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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직 한국영화만을 위한 시간

올해 부산영화제에서 만난 젊은 한국영화 13편에 대한 이야기

열여덟편의 한국 장편영화 관람, 열아홉 차례 관객과의 대화 진행, 그리고 극장과 극장 사이를 오가며 맞은 생애 최고의 서러운 태풍. 내게 올해 부산국제영화제에서의 8일은 그렇게 남았다. 한달 전부터 점찍어둔 해외영화들은 거의 한편도 보지 못했으며, 그나마 짬을 내어 비디오룸에서 볼 수 있었던 몇편은 화질에 대한 미련 때문에 차라리 중도에 보기를 그만두었고 지인들이 강력 추천한 영화 단 한편을 극장에서 마침내 볼 수 있었으나 심신은 이미 그 어떤 감흥도 받아들이지 못하는 상태였다. 말하자면 적어도 내게 올해의 부산국제영화제는 온전히 한국영화를 위한, 한국영화에 의한 시간이나 다름없었다. 열다섯명의 감독들을 만났고 그보다 배는 많은 배우들을 만났고, 그보다 몇 백배는 되는 관객을 만났다. 이제 그 시간의 경험을 여기 풀어놓고자 한다. 내가 본 스무편가량의 영화들은 ‘한국영화의 오늘’ 파노라마와 비전 섹션, 그리고 뉴커런츠 경쟁에 오른 작품들이며, 대부분 부산에서 처음 공개되는 신작들이다. 다른 영화들에 대해서는 언젠가 말할 기회가 있을 것이고, 이 자리에서는 신진 감독들의 장편 데뷔작이나 두 번째 작품들로 꾸려진 비전 부문의 열편의 영화들과 뉴커런츠에 뽑힌 세편의 한국영화들이 안긴 인상에 대해서만 이야기하려고 한다. 그러니 이 글은 본격적인 비평이라기보다는 이제 막 처음 공개된 작품들에 대한 나의 주관적인 생각과 지난 8일간의 여정이 남긴 어떤 감흥에 닿은 에세이가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 단상들이 아직은 영화를 보지 못한 미래의 관객에게 호기심과 기대감을 조금이라도 불러일으키는 역할을 하면 좋을 것 같다.

독립영화가 미스터리 스릴러를 선택한 이유

다소 뻔한 말이기는 하지만, 한정된 제작비와 시간과 싸우며 장편을 만들어야 하는 독립영화감독들에게 그 조건 안에서 자신의 이야기를 가장 효과적으로 관객에게 전달하는 방법을 고안하는 일은 중요하고 시급한 문제일 것이다. 달리 말해 어떻게 관객을 설득하고 이해시키고 동화시킬 것인가. 개인적으로는 그 문제가 한편의 영화를 만드는 데 있어 가장 먼저 고려되어야 할 사안이라고 생각하지 않을뿐더러 그게 최우선이 될 때 오히려 영화가 나빠지는 경우가 많다고 생각하지만, 어쨌든 더 많은 관객과 만나기를 원하는 감독이라면 그 문제를 아예 무시할 수는 없을 테고, 이를 위해 감독마다 자기만의 문제의식, 감흥을 전달하는 장치에 대한 고민이 있을 것이다. 비전과 뉴커런츠에 포함된 총 열세편의 영화 중 반 이상의 영화들이 택한 장치는 미스터리 스릴러의 틀이다. 각각이 고심하는 사회적 이슈와 주제는 다양하지만, 이들 사이에는 그걸 미스터리 스릴러 틀로 풀어낸다는 공통점이 있고 그 점이 좀 놀라웠다. 어떤 이야기를 다루든 폭력이 있고, 비밀이 있고, 복수가 있고, 죽음이 예견되는 그 장르적 구조가 여기 반복된다는 것이며, 감독들은 이 장르의 도입으로 무언가가 가능해진다고 믿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이때, 가능해지는 무엇이 대중성이라고 간단히 말해버리면 그만일까.

