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친구가 떠나 슬픔에 빠져 있던 렐에게 길 잃은 새끼 고양이가 찾아온다. 마음 둘 곳 없던 그는 온갖 정성을 다해 고양이를 돌본다. 하와이어로 ‘시원한 바람’을 의미하는 ‘키아누’라는 이름도 붙여줬다. 키아누를 모델로 예쁜 달력을 만들던 어느 날 집이 털리고 고양이가 사라진다. 빈집털이의 경우 범인을 잡을 확률이 낮다는 말에 렐은 직접 키아누를 찾아 나서기로 결심한다. 문제는 키아누에 집착하는 사람들이 하필이면 전부 흑인 갱스터 아니면 흑인 마약 딜러들이라는 것. 대충 줄거리만 들어도 <존 윅>(2014)의 패러디임이 빤한 이 영화의 제목은 <키아누>(2016)다. 구미가 당길 정보를 전하자면, 렐 역할을 맡은 배우가 조던 필이다. <겟 아웃>(2017)으로 세상을 흔들기 직전에 제작, 출연, 각본을 도맡은 작품이었다. 그래도 이 재미있는 영화를 안 보겠다면 키아누의 목소리 역할로 키아누 리브스가 깜짝출연한다는 걸 밝혀야겠다. <매트릭스>의 대사를 흉내내 지혜의 말씀을 전하는 고양이라니 어찌 거부할 수 있겠는가.
키아누 리브스가 아예 본인 역할로 나오는 영화도 있다. 넷플릭스가 제작한 <우리 사이 어쩌면>에서 리브스는 유명 셰프에게 작업을 거는 스타로 나온다. 톰 포드가 몸에 맞게 제작해준 양복을 걸치고, 멀쩡한 시력에 패션용 안경을 쓰고 등장한 그는 전형적인 얄팍한 연예인을 연기한다. 우아한 말이 입에서 줄줄 흘러나오지만 진심은 별로 느껴지지 않는다. “시간을 소재로 한 음식”을 주문하고 싶다던 그는 사슴 소리를 헤드폰으로 들으며 사슴 고기를 먹다 미안하다고 울부짖는다. 극중 표현으로 ‘연극스러운 행동’에 능한 사람이다. 여자의 옛 남자친구를 불러놓은 자리에서 <존 윅>의 스턴트 책임자가 가르쳐준 게임을 제안해 온갖 남자다운 척을 다하다 심통을 부린다. 결국 옛 남자친구에게 얻어맞은 사건은 나중에 노래로 만들어진다.
대체 불가능한 존재감
영화에서 유명인을 거론하는 건 흔하겠지만 이 정도면 가히 현상이라 부를 만하다. <스피드>(1994)와 <매트릭스> 시리즈에 이어 리브스의 인생 영화로 등극한 <존 윅> 시리즈는 한동안 정체됐던 리브스의 존재감을 격상시켰다. <존 윅3: 파라벨룸>(이하 <존 윅3>)은 시리즈 최고의 흥행 기록을 세웠으며, 때마침 또 다른 흥행작 <토이 스토리4>에 거푸 출연해 주체하기 힘든 인기를 실감하는 중이다. 보통 늙지 않는 배우로 톰 크루즈를 꼽는데, 그보다 두살 젊은 리브스도 뒤지지 않는다. 환갑을 5년 정도 앞둔 그는 평범한 중년 역할을 맡은 적이 거의 없다. 손자는커녕 아들을 둔 아버지의 모습으로 그를 떠올리기란 힘들다. 초기의 어리숙한 모습을 기억하는 사람은 그가 지금까지 인기를 유지할 거라고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떡잎을 알아본 프랜시스 코폴라, 스티븐 프리어스 같은 명장들은 고전을 각색한 영화에 초기의 리브스를 출연시켰다. 그중 가장 인상적인 역할은 <아이다호>(1991)의 스콧이다. <아이다호>가 고전의 각색물이라고? 구스 반 산트는 3개의 프로젝트를 진행하다 그것을 합쳐 <아이다호>를 완성했는데, 첫 번째 프로젝트가 셰익스피어의 <헨리 4세>였다. 리브스가 맡은 스콧은 (헨리 5세로 등극하기 전) 방탕한 생활을 하는 헨리 왕자로, 대사 중 많은 부분도 셰익스피어의 극에서 따왔다. 시장 아들인 스콧은 거리의 소년들과 어울려 다니다 거액의 유산을 승계받은 후 상류층의 삶으로 이전한다. 반 산트는 그가 아버지처럼 따르던 도둑들의 왕 밥으로부터 등을 돌리는 장면을, (셰익스피어의 <윈저의 즐거운 아낙네들>을 각색한) 오슨 웰스의 <심야의 종소리>(1965)에서 헨리 5세로 즉위한 헨리 왕자가 팔스타프를 버리는 장면과 똑같이 재연했다.
