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이야기는 ‘4차 산업혁명’으로부터 시작해야 한다. 아시아에서 영화를 잘 만드는 법과 4차 산업혁명이 대체 무슨 관련이 있냐고? ‘한-아세안 차세대영화인재육성사업’(ASEAN-ROK Film Leaders Incubator, 이하 FLY)의 사회를 맡은 최윤 부산영상위원회 운영위원장의 말을 들어보자. “넷플릭스를 필두로 나라별 온라인 스트리밍 서비스 업체들이 급속도로 늘어나고 있다. 할리우드의 파라마운트, 디즈니 같은 메이저 스튜디오들도 자사의 온라인 스트리밍 서비스를 내년, 혹은 내후년 시작하겠다고 발표했다. 이런 변화는 4차 산업혁명의 시대를 맞아 보다 급속도로 진행되고 있다. 기존에는 나라별 스튜디오를 중심으로 투자와 배급이 이루어지고 로컬 필름을 제작하는 방식이 일반적이었다. 하지만 온라인 스트리밍은 전세계를 대상으로 서비스되기 때문에 로컬뿐만 아니라 글로벌하게 서비스할 수 있는 프로젝트에 투자가 들어올 가능성이 크다.” 사회와 사회, 문화와 문화, 국가와 국가간의 경계가 사라지는 4차 산업혁명의 시대, 영화산업에 있어서 국제 공동 기획과 제작의 필요성이 그 어느 때보다 절실해지고 있다는 얘기다. 이제 네트워크는 선택이 아니라 필수다. 10월 13일부터 16일까지, 부산에서 목격한 아시아 영화인들의 교류, 그들과의 만남을 통해 경험한 웰메이드 영화 제작의 노하우를 전한다.
#1. 아시아에서 영화 친구를 만드는 법
10월 13일, 부산시청자미디어센터에 아시아 지역 차세대 영화인재들이 모였다. 부산시와 부산영상위원회가 주최하고, 부산아시아영화학교가 주관하는 FLY영화제에 참석하기 위해서다. FLY는 매년 한국과 아세안(동남아시아국가연합) 10개국(타이·인도네시아·필리핀·말레이시아·싱가포르·브루나이·베트남·라오스·미얀마·캄보디아)에서 나라별로 두명씩, 만 16살부터 25살 사이 재능 있는 영화인 22명을 선발해 아세안 지역에서 2주간 진행되는 단편영화 제작 워크숍이다. 2012년 필리핀 다바오에서 시작해 타이 후아힌(2013년)과 미얀마 양곤(2014년), 말레이시아 조호르바루(2015년)와 캄보디아 프놈펜(2016년)에서 개최되었고 각국의 전문 영화인들이 강사로 참여했다. 지난 5년간 FLY가 배출한 113명의 졸업생은 아시아 각 지역에서 감독, 프로듀서, 촬영감독, 시나리오작가 등으로 활발하게 활동 중이다. 10월 13일부터 15일까지 3일간 부산시청자미디어센터에서 열린 FLY영화제는 아세안 창립 50주년을 기념하는 ‘한-아세안 문화교류의 해’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FLY 졸업생들이 만든 9개국 32편(장편영화 4편, 단편영화 28편)의 영화를 상영했다.
