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찬욱 감독의 <올드보이>(2003)에서 오대수(최민식)에게 생니를 뽑히며 음흉한 미소를 짓던 감금방의 괴남자. 기존에 보아온 악당이란 말로 단언하기에는 생소하고 기괴했던 이미지의 남자. 어디서 이런 독특한 배우가 나왔나 궁금해할 겨를도 없이, 김지운 감독의 <달콤한 인생>(2005)에서 러시아어를 구사하는 무기 밀매상으로 코믹과 악역의 줄타기를 하던 이 ‘괴물 같은’ 배우는 급기야 봉준호 감독의 기념비적인 작품 <괴물>(2006)에서 ‘괴물’ 목소리 연기로 관객의 뒤통수를 쳤다. 2000년대 초•중반, 한국영화의 기념비적 작품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상적인 연기자로 자리매김한 이후, 오달수의 필모그래피에는 한국영화의 성공사가 함께 쓰여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출연작마다 천만 관객을 동원하는 ‘괴물 같은’ 행보로 주목받고 있는 지금, 20년차 무명배우 장성필의 고군분투를 그린 <대배우>는 배우 오달수의 지난 행적을 곱씹게 만들어주는 의미 있는 영화다.
-<7번방의 선물>(2012), <도둑들>(2012), <변호인>(2013), <암살>(2014), <국제시장>(2014), <베테랑>(2015)까지 출연 작품 상당수가 천만 관객을 동원하며 작품의 업적이 매번 수치로 환산된다. 그런 기대감이 더해져 주연 타이틀에 대한 압박이 클 것 같다.
=괜히 포스터에 로버트 드니로를 들먹이면서 사람을 민망하게 해서. (웃음) (<대배우> 포스터는 오달수의 클로즈업컷으로, 로버트 드니로와 연결시킨 이미지다.) 독자 여러분이 질릴까봐 이 말씀을 드리는 게 불안불안한데, 내가 한 90% 정도 출연한다. 얼마나 지겨우실까, 그렇게 내 얼굴을 많이 보시면. 걱정이 크다.
-석민우 감독과 이 작품을 하기로 한 건 꽤 오래 전 일이다. 처음엔 제목이 ‘연기의 제왕’이었다고.
=<박쥐>(2009) 촬영 때쯤으로 기억하는데, 그때 (조감독이었던) 석민우 감독이 지나가는 말로 “형님, 시나리오 나오면 꼭 한번 출연해주세요”라고 하기에, “그래 그래. 좋지 좋지. 열심히 쓰세요” 했다. 한두번 지나가는 말로 이야기하다가 결국 이렇게 출연까지 한 거다.
-워낙 거절을 잘 못하는 스타일로 알려져 있다. <씨네21>도 덕분에 디지털 매거진 창간 때 박찬욱, 박찬경 감독이 연출한 뮤직비디오 <오달슬로우>로 출연 빚을 진 기억이 있다.
=뭘, 랩도 하고. 재밌었다. 그런데 내가 원래 좀 정에 약한 편이다. 그래서 제작자들 보면, 내게 시나리오를 직접 주고 싶어 한다. ‘오달수 캐스팅은 술 한잔 먹이면 된다’ 그런 말을 한다더라. (웃음) 그렇게 마련된 자리에서 감독이 영화 설명해주면 혹해가지고…. 그래서 나중에 작품 겹치고 스케줄이 꼬이면 피곤해지는 거다. 그럴 때면 ‘아이고야, 이세돌이 질 때처럼 내가 악수(惡手)를 뒀구나. 판을 잘 읽어야 하는데 그게 안 되는구나’ 하는 거다.
-<대배우>도 박찬욱 감독의 조감독 출신으로 <올드보이>, <친절한 금자씨>(2005), <박쥐>를 작업하며 인연을 맺어온 석민우 감독의 입봉작이란 점에서는 그런 혐의를 지울 수 없다.
