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 이적씨의 개인사정상 이번주는 그의 친구 태일씨가 보내온 이메일을 대신 게재합니다. 독자 여러분의 넓은 양해를 구합니다.
1.
안녕하세요, 심은하 편집기자님, 태일이라고 합니다. 이적이 이리로 메일을 보내면 된다고 해서. 저에 대해서 아마 많이 알고 있을 거라고 하던데 정말인가요? <씨네21>을 요즘 제대로 읽은 적이 없네요. 어릴 적엔 <키노>도 열심히 읽고 그랬는데, 뭔 말인진 하나도 모르면서. 들고 다니면 무지하게 있어 보였거든요. <키노>는 이제 안 나오죠? <무비위크>도 지하철 가판대에서 안 보이더군요, <씨네21>도 곧 그렇게 되는 거 아닙니까? 흐흐, 농담입니다. 전에 이적이 제멋대로 제 이야기를 칼럼에 쓰고 있다는 소릴 듣고 열 받아서 인터넷에 올라온 칼럼 몇 꼭지 찾아본 적은 있죠. 말장난 좋아하는 친구라 제목부터 유치하대요. 저에 대해서는 꽤 많이 순화했더군요. 배려라기보다는 원래 소심한 친구라 그래요. 어쨌든 각색도 좀 있고 그 정도면 미화도 하는 것 같고, 결정적으로 실제 저를 연상시킬 단서가 별로 없길래 그냥 내버려두기로 했습니다. 아니었다면 콩밥을 먹이든지 눈텡이에 주먹을 먹이든지 둘 중 하나는 먹였을 거예요. 하긴 이적 눈은 원체 내려앉아 있어서 티도 안 났겠지만. 기본적으로 권투 8라운드 정도는 뛴 상태의 눈두덩이잖아요. 흐흐. 그나저나 심은하 기자님, 그 심은하는 아니시죠? 영화잡지라 혹시나 해서.
이적이 영화잡지니까 영화에 대한 이야기를 써야 한다고 하대요. 정말 막연한 얘깁니다. 하늘의 별처럼 많은 영화 중에서 뭘 꼽아서 써야 하나, 무지하게 고민했어요. 그러다 제가 그나마 알고 있는 게 음악이니 음악을 다룬 영화 이야기를 써볼까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아실지 모르겠지만 전 얼마 전까지 베이시스트로서 밴드 하나를 이끌었거든요. 과거형으로 얘기해야 하는 지금 상황이 뭣 같지만, 인생 모르는 거니까, 앞으로 또 좋은 일 생길지 누가 압니까? 좌우지간 제가 제일 좋아하는 음악영화가 뭔가 한참 생각해봤어요. 그러다보니 다시 절감한 건데, 정말 불가사의한 일이지만, 이 세상에는 음악영화가 지나치게 많아요. 도대체 왜일까요? 음악이 만만해서? 아니겠지요. 그보다는 음악이 참 좋아서겠지요. 아름다워서겠지요. 어린 시절 음악에 빠지고, 음악에 뻑이 갔던 기억, 음악 하나로 온몸의 신경세포가 다 깨어나던 순간의 기억을 영화에 담고 싶어 하는 감독의 열망 때문이겠지요. 저도 그 맘은 십분 이해합니다. 안 그렇겠어요? 지지리도 돈 안되는 음악에 이십년 넘게 몰빵했던 사람이니까. 근데 음악에 관한 영화 만드는 건 생각만큼 쉬운 일이 아니에요. 예전에 그런 얘기를 들은 적 있는데, “음악에 대해 글을 쓰는 건 건축에 대해 춤을 추는 것과 같다”. 한마디로 뻘짓이란 얘기죠. 음악에 대한 영화를 만드는 것도 크게 다른 것 같지 않아요.
음악영화들이 비슷한 패턴을 보이는 것도 실망스러워요. 스포츠영화에 빤한 패턴이 있는 것처럼 음악영화에도 그런 게 있거든요. 떠오르는 대로 몇 가지만 예를 들어볼까요.
먼저 ‘왕년의 용사들이 다시 뭉쳐 능숙하진 않지만 애틋한 하모니를 이뤄낸다’ 패턴. 한국영화 중에도 이런 패턴의 영화가 몇개 있었는데 거론할 만큼 괜찮았던 작품은 없는 것 같고, 제가 보기에 이 패턴으로 제일 성공한 영화는 <블루스 브러더스>가 아닐까 싶습니다.