비전 부문에서 상영되었으며 미스터리 기법을 적극 차용한 영화들 세편의 유사한 흐름에서부터 시작해보려고 한다. 이들 세편의 영화들은 특정 시점을 축으로 캐릭터나 상황에 급격한 변화가 일어나서, 전반부와 후반부가 마치 두개의 분리된 이야기처럼 진행된다. 그것이 의도치 않은 실패는 아닌 것 같고, 후반부의 장르적 폭발을 위해 전반부에 전혀 다른 톤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던 것처럼 보인다. 경남 창원에서 영화작업을 해온 김재한 감독의 <안녕, 투이>는 시골 마을의 한국 남자에게 시집온 베트남 여성 투이의 이야기로 시작된다. 웬일인지 남편은 등장하지 않은 채 투이와 시아버지, 그리고 치매에 걸린 시어머니의 고된 일상이 한편에 그려지고, 다른 한편에서는 마을의 경찰서로 전근 온 젊은 경찰과 어딘지 수상해 보이는 동네 자율방범대원의 모습이 펼쳐진다. 이주민 여성과 그 가족의 애환에 대한 이야기처럼 보이던 영화는 투이 남편이 사고로 죽었다는 사실이 밝혀진 뒤, 그 사고의 비밀을 둘러싸고 투이와 방범대원, 경찰이 얽힌 미스터리물로 급전환하고 예상치 못한 반전을 맞이하며 도입부와는 전혀 다른 이야기로 끝난다. 김재한 감독은 기존에 나온 이주민 여성들의 영화와는 좀 다른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 스릴러를 차용했다고 밝혔지만, 내가 보기에 그는 이주민 여성의 이야기보다는 어느 시골 마을에 음습하게 내면화된 폭력의 스릴러를 그리고 싶은 마음이 더 컸던 것 같다. 감독은 투이를 연기한 배우가 실제 이주민 여성이 아니라 베트남에서 캐스팅한 배우로, 한국어를 외워가며 연기했다는 사실을 들려주었다. 아무래도 <안녕, 투이>는 좀 다른 이주민 여성의 이야기가 아니라 베트남 여성을 주인공으로 한 좀 다른 스릴러가 되고 싶어 하는 영화에 가까워 보인다. 그렇다면 영화는 남편을 사고로 잃고 사고의 비밀을 좇는 가련한 아내의 자리에 반드시 이주 여성이 필요했던 이유를 설득해내고 있는가? 이 질문 앞에서 나는 망설이게 된다.

<보호자>

<못>

전반부와 후반부의 색깔이 다른 <보호자>와 <>

한편 유원상 감독의 <보호자> 역시 TV드라마에서 볼 법한 화사하게 가공된 가족드라마로 진행되는가 싶더니, 갑작스럽게 아이의 납치 스토리로 방향을 전환하고, 거기 더해 기존의 유괴서사를 한번 더 꼬고 있다. 내 아이를 구하기 위해서는 다른 아이를 유괴해야 하는 상황에 두 아버지가 동시에 놓인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이 영화는 두개의 질문을 풀어가는 과정으로 진행된다. 이 상황을 멀리서 주관하고 조종하는 남자는 무슨 사연으로 이런 극단적인 사태를 구경하는 것일까. 또 하나, 자신의 아이를 되찾기 위한 절박한 행동이 실은 남의 아이를 죽음에 내모는 행위와 다름없을 때, 그것은 과연 얼마나 정당하며 그들 중 누가 더 나쁘다고 단언할 수 있을까. 범인을 찾아가는 피해자 부모의 단선적인 동선이 아니라 내 가족을 지키기 위한 모순적인 심리묘사가 중요한 영화이며 이를 극대화하기 위해 비밀 언저리를 맴돌며 진행되는 장르가 필요했던 것 같다. 그런데 영화는 이 황당한 상황을 긴박한 스릴러로 지속하다가도 종종 블랙코미디로 멈춰 세우거나 긴장을 흩뜨리고 싶어 한다는 인상을 주고, 그런 시도 혹은 욕망은 전체적인 장르적 리듬에 그다지 좋은 영향을 주지 않는 것 같다. 관객과의 대화 자리에서 나는 감독이 원래는 유괴라는 소재와 유머를 섞는 영화를 만드는 것이 목표였지만 (아마도 유괴라는 소재의 무게 때문에) 스릴러라는 장르를 기본 틀로 취할 수밖에 없었다는 인상을 받았는데, 차라리 그가 과감하게 유머쪽으로 비틀었다면 전혀 다른 종류의 흥미로움이 가능하지 않았을까 하는 상상을 잠시 해보았다.