=석민우 감독이 굳이 나를 따라다니며 해달라고 하지는 않았고. (웃음) 이제 입봉할 때도 됐고 하니까 진심을 다해 도와주고 싶었다. 아니 돕는다는 표현은 건방지고, 최선을 다해서 같이 하고 싶었다. 박찬욱 감독님의 영화에 내가 많이 나오면서 본 세월도 길고,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2008) 때도 같이 했고. 조감독이다 보니 옆에서 보면서 배우의 좋은 점, 나쁜 점, 더러운 점들까지 속속들이 다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깐느 박, 설강식 같은 영화 속 캐릭터의 모델이 박찬욱 감독, 설경구, 송강호, 최민식이었다. 영화에서 <박쥐>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의 제작 현장도 재연되고. 실제 인물들의 반응도 궁금하다.
=내가 박찬욱 감독님을 워낙 많이 봐서 그런데, 깐느 박 연기를 한 이경영 형님을 어느 각도에서 보면 ‘오! 감독님’ 소리가 절로 나온다. 체형도 비슷하고 얼굴도 비슷하고. (웃음) 이건 그냥 하는 얘기인데 만약 캐릭터로 ‘송강호’가 있다면 제일 잘할 수 있는 배우가 김윤석 아니면 나일 것 같다. 아니다, 비주얼은 나보다 김윤석이 나을 것 같네. 내가 감히 송강호 이야기를 하다니! (웃음) 하여간, 박 감독님이 대학로 현장에 오셨는데, 그땐 마침 우리가 밤 촬영을 할 때라 술을 못해 아쉽다. 강호 형님은 원래 자기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는 사람이다. 현장에 자주 오긴 했는데 ‘어이, 대배우’ 이러는 게 다다. 두분 다 나만큼 석민우 감독과 오랜 인연이 있었고, 응원을 해주셔서 힘이 많이 됐다.
-박찬욱 감독이 인터뷰 때(<씨네21> 1036호 스페셜-5인의 감독, 결산과 새해의 기대), “<아가씨> 촬영을 끝내고 편집실에서 편집을 하는데 뭔가 허전해 곰곰이 생각해보니, 내 영화에 오달수가 없다는 걸 깨달았다”며 오달수라는 배우의 중요성을 언급하기도 했다. 그렇게 박찬욱 감독의 현장에서 공기 같은 역할을 해왔다.
=글쎄, 그런 이야기를 나도 들었다. <아가씨> 때 많이 외로우셨다고. 아무래도 함께 술을 마실 사람이 없으니 힘드셨을 거다. 그래도 이제 다른 배우들과 많이 하셔야지. (웃음)
-20년간 무명배우로 연극 무대에서 활동하고 영화 오디션을 보려고 애를 쓰는 장성필을 보고 있으면, 연극배우 출신인 본인의 실제 경험담이 상당 부분 반영됐지 싶다. 얼마나 관여한 건가.
=나도 시나리오 보고 깜짝 놀랐다. 감독님이 연극을 해보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이렇게 자세히 알까 싶더라. 연극을 하다가 충무로로 넘어간 배우들이 많으니 옆에서 귀동냥을 하지 않았을까.
-장르영화의 극화된 캐릭터로 익숙한데, <대배우>에서는 좀 다르다. 덕분에 관객에게 장성필이 곧 오달수로 받아들여질 여지가 많다. 캐릭터 설정이나 연기 톤을 잡는 것도 전작들과는 달랐을 것 같다.
=딱히 뭘 만들 필요가 없더구먼. (웃음) 그냥 하면 되더라. 영화에 아동극을 하는 극단 별무리에서 <플란다스의 개>의 개 ‘파트라슈’로 출연하는데, 관객이 두명 밖에 없는데도 공연을 한다. 그러다 관객이 나가버리니까 다 같이 술이나 마시러 가자고 하고. 진짜 대책이 필요한 사람들인데, 그런 모습들이 예전에 내가 연극할 때 살아온 것과 많이 닮아 있었다. (웃음)
-영화를 처음 시작했을 때 생각이 많이 났을 것 같다. 첫 영화 출연작은 <해적, 디스코왕 되다>(2002)였고 곧장 <여섯개의 시선>(2003) 중 박찬욱 감독이 연출한 <믿거나 말거나 찬드라의 경우>에 파출소장으로 출연하며 그와의 인연이 시작됐다.
