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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영화 BEST 11+α

서울독립영화제에서 놓치면 안 될 영화를 <씨네21>이 먼저 보고 골랐습니다

<오늘영화> 감독 윤성호, 강경태, 구교환•이옥섭 / 극영화 / 컬러 / 87분 / 개막작

개막작 <오늘영화>는 서독제의 ‘인디트라이앵글 프로젝트’의 네 번째 프로젝트이며 옴니버스영화다. ‘나의 영화, 나의 영화제’라는 주제하에 묶인 세편의 영화는 윤성호 감독의 <백역사>와 강경태 감독의 <뇌물>, 구교환•이옥섭 감독의 <연애다큐>이다. 나이트클럽에서 우연히 만난 여자와 연애를 시작하는 남자의 첫 극장 데이트를 그린 <백역사>는 (‘흑역사’가 아닌) ‘백역사’라는 제목의 재기 그대로 낯선 남녀가 연인으로 발전하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해준 적당히 어둡고, 적당히 사람 없어준 극장에 바치는 오마주처럼 보인다. <백역사>가 영화를 상영하는 극장에 주목했다면 <뇌물>은 영화를 만드는 과정에 주목한다. 졸업작품을 준비 중인 연출과 학생 대일은 여자친구이자 배우인 소은과 함께 영화를 찍었지만, 그의 편집본을 본 주변 사람들은 모두 불만을 털어놓기 바쁘다. 영화와 현실, 그리고 다시 그 현실이 영화가 되는 과정이 중첩되면서 영화가 담는 현실이 과연 무엇인지에 대해서 생각해보게 만든다. 감독 자신들의 연애사를 담은 <연애다큐>는 오래된 연인의 나른한 ‘동지애’를 사실적으로 담은 셀프다큐의 성격이 강하지만, 이들이 경험하는 사건들을 드라마틱하게 재구성해내는 극영화의 연출감도 꽤 주목할 만하다.

<표정들> 감독 양시모 / 극영화 / 컬러 / 66분 / 새로운 선택

부모의 이혼 후 힘들게 일하는 엄마와 함께 사는 남기는 자전거 가게에서 일하며 연극배우의 꿈을 키워간다. 수줍지만 성실한 그에겐 학습지 교사를 하는 여자친구 재경이 있다. 연극배우를 소개받으며 자신의 꿈에 한 걸음 다가가는가 싶던 남기에게 어느 날 재경은 자신의 임신 사실을 알리고, 그가 원하지 않더라도 아이를 낳아 키울 것이라고 선언한다.

연애하는 커플에게 의도치 않게 찾아온 임신이라는 ‘드라마틱’한 사건은 대부분 극적 상황을 극대화하기 위해서 여자의 시선으로 그려지는 경우가 많은데, <표정들>은 남자, 남기를 시선의 중심에 놓고 이 ‘사건’을 바라본다. 양시모 감독은 감당하기 힘든 복잡한 심정일 남기의 심리를 파헤치기 위해 무리하게 그에게 카메라를 들이대지 않는다. 남기의 성격처럼 묵묵히 그의 뒤를 쫓아다니며 그가 만나는 사람들을 담는다. 생활고에 시달리는 엄마와 이혼 후 재가한 아빠의 새로운 가족들, 친구들, 가게 사장, 그리고 재경을 만나는 반복적인 과정 속에서 남기의 심리 상태는 이들의 대사와 표정을 통해서 재구성된다. ‘꿈과 현실’이라는 누구나 ‘울컥’할 만한 주제를, 감정적 동요 없이 담담하게 담아내려는 감독의 시도가 눈에 띈다.

<똘> 감독 이은영 / 애니메이션 / 컬러 / 60분 / 장편경쟁

로미는 소설가가 꿈이지만 당장의 생계를 위해 모델 사진들을 보정작업하는 아르바이트를 하며 불만 가득한 하루하루를 보낸다. 오래 만나온 연인이 이별을 고하면서 자신의 어두웠던 과거와 잊고 싶은 우울한 가족사가 하나둘 로미를 덮치기 시작한다. 로미 안에서 얼룩을 만들어내는 괴물이 탄생하고, 로미는 현실과 환상을 오가며 괴물과 대면한다.