앞의 두 영화와는 다른 내용이지만, 그 전개과정이 유사한 또다른 영화는 서호빈 감독의 <>이다. 처음에는 말도 많고 탈도 많지만 결국은 추억이 소중한 성장영화처럼 보이다가 갑작스럽게 비극적인 사건이 개입하고 이후 영화 속 세계는 점점 더 헤어나올 수 없는 구렁텅이로 빠져든다. 의도치 않은 누군가의 죽음이 있고 난 뒤, 분노와 냉소, 폭력과 후회와 죄의식이 끈질기게 그 자리를 맴돌고, 인물들은 트라우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각자의 방식으로 나빠지고 있으며, 사태를 돌이킬 수 있는 시간은 점점 멀어져가고, 영화는 그 과정을 냉정하게 관찰한다. 처음 누군가의 죽음이 등장한 다음, 나는 인물들이 부서져가는 과정을 지켜보면서 영화가 과연 이 비극을 어떻게 감당하며 과연 어디서 끝낼지 궁금했는데, 영화는 예상보다도 더 망설임 없이 죽음과 파국을 장르적으로 밀어붙이고 있었다. 되돌리기엔 이미 너무 늦었다는 냉소 안에서 죽음을 해결하기 위한 또 다른 죽음, 파국을 해결하기 위한 또 다른 파국이 이어지며 영화가 끝을 향해 달려갈 때, 영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내 붙잡고 있어야 할 것들을 너무 쉽게 놓아버리고 있는 것은 아닌지 한번쯤 의문을 제기해볼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영화 외적인 사실 하나를 말하자면, <>은 감독이 얼마 전 차린 영화사 ‘새삶’의 작품인데, 이름이 낯익어서 찾아보니 서호빈은 지난해 인상적으로 봤던 <새삶>이라는 단편을 만든 감독과 동일인이었다. 여기서 길게 말할 일은 아니지만, <새삶>의 영화적 공기나 상상력과 <>의 기운은 그 기질과 태도가 너무 달라서, 나는 뒤늦게 이 감독의 스펙트럼이 매우 넓거나 아직 뭔가를 감추고 있거나 둘 중 하나일지 모르고, 기왕이면 후자의 경우라면 좋겠다는 이상한 생각에 잠겼다.

<소녀>

<조난자들>

장르의 긴장감과 사회적 이슈가 만난 <소녀>와 <조난자들>

국제경쟁부문인 뉴커런츠의 한국영화들 중에서도 위의 영화들과 유사한 장르적 길을 택한 작품이 있는데, 최진성 감독의 <소녀>다. 상처를 안고 조용한 시골 마을의 학교로 전학 온 소년과 마을 주민들에게 따돌림을 당하지만 어딘지 신비로운 분위기의 소녀가 만나 벌어지는 이야기로, 여기에 구제역의 참상과 위선적이고 폭력적인 어른들의 실체가 더해진다. 진실이 아닌 말의 전파가 저지르는 오인의 폭력이 어떻게 한 사람의 인생을 낙인 찍고 생매장하는지를 보여주기 위해 영화는 소녀를 중심으로 곳곳에 비밀을 묻어두고 관객으로 하여금 소년과 함께 그 오인의 전차에 타게 했다가 점차 진실이 밝혀지는 과정을 목도하게 한다. 겨울밤 꽁꽁 언 호수 위에서 스케이트를 타는 소녀, 스케이트의 차가운 날, 어두운 숲길, 돼지들이 생매장되는 황량한 벌판, 소년의 애처로운 눈빛과 실루엣, 마을 이면에 잠복한 광기 등이 영화의 공기를 현실과 초현실의 위태로운 그 어딘가에 두며 스스로를 잔잔하지만 가혹한 동화처럼 보이게 만든다. 그런데 이 영화 역시 소녀의 신비로움을 벗겨내며 그녀가 겪어온 폭력의 실체를 전면화하면서부터 복수의 장르에 대한 욕망을 숨기지 않는다. 하얀 눈밭의 위태로운 공기가 명징한 피의 장르가 되면서 이 영화는 잃은 것이 더 많은 걸까, 얻은 것이 더 많은 걸까. 영화를 보고 나서 이런 의문과 더불어 어느 외국 관객이 진심으로 궁금해하는 표정으로 던진 질문에 생각이 머무르게 되었는데, 질문의 요지는 대강 이렇다. 왜 이렇게 많은 한국영화들은 강간을 소재로 취하는가. 한편으로는 쓸데없는 질문이라는 생각이 들면서도 과연 이 질문에 대한 내가 알지 못하는 대답을 들을 수 있을지 모른다는 기대가 있었던 것 같다. 최진성 감독은 조금 망설이다, 가장 큰 이유는 그게 우리의 현실이기 때문이라고 대답했는데, 다른 감독들에게서도 그 이상의 대답이 나오기 어렵다는 걸 알면서도 그 이상의 대답을 기다리면 왜 안되는가, 그 이상의 대답이 있어야 하는 건 아닌가, 라고 지금의 나는 반문하고 있다.