또 ‘문제학생들이 새로 부임한 음악선생과의 교감으로 새 삶을 찾는다’ 패턴. 선생이 미셸 파이퍼든 우피 골드버그든 차인표든 큰 상관은 없죠. 학교가 아니라 교도소여도 그렇고. 이 패턴을 역으로 비틀어 그나마 웃음을 건진 영화로 제가 좋아하는 <스쿨 오브 락>이 있겠군요.
아니면 ‘천재소년이 주변의 박해를 극복하고 결국 대가로 성장한다’ 패턴. 아마 일반인들이 음악인에 대해서 갖는 환상 중에 제일 강력한 게 이런 걸 거예요. 저도 오케스트라 스코어를 읽기만 해도 교향곡이 다 들린다는 마에스트로 이야기를 접하면 오금이 저리거든요. 천재성도 필요하지만 훈련이 더 중요하다는 점은 간과되기 쉽죠. 게다가 성공은 운빨이 8할이라고요. 저같이 못 뜬 놈이 이런 얘기를 하면 더 찌질해 보이겠지만 말입니다. <어거스트 러쉬> 같은 신동 이야기는 손발이 오그라들어요. 얼마 전에 케이블에서 했던 음악드라마 <몬스타>의 장면들같이.
그럼 너는 어떤 음악영화를 좋아하냐. 어떤 게 공식을 따르지 않은 음악영화냐 하고 물으신다면, 글쎄요. <원스> 같은 영화도 괜찮았지요. 슴슴하고 자극적이지 않고. 문제는 음악이 제 취향이 아니라는 건데… 아직도 제 마음속에 남아 있는 최고의 음악영화는 앨런 파커 감독의 <커미트먼트>랍니다. 아일랜드의 노동자계급 젊은이들이 ‘우리는 유럽의 흑인이다’라는 슬로건 아래 모여, 난데없이 흑인음악 솔 밴드를 결성하는 이야기죠. 처음부터 끝까지 난장판, 좌충우돌, 대소동의 연속인데 밴드를 해본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포복절도할 만한 리얼한 캐릭터들이 즐비해요. 노래는 좀 하는데 성격이 개차반인 놈, 과거가 불분명한 허세 가득한 선배, 몰래 연애하는 남녀 멤버, 연주 잘한다 싶더니 재즈로 빠지는 색소포니스트 등등. 나름 흥망성쇠를 겪고 마지막에 다시 각자의 삶으로 돌아가는데 그게 참 가슴에 와 박혀요. 지금 저로선 더 그렇죠. 절절해요. 아… 씨발. 한번 더 봐야겠다. 눈물난다. 죄송합니다만, 이따가 메일 이어서 쓸게요.
2.
방금 <커미트먼트> 보면서 소주 세병 깠습니다. 이 영화가 최고예요. 기자님은 보셨겠지만, 못 본 사람들한테 추천 좀 해주세요. 앨런 파커 감독은 음악을 진짜 잘 알아요. <페임>이나 <핑크 플로이드의 벽> <에비타> 같은 본격 음악영화 말고도 <엔젤 하트> 같은 영화의 가스펠 뮤직도 죽이죠. 젊을 때 밴드깨나 해봤을 거예요. 감독이 특별한 장치 없이 영화를 만들어도 음악이 좋으니 음악영화가 되잖아요. 대니 보일의 <트레인스포팅> 같은 영화도 저는 음악영화로 본다고요. 그러고 보니 그 얘길 할걸 그랬나. 다음엔 그 영화 얘기 써볼까요? 아니, 아마 이젠 더 기회를 안 주실 것 같기도 하고. 모르죠. 이적이 또 빵꾸 내면서 부탁할지. 촬영이 바빠서 어쩌고 하면서 전화 왔던데, 그쪽에도 그렇게 얘기했죠? 아닌 거 같아. 놀러간 거 같아. 전화로 부탁하는 목소리가 너무 깔려 있더라고. 과장돼 있단 얘기지. 그 정도는 눈치챌 사이에요. 이십년이 됐으니까. 어쨌든, 오늘은 이만 줄이겠습니다. 나중에 얼굴 보고 얘기해요. 고민도 좀 들어주시고요. 심은하 기자님, 저는 이제 뭘 하고 살면 좋겠습니까? 음악은 아름다운 건데 왜 밥은 안 먹여줍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