영화제 첫날인 13일에는 20명의 FLY 졸업생들이 한자리에 모여 <로봇, 소리>(2015)를 만든 이호재 감독(FLY 2016 연출강사)의 진행으로 ‘FLY 그 후, 그리고 아세안 영화공동체’라는 주제로 이야기를 나눴다. 아시아에서 영화를 만드는 데 FLY라는 경험이 미친 영향, 자국의 영화산업 현황과 합작에 대한 생각을 자유롭게 나누는 자리였다. 졸업생들은 영화인으로서의 시야를 넓히는 데 FLY가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입을 모아 말했다. FLY에 참석하기 전 다큐멘터리 연출을 지향했다는 인도네시아의 알리 유노야 졸업생은 “FLY에서의 단편 극영화 연출 경험을 통해 장편 상업영화의 시나리오를 완성할 수 있었다”는 소감을 밝혔고, 한국의 김영덕 졸업생은 “FLY에서 알게 된 베트남 친구의 도움으로 저렴한 제작비로 베트남에서 영화를 찍을 수 있게 됐다”고 전했다. 베트남의 항 르엉 졸업생은 “FLY 이후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의 환상영화학교 등 다양한 워크숍에 참여하면서 기회가 이어지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며 “같은 꿈을 꾸는 아시아의 젊은 영화 친구들을 만나 서로 용기를 북돋워주는 게 참 좋았다”고 말했다. 할리우드영화가 아시아 영화시장을 지배하고 있는 상황에서 어떻게 자국 관객의 마음을 사로잡을 것인지의 문제는 이 자리에 모인 모든 차세대 아시아 영화인들의 공통적인 화두였다. 필리핀의 기안 카를로 아브라한 졸업생은 “관객이 더 수월하게 접근할 수 있는 영화의 러닝타임을 고민하게 된다”고 말했고, 미얀마의 위 라 졸업생은 “할리우드영화만 상영하는 메이저 배급사에 맞서 새로운 활로를 개척하는 것이 필요하다. 국제영화제를 겨냥한 영화를 만들 것인지, 혹은 인터넷 스트리밍이라는 새로운 플랫폼을 개척할 것인지” 등 플랫폼의 변화를 생각해봐야 한다고 말했다. 브루나이에서 온 압둘 자이니디 졸업생은 “부산국제영화제 아시아영화아카데미(AFA)에 참가했을 때 교장선생님을 맡은 차이밍량 감독으로부터 ‘비전을 타협하지 말라’는 조언을 들었다”며 주변의 변화에 지나치게 휩쓸리지 말고 창작자로서 자신의 것을 지켜야 한다는 의견을 전했다.
‘FLY 그 후, 그리고 아세안 영화공동체’ 포럼에서 서로의 경험담을 공유 중인 아시아 영화인들.
#2. 아시아 영화인들과 함께 영화를 만드는 법
이탈리아 감독이 연출하고 한국 프로듀서가 제작하는 영화를 대만에서 촬영한다? 2016년 10월 4일 개교한 부산아시아영화학교(Busan Asian Film School, 이하 AFiS)가 지향하는 합작의 방식이다. 아시아 17개국에서 모인 AFiS 20명의 교육생들이 참여한 ‘AFiS 프로젝트피칭’ 행사가 파라다이스호텔 부산(10월 15일), 부산 벡스코 제2 전시장(10월 16일)에서 양일간 열렸다. 이 행사는 AFiS의 국제영화비즈니스아카데미 교육생들이 국제 공동 제작을 지향하며 새롭게 발굴해낸 20편의 장편 극영화 프로젝트를 선보이는 자리다. 학생이라고는 하지만 이미 선발 과정에서부터 감독과 프로듀서, 필름 커미셔너, 영화제 프로그래머 등 다양한 배경을 가진 경력자들을 염두에 두었기 때문에 AFiS 교육생들이 선보인 다양한 프로젝트는 피칭 행사에 모여든 전세계 영화산업 관계자들의 눈을 사로잡기에 충분해 보였다. 10월 15일 파라다이스호텔 부산에서 열린 ‘AFiS 프로젝트 피칭’ 행사 중 두 번째 그룹의 발표를 보다 자세히 들을 수 있었다. 이 그룹에서는 한국과의 국제 공동 제작을 지향하거나 한국의 파트너와 일하고자 하는 교육생들의 프로젝트가 소개됐다. <붉은 그림자>와 <유 러브 미 쏘 아이 캔 브리드>(가제), <화이트 로터스>와 <직감>이 그 작품들이다. 워너브러더스코리아의 최재원 대표, 왕샤오솨이와 로우예 등 중국 감독들의 영화를 제작하고 배급사 아시안 섀도를 설립한 프랑스 영화인 이자벨 글라샹, 전 CJ엔터테인먼트 대표이사였던 씨그널픽처스의 김정아 대표이사가 이 행사의 심사위원으로 나섰다.
<유 러브 미 쏘 아이 캔 브리드>를 피칭 중인 한국의 이용희 프로듀서.
