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편의 작품 중 마음에 드는 것을 고르게.” <십계>(1987)의 제작을 앞둔 크쥐쉬토프 키에슬로프스키가 촬영을 맡을 슬라보미르 이지악에게 건넨 첫마디였다. 인간 본성의 면면을 드러낸 이 문제작들은 숱한 논쟁을 자아내며 이들에게 국제적인 명성을 안겨주었으나, 당시 이지악에게는 이 제안이 썩 내키지 않았다. 우선 16mm TV시리즈라는 것 자체가 악몽이었는데, 그건 곧 일정의 질을 보장받지 못한다는 뜻이다. 이럴 경우 서구에서의 거절 방법은 손쉽다. ‘작품은 흥미롭지만, 내 편당 급여는 20만달러요’ 이러면 그쪽에서 ‘시간 내주셔서 감사했습니다’ 하게 되고 그걸로 끝이다. 그러나 폴란드에서는 사정이 다르다. 공산정부는 소위 예술종사자들에겐 돈이 필요없다는 믿음이 있었고, 촬영감독이 받을 수 있는 급여 또한 200달러로 고정되어 있었다.
결국 이지악은 사랑과 질투에 관한 9번째 에피소드를 선택하나, 곧 키에슬로프스키는 이것이 시간을 벌기 위한 핑계라 여기고, 대신 5번째 이야기인 ‘살인하지 마라’의 촬영을 권유하는데, 이지악은 사람을 죽이고, 교수형을 하는 끔찍한 이야기가 영 내키지 않는다며 또다시 거절한다. 키에슬로프스키의 고집 또한 만만치 않았고 이지악은 화면을 모두 그린톤으로 하겠다는 조건을 내건다. 난데없이 그린톤이라니! 화가 날 대로 난 그는 자리를 박차고 나가지만, ‘원하는 대로 하라’며 이지악의 의견을 받아들인다. 때로 전혀 새로운 것을 감행할 때 두렵기 마련이지만, 바꾸어 말하면 이는 곧 전적인 자유를 의미한다. 촬영에 있어 이런 기회란 쉽지 않은 것이며, 이지악은 이를 놓치지 않았다. 전혀 다르고, 그만큼 이상한 독창적인 영화의 탄생에 앞선 이야기였다.
1940년 폴란드 태생으로 근 40년간 자국인 폴란드뿐 아니라, 영국, 이탈리아, 독일, 프랑스, 미국 등 세계 각지에서 촬영을 해온 슬라보미르 이지악은, 오늘날 폴란드영화 중흥의 산 증인으로 자리한다. 가족 모두가 사진작가였던 집안내력과 행운은 그를 경쟁률 800 대 1이라는 까다롭기로 정평이 난 영화학교 ‘우츠’의 문턱을 넘게 해주었고, 감독의 가장 중요한 파트너이자 영화 전반의 책임자로, 또 한 사람의 작가로 인정받는 폴란드 특유의 촬영감독을 대하는 풍토에서 이지악의 예술적 감성은 점차 싹을 틔운다.
촬영감독의 입지를 굳혀나가며 처음으로 안정감과 발전을 맛보게 된 계기는 크쥐쉬토프 자누쉬와의 만남을 통해서이다. 이지악의 초기 필모그래피를 점하고 있는 <지하철 보행자>(1973)나 <충실>(1980) 등 자누쉬와 함께 한 일련의 작업은 단지 영화에 국한되지 않은, 인간관계라는 한층 성숙된 일면을 맛보게 해준다. 당시 저예산으로 촬영한 안제이 바이다 감독의 <지휘자>(1979)에서 역시 그의 능력은 십분 발휘된다.
이지악에게 촬영감독으로의 명성을 안겨준 키에슬로프스키와의 인연 또한 이때로 거슬러 올라가는데 함께 수학한 절친한 친구 사이였으나, 다큐멘터리 작업에 치중하던 키에슬로프스키의 작업은 이지악과 맞지 않았고, <상처>(1976) 이후 그들이 해후하기까지는 오랜 시일이 걸린다. 그러나 키에슬로프스키에게는 첫 TV시리즈인 <십계>의 촬영에 이은 첫 해외작품인 <베로니카의 이중생활>(1991)과 <블루>(1993)에 이르기까지 키에슬로프스키의 중요한 작품은 줄곧 촬영감독 이지악의 손길을 거치게 된다.