<아이다호> 이야기를 길게 이은 이유는, 이 영화의 여러 개념– 상실, 집, 길– 이 <존 윅> 시리즈 및 <토이 스토리4>의 역할과 깊은 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이다. <존 윅: 리로드>(2017)에서 악당 산티노는 존 윅의 신경을 건드리기 위해 “아내를 잃고 삶을 잃고 집을 잃었다”라고 놀린다. 존의 처지를 정확하게 읽은 것 같지만 하나를 놓쳤다. 그건 ‘길’이다. <아이다호>의 주인공 마이크(리버 피닉스)는 떠돌이 남창이다. 거리가 잠자리이고 길을 따라 발길 닿는 대로 산다. 그가 처음부터 거리를 떠돈 것은 아니다. 기면발작증에 걸린 그는 쓰러질 때마다 자신을 버린 어머니를 떠올린다. 집으로 돌아가고 싶은 그는 ‘강을 거슬러 오르는 연어’를 꿈꾼다. 하지만 그에겐 집이 없다. 중년 남자로부터 구강성교를 받던 그는 사정하기 직전 ‘길 위로 떨어져 산산이 부서지는 집’의 이미지를 그린다. 사랑했던 여성에게 버려져 돌아갈 집도 없는 그는 마침내 ‘길의 감식가’로 남기를 선택한다. <아이다호>에서 마이크가 유일하게 감정을 드러내는 대상은 리브스가 분한 스콧이다. 시애틀에선 추울까봐 재킷을 벗어주었고, 포틀랜드에선 쓰러진 그를 안고 있었던 사람이 스콧 아니던가. 모닥불 앞에서 사랑을 고백하기 전, 마이크는 “친하지만 가까워질 수는 없을 것 같다”고 말했다. 마이크의 예감대로 스콧은 그를 떠난다. 과장된 생각이겠으나 <존 윅> 시리즈는 리브스가 <아이다호>에 보내는 응답처럼 보인다. <존 윅>의 첫 장면에서 존은 쓰러지며 폰을 꺼내 사랑하는 여자의 이미지를 본 다음 실신한다. <아이다호>의 첫 장면에서 마이크가 쓰러지며 어머니의 이미지를 떠올리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존은 마이크가 걸었던 여정을 정확하게 반복한다. <존 윅: 리로드>에서 어쩔 수 없이 킬러로 복귀한 존이 싫어도 가야 하는 첫 도시가 왜 로마일까. <아이다호>에서 스콧이 마이크를 버렸던 도시가 로마였다.
