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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고 봅시다] 장국영에 대해 당신이 몰랐을 법한 5가지 이야기
주성철 2017-04-03

2003년 4월 1일, ‘마음이 피곤하여 더이상 세상을 사랑할 수 없다’는 말을 남기고 홍콩 만다린오리엔탈 호텔에서 투신자살한 장국영. 러닝타임 47년, 왕가위라는 클라이맥스, 그리고 만우절의 라스트신. <영웅본색> <천녀유혼> <아비정전> <패왕별희> <동사서독> <해피 투게더> 등으로 홍콩영화계를 넘어 아시아를 대표했던 미남자이자 배우, 그리고 가수였던 장국영의 14주기를 맞아 그의 다소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들을 전한다.

로자리힐 스쿨.

유년기의 기억

1956년 9월 12일, 원숭이띠에 처녀자리로 태어난 장국영은 무려 10남매 중 막내였다. 10남매 안에서 ‘섬’처럼 지내온 유년기는 그의 인생과 캐릭터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리고 셋째형, 넷째 누나, 그리고 바로 위인 아홉째 형은 그가 어렸을 때 세상을 떴다. 그래서 실제로는 7남매라고 할 수 있는데, 공교롭게도 죽은 아홉째 형과 그의 생일이 같았기에 가족들은 언제나 그 형이 환생하여 장국영이 태어났다고 여겼다. 홍콩에서 로자리힐 스쿨(Rosaryhill School)을 다닌 그는 유명한 재단사였던 아버지의 영향으로 13살 때 영국 리즈대학교 섬유학과로 유학을 떠났다. 13살 때부터 가족들과 떨어져 홀로 산 것이나 마찬가지다. 로자리힐 스쿨은 홍콩에서 그의 흔적이 남은 거의 유일한 학교다. 학교 설립자이자 그에 대한 기억을 갖고 있는 프란시스 자비에르 신부는 장국영이 세상을 뜬 뒤 글을 남기기도 했는데, 장국영은 ‘레슬리’라는 이름을 갖기 이전 학교에서 ‘바비’라는 애칭으로 불린 인기 많은 학생이었다고 한다.

《정인전》 커버.

<아비정전>

<성탄쾌락>

<아비정전>의 아비가 되기까지

1976년 홍콩 ATV 아시아 뮤직 콘테스트 2위를 차지하며 본격적인 가수의 길을 걷게 된 장국영은, 당시 홍콩 연예산업이 그러했듯 가수와 배우를 겸했다. 데뷔 앨범 《I LIKE DREAMING》(1976)과 후속 앨범 《정인전》(1978)이 별 인기를 얻지 못하자, 외모를 무기 삼아 배우 활동에 집중했던 것. 스스로도 기억하고 싶지 않을 ‘3급전영’(쉽게 말해 ‘미성년자 관람불가’ 영화) 데뷔작 <홍루춘상춘>(1978)의 상처를 지나(아버지의 정부에게 추파를 던지는 성인 코미디였다) 조연으로 나온 <갈채>(1980)에서는 드디어 가수 지망생을 연기했다. <갈채>는 그처럼 그의 ‘얼굴값 하는’ 초기의 반항적 청춘스타 이미지를 요약하고 있다. 말하자면 이때부터 그는 ‘아비’였다. <성탄쾌락>(1984)에서는 물건을 전해주러 갔다가 우연히 만난 맥향(맥가)의 딸(이려진)을 보고는 대뜸 댄스파티에 가자고 꼬시는 대담한 배달 사원이었고, 그의 첫 번째 메가히트작이라 할 수 있는 <위니종정>(1985)에서도 우연히 만난 여려진(이려진)에게 반하여 무턱대고 같은 버스에 올라타 쫓아갔다. 오죽하면 허관걸과 함께 부른 <신최가박당>(1989) 주제곡 <아미경과>에서 허관걸에 이어 장국영이 부르는 대목이 이렇게 시작한다. “예쁜 여자 만나면 바로 작업 시작!” <아비정전>(1990)의 첫 장면도 그러하다. 아비(장국영)는 수리첸(장만옥)에게 대뜸 다가가 자신의 시계를 1분만 같이 보자고 하고는 “1960년 4월16일 오후 3시, 우린 1분 동안 같이 있었어. 난 그 1분을 기억할 거야”라는 말을 건넨다. 시작만 보자면 이전 장국영 영화와 별다를 바 없는 설정이다. 하지만 <아비정전>은 그 이상의 고독과 허무를 머금은 아비 캐릭터를 통해, 배우 장국영에게 가장 중요한 전환점이 됐다.

레슬리 하워드.