모델들의 ‘흉터’를 보정작업으로 말끔하게 지울 수 있는 능력을 가진 로미이지만 정작 자신의 지우고 싶은 괴로운 기억들은 지우지 못한다는 아이러니한 설정이 <똘>의 출발점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상처’를, 얼룩을 가진 ‘괴물’로 형상화해서 표현해낸 것은 <똘>이 애니메이션이기 때문에 가능했다. 자살 성향을 가진 아버지와 그런 아버지 때문에 우울증에 시달리는 어머니는 로미의 잊고 싶은 과거이자, 여전히 떨쳐내지 못해 현재를 괴롭히는 ‘괴물’ 같은 존재이다. 이때 <똘>은 꺼내 대면하지 않으면 절대 사라지지 않을 이 ‘괴물’을 로미의 환상 속에 끊임없이 출몰시켜 ‘견딜 만한 것’으로 만들어낸다. 밝고 다채로운 색의 화면과 무게감을 덜어낸 대사들에서 “무거운 주제를 가볍게 풀어보고 싶었다”는 감독의 노력이 고스란히 느껴진다.

<서둘러 천천히> 감독 현영애 / 다큐멘터리 / 컬러 / 101분 / 특별초청

각자 바리스타로, 목수로, 그리고 문화활동가로 활동하면서 ‘아나킨 프로젝트’라는 밴드를 결성해 활동하고 있는 조윤석, 마승길, 홍샤인은 어느 날, 다큐 감독으로부터 덴마크 코펜하겐에 있는 작은 도시 크리스티아니아에 함께 가자는 제안을 받는다. 일종의 ‘히피 공동체’인 이 마을은 개인이 아닌 공동체를 중심으로 함께 일하고, 함께 즐기는 삶을 추구한다. 세명의 멤버들은 그곳에서 노래하고 축제를 즐기며 그들의 삶을 보고 듣는다. 크리스티아니아에 사는 이들의 삶의 태도를 한마디로 정의하자면 ‘천천히’다. 음악과 생업을 병행해야 하는 인디밴드 멤버들에게 아마 이곳은 천국이었을 것이다. 감독은 세 멤버들의 한국에서의 일상과 크리스티아니아 사람들의 삶을 병치해놓은 다음, 이들이 그곳에서 보고 듣고 경험하는 과정을 따라간다. 그리고 그들이 한국으로 돌아와 전남 영광군의 한 작은 마을을 변화시켜보려는 노력의 시작을 지켜본다. 말하자면 <서둘러 천천히>는 ‘천천히’의 의미를 깨닫고, ‘서둘러’ 변화의 작은 발걸음을 내딛기 시작한 세 멤버들의 일기장 같은 다큐멘터리다.

<명령불복종교사> 감독 서동일 / 다큐 / 컬러 / 101분 / 장편경쟁

2008년 10월 전국 초등 6학년, 중등 3학년, 고등 1학년 학생들을 대상으로 국가수준학업성취도 평가가 실시됐다. 일명 ‘일제고사’라고 불리는 이 시험의 교육적 악영향을 걱정한 몇몇 교사들은 시험 직전 학부모들에게 시험 대신 체험학습을 선택할 수 있다는 내용을 담은 ‘담임 편지’를 보냈고, 이를 근거로 일부 학생들과 학부모는 시험에 응하지 않게 된다. 이에 교육부와 서울시교육청은 이들 전교조 소속 7명의 교사들을 해임, 파면한다. <명령불복종교사>는 일제고사를 둘러싸고 극명히 드러난 공교육의 문제점과 이를 지켜내려는 일부 교사와 학부모, 학생들의 투쟁 과정을 담은 다큐멘터리다. 사실 공교육으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은 없다.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공교육을 받는 학생이거나, 그런 학생을 둔 부모이거나, 그곳을 직장으로 두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 시험점수가 인생의 성공을 결정짓는 가장 중요한 열쇠가 되어버린 경쟁적 사회구조까지 덧붙으니 교육 문제에 언성을 높이는 사람들의 수는 자꾸만 늘어난다. <명령불복종교사>에서 ‘일제고사 반대 교사들의 해임’이라는 사건은 권위적인 정부와 교육의 참뜻을 실천하려는 교사들의 골 깊은 대립을 보여주는 하나의 단면일 뿐이다. 해임교사 복직을 외치는 사람들의 목소리는 그러니 공교육의 개혁에 대한 목소리에 다름 아니다.

