적 비주얼과 “하일 히틀러” 경례의 반복 변주만으로 폭소를 자아내는 와이티티의 독창적 유머감각은 과연 어두운 제재라는 사실을 잊고 즐기게 만든다. 영화 속 세계가 소년의 눈을 필터로 재현된 풍경이라는 전제가 마음의 짐을 덜어주는 면도 있다. <조조 래빗>은 2차대전을 재해석하는 영화가 아니라, 특정 시대에 한정되지 않는 차별과 혐오를 유머로 두들겨패는 영화며 그래서 <조커>보다 훨씬 안전한 이야기다.

<탐욕> courtesy of TIFF

시대의 관찰자로 내공이 깊은 두 중견, 마이클 윈터보텀스티븐 소더버그는, 더이상 못 참겠다는 듯 대놓고 깃발을 휘두르는 영화를 들고 토론토를 찾았다. 우선 윈터보텀의 <탐욕>(Greed)은, 무수한 브랜드와 로드숍을 론칭하고 매각해 돈을 번 부자 리처드 맥크레디 경(스티브 쿠건, 톱숍의 필립 그린이 모델로 알려졌다)의 60회 생일파티를 둘러싼 유사 다큐멘터리 형식의 소동극이다. 회사는 망해도 오너는 부를 축적하는 전형적 예다. 상영관을 찾은 감독은 “지금부터 볼 내용이 아무리 극단적이고 부조리해도 현실에 비하면 미미하다”고 예고했고 영화가 끝난 후에는, 의류기업들이 제3세계에서 착취하는 노동자의 80%가 여성임을 강조하며 셀러브리티들이 패션 재벌들과 어울리는 일이 그들을 정당화해주지는 않는지 물었다.

<돈 세탁소> courtesy of TIFF

소더버그의 신작 역시 보이지 않는 돈의 흐름을 보이게 하려는 시도다. <돈 세탁소>(Laundromat)의 소재는 파나마 페이퍼. 2016년 탐사보도 언론인들에 의해 폭로된 세계 최상층 부자와 권력자들의 탈세법을 담은 비밀문서다. <트래픽> <컨테이젼> <로건 럭키> 등 ‘물류이동’을 묘사하는 시나리오에 강한 소더버그는 <돈 세탁소>에서는 장(章)을 나눠 미국, 서인도제도, 중국을 누비며 ‘우리만 모르는’ 돈의 흐름을 밝히는 변칙적 형식을 택했다. 메릴 스트립이 유람선 사고로 남편을 잃고 보험금을 협상하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셸 컴퍼니(shell company)와 유령회사의 미로에 빠져드는 주부로 분했다. 개리 올드먼과 안토니오 반데라스는 시종 커플룩 슈트를 차려입고 관객을 가이드하고 극중 사건에 추임새를 넣는 그리스 코러스 역을 한다. 마지막에 객석에 냉수를 끼얹는 듯한 모 배우의 선언적 롱테이크는 개봉 후 인터넷에 상당히 떠돌아다닐 것으로 예상된다.

<저스트 머시> courtesy of TIFF

실화를 기반으로 인종 불평등을 그린 <저스트 머시>(Just Mercy)는 마이클 B. 조던, 제이미 폭스, 브리 라슨의 출연으로 이목을 집중시켰으나 세 배우 모두에게 최고작은 되지 못할 성싶다. 하버드 출신의 젊은 변호사 브라이언(마이클 B. 조던)은 사형수들이 흔히 정당한 법률 서비스를 받지 못하고 죽음에 이르며, 그중 다수가 차별받는 흑인이라는 사실에 인권단체와 협력해 구제에 나선다. 브리 라슨은 그를 돕는 백인 사무장이다. 영화의 본론은 소설 <앵무새 죽이기>의 고장 앨라배마에서 무려 1987년에 다시 무고한 흑인 조니(제이미 폭스)가 일방적 재판으로 강간 살해 유죄선고를 받은 사건. 제출된 증거는 허약하고 알리바이도 확실하지만, 그들이 보호해야 하는 ‘시민 공동체’에 결코 아프리카계 주민을 포함시키지 않는 백인 검찰과 경찰은, 브라이언의 노력을 치안을 위협하는 도발로 치부한다. <저스트 머시>는 피부색을 가리는 불평등한 법 집행뿐 아니라 미국의 사형제가 결국 전기의자에 앉히는 사람들이 과연 가장 죄가 무거운 자들인지 되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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