=지금도 기억나는데 박찬욱 감독님이 <친절한 금자씨> 때 라미란이라는 배우를 캐스팅하시면서, 무시무시한 배우가 나올 거라고 예언하셨다. 딱 맞은 거지.
-오달수라는 배우에 대해서는 어떤 예언이나 언질이 있었나.
=그냥 “스케줄 어떻게 되냐”고 물으시더라. (웃음)
-라미란씨를 향한 호평에 비하면 너무 평범한 것 아닌가.
=그런데 그게 나한테는 엄청난 거였다. <올드보이> 시나리오 쓰실 때 감독님이 전화를 하셨는데, 오달수씨 맞냐, 4월부터 7월까지 스케줄 어떻게 되냐고 물으시더라. 연극배우한테 스케줄을 물어봐주는 게 고맙더라. 연극하면서 우리는 그런 거 안 묻는다. 다들 잠정적인 백수이기 때문에. 스케줄? 스케줄이 뭐지? 처음 들어보는 최고의 제안이었다고나 할까. (웃음)
-<올드보이>의 기괴한 감금방 간수. 그 강렬한 캐릭터가 오달수를 이후 한국영화계에서 빼놓을 수 없는 배우로 각인시켰다.
=그땐 연극에 매진하고 있을 때였고, 칸국제영화제 수상 때도 순수하게, 잘됐다며 축하해주는 마음이 컸다. 그런데 조연으로 출연한 첫 번째 영화가 너무 강한 작품이다 보니 어마어마하게 운이 좋았던 거다. 영화계 사람들이 저 배우는 누굴까 모두 궁금해했던 거지.
-그렇게 <올드보이>에서 쐐기를 박은 것을 시작으로, <친절한 금자씨> <달콤한 인생> <괴물> 등을 통해 한국영화의 새로운 물결을 일군 박찬욱, 김지운, 봉준호 감독 등과 연달아 작업했다.
=영화 오디션을 본 적이 한번도 없다. 알음알음으로 박찬욱 감독 같은 거장하고 작품을 한 거다. (웃음) 박찬욱 감독님에게는 너무나 감사하다. 회식 자리에서 다른 감독님들 오시면 일일이 다 인사를 시켜주셨다. 송강호 형님, 최민식 형님도 그렇게 알게 됐다. 민식이 형님은 <올드보이> 끝나고 “너 회사 있니?” 하더니 회사에 데려가주셨다. 스케줄에 이어서 회사라는 말도 처음 들어보는 소리였다. (웃음) 돌아보면 이래저래 감사한 분들이 너무 많다.
-박찬욱, 김지운, 봉준호, 류승완 등 함께 작업한 감독마다 스타일도 달랐을 것 같은데,
=중요한 건 그중 단 한명도 타협하는 사람들이 없다는 것이었다. 배우와 타협한다든지, 자기가 생각하는 이미지는 이건데, 한계가 여기까지니 대충 넘어가자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그런 현장에서 같이 일하면서 많이 배울 수 있었다.
-뜻하지 않게 연극 무대에서 벗어나 영화 활동을 하면서 배우로서 목표 지점도 새로 설정했을 것 같다. 연극과 영화 사이에서 정체성의 혼란이 오지는 않았나.
=지금은 자연스럽게 경계가 허물어졌지만, 내가 연극할 당시만 해도 연극은 연극배우, 영화는 영화배우, 그런 생각이 확고했다. 영화에 출연하면서도 ‘내가 영화배우가 되겠어? 잠깐 하는 거지’ 싶었다. 그러니 딱히 정체성의 혼란을 겪지는 않았다. 그런데 막상 영화를 찍어보니 너무 재밌더라. 작품을 만드는 메커니즘도 그렇고, 영화의 기술들을 하나하나 익혀가는 것도 그렇고. 그런 재미 때문에 ‘내가 연극배우지’, 이런 자각은 깜빡 잊고 있었다. 내가 좀 단순하다.