<결혼전야> 감독 이란희 / 극영화 / 컬러 / 18분 / 특별초청

결혼식 전날 밤, 딸은 짐을 정리하느라 바쁘고, 엄마는 그런 딸에게 뭐라도 하나 더 싸주기 위해 집안을 뒤지느라 정신이 없다. 가난한 살림에 연극하는 남자를 만나 시집가는 딸이 안쓰럽지만 엄마는 딸이 집을 떠난다는 사실의 울적함을 퉁명스러움으로 감춘다. 하지만 딸은 이런 엄마의 마음을 모르는 것만 같다. 좁은 집 안, 단 두명의 등장인물, 18분의 짧은 시간이라는 세개의 제약 조건하에서 이란희 감독은 결혼을 앞둔 딸과 혼자 남게 될 엄마의 심리를 예민하게 담아낸다. 결혼에 얽힌 전후 사연과 이들의 가족사를 무리하지 않는 범위에서 엄마와 딸의 치고받는 익숙한 대사들로 녹여낸 것도 영화의 재미를 더한다. 누구나 한번쯤 경험해보았을 엄마의 ‘걱정 반 애정 반’의 독설에 가까운 잔소리들도, 따뜻한 대답 대신 “아, 됐어!”를 연신 외치는 딸의 투덜거림도, 딸 가진 여느 집의 풍경을 그대로 뚝 잘라놓은 듯 자연스럽다. 이 짧은 시간만이라도 딸과 엄마의 온전한 시간을 선물하려는 듯 영화는 이들을 하나의 숏 안에 담으려 애쓴다. 여기에 퉁명스러운 대사들 뒤로, 핸드헬드 카메라로 가까이 다가가 담아낸 모녀의 작은 행동과 시선은 집을 떠나 새로운 삶을 시작할 딸의 설렘과 두려움을, 딸을 보내야 하는 엄마의 아쉬움과 쓸쓸함을 잘 포착해낸다.

<그림자들의 섬> 감독 김정근 / 다큐 / 컬러&흑백 / 120분 / 장편경쟁

<그림자들의 섬>은 부산 영도에서 살아온 그림자들의 연대기다. 2011년 김진숙 위원은 정리해고 철회를 외치며 크레인에 올라간다. 한진중공업 사태는 하나의 단편적 이미지로만 남아 있지만 대개의 사람들은 그 전후 사정에 대해 무심하다. 영화는 1980년대부터 현재까지의 기억을 회고하는 한진 노조원들의 인터뷰를 중심으로 진행된다. 작업복을 입은 인물들은 부산의 한 사진관 카메라 앞에서 입사 후 지금까지의 삶을 술회한다. 취직의 기쁨, 동료들과의 유쾌했던 현장들. 그뿐만이 아니다. 작업환경의 열악함, 회사의 노조 탄압, 민주노조를 열망하며 대동단결했던 87년의 기억, 2000년대 들어서 기업의 영특한 노조 친화정책 속에서 점차 단결력이 무너지고 노노 갈등이 생겨나던 일등도 기억된다. 영화는 인물의 사적 경험에 밀착해 역사를 환기시키나 그 과거를 박제화하지는 않는다. 다큐멘터리 감독 김정근에게 한진중공업은 오랜 관심사다. <버스를 타라>(2012)에서 희망버스와 SNS를 통한 자율적 운동조직의 가능성을 보았던 감독은 이번 영화에서는 화석화된 기억이 아니라 여전히 현재적인 노동현장의 문제를 끄집어낸다. 한때 희망버스가 움직이자 미디어가 관심을 기울였고 고공 트레인에서 투사는 내려왔다. 그 후로 많은 것이 바뀌었을까. 여전히 한진중공업 노조원들은 끝모를 투쟁의 현장에 있다.