노영석 감독의 <조난자들>은 특정 이슈를 전면에서 끌어안고 그걸 전달하기 위한 길로 미스터리 장르를 택한 위의 영화들과 달리 그 장르 자체의 긴장감으로 이야기를 밀고 나가는 쪽에 속하는 영화다. 어딘지 어수룩해 보이지만 사진도 찍고 시나리오도 쓰며 뒤에서 할 건 다 할 것 같은 남자가 홀로 낯선 곳에 여행을 왔는데, 귀찮게 친절하거나 무섭게 낯선 주민들을 만나고 자기보다 더 이상한 여행객들과 마주하면서 난관에 빠지는 이야기. 대체 이 마을의 정체는 뭘까. 이 사람들의 정체는 무엇일까. 왜 이렇게 위악적인 상황만 계속될까. <낮술>에서 겁 많고 지질하지만 욕망만은 살아 있는 남자들의 디테일을 대방출했던 감독답게 이번 영화에서도 그런 부류의 한 남자에 현미경을 들이대고 위의 질문들을 지속시키면서 극의 긴장을 이어간다. 누구의 정체도 확실히 밝히지 않고 특별한 사건도 없이 그렇게 긴장을 유지해가던 영화는 의외의 방향으로 몇 차례 전환되며 우리의 예상을 뒤집는다. 그런데 모든 사태가 끝났다고 생각될 무렵, 영화는 이 마을에 감돌았던 기이한 기운과 주인공을 고난에 빠뜨린 어처구니없는 사건의 근원이 전혀 다른 데 있었을지도 모른다고 슬쩍 흘린다. 더욱이 그 근원으로 추정되는 정체가 민감한 정치적 사안이고 뒤늦게야 바로 그 사안에서 이 영화의 이야기가 출발한 것 같다는 예감이 들어서 당황스러워지는데, 스포일러가 될 것 같아서 여기서 명확히 밝힐 수는 없지만 그 당황스러움은 이런 것이다. 이 스릴러는 내부의 적에 대한 이야기인 줄 알았는데, 외부의 적에 대한 이야기인가? 이것은 우리 안의 공포를 보여주는 데 골몰하는가, 그 공포를 외부로 돌리고 마는가? 러닝타임은 고작 10분이 채 남지 않았고, 이 영화의 시선이 다소 모호하고 오해의 소지 또한 분명히 있다고 생각할 무렵, 조금은 느닷없지만 영리한 결단처럼 보이는 엔딩이 이어진다. 아마도 여기에 영화 나름의 대답이 있을 것이다. 그러고보니 <조난자들>은 <낮술>의 스릴러 버전이라고 정리하기에는 어쩐지 그 야망이 더 큰 영화라는 생각이 드는데 이 야망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에 대해서는 좀더 고민해봐야 할 것 같다.