시나리오의 첫 단계부터 세심하게 조율되어 영화를 장악한 이지악 특유의 색감은 극을 한층 강화시키는 의미있는 색으로의 기능을 해낸다. 어디에나 존재하고 있는 파란색이 아닌, 슬픔을 극대화시켜주고, 감정을 고조시키며, 공격적이기까지 한 ‘블루’는 이처럼 이지악의 팔레트 위에서 새롭게 창조된다. 이러한 그의 눈물겨운 노력은 600개에 달하는 놀라운 필터의 양에서도 입증되는데, 종종 공항에서는 커다란 필터케이스가 의심스러운 폭탄장치로 의심받는 해프닝도 벌어진다고 한다. 그의 강렬한 색감은, 이후 존 듀이간의 <오거스트 킹>에 이어 <가타카> <프루프 오브 라이프> 등 할리우에서도 빛을 잃지 않았으며, 최근에는 리들리 스콧과 함께 작업한 <블랙 호크 다운>의 잿빛 영상으로 다시 한번 건재함을 과시하였다.
누군가 끊임없는 감성의 원천을 물어온다면 아마 그는 이렇게 답할 것이다. “기술은 점점 단순해지고 있으며, 기술자로서는 더이상 충분치 않다. 바로 공동의 파트너로 영화를 바라볼 줄 아는 태도가 중요하며, 이는 스토리를 이해할 때만이 가능하다. 스토리를 스크린에 옮겨내는 것 바로 그것이 촬영감독이 찾아내야 하는 길이다.” 이화정/ 자유기고가 zzaal@hanmail.net
Slavomir Idziak 필모그래피
<블랙 호크 다운>(Black Hawk Down, 2001) 리들리 스콧 감독
<프루프 오브 라이프>(Proof Of Life, 2000) 테일러 핵포드 감독
<기쁨의 다발>(LiebesLuder, 2000) 데틀레프 부크 감독
<패러노이드>(Paranoid, 2000) 존 듀이건 감독
<라스트 셉템버>(The Last September, 1999) 데보라 워너 감독
<사랑과 분노>(Love and Rage, 1998) 케살 블랙 감독
<광끼>(I Want You, 1998) 마이클 윈터바텀 감독
<계율>(Commandments, 1997) 다니엘 타플리츠 감독
<가타카>(Gattaca, 1997) 앤드루 니콜 감독
<맨 위드 건>(Men With Guns, 1997) 존 세일즈 감독
<스탠 바이 유어 맨>(Mannerpension, 1996) 데틀레프 부크 감독
<릴리안의 이야기>(Lilian's Story, 1996) 저지 도마라즈키 감독
<오거스트 킹>(The Journey of August King, 1995) 존 듀이건 감독
<세가지 색: 블루>(Trois Couleurs: Bleu, 1993) 크쥐쉬토프 키에슬로프스키 감독 <새와의 오랜 대화>(Das Lange Gesprach mit dem Vogel, 1992)(TV) 크쥐쉬토프 자누쉬 감독
<베로니카의 이중 생활>(La Double Vie De Veronique, 1991) 크쥐쉬토프 키에슬로프스키 감독
<인벤토리>(Stan Posiadania, 1989) 크쥐쉬토프 자누쉬 감독
<십계>(The Decalogue, 1988)(TV) 크쥐쉬토프 키에슬로프스키 감독
<당신이 어디에 있건>(Gdzieskolwiek Jest, Jeslis Jest…, 1988) 크쥐쉬토프 자누쉬 감독
<살인에 관한 짧은 필름>(A Short Film about Killing, 1988) 크쥐쉬토프 키에슬로프스키 감독
<십계>(Dekalog, 1987)(TV) 크쥐쉬토프 키에슬로프스키 감독
<악의 힘>(Paradigma, 1985) 크쥐쉬토프 자누쉬 감독
<태양의 해>(Rok Spokojnego Slonca, 1984) 크쥐쉬토프 자누쉬 감독
<임패러티브>(Imperativ, 1982) 크쥐쉬토프 자누쉬 감독
<요한 바오로 2세의 생애>(Z Dalekiego Kraju, 1981)(TV) 크쥐쉬토프 자누쉬 감독
<계약>(Kontrakt, 1980) 크쥐쉬토프 자누쉬 감독
<충실>(Constans, 1980) 크쥐쉬토프 자누쉬 감독
<지휘자>(Dyrygent, 1979) 안제이 바이다 감독
<비행 수업>(Nauka Latania, 1978) 슬라보미르 이지악
<상처>(The Scar, 1976) 크쥐쉬토프 키에슬로프스키 감독
<여자의 결정>(Bilans Kwartalny, 1975) 크쥐쉬토프 자누쉬 감독
<지하철 보행자>(Pedestrian Subway, 1973)(TV) 크쥐쉬토프 키에슬로프스키 감독
<피자마>(Pizama, 1971)(TV) 안소니 크라우즈 감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