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드 돈 다이>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우리집>의 12살 하나(김나연)는 엄마 아빠의 불화로 금이 간 가족을 묶어세우느라 바쁜 여름을 보내는 중이다. 온 식구가 식탁에 둘러앉은 모습을 보고 싶어 음식을 만들고, 가족 여행을 궁리한다. 윤가은 감독의 단편 <손님>(2011)과 <콩나물>(2013)의 소녀들이 그랬듯, 하나는 부모를 달래고 보살피려는 아이다. <우리집>의 ‘집’은 가정을 뜻하기도 하고 말 그대로 가족이 사는 집이기도 하다. 잦은 이사에 지친 이웃 자매 유미(김시아)와 유진(주예림)과 친해진 하나가 막아야 할 재앙은 이혼과 이사, 두 가지로 늘어난다. 그러나 두 집을 지키려고 애쓰는 동안 세 아이는 그들만의 작은 집을 하나 짓게 된다.
07/31
짐 자무시는 기존 장르를 취해 자무시 월드의 한 구역을 만들어왔다. 테마파크의 ‘무슨 무슨 랜드’처럼. 그 서쪽 끝에 웨스턴 장르를 전유한 <데드 맨>(1995)이 있고, 사무라이영화를 가져온 <고스트 독>(1999), 뱀파이어 호러를 수혈한 <오직 사랑하는 이들만이 살아남는다>(2013)가 있다. <데드 돈 다이>는 언급한 세 작품보다 훨씬 가벼운 장르 리믹스다. 짐 자무시 감독이 가까운 친구들에게 연락해 ‘좀비 호러’가 드레스 코드인 파티를 열었다고 보면 비슷하다. 많은 참석자가 좀비를, 몇몇은 경찰과 주민 분장을 택한다. 틸다 스윈턴 같은 오랜 친구는 ‘모두가 좀비라고? 그보다 이상한 캐릭터는 뭐가 있을까?’ 궁리한다.
<데드 돈 다이>의 인물들은 한여름에 소름 돋게 쿨하다. 짐 자무시 감독의 캐릭터들이 일희일비하지 않는 성격인 것은 30년도 더 된 일이지만 무려 좀비가 창궐하는 사태에도 마이 페이스를 유지하는 광경은 새삼 감탄스럽다. 짐 자무시는 토성의 테처럼 친구들을 두르고 사는 타입이다. 음악 밴드 스퀴럴의 멤버이자 ‘리 마빈의 아들들’이라는 닮은 사람 모임의 가입자이기도 하고, 영화 역시 성정과 취향이 맞는 동료들과 꾸준히 만들어왔다. 대표적으로 <데드 돈 다이>에서 이기 팝과 커플좀비로 등장하는 사라 드라이버는 자무시의 실제 반려자이자 태초부터 함께한 영화 동지다. 짐 자무시의 여러 친구 중에서도 남성배우 빌 머레이와 애덤 드라이버는 감독의 호흡과 유머 감각을 별도의 노력 없이 공유하는 영혼의 형제처럼 보인다(<데드 맨> 시절 조니 뎁도 그랬지만, 지금은 먼 곳으로 가버렸다). 클리프 로버트슨 서장(빌 머레이)과 로니 페터슨 경관(애덤 드라이버)은 미국 중부의 작은 마을 센터빌의 치안을 담당하는 경찰서의 2/3다. 나머지 한명은 민디 모리슨 경관(클로에 셰비니)이다. 은퇴를 앞둔(어쩌면 타이밍을 놓친) 클리프와 젊은 로니는 어느 날 이상한 기운을 감지한다. 밤 8시가 넘었는데도 해는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고, 시계와 핸드폰은 이유 없이 멎는다. 라디오에서는 ‘죽은 자들이 죽지 않아’라는 제목의 노래가 흘러나온다. 하지만 두 사람은 “참으로 이상하군”을 이리저리 변주한 대화를 유유자적 주고받을 뿐, 떨치고 나서서 조사할 생각은 하지 않는다. 빌 머레이와 애덤 드라이버가 끌어가는 초반 15분은 영화의 박자와 조성을 확정한다. 짐 자무시의 모든 영화는 사실적이되 특정한 매너로 굴러가는 자기 완결적 세계이고, 그래서 단숨에 톤을 잡는 배우의 존재가 중요하다.
<데드 돈 다이>는 영화 자체가 좀비의 속도로 걷는다. 극중에 인용되는 조지 로메로의 클래식이 정립한 규칙대로 센터빌의 좀비들은 발이 느리고, 대응하는 인간쪽에도 박력이라곤 없다. 후반부에 좀비들이 마을을 뒤덮은 다음에도 경찰은 외부로 구조요청을 보내지 않는다. 그들은 겁에 질려 정해진 순찰을 포기하지도 않지만 동시에 좀비에게 공격당하는 주민들을 도우려고 차에서 내리는 수고도 감수하지 않는다. 사파리 밴이라도 탄 것처럼 동네를 주유하다가 마침 길가에 좀비가 서 있으면 차창을 열고 때려눕히는 정도다. 그들은 비겁하다기보다 비관적이다. 어차피 끝이 좋지 않을 것을 알기에 유예할 뿐이다. 각자 차이는 있다. 늙고 지친 클리프는 체념에 의탁하고, 로니는 불운한 결말뿐 아니라, 질 것을 알고 최선을 다하는 사투까지 불가피한 사안으로 본다. 민디는 다른 방향으로 소극적인 동시에 용감하다. 두 동료와 달리 공포와 슬픔을 표하는 민디는, 생전에 알고 지내던 언데드를 도저히 해칠 수 없는 자신을 인정하고 스스로 좀비 떼에 몸을 내준다.