<존 윅>의 존 윅, 혹은 키아누 리브스
<존 윅>의 주제는 상실이다. 존은 사랑하는 여인 헬렌과 결혼하면서 킬러라는 직업을 그만둔다. 하지만 그녀와 함께 보낸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병으로 세상을 먼저 떠난 그녀는 그에게 강아지를 선물한다. 그나마 마음 둘 곳이 필요할 것 같아서였다. 악당이 그런 강아지를 죽여버렸으니 존의 대응은 보지 않아도 알 수 있다. <존 윅: 리로드>의 주제는 집이다. 짧은 복수를 마친 다음 그는 킬러라는 직업으로 되돌아가지 않는다. 외딴집에서 새로 구한 개와 조용하고 평안하게 살고 싶었다. 살인의 도구들을 지하실 깊숙이 봉인하자마자 과거가 그를 찾아온다. 과거의 업보는 그를 구속하고, 그는 마지막 미션을 수행해야 할지 고민한다. 거기에서 멈췄으면 존은 평범한 삶을 유지했을 테지만, 악당은 그의 집을 폭파하고 만다. 카메라는 헬렌이 남긴 물건들을 포함해 집 전체가 붉은 불꽃으로 화하는 풍경을 오랫동안 바라본다. 다시 복수를 마친 존은 개에게 “집으로 돌아가자”고 말한다. 그러나 그에게 돌아갈 집은 없다. 추적추적 비가 내리고, 그는 폐허가 된 집에 앉아 갈 곳이 없음을 깨닫는다. <존 윅3>에서 존은 길 위의 삶을 받아들인다. 편히 쉴 곳은 사라지고 그는 수많은 적의 총과 눈을 피해 끊임없이 길 위를 헤매야 한다. 잠자는 사자의 코털을 건드렸지만 그가 벌이는 일은 <데스 위시>(1974)의 주인공이 하는 복수와 비교해 완전히 다르다. <존 윅> 시리즈는 복수극이라기보다 길 위에 강제로 나앉은 인물의 방황의 기록이다. 그래서 공허할 수도 있는 영화다.
이 시리즈에서 집만큼 중요한 공간은 ‘컨티넨털 호텔 뉴욕 지점’이다. 지형적 위치부터 독특한 호텔이다. 보통 호텔처럼 도로의 한쪽편에 놓인 게 아니라 길과 길 사이의 가운데 공간을 차지한다. 안전이나 편안함 따위는 별로 신경도 안 쓴다는 듯이 자신을 오만하게 드러낸 공간답게 용도도 비즈니스에 적합하게 꾸며져 있다. 정보를 수집하고 옷을 맞추고 장비를 구입하기에 편리한 곳에 위치했음은 물론이다. 간혹 객실의 침대를 보여주기는 하지만, 존이 거기 누워서 잠을 잔다거나 관계를 맺는 모습은 한번도 나오지 않는다. 집이지만 길과 다름없는 곳이어서 긴장을 풀 만한 곳은 안 된다. 흥미로운 것은 뉴욕 지점의 주인이자 관리자인 윈스턴(이언 맥셰인)이 <존 윅3>에서 직위를 뺏긴다는 점이다. 그런데 그뿐만 아니라, 뉴욕 부랑자들의 왕인 바우어리 킹 또한 최고회의에 의해 직위를 박탈당한다. 여기서 직위를 박탈당한다는 것은 그들이 군림했던 공간에서 쫓겨남을 의미한다. 즉 그들도 존과 마찬가지 상황에 처한다는 뜻인데, 그들이 대처하는 방식은 존과 정반대다. 윈스턴은 존을 포함한 세력의 도움으로 최고회의와 한판 전쟁을 벌여 끝내 자신의 지위를 회복한다. 죽음에서 부활한 바우어리 킹도 자신의 지위를 회복하기를 다짐한다. 그렇다면 그런 질문을 하게 된다. 존은 왜 그들처럼 행동하지 않을까? 폐허가 된 집을 허물고 새로 집을 지어 거기에 머무는 행위를 왜 그는 하지 않았을까?