<스톤>

<다이너마이트맨>

장르적 활력에 몰두하는 <다이너마이트맨>과 <스톤>

이상의 영화들처럼 현실적인 이슈를 기반으로 하거나 현실과의 접합점을 찾기보다는 장르적 활력에 더 몰두하는 영화로는 정혁원 감독의 <다이너마이트맨>을 꼽을 수 있다. 형제가 조직을 배신한 대가로 동생이 온몸에 화상을 입고 죽어가자 형이 조직원들을 하나씩 찾아가 죽이는 과정을 담은 이 영화는 현재 형의 잔혹한 행동과 그 이유를 설명해주는 플래시백을 교차하며 나아간다. 영화가 화려한 액션이나 잔혹한 복수의 현장감보다 더 공들이는 것은 그런 복수의 세속성을 넘어서는 특정 공간의 초현실성이나 살인마와 신부와의 긴 대화를 컷 없이 찍은 그 시공간의 종교적인 공기다. 감독은 마치 마블코믹스의 악당의 전사를 상상해보는 심정으로 이 이야기를 구상했다고 말하기도 했는데, 나는 <다이너마이트맨>이 복수 그 자체의 행위에서 쾌감을 유도하고 싶어 하는 영화이기보다는 사색하고 철학하는 건조한 복수극이 되고 싶어 하는 영화라는 인상을 받았다. 존중할 만한 선택이지만 아쉽게도 그것이 종종 사색이 아닌 사색하는 것처럼 무게를 잡고 있거나, 그 톤을 내용이 받쳐주지 못해서 어쩔 수 없이 악당이 되어버린 자의 소름 끼치는 사색으로 이어지는 데까지는 도달하지 못한다.

한편, 전혀 연결고리가 없을 것 같은 두개의 이야기, 아니 두개의 장르를 겹쳐두고 둘의 충돌과 조화와 결합으로 하나의 장르에서는 불가능한 활기의 아우라를 기대하는 영화는 조세래 감독의 <스톤>이다. 실제로 바둑소설 <승부> 시리즈의 저자이기도 한 조세래 감독은 이 영화에서 바둑판과 현실을, 회한에 찬 건달 두목과 입단에 실패한 청년 기사를, 칼과 돌을, 그러니까 이렇게 말할 수 있다면 바둑이라는 장르와 조폭이라는 장르를 마주 세워두고 때로는 서로를 거울처럼 비추게 하고, 때로는 서로에게 깨달음을 주는 역할을 하게 하면서 이야기를 진행시킨다. 흥미로운 설정이며, 고수가 아니라면 감히 흉내낼 수 없는 멋진 대사들도 많고, 잠재성은 있으나 일찍 체념을 배워버린 가난한 청년 기사와 이제는 젊은 날이 후회되지만 인생을 바꾸기에는 늦어버린 나이 든 건달이 나누는 우정은 감동적이며, 무엇보다 배우 김뢰하의 카리스마는 아무리 건달이라도 그런 어른이 곁에 있으면 좋겠다는 마음을 갖게 한다. 그런데 영화가 두개의 세계를 오가면서 숏을 교차하며 뭔가 연관성을 만들려고 할 때 종종 위험하고 무리하게 연결하고 있다는 인상을 주며, 마침내 두 세계가 서로를 끌어안고 파토스를 폭발시키는 이 영화의 목적지에 이르면 그 설정과 공기에 함께 취할지, 그걸 과하게 받아들일지에 따라서 보는 이의 감흥의 강도가 달라질 것 같다.