08/01
센터빌 경찰들이 좀비 사태를 맞아 그다지 경악하거나 수사 의지를 발휘하지 않는 까닭은, 재앙의 원인이 미스터리가 아니라서다. 올 것이 왔으며 인류는 망하게 돼 있다는 태도를 보이는 <데드 돈 다이>는, 대놓고 만연된 물신숭배와 자본주의 경제를 굴려가는 뻔뻔한 탐욕, 그로 말미암은 환경파괴를 원흉으로 가리킨다. 영화 초반부터 뉴스는 극지방을 드릴로 뚫는 시추 방식이 지구 자전축에 영향을 주고 기상이변을 일으키고 있다는 분석을 방송한다. 기후 위기 경고를 일부 과학자의 음모론이라고 반박하는 기업가쪽의 주장이 ‘균형’을 위해 뒤따라 보도된다. 되살아나서도 생전에 탐하던 물건의 이름- “커피!” “와이파이!”- 만 반복적으로 외치며 돌아다니는 <데드 돈 다이>의 좀비들은 스크린의 어떤 언데드보다 무력하고 하찮다. 트럼프에게 표를 던졌을 것이 분명한 백인우월주의자 농장주 프랭크(스티브 부세미)는 무엇보다 좀비들이 사유지를 침범했다는 사실에 분노한다. 일찌감치 숲에서 외톨이로 살아온 은둔자 밥(톰 웨이츠)은 마을의 난리통을 쌍안경으로 관찰하는데 프랭크의 불운한 결말에 만족감마저 표한다. 심지어 두 경찰조차 프랭크에게 동정을 표하지 않는다. <데드 돈 다이>의 (너무 뻔해서 메시지라고 하기도 무안한) 메시지는, 살아남은 자의 면면으로 재확인된다. 좀비의 표적에서 벗어난 인물은, 좀도둑질을 포함해 자급자족으로 살아온 은둔자와 소년원에 갇혀 세상으로부터 격리돼 있던 세 아이들뿐이다. 다만 유의할 점은 그렇다고 해서, 생존자 밥이 성자이거나 살아남은 10대들과 단결해 좀비 이후의 세계를 계획하지도 않는다는 점이다. 밥은 시장경제에 편입되지 않고 살아왔는지는 몰라도, 수시로 마을을 엿보며 우월감을 갖는 관음증의 소유자이며 무고한 자에게 총질도 서슴지 않는다. 그러면 외부로부터의 구원은 어떤가? 마치 해결책을 갖고 있는 것처럼 보였던 이방인 젤다(틸다 스윈턴)는, 허무하게도 “구경 한번 잘했다”는 투로 영화에서 표표히 빠져나간다. 요컨대 짐 자무시 감독은 현재의 미국과 세계에 대해 비판적이지만, 영화 내부에 변화를 위한 싸움을 끌어들일 뜻은 없다. 언제나 그랬듯 그의 관심사는 독특한 개인의 대응과 대안적 세계의 건립이다. 그리고 자무시의 ‘마을’에서 격한 충돌은 일어나지 않는다. 고요한 <패터슨>의 세계에서 딱 한 번 일어난 총기 협박 소동이 어떻게 마무리됐는지 상기해보라. <데드 돈 다이>에서도 ‘백인에게 미국을!’이라는 슬로건을 수놓은 모자까지 쓰고 다니는 프랭크는, 흑인 이웃 행크(대니 글로버)와 나란히 앉아 별 탈 없이 커피를 마신다. <데드 돈 다이>를 보고 돌아와, 나는 오래 미루어두었던 <블랙클랜스맨>(2018)을 넷플릭스로 관람했다. 30여년 전 미국 독립영화의 양대 영웅이었던 짐 자무시와 스파이크 리는 공히 미국의 현재에 탄식하지만, 한 사람은 여전히 차갑고 한 사람은 여전히 영화를 태워먹을 기세로 뜨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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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차 유머
무슨 팔자인지 짐 자무시와 스파이크 리의 냉온탕을 오가는 배우가 있으니 <미스테리 트레인>과 <똑바로 살아라>가 나온 해에 6살이었던 애덤 드라이버(<패터슨> <블랙클랜스맨>)다. 결과적으로 호러보다 코미디 함량이 높은 <데드 돈 다이>에서 많은 유머는 드라이버의 캐릭터 로니에게서 비롯된다. 침착하고 비관적인 대사와 <스타워즈>의 카일로 렌을 빗댄 인용도 웃음을 자아내지만, 배우의 외양을 알뜰히 활용한 시각적 개그까지 동원돼 짐 자무시의 알뜰함을 증명한다. <패터슨>에서 덩치에 맞게 노선버스를 운전했던 애덤 드라이버는 <데드 돈 다이>에서 환경친화형 경차를 몬다. 좀비 사태가 기후 위기에서 파생됐다고 보면, 영화의 메시지에 부합하는 차종이다. 콤팩트 카에 장신의 몸을 구겨넣고 세상 진지한 표정으로, 최초의 인명피해가 발생한 현장에 탈탈 도착하는 로니는, 눈앞에 시신을 두고도 관객이 폭소를 터뜨리게 만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