<4학년 보경이> 감독 이옥섭 / 극영화 / 컬러 / 28분 / 단편경쟁

미술전공 대학 4학년 보경이(김꽃비)는 4년간 만난 썰렁하고 맘 착한 남자친구 덕우(구교환)가 조금 지겹고 하찮게 느껴진다. ‘들어와주세요’라는 제목의 같은 과 선배의 그림은 마치 하나의 암시처럼 점점 보경을 선배에게 빠져들게 한다. 오랜 일상을 함께한 남자친구와의 이별을 결심한 보경이에게 뜻밖의 사태가 벌어지고, 그렇게 영화는 보경이 새롭고 설레는 욕망을 찾아가는 모험을 따라간다. 한결같이 부드러운 감정 속에 살고 있어도 문득 자극적인 설렘에 당긴다. 영화에서 이러한 설정은 늘 먹던 포카리스웨트가 지겨워지고 환타의 톡 쏘는 맛에 순간 매료되는 것으로 표현된다. 늘 의지가 되고 너무 잘 알기에 성적 취향까지 속속들이 익숙한 오랜 연인도 지겨워지는 순간이 있다. 권태, 설렘, 은밀한 만남 등을 이 작품은 코믹만화나 CF처럼 경쾌하게 포착해낸다. 하지만 보경이 경험하는 욕망의 모험에는 몇 가지 마법적 암시들이 있다. 영화는 이러한 암시들을 배치해 감정의 실마리를 만들어가며 연애의 공감할 만한 단면을 드러낸다. 발랄한 연애영화 <4학년 보경이>는 2014년 미쟝센단편영화제 온라인관객상과 아시아나국제단편영화제 국내경쟁 심사위원 특별상을 받았다. 감독 이옥섭은 주연배우인 구교환과 함께 서울독립영화제 개막작 <오늘영화>의 에피소드 <연애다큐>의 연출을 맡기도 했다.

<몽테뉴와 함께 춤을> 감독 이은지 / 다큐 / 컬러 / 102분 / 새로운 선택

반백수인 영화과 졸업생 은지(이은지)는 은퇴 후 몽테뉴의 <수상록>을 번역하고 있는 불문학자인 엄마(심민화)와 함께 프랑스로 두달간의 여행길에 오른다. 초반에는 소설가 아빠(이인성)도 동행한다. 별일 없이 지리멸렬한 일상을 살던 30대 딸이 부모의 문화자본 덕택에 유럽의 예술과 철학을 접하고 여러 예술인들을 만난다. 그런데 영화가 점차 진행될수록 정서적 사치처럼 보이던 여정 속에 서서히 삶과 예술, 생산과 창작에 대한 경구들이 반짝이며 지나간다. 결국 영화는 한 젊은 영화인의 넋두리를 넘어서 다른 곳으로 향해간다. 과거든 현대든 젊든 나이가 들었든 우리는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거대하고 막연한 질문에 직면해 있다. 몽테뉴라는 삶의 예찬자는 가장 범상하고 개인적인 삶에도 심오한 도덕철학이 있다고, 우리의 위대한 걸작은 바로 적합타당하게 살아가는 삶 그 자체라고 말한다. 번역과 창작 사이에서의 끊임없는 긴장, 그럼에도 예술적 생산에 대한 꾸준한 열망을 우리는 언뜻언뜻 감독의 어머니인 한 여성의 준열한 내적 고민을 통해 발견하게 된다. 그렇기에 이 영화는 심민화가 쓴 <에세>의 딸 주석본과도 같다. 몽테뉴의 삶을 통해 자신을 돌아보려던 영화지망생의 질문은 ‘이 여자의 삶을 보라’는 답변으로 귀결되는 것이다.

<위로공단> 감독 임흥순 / 다큐 / 컬러&흑백 / 112분 / 장편경쟁

영화는 다양한 여성 노동자들의 현장 경험을 인터뷰로 제시한다. 기이하게도 이 다큐멘터리는 이 공간을 재이미지화하여 응시하고 곳곳에 행위예술적 재연을 삽입시킨다. 공장과 마트, 영화 촬영현장과 전화상담실은 느리게 트래킹되고 메시지가 이미지와 만나 낯설고 역동적인 에너지가 만들어진다. 우리가 알던 역사와 노동의 현장은 그렇게 이질적 이미지로 출현한다. 영화의 관심은 이것이 과거의 일이 아니라 현재의 일이며, 이곳의 일일뿐더러 자본이 이행해간 저성장국에서 재반복되는 무한지옥이라는 점에 놓여 있다. 그렇기에 영화 오프닝에서는 캄보디아의 한국 의류기업 재직 여공들이 벌인 최저임금 보장을 위한 집회에 공수부대가 투입되어 5명의 사상자와 40여명의 부상자가 발생한 유혈진압사태를 배치했다. 감독 임흥순은 제주 4•3 사건을 다룬 다큐멘터리 <비념>(2012)에 이어 <위로공단>에서도 역사와 미술을 결합시키는 새로운 다큐멘터리적 시도를 보여주었다. 인터뷰에서는 최대한 감정이입을 자제하였고 재구성된 이미지의 아름다움에 현혹되지 않도록 적절한 거리감을 두었다. 연결되고 충돌하며 배반되는 생소한 이미지들을 통해 우리의 역사를 다른 시선으로 바라보게 하는 작품이다.