‘Leslie’라는 영어 이름의 유래

장국영이 아버지의 바람대로 영국 유학을 다녀온 것은 삶의 중요한 전환점이 됐다. 당시 처음으로 여자친구를 사귀었다가 유학 가면서 헤어진 기억도 있지만, 영국에서 비로소 음악에 눈떴기 때문이다. 영국에서 친척이 운영하던 레스토랑에서 아르바이트로 노래를 부르며 음악에 대한 사랑을 키운 것이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1939)에서 누구나 기억할 법한 클라크 게이블이 아니라, 스칼렛(비비안 리)이 좋아하던 젠틀한 남자 얘슐리를 연기한 레슬리 하워드를 좋아하여 레슬리(Leslie)라는 영어 이름도 가져왔다. 남자, 여자 다 쓸 수 있는 중성적인 이름이어서 마음에 들었다고 한다. 그만의 감각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기도 하다. 그렇게 ‘바비 청’은 ‘레슬리 청’이 되었다.

<연지구>

<패왕별희>

미목여화, 예광과 이벽화 작가

홍콩 쇼브러더스를 대표했던 무협영화 감독 장철. 그의 영화 <외팔이> <복수> <철수무정> 등에서 시나리오를 맡았던 예광은 장국영의 미모를 일컬어 미목여화(眉目如畵)라 지칭했다. 눈과 눈썹이 그림을 그려놓은 것처럼 아름답다는 의미로 ‘미인’을 일컫는 최고의 표현이라 할 수 있다. 같은 남자이자, 장철의 영화로 대표되는 남성미 가득한 영화들의 시나리오는 물론 SF소설을 쓰기도 했던 다재다능한 작가의 이야기이기에 무척 흥미롭다. 장국영이 출연한 <연지구>(감독 관금붕, 1988)와 <패왕별희>(감독 첸카이거, 1993)의 시나리오를 썼던, 이벽화 작가(두 작품 외 <진용> <청사> <천도방자> 등 대부분의 작품들이 영화화됐다) 또한 그 의견에 동의했다. 이벽화는 <연지구>에 장국영과 매염방이 주연으로 캐스팅되는 데 힘을 보탰고, <마지막 황제>(1987)의 배우 존 론이 연기할 뻔했던 <패왕별희>의 데이 역할을 장국영이 맡는 데에도 영향을 미쳤다.

<연비연멸>

<색정남녀>

이루지 못한 감독의 꿈

예술가로서 장국영의 마지막 꿈은 감독이었다. <야반가성>(1995)과 <금지옥엽2>(1996) 때는 조감독을 겸하기도 했다. 그러다 구체적으로 1999년 크랭크인을 목표로 장편 연출 데뷔작 <투심>을 준비했었다. 하지만 상업적이지 않다는 이유로 계속 투자를 받지 못했다. 결국 시나리오와 캐스팅까지 거의 완료되어가는 상황에서 벽에 부딪히고 말았다. 배우이자 가수로서 모든 것을 이뤘던 장국영이 마지막 그 감독의 꿈을 이루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는 것은 가장 마음 아픈 일이다. 그렇다고 그가 메가폰을 잡은 적이 없는 것은 아니다. 단편영화 <연비연멸>(2000)과 매염방의 <방화절대> 뮤직비디오를 직접 연출한 일이 있다. <연비연멸>은 RTHK 방송국과 정부의 지원을 받은 금연 홍보 영화다. 영화가 시작하면서 ‘장국영 작품’(張國榮 作品)이라는 자막이 뜰 때 그가 느낀 감격은 어떠했을까. 작품 속 사진작가로 직접 출연한 그는 매염방과 어린 아들을 하나 둔 부부로 출연했다. 직접 연출한 것은 아니지만 그가 영화감독으로 출연한 영화는 따로 있다. 바로 배우 서기와 함께 출연한 이동승 감독의 <색정남녀>(1996)다. 가슴 아프게도 그는 영화 속에서 홍콩 금상장 최우수감독상을 수상하는 꿈을 꾼다. 보통 ‘영화 속 영화’는 실제 그 영화 제목과 다른 경우가 대부분이다. 장 뤽 고다르의 <경멸>(1963)에서 영화 속 영화감독인 프리츠 랑은 <오디세이>를 영화화하고 있으며, 프랑수아 트뤼포의 <아메리카의 밤>(1973)에서 영화 속 영화감독인 트뤼포가 만드는 영화의 제목은 <파멜라를 찾아서>이며, 우디 앨런의 <할리우드 엔딩>(2002)에서 영화 속 영화감독인 우디 앨런이 컴백의 기회로 작업하게 되는 영화의 제목은 <잠들지 않는 도시>다. 하지만 <색정남녀> 안에서 장국영이 만드는 영화 제목은 똑같이 <색정남녀>다. 아마도 이동승은 자신이 감독이지만 그 순간만큼은 그 영화 속 영화를 감독 장국영에게 온전히 바치기로 한 게 아닐까 싶다. 그렇게나마 우리는 ‘장국영 감독’을 만나게 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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