-그땐 연극계에서도 촉망받는 배우로 자리를 잡아갈 때가 아니었나.
=촉망까지는 아니고(웃음), 귀여움을 받는다고나 할까. 부산의 연희단거리패에서만 쭉 연극을 하다가 연극 <남자충동>을 하려고 올라온 게 1997년이었다. 작품성도 좋고 반응도 좋은 작품이었다. 그 뒤로 좋은 연극도 많이 하고 너무너무 행복했다. 영화하면서도 연극은 계속 병행해왔는데, 지금 1년 반 정도를 못하고 있다. 그전에는 회차에 여유가 있어서 공연하면서도 영화를 찍을 수 있었으나 이젠 하려면 두달 정도 스케줄을 완전히 비워야 하는데, 영화 스케줄은 또 그게 안되더라. 최근 들어 어렵게 고사하는 경우가 많았다.
-대학 때 아르바이트로 소극장(가마골 소극장)에 팸플릿 배달을 하다가, 무대의 매력에 빠져 배우가 되기로 했다는 건 잘 알려진 입문 에피소드다. 초등학교 선생님이셨던 아버지가 ‘미친놈’ 취급했다고 하던데. 어릴 때부터 연기에 재능을 보였나.
=아르바이트할 때 연희단거리패에서 시인이자 연극평론을 하던 분과 알게 됐는데, 배달 가면 그분이 “너 연극 한번 해봐라” 하셨다. 한 4~5년 뒤에 연극을 할 때 그분과 다시 만났는데, 그때 묻더라. 아직 연극 안 하냐고. 그냥 한번 툭 던진 말인데, 내가 진짜로 하니 무척 놀라시더라. (웃음) 사실 배우의 재능이나 끼 같은 건 어릴 때 전혀 없었다. 누나 둘에 위로 형님이 한 분 계시는데, 형님은 워낙 나이 차가 많이 나서 나를 애 취급했고 누나들 사이에서 기도 죽어 지냈다. (웃음) 숫기가 워낙 없는 편인데 그래서, 첫 무대를 잊을 수가 없다. 연극 <오구>에서 문상객을 하는데, 사시나무 떨듯 덜덜덜 떨고 있었다. 우리 형님이 와서 보시고는 “넌 무대에서 왜 그렇게 얼굴이 빨개지고 안돼 보이냐, 명색이 배우가” 하시더라. 한달 동안 공연을 하는데, 시작을 했으니 도망갈 수는 없고, ‘내가 이거 끝나고 두번 다시 연극을 하면 인간이 아니다’ 생각했다. 그런 거 보면 요즘에는 참 뻔뻔해졌다. 못해도, 아이 몰라 그러고. 마음에 안 들어도, 다음엔 더 잘할 수 있겠지, 이러고 있다.
-<효자동 이발사>(2004) 촬영현장에서 처음 만났을 때, 강한 인상과 달리 너무 조용하고 숫기도 없는 걸 보고 의외였던 기억이 난다. 그렇게 이미지와 성격이 주는 차이가 연기에는 어떻게 적용되나.
=자유분방한 성격을 가진 배우들이 지닌 장점이 물론 있다. 그런데 나처럼 조용하고 약간 섬세하달까, 여성스럽기도 하고 그런 게 배우한테는 도움이 많이 된다. 평소에는 그렇지만 사람 죽이는 역할도 할 수 있다. 가짜니까, 연기니까 가능해지는 거다.
-요즘은 그런 말도 통하지 않는 게, 어느 순간부터 필모그래피에 착한 역할이 압도적으로 많아지고 있다. <7번방의 선물>에서 용구(류승룡)를 돕는 따뜻한 조폭, <변호인>에서 송우석(송강호)을 보좌하는 사무장, <조선 명탐정> 시리즈에서는 명탐정(김명민)의 파트너 서필, <암살>에서는 하와이피스톨(하정우)의 조력자인 영감, <국제시장>에서 덕수(황정민)의 오랜 친구 등으로 활약했다. 착한 소시민, 좋은 파트너 역할로 친근하게 어필하면서 기존의 강한 이미지에서 벗어나고 있다고 할까. ‘천만요정’이라는 수식어와 맞물리는 행보다.