<캐릭터 충돌의 궤적 읽기> 감독 손영모, 백현상 / 극영화 / 컬러 / 64분 / 새로운 선택

명문대 영문과 석사과정생 윤미연(윤현길)은 전설적 영화감독인 셀빈 라이스에 관한 논문을 쓰기 위해 영화과 교수 공정우(백현상)를 찾아간다. 학생은 지적 에너지로 가득하지만 어찌 보면 추상적 세계에 갇힌 듯 자기 이론에 도취되어 있다. 이를 보는 교수는 치기어린 현학도가 경험 없이 늘어놓는 관념론이 조금 지겹다. 하지만 이들 사이에는 동일한 관심사인 셀빈 라이스가 놓여 있다. 이론을 통해 셀빈 라이스를 분석하는 학생과 실제 연출론을 통해 이론의 나약함을 논파하는 교수의 보이지 미묘한 감정의 충돌은 굴곡 없는 서사 전개에 묘한 긴강감을 형성시킨다. 영화 <캐릭터 충돌의 궤적 읽기>는 석사학위 논문의 목차를 따라가며 미스터리한 작가의 세계를 파헤치는 학생과 교수의 논쟁을 다루었다. 도서관의 먼지가 될 운명일지는 모르지만 공부를 시작한 학생에게는 학위 논문에 대한 야심이 있게 마련이다. 이론의 유희에 지친 기성학자인 교수는 어린 학생의 지적 유희가 치기어린 무용함으로 보인다. 어쩌면 서로는 자신의 과거와 현재의 모습을 맞바꾸어 바라보고 있는 것인데, 자신의 속물근성을 발견하게 되는 그러한 자기조우는 불쾌한 법이다. 냉소로 가득한 자기반영적 영화 <캐릭터 충돌의 궤적 읽기>는 지적인 블랙코미디다. 허세로 가득 차 있는 듯 보이지만 예술과 아름다움의 본질에 대한 삐딱하지만 진지한 탐색이야말로 이 영화의 궁극적 의도일 것이다.

<그녀는 그것을 좋아해>

‘미국 독립영화 특별전’의 걸작들

40주년을 맞은 서울독립영화제가 올해 야심차게 마련한 기획전은 ‘미국 독립영화 특별전’이다. 특히 1984년부터 1994년까지의 작품들을 묶었다. 80년대 초를 거쳐 90년대 초에 이르는 이 시기에 미국 독립영화계에 새로운 바람이 불어왔다는 판단에서다. 현재 미국 독립영화계의 거장으로 우뚝 선 이름들이 다수 보인다. 그들이 영화 인생의 초입에 있었을 때 열정과 도전으로 만든 영화들이 대부분 이번 상영작이다. 서울독립영화제 40주년을 맞아 미국 독립영화의 팽팽했던 그 도전의 시기에서 교훈과 힘을 얻자는 뜻인 것 같다. 상영작은 10편이며 국내 미개봉작들이 다수다. 짐 자무시를 일약 미국 독립영화계의 스타로 만든 <천국보다 낯선>이 빠질 리 없다. 미국 독립영화의 영원한 기수 할 하틀리의 작품 <믿을 수 없는 진실>, 이제는 <보이후드>의 감독으로 우리에게 더 친숙한 리처드 링클레이터의 초기작 <슬래커>도 놓치면 안 되겠다. 그 밖에도 스파이크 리의 <그녀는 그것을 좋아해>, 스티븐 소더버그의 <섹스, 거짓말 그리고 비디오테이프>, 마이클 무어의 <로저와 나>, 구스 반 산트의 <말라노체>, 테리 즈위고프의 <크럼> 등 전설의 감독과 영화들이 즐비하다. 지금은 시들해졌지만 당시에는 촉망받았던, 케빈 스미스의 <점원들> 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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