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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원의 도를 아십니까] 친구의 도(道)

<샬롯의 거미줄> <월레스와 그로밋> <볼트> 등으로 본 동물 친구의 도(道)

<샬롯의 거미줄>

모처럼의 외국 여행, 하얀 돌고래 벨루가를 보러 갔다. 한국에는 벨루가가 없던 시절이었다. 강한 자가 살아남는 게 아니라 살아남는 자가 강하다고 했던가. 한때 북극 지방에서 사람이나 개의 식량으로 쓰였다던 벨루가는 현대에 이르러 승리를 쟁취, 그거 있는 수족관은 어깨에 힘 좀 준다는 귀한 몸이 되었다. 얼마나 귀한가 하면… 일을 안 한다. 수족관에 사는 물고기들이 전부 하는 일 없이 놀기는 하지, 무슨 일을 하겠어. 하지만 벨루가는 물고기가 아니라 포유류, 같은 포유류인 돌고래랑 바다표범이랑 해마는 다들 뼈 빠지게 일해서 정어리 얻어먹는다고. 근데 정어리는 소금 뿌려 굽기만 해도 맛있고, 올리브유랑 고추에 절이면 더욱 맛있고, 아아, 정어리….

어쨌든 초등학생들을 무자비하게 제쳐가면서 관람석 앞줄을 차지하고 만난 벨루가, 못쓰겠어. 다른 애들은 고리 넘고 앞구르기하고 공부해서 숫자도 세는데 이 녀석은 헤엄만 치더라고. 근데 박수는 제일 많이 받아, 따라서 정어리도 제일 많이 받아먹지. 이런 동물계의 월급 도둑. 그 순간, 나는 장래 희망을 내세에 벨루가로 태어나는 걸로 수정했다(근데 나중에 롯데월드에서 벨루가가 요절하는 걸 보고 반드시 캐나다 벨루가로 태어나기로 했다).

그렇다, 왕후장상에는 씨가 없어도 동물 친구들에게는 씨가 있다. 그래 봤자 돌고래, 돌고래에 흰 칠 좀 한다고 은고래 되는 거 아니겠지만, 벨루가처럼 귀엽게 생긴 멸종 위기종으로 태어나면 평생을 건물주 아들처럼 살 수 있다(재벌 아들도 출퇴근은 하더라고, 건물주 며느리인 내 친구는 일생이 주말인데).

하지만 하늘이 허락지 않아 그냥 평범한 동물, 이를테면 돼지로 태어난다면 어찌 해야 할까. 나의 두 번째 장래 희망, 호구 잡는 진상이 되면 좋겠다. 아니면 조지 클루니 애완 돼지로 태어나던지.

영화 <샬롯의 거미줄>의 농장 돼지 윌버는 먹는 것보다 노는 게 제일 좋은, 알고 보면 희귀 돼지지만, 그건 돼지 사정, 육식 인간들이 알 바 아니다. 봄에 태어나 크리스마스면 햄이 되는 숙명을 지니고 태어난 윌버는 첫눈이 보고 싶다는 배부른 투정을 하면서 거미 샬롯을 초장부터 매우 후려댄다.

그러고 보니 꿀 발라 구운 크리스마스 햄이 그렇게 맛있다던데. 근데 나는 동물 이야기를 쓰면서 왜 자꾸 먹는 이야기로 빠지는 걸까, 그러니까 내가 돼지… 아니, 어쨌든 샬롯은 괜히 인사 한번 잘못했다가 죽는 날까지 윌버의 호구 노릇을 하면서 이 돼지가 얼마나 멋진 돼지인지 광고하는 카피라이터 노릇에 직접 그 문구를 거미줄로 짜대는 미싱공 노릇까지 겸한다. 뼈도 없는데 뼈 빠지게 일하는 투잡 거미 샬롯.

그리하여 한 돼지의 노동 착취 사회 드라마 <샬롯의 거미줄>의 결말은 진정한 호러로 거듭난다. 샬롯이 남기고 간 새끼들 중에서 오직 한 마리가 윌버네 헛간에 남는데, 크리스마스는 매년 거르지 않고 찾아오고 꿀 발라 구운 크리스마스 햄은 변함없는 진미일지니 윌버는 악어의 눈물로 위장하고 한번만 더 눈을 보고 싶다며 어린 새끼에게 거미줄을 짜내라고 족치는 악덕 노예주로 화하여….

<볼트>

인간에게도 산책을

하지만 진상은 호구가 만든다고, 샬롯 같은 호구가 먼지처럼 널린 건 아니고 아무나 윌버 같은 진상이 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럴 때는 강아지 볼트처럼 스토커 수준의 집착을 불태우라 추천하고 싶다.

애니메이션 <볼트>의 볼트는 털에 번개 무늬가 있는 강아지다. 인간이었다면 토르가 되었을 것을 개로 태어난 것이 죄라서 ‘가오’가 살지 않는 이름을 달고 강아지계의 트루먼으로 살고 있다. 대통령 트루먼 아니고 영화 <트루먼 쇼>의 트루먼, 세트장에 살면서 그곳이 진짜 세상인 줄 아는 트루먼.