<토이 스토리4>에서 우디는 오랫동안 헤어졌던 보핍과 재회하면서 새로운 운명에 처한다. 지금까지 아이들의 장난감으로서 집에만 머물렀던 그에게 자유롭게 삶을 개척하는 보핍은 낯설게 다가온다. 나는 질문해본다. 우디의 본질은 장난감인가, 카우보이인가. <토이 스토리4>는 자각에 관한 이야기다. 우디는 자신이 장난감 이전에 카우보이임을 받아들인다. <레드 리버>(1948), <리오 브라보>(1959), <최후의 총잡이>(1976)에서 존 웨인이 그랬던 것처럼, 우디는 먼저 자신의 후계자를 선택한다. 시대의 흐름에 맞춰 남자가 아닌 여자 카우보이가 그의 보안관 배지를 인계받는다. 그다음 우디는 <역마차>(1939)의 웨인처럼 길을 떠나기로 한다. 1950년대에 태어났으니 <리버티 밸런스를 쏜 사나이>(1962)의 웨인을 따라 집에 머물 수도 있겠으나, 우디는 아직 그러기엔 젊다고 생각한다. 그를 따르는 인물 중 하나는 리브스가 목소리를 맡은 ‘듀크 카붐’이다. 듀크는 다른 인형들과 통 속에 갇혀 언젠가는 인간의 손에 뽑히기를 기다리는 존재였다. 기대했던 것만큼 점프하지 못한다는 이유로 주인에게 버려진 장난감이었다. 겉만 번드르르할 뿐 속은 죽어 있던 그는 갇힌 친구들의 탈출극에서 큰 역할을 담당하면서 새롭게 태어난다. 그리고 길 위의 삶을 살기로 한다.
<토이 스토리4>에서 키아누 리브스는 듀크 카붐의 목소리를 연기했다.
영화 같은 삶
듀크가 길을 선택한 것은 따지고 보면 당연한 일이다. 듀크는 <이지 라이더>(1969)에 나왔던 피터 폰다와 데니스 호퍼의 후예다. 특유의 수염부터, 게이 캐릭터이면서 틈만 나면 마초 흉내를 내는 것도 똑 닮았다. 그들처럼 모터바이크에 몸을 싣고 대륙을 횡단하는 일이야말로 듀크의 운명이다. 길의 운명을 타고났다는 점에서 듀크는 존 윅의 쌍둥이 형제다. 길은 보통 자유를 의미한다. 존과 듀크에게 길은 자유 외에 또 다른 의미를 지닌다. 그들은 삶을 사는 방식으로 길을 선택했다. 다르게 말하면 그들에게 길은 죽음을 피하는 방법이다. <돈키호테>를 진정 이해하는 데는 긴 시간이 필요한 것과 같다. 존은 살인자이면서 스스로 말하기를 죽음을 두려워하고 지옥에 가기를 무서워한다. 그래서 그는 계속 움직인다. 움직이는 존재는 누군가 멈추지 않는 한 움직이기를 계속하며, 움직임을 계속하는 한 죽은 게 아니다. 죽은 시간, 죽은 삶에 그들은 그렇게 반응한다. 빔 벤더스의 <시간의 흐름 속으로>(1976)에는 집을 잃은 또 한명의 남자가 나온다. 시골 마을의 극장을 전전하며 영사기를 수리하는 남자에게는 길과 트럭이 집이다. 벤더스는 고독한 방랑자인 그에게 ‘길의 제왕’이란 근사한 이름을 붙였다. 키아누 리브스는 영화 같은 삶을 사는 배우다. 근작들- <존 윅> 시리즈, <토이 스토리4> 그리고 <데스티네이션 웨딩>(2018)에서 그는 흡사 리버 피닉스의 대사, “나는 길의 감식가, 평생 길을 감식하리라. 이 길은 끝이 없으니 이 세상 어디든지 뻗어 있으리”라고 말하는 듯하다. 그런 그에게 한시적이나마 ‘길의 제왕’이란 타이틀을 붙여준다 한들 죄가 될 건 없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