=그러니까. 그게 좀 문제다. 딜레마인데. 평소 친하게 지내던 조민호 감독이 “달수야 다 좋다. 다 좋은데 너 요즘에 너무 달달한 역할만 하는 거 아니냐”고 하더라. 그 말이 비수처럼 가슴에 꽂혔다. 아 그렇구나, 내가 지금. 사람이 좋아서 그렇다는 말들도 많이 하시는데, 그렇게 말씀하시는 이유도 알겠고. 그런데 달달한 역할만 들어오는 걸 어떡하나 싶기도 하고.
-2000년대 중반 이후, 한국영화 주연과 조연의 경계 위에서 배우 풀이 넓어지는 데 일조한 대표적인 배우다. ‘감초연기’ , ‘신 스틸러’, ‘명품조연’, ‘멀티캐스팅’이라는 수식 아래 다양한 배우들이 주목받기 시작했는데, 주목도가 높아진 긍정적 의미도 있는 반면, 배우의 역할을 산업적인 측면에서 평가하려는 의도도 다분하다.
=독특하고 개성 있는 배우들에게 관객이 시선을 더 많이 주는 것만큼은 확실하다. 그런데 요정이라는 별명이 좋게 생각하면 웃자고 하는 소리인 것 같기도 하고, 조금 부정적으로 생각하면 명품조연, 천만요정, 이런 말들은 상업적인 시선이 짙게 깔려 있는 규정들이기도 하다. ‘그는 단 한번도 웃기게 연기한 적이 없다’는 <대배우>의 카피도 그런데, 난 단 한번도 내 입으로 명품조연이다, 요정이다 이런 말을 한 적이 없다. 상업적으로 그런 말들이 필요에 의해서 생긴 것이고, 쉽게 말하면 관객이 들어야 하니까 그런 말을 쓸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된 측면이 크다.
-1990년, 연희단거리패에 들어와 연기 생활을 시작한 이래 25년 이상 연기를 했고 다작 배우로 통한다. 그럼에도 ‘한번도 소모된 적 없는 배우’(<씨네21> 991호 커버스토리)라는 소리가 나올 수 있는 비결이 궁금했다. 최동훈 감독은 “오달수 선배는 누구도 이기려고 하지 않는다. 그래서 좋다”고 하더라. 그런 자세가 매 작품에서 악역도 악역에만 머물지 않고, 코믹도 그저 웃음으로만 그치지 않는 조화로운 연기를 만들어낸 게 아닐까.
=한때는 관객을 코뿔소의 뿔처럼 생각한 적이 있다. 내가 그 뿔을 잡고 대치를 하고 있다, 절대 밀리면 안 된다, 이런 생각을 했다. 부산에서 연극한다고 짐 싸서 무작정 서울에 왔으니 여기서 밀리면 끝이다, 라고 생각한 거다. 지금은 바뀌었다. 어느 순간 그런 욕심을 놓게 되더라. 10년, 20년 한 분야의 전문가가 되면 놓을 건 놓고 쥘 건 쥐게 되는 것 같다. 최동훈 감독도 그런 내 모습을 보고 말씀하지 않았겠나. 못하면 물어보면 된다. 그래서 감독이 있고, 스탭이 있고, 내 옆에 매니저가 있는 거다. 이제 겨우 20여년 한 거지만 인생의 절반 동안 이 ‘짓’을 하면서 살았으니, 혼자 막 빠져서 미친 듯이 나가는 게 아니라 다른 사람의 의견에도 귀를 기울이게 되는 것 같다.
-혹시 그 길에서 같은 배우로서 재능이 탐난다거나 혹은 닮고 싶은 배우가 있었나.
=그 인생을 닮고 싶지는 않지만 미키 루크가 존경스럽다. 한때 최고의 자리까지 갔다가 성형 부작용, 약물중독 등으로 고전을 면치 못했지만 결국 잘못된 과거를 딛고 지금 잘하고 있지 않나. 놀랍게도 좌절 끝에 더 좋은 배우가 되어서 돌아왔다. <씬 시티>(2005)에서의 도전이나 <더 레슬러>(2008) 같은 작품들을 보면 너무나도 멋있더라.