<족구왕>

<10분>

유일한 코미디 <족구왕>과 극적 상황을 배제한 <10분>

세상을 향해 잔뜩 찌푸린 영화들 틈에서 올해 내가 본 유일한 코미디이자, 유일하게 피와 폭력이 없었던 영화는 우문기 감독의 <족구왕>이다. 제대를 하고 복학한 주인공은 남들이 공무원 시험을 준비할 때 연애하고 싶다고 말하고, 총장과의 대화에서 족구장을 만들어 달라고 말하는 대책 없지만 착하고 솔직한 남자다. “남들이 싫어한다고 자기가 좋아하는 걸 숨기고 사는 게 더 바보 같다”고 말하며, “대체 너에게 족구가 뭐냐?”라는 물음에 당연한 걸 묻는다는 듯이 쳐다보며 “재밌잖아요”라고 말하는, 알고 보면 내공이 대단한 우리의 주인공에게 그를 비웃던 주변인들이 하나둘 감화되며 족구대회에 참여하게 되고, 상처도 치유하게 된다는, 따뜻하고 착한 이야기가 여기 있다. 이 영화의 장점은 무리한 설정 없이, 무리한 캐릭터 없이, 인물들에 차별을 두지 않고 시선의 오고감, 심드렁한 대화와 그 사이의 침묵, 그러니까 엇박의 타이밍으로 유머를 자아내는 데 있다. 그리고 그 유머에 단 한순간의 냉소도 없다는 건 이 영화의 귀여운 점이다. 다만 대사와 대응하지 않는 상황 연출이 빚어내는 웃음이나 엇박의 리듬에서 나오는 낄낄거림에 대한 욕망, 한마디로 보는 이를 웃기고 싶어 하는 영화의 욕망이 때때로 강박처럼 과하게 작용해서 오히려 코미디의 호흡이 풀어지거나 경직되는 순간들이 생기는 것 같다. 그럼에도 사족인 것 같지만, 이 말은 하고 싶다. 여자에게 치근덕대는 연기가 한갓 지질함이 아니라 당당한 순정으로도 표현될 수 있고 그게 찡할 수도 있다는 걸 배우 안재홍은 느끼게 한다.

이 지면에서 언급하는 영화들 대다수가 극적인 사건을 발생시키고, 인물들로 하여금 그걸 통과하게 하며 어떤 결말에 이르기 위해 종종 무리를 무릅쓴다면, 이용승 감독의 <10분>은 예외적인 영화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좀 이상한 표현이지만, 이 영화는 그런 무리를 안 하기 위해 무리하는 영화처럼 보인다. <소녀> <파스카>와 함께 뉴커런츠 부문에 오른 <10분>은 대학을 졸업하고 한 회사의 인턴으로 잠시 근무하며 PD 시험을 준비하던 청년이 시험에 떨어지면서 그 개인의 이야기가 아니라, 회사라는 곳의 관료적 생리와 거기에 기생하는 사람들의 미묘한 행태 변화의 풍경으로 확장된다. 권력과 이해관계를 중심으로 재편되는 회사 내부의 공기와 인간관계, 그에 따라 불안정하게 흔들리는 비정규직의 고충을 작위적 사건을 통한 폭발과 해결 혹은 파국 없이 그저 꼼꼼한 시선으로 관찰하는 이 영화는 이용승의 장기가 잘 묻어난다. <런던유학생 리차드>라는 단편에서와 마찬가지로 그는 내지르지 못하고 억울하게 삼키면서도 눈치보는 자들의 심리와 박쥐처럼 돌변하는 자들의 행동을 한정된 공간에 붙여두고 매우 갑갑한 상황 속에서의 꿈틀거림을 잘 견디며 지켜본다. 비유하자면 그의 영화는 어쩐지 영화 속 인물들 중에서도 성실하고 감정을 쉽게 폭발하지 않지만 생존력이 질긴 자들의 기질에 닿아 있는 것 같고, 그 점이 그의 영화를 튼튼하게 만들지만, 때로는 어느 선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누르고 있다는 인상 또한 주는 것 같다.

<셔틀콕>

<한공주>

규정하지 않고 판단하지 않고, <셔틀콕>과 <한공주>

영화제 폐막식 다음날, 매체들이 수상 소식과 함께 올해 부산의 수확은 “3李작가”의 탄생이라고 쓴 기사들을 보았다. 말 만들기 좋아하는 언론의 수사라고 생각하지만, 어쨌든 그중 하나가 <10분>의 이용승 감독이고 나머지 둘 중 하나가 <셔틀콕>을 만든 이유빈 감독이다. 나이 차이가 꽤 나고 사이가 그다지 좋아 보이지 않는 형제가 차를 타고 남해로 향하고 있다. 그들의 아슬아슬한 초/중반까지의 이야기가 별다른 설명 없이 시간을 가로지르며 펼쳐지는 데다가 무엇보다 인물의 표정이나 행동, 대사뿐만 아니라 영화의 전반적인 공기에 짜증이 가득 차 있어서 어디에 중심을 두며 봐야 할지 갈피를 잡기 어려운데도 여기저기에 감도는 이상한 기운을 의식하게 된다. 개인적으로는 그 느낌이 이 영화에 계속 시선을 두게 만들었다. 이 영화가 단순히 부서진 가족드라마가 아니라, 위태롭게 경계 위로 삐죽 솟아나온 욕망과 마음 때문에 어쩌지 못하고 힘겨워하는 묘한 (가족)관계 이야기라는 걸 알게 된 다음에야, 그 이상한 기운의 정체를 이해하게 되었다. 이 로드무비에서 중요한 건 인물들이 보이는 행동의 인과관계나 스토리가 아니라, 그 길과 호흡하며 감정을 토해내고 쓸어담고 망설이다 결국 그 감정을 받아들이는 과정에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셔틀콕>은 인물들의 관계나 그들의 감정처럼 거칠고 산만하며 어색한 구석이 엿보이지만, 보는 이의 마음을 잡아채는 좋은 장면들을 품고 있다.