<붉은 그림자>는 싱가포르 mm2 엔터테인먼트의 프로듀서인 캐럴 수진 톰이 제작하고 <미스터 고> <적인걸2: 신도해왕의 비밀> 등의 영화에 시각특수효과(VFX) 프로듀서로 참여한 한국 채수응 감독의 합작 프로젝트다. 이 작품은 수백명의 목숨을 앗아간 화재에 얽힌 미스터리를 풀어내고자 하는 한 남자의 뒤를 쫓는 심리 스릴러다. 캐럴 수진톰 프로듀서는 “싱가포르에 거주하는 한국인이 주인공인 이 작품을 통해 한국과 싱가포르 마켓을 모두 타깃으로 잡고 싶다”고 말했다.
<유 러브 미 쏘 아이 캔 브리드>는 <굿 뉴스>로 제73회 베니스국제영화제 오리종티 단편영화 경쟁부문에 초청받은 이탈리아 감독 지오바니 푸무와 한국의 이용희 프로듀서의 프로젝트다. 이 작품은 부산에서 일하는 사기꾼 남성 접대부 류가 몇년 전에 사라진 실세의 딸을 찾기 위해 대만으로 향한다는 내용의 미스터리 드라마다. “왜 대만을 영화의 배경으로 정했는가”라는 이자벨 글라샹 심사위원의 질문이 이어졌다. “대만은 중국 본토와 일본적인 요소를 동시에 갖춘 흥미로운 나라다. LGBT 문화도 발달되어 있어 아시아 지역에서 다문화에 대해 굉장히 흥미로운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장소라 생각했다”는 지오바니 푸무 감독의 대답이 이어졌다.
AFiS 프로젝트 피칭에 참가한 부산아시아영화학교 교육생들과 심사위원들의 질의응답 시간.
‘아웅산 테러 사건’(북한이 1983년 10월 9일 버마(현 미얀마)를 방문 중이던 전두환 대통령 및 수행원들을 대상으로 자행한 테러 사건)으로부터 모티브를 얻은 <화이트 로터스>는 한국 심사위원들의 많은 관심을 받았다. “소재의 위험성 때문에 한국에선 영화로 만들지 못했던 작품인데, 미얀마에서는 자연스러운 접근이 될 것 같다. 미얀마 시장에서도 이 영화가 충분히 성과를 낼 수 있을까?”란 최재원 심사위원의 질문에 미얀마 프로듀서 콴 마이 아웅은 “최근의 미얀마는 한류와 K팝에 많은 영향을 받고 있다. 한국 감독과 한국 배우들을 데리고 한국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는 건 미얀마 영화시장에서 성공할 수 있는 요소”라고 답했다.
2013년 카자흐스탄 박스오피스 1위를 달성한 <그와 그녀>의 사켄 졸다스 감독은 두 번째 장편영화 <직감>을 피칭에서 소개했다. 한국 스릴러영화의 팬이라는 그는 봉준호 감독의 <마더>와 드니 빌뇌브 감독의 <프리즈너스>를 레퍼런스로 <직감>을 연출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요르단 현지시각으로 새벽 4시30분경, 화상 통화에 응한 요르단필름커미션의 조지 데이비드 위원장.
#3. 아시아 지역 최고의 로케이션을 찾는 법
아직 충분히 탐구되지 않은, 매력적인 영화 촬영지를 찾는 건 전세계 모든 영화제작자들의 꿈이다. ‘라이징 아시아’는 매해 아시아 각국의 영화 이슈와 신기술을 소개하고, 아시아영화인들의 교류를 도모하는 ‘LINK OF CINE-ASIA’(아시아영화포럼&비즈니스 쇼케이스) 행사에서 선보이는 프로그램이다. 매년 세개의 아시아 국가를 선정해 이들 지역 고유의 매력을 탐구하고 촬영에 필요한 요소들을 점검하는, ‘로케이션’이라는 주제에 특화된 포럼이라고 할 수 있다. 올해의 포럼에서 특히 주목한 아시아 국가는 요르단, 뉴질랜드, 필리핀이었다. 요르단필름커미션의 조지 데이비드 위원장, 뉴질랜드 필름오타고사우스랜드의 케빈 제닝스 위원장과 뉴질랜드 스크린오클랜드의 마이클 브룩 위원장, 필리핀 필름엑스포서비스오피스의 돈저빈 아라완 위원장이 촬영지로서 각국의 매력을 소개하는 시간을 가졌다. 이 중 요르단의 조지 데이비드 위원장은 사정상 화상 통화로 포럼에 참석했는데, 요르단 현지시각이 새벽 4시30분이라는 말에 모두의 탄식과 웃음을 자아냈다.