이 물정 모르고 머리 나쁜 개가 똑같이 생긴 대역을 물리치고 주인을 쟁취하는 건 주인을 향한 집념 덕분이다. 불이 난 촬영 스튜디오 안에 갇힌 주인이 외치는 목소리를 듣고 구하러 가는 볼트. 아무리 개가 청력이 좋다지만 스튜디오는 방음 시설 필수 아니던가요.

그렇다고 아무 주인한테나 덥석 안겼다가는 그로밋 되는 수가 있다. 클레이메이션 <월레스와 그로밋> 시리즈의 그로밋은 아침 식탁에 앉아 영자 신문을 읽는 지적인 강아지로서 (영국 강아지니까 당연한 건가, 근데 한국 강아지였다면 밥상머리에서 뭐하는 짓이냐며 숟가락으로 두들겨 맞았을 텐데) 모자란 주인 월레스 뒤치다꺼리에 그 지성을 낭비한다. 그로밋의 모델은 한국에서 3대 지랄견이라 불리는 비글, 그 지랄의 열정을 쏟아부어도 상대가 되지 않는 지랄인이 월레스다.

<월레스와 그로밋>

마당 없는 오피스텔뿐인 우리 동네엔 불가사의한 이유로 대형견이 많다. 내가 사는 건물은 세대의 80%가 실평수 13평 이하인 건물인데도 아프간 하운드와 잉글리시 십도그 같은 대형견들이 돌아다닌다. 나머지 20% 대형 평수에 사는 아이들인가, 품었던 의문은 동네 온갖 사정을 파악하고 있는 1층 술집 아저씨와 말을 트면서 더욱 미궁으로 빠져들었다. 누가 봐도 나보다 비싸게 생긴 그 아프간 하운드는 나보다 좁은 집에서 그 술집 단골하고 행복하게 사는 개라고. 아니, 열평짜리 원룸에서 인간 하나하고 아프간 하운드 한 마리가 행복하게 살 수 있다고요? 그렇다고 합니다.

그러고 보면 내 집에서 내가 쓰는 공간도 그리 넓지는 않다. 그 좁은 데서도 오가던 길만 오간다. 그러고도 좁다고 한탄을 하는데, 씻고 나가기가 귀찮아서 집에만 처박혀 있는 내 탓을 하지는 않는다. 아프간 하운드를 산책시키는 마음으로 나에게도 산책을 시켜줘야겠다.

주사는 생물의 본능

귀엽기만 하면 되는 동물 친구들도 갈고닦으면 좋을 두세 가지 인간 기술

<샬롯의 거미줄>

표 절

<샬롯의 거미줄>의 샬롯은 신문도 보는 배운 거미이자 농장계의 카피라이터지만 신은 그녀에게 한 가지 재능을 허락지 않았으니, 창조력이다. 샬롯이 만든 카피는 전부 여기저기서 주워온 거다. 사람 보는 신문 보더니 나쁜 것만 배웠어. 쓸 만한 건 다 베껴 쓰고 나서는 평소 괄시하던 생쥐 시켜서 광고 전단 좀더 가져오라고 괴롭힌다. 윌버의 호구는 샬롯, 샬롯의 호구는 생쥐. 다음 세상에서 벨루가는 못 돼도 생쥐만은 되지 말아야겠다. 온 농장 동물이 친구라는 펀(다코타 패닝)도 생쥐는 빼고 친구한다잖아.

<부그와 엘리엇>

주 사

몸에 좋은 건강식만 먹으면서 곰돌이 인형을 끌어안고 주인이 불러주는 자장가 소리에 잠드는 나태하고도 건전한 갈색곰 부그가 둥지를 박차고 나올 수 있었던 건 (사실은 쫓겨났지만) 초코바 먹고 취해서 난동을 부린 덕분이다. 사람이든 곰이든 취하면 똑같구나, 왠지 노래 부르며 춤을 추고 싶어지고 세상이 내 것 같고 한없이 행복하지만, 다음날 아침이 되면 불행의 구렁텅이에서 깨어나지. 바나나우유 두병을 혼자 마시고 취해서 구구단 노래를 부르며 발버둥치는 (근데 구구단 모름, 오오는 십팔이래. 숫자를 골라도 하필…) 조카를 봐도 나이와 종에 상관없이 주사는 생물의 본능인가 보다.

<아기기린 자라파>

복 화 술

<아기기린 자라파>의 아기기린 자라파는 애니메이션계의 동물 친구치고는 보기 드물게 말을 하지 않는다. 아니, 하긴 하는데 입을 열지 않는다, 얘는 복화술의 달인. 프랑스 국왕한테 선물로 팔려가게 되자 자기보다 작은 꼬마 마키를 족쳐서 집에 데려다 달라며 애를 고난의 가시밭길로 끌고 가는, 뭍에 사는 주제에 물귀신. 결국 마키는 죽도록 고생하다 빈손으로 돌아가고 자라파는 잘생긴 신랑 만나 아들딸 낳고 알콩달콩 깨 볶으며 그 후로도 오랫동안 행복하게 살았답니다. 이래서 커플한테 잘해주면 안 된다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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