이용승, 이유빈에 이은 마지막 “3李”는 <한공주>의 감독 이수진이다. 집단 성폭행을 당한 여고생이 사건 이후, 과거의 상처와 편견에 맞서 오늘을 살아가기 위해 애쓰는 과정을 담은 이 영화는 이런 소재를 다룬 대개의 이야기들과는 좀 다른 길을 간다. 우리는 한공주가 어떤 일을 겪어서 지금과 같은 표정을 지니게 되었고 세상의 친밀한 접근에 왜 종종 한발 물러서는지, 그러면서도 그 세상을 물끄러미 쳐다보는지 그녀를 한참 지켜본 뒤에야 알게 된다. 물론 이 영화에도 플래시백이 등장하지만 그것은 그녀의 과거를 설명하기 위한 도구가 아니라, 현재에 뒤섞이며 현재가 품을 수밖에 없는 시간으로 등장한다. 말하자면 이 영화는 섣부르게 분노하거나 판단하거나 절망하거나 희망하는 대신 좋은 기억과 나쁜 기억, 좋은 현재와 현재에 악몽처럼 부유하는 과거를 교차시키며 하나가 다른 하나를 밀어내지 못하게 한 다음, 그 한가운데에 한공주와 우리를 던져둔다. 이는 감당하기 어려운 고통스러운 과거를 사건으로, 이슈로 다루거나, 그걸 복수의 이야기로 전환하거나, 그 어떤 설정에 기대는 선택을 하지 않으면서도 지금을 살아가고 있는 소녀의 숨 쉬는 내면에 집중하고자 하는 이 영화만의 고민의 결과일 것이다. 이 짐을 온전히 홀로 짊어지고 가면서도 결이 살아 있는 소녀로 완성해낸 배우 천우희의 공이 크며, 자칫 감상적으로 과할 수도 있었을 음악을 신 안으로, 인물들의 마음 안으로 들이고 내는 감독의 재능도 눈여겨볼 만하다. 다만 개인적으로 한 가지 걸리는 것은 이런 소재의 영화들이 줄곧 빠져드는 몇몇 함정들에 <한공주>의 몇몇 부분들 역시 아슬아슬하게 걸쳐 있거나 미련을 두고 있는 것은 아닌가, 지금으로서는 그 의문을 완전히 거두지 못하겠다는 점이다.