<마스터>에서 진 회장(이병헌)의 일부 장면은 필리핀에서 촬영됐다.
와디럼 사막으로 유명한 요르단은 <스타워즈: 로그 원>(2016), <마션>(2015)의 촬영지다. 흙먼지 자욱했던 <마션>의 화성은 요르단의 자연환경이 배경이다. 요르단의 이국적인 사막은 전쟁영화에서도 자주 등장했는데, 브라이언 드 팔마의 <리댁티드>(2007),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작품상을 수상한 캐스린 비글로의 <허트 로커>(2008)가 요르단에서 촬영했다는 점이 알려지며 할리우드에서 각광받는 촬영지로 떠올랐다고 조지 데이비드 위원장은 말했다. 그가 전하는 로케이션으로서 요르단의 매력은 “창작자의 예술적 영감을 불러일으키는” 자연과 “풍부한 세제 혜택”이다. 조지 데이비드 위원장은 “지구상에서 이렇게 아름다운 장소를 본 적이 없다”는 <마션>의 주연배우 맷 데이먼의 코멘트를 소개하며 “요르단에서 촬영진이 비용을 지출할수록 포인트가 적립된다. 이 적립 제도에 따르면 최대 60%의 절감 혜택을 누릴 수 있다. <마션>도 수혜자였다”고 말했다. 2018년 20%의 캐시 리베이트 프로그램을 도입하면 보다 많은 영화인들이 요르단을 찾게 될 거라는 말도 그는 덧붙였다.
뉴질랜드는 <반지의 제왕> 시리즈를 통해 유명세를 얻은 촬영지다. 케빈 제닝스 위원장은 “<반지의 제왕> 이전까지만 해도 사람들은 지도에서 호주를 가리키며 뉴질랜드가 아니냐고 했었다”면서 이 필름 프랜차이즈가 뉴질랜드 관광산업과 영화산업에 대한 중요성을 국가적으로 얼마나 환기시켰는지 말했다. 마이클 브룩 위원장이 전하는 촬영지로서 뉴질랜드의 매력은 “철저히 고객 중심의 서비스”를 지향한다는 것이다. “전국에 위치한 영상위원회간의 긴밀한 협력으로 모든 것들이 신속하게 처리되는” 시스템을 구축했다고 그는 말했다. 더불어 웨타 디지털을 필두로 양질의 후반작업 시설도 구축되어 있어 촬영과 후반작업을 함께할 수 있는 장점도 있다고 마이클 브룩 위원장은 전했다.
<마션>에서 화성의 이국적인 풍경은 요르단의 와디럼 사막에서 촬영했다.
필리핀은 <본 레거시>(2012)와 한국영화 <마스터>(2016)의 촬영지다. 돈저빈 아라완 위원장은 “7천개 이상의 섬으로 이루어진 필리핀에서는 전세계의 모든 면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하며 인도네시아 발리와 필리핀의 세부를, 노르웨이와 필리핀의 팔라완을, 뉴질랜드와 필리핀의 콤포스텔라밸리를 비교한 사진을 소개했다. 더불어 그는 “필리핀에서는 필름엑스포서비스오피스에 오면 모든 것이 해결된다”며 필리핀 촬영을 위한 서류 작업이 한층 수월해졌음을 피력했다. 4일간 부산에서 열린 다양한 영화 행사들을 체험하며 도달한 결론은 ‘아는 만큼 더 멀리 닿을 수 있다’는 점이었다. 국경을 넘은 아시아 영화인들의 교류는 해마다 그 범위를 넓혀가고 있었다. 이들이 자국의 영화산업, 나아가 아시아 영화산업에 불러일으킬 나비효과가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