-이후 계획도 궁금하다.
=<국가대표2>(감독 김종현)와 <터널>(감독 김성훈)은 촬영이 끝났다. <국가대표2>에서는 대한민국 아이스하키 여자 국가대표 선수들의 감독으로 나온다. <국가대표2>에서는 선수들 뒤에 항상 걸린다. 경기할 때 격한 액션은 대역들이 많이 하는데, 그럴 때도 나는 벤치에 다 걸리니까. 대사 한마디 없이 갔다가 박수 한번 치고 온 적도 많다. (웃음) <터널>에서는 터널에 갇힌 이정수(하정우)를 구하기 위해 사력을 다하는 구조대장 역으로 나온다. <마스터>(감독 조의석)는 4월 말부터 촬영에 들어갈 것 같은데, 검사 출신의 엘리트 변호사 역할로 나온다. 강동원, 이병헌, 김우빈, 진경씨 등과 같이 나오는데, 기대가 큰 작품이다.
-이제 또 새로운 모습을 보여주지 않을까.
=인간이 변하면 죽음이 다가왔을 때라고 하더라. 크게 변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30년, 40년 연기하다보면 어느 순간 이런저런 것들을 깨닫고 많은 것들을 쌓아 나가면서 달라져 있을 것 같다.
오달수의 매력점
오달수의 매력을 극대화하는 큰 얼굴과 어색한 사투리(어색한 표준어가 아니라, 사투리가 어색한데 지금은 그 모든 것이 ‘귀여움’으로 승화되었다)에 대한 본인의 견해는 어떨까. “콤플렉스 같은 건 전혀! 전혀 없다. 그러면 한순간도 못살지.” 금세 확신에 찬 답변이 되돌아온다. “남들은 그런 소리를 할지라도 나는 스스로를 도닥거려야 한다. 내가 ‘내’를 도닥거려야지. 내도 내를 싫어하면 누가 나를 알아봐주나”라는 게 그의 지론. “고등학생 때 얼굴하고 지금하고 똑같다. 최근에 동창들을 만나보니 많이 변했던데, 나는 학교 때부터 이 얼굴 그대로였다.” 고등학생 때 아버지의 양복을 입고, 구두 신고 부산 남포동 뒤 광복동가서, 잔으로 한잔에 50원, 100원 하는 소주를 사먹었는데 아무도 의심하지 않았다고. “그때 초량동에 있는 피아노 치는 화교 소녀를 좋아했는데, 나를 그렇게 싫어하더라. 차 한잔 마시자고 해도 싫다 하고. 너무 늙어 보인다 이거지. (웃음)” 부산 출신의 지역색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고치다만 사투리도 배우로서는 교정의 대상이 아니었을까. “처음 서울 와서는 나도 사투리를 고치려고 연습을 했다. 그런데 하다가 말았다. 중요한 건 감정이고, 말이 다가 아니라는 자기 합리화를 한 거다.” 덕분에 고생도 많았다. “연극 연출가들 중에 말을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하는 분들이 많다. 짐 싸가지고 부산 내려가라더라. 사투리 때문에 넌 절대 안 된다고.” 그때 그의 사투리를 ‘살려준’ 건 오달수와 의형제를 맺을 정도로 친한 동료이자 극작가 겸 연극 연출가 이해제였다. “아예 부산 사투리로 된 대본을 써가지고 와서 ‘형 이거 해라. 너무 기죽지 말고’ 그러더라. 그게 1999년에 올린 <흉가에 볕들어라>였는데, 당시 최고의 작품으로 평가받았다. 이후 영화 일을 하면서는 다행히 사투리로 지적하는 감독들이 아무도 없었다. 정말 다행히.” 이래저래 힘이 돼준 사람들 덕분에 지금까지 왔다는 오달수. “그때 그냥 짐 싸들고 집에 갔으면 아무것도 안 됐겠지. 정말 그랬다면 지금 내가 뭘 하고 있으려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