<신의 선물>

<파스카>

새 생명과 연관된 <신의 선물>과 <파스카>

이제 마지막으로 남은 두편의 영화를 언급하려고 한다. 문시현 감독의 <신의 선물>은 아이를 간절히 원하지만 가질 수 없는 여자와 아이를 가졌으나 낳을 수 없는 여자가 만나 모종의 계약을 하고, 그들 사이의 묘한 유대감과 갈등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확장되는 영화다. 알려진 대로 이 영화의 시나리오는 김기덕 감독이 썼고, 문시현은 그의 조감독 출신이다. 말하자면 누가 봐도 알 수 있을 김기덕의 인장을 문시현이 어떻게 자기만의 톤으로 소화해냈는지가 영화의 관건일 텐데, 이에 대한 구체적인 대답을 하는 대신, 이와 관련된 관객의 반응 하나를 소개하려고 한다. 상영이 끝난 뒤, 무대에 오른 감독에게 어느 여자 관객이 벅찬 얼굴로 말하길, 김기덕 감독의 영화들을 보는 동안은 언제나 정신적으로 힘이 들고 이해도 잘 안됐지만 <신의 선물>은 이상하게도 마음을 울리고 좋았는데, 알고 보니 감독이 여자였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 관객은 이 영화를 김기덕이 연출했다면 전혀 다른 결과가 나왔을 거라고 짐작하는 모양이고, 바꿔 말하면 이 영화에는 김기덕에게는 없는 ‘여성적인’ 무언가가 있다는 표현처럼 들리는데, 솔직히 나는 잘 모르겠다. <신의 선물>에 김기덕의 파편들이 어른거린다는 지적은 어쩌면 하나마나한 말이 될 테니 좀 다른 견해를 덧붙이려고 한다. <신의 선물>을 보는 동안 나는 이 영화가 여자들의 이야기이고 여성 감독이 만들었다고 해서 여기, 김기덕에게서는 본 적 없는 어떤 ‘여성적인’ 시선이 있다는 생각을 하지는 못했다. 하지만 문시현 감독이 여자들간의 관계나 욕망을 다룰 때보다 오히려 다른 부분을 찍을 때 더 모험을 하고 싶어 하고 즐기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고 그 점에 대해 말하는 게 더 흥미로울 것 같다.

<신의 선물>에서 두 여자의 관계 안에서 아이는 결국 태어나 살게 되지만, 안선경 감독의 <파스카>에서 아이는 사회적 편견을 이기지 못하고 나약해진 엄마의 몸속에서 죽어 시신의 모습으로 등장한다. 이 영화는 20대 남자와 40대 여자의 사랑, 그들이 보듬어 안고자 하는 생명, 그렇게 단단해지려고 할 때마다 이들을 매섭게 내리치는 사회적 통념에 대한 이야기다. 그런데 가난한 연인이 사회의 상투적이고 폭력적인 시선에 부딪혀 무너지고 슬퍼하는 장면들, 즉 영화가 세상에 대해 싸우고 싶어 하는 순간들보다 두 남녀가 조곤조곤 대화하고 서로를 쓰다듬는 작은 순간순간들, 즉 통념과 편견이 개입하지 않고 둘의 마음과 육체만이 작동하는 그 순간들에 이 영화의 울림이 있다. 말하자면 이 영화는 상투에 대응하기 위해 분노하며 내지를 때가 아니라 외부의 시선에 아랑곳하지 않고 통속을 끌어안고서 그 안의 구체적인 결들을 지켜보고 그 결들의 흔들림을 감지할 때 좋아진다. 내 입장에서 <파스카>는 그런 점에서 안선경 영화의 좋은 점을 새로 보게 해줌과 동시에 아쉬운 점 역시 또 한번 생각하게 만드는 영화다. 나는 그간 안선경의 영화들이 무언가를 보여주려고 애쓰거나, 보다 센 영화적 언어들을 구사할 때마다 그녀의 세계가 무언가 모험을 하고 있으나 이상하게도 어딘지 자유롭지 않거나 종종 과시하는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는데, 이 영화를 보고 좀더 분명하게 알게 되었다. 안선경 감독은 연극적인 세팅보다는 일상적 순간의 디테일에, 어떤 설정들 안에서 상황과 감정을 조직할 때보다 그 설정들이 틈입할 수 없는 상황과 감정을 들여다보며 거기서부터 시작하는 순간에 더 강한 것 같다. <파스카>는 그 강점으로 지탱되는 여리지만 당당하고, 무너질 것 같지만 버티는 영화다.

미래의 관객을 위한 가이드가 되길

마침내 열세편의 영화들을 모두 말했다. 몇몇은 이미 개봉 일정이 잡혀 있고, 나머지는 애타게 개봉의 기회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운 좋게 먼저 영화들을 접하고 쓴 이 단상들이 미래의 관객이 이 영화들을 만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을까. 그럴 수 있다면 좋겠다. 어쨌든 열세편의 영화를 다시 떠올리며 이 긴 글을 다 쓰고 나니 이제야 올해 부산영화제가 내 심신에 남긴 짙은 그림자를 떨쳐내고 남은 가을을 보낼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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