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대 출신 배우.’ 지금이야 무척 어색한 표현이지만 1990년대 중후반 한국 영화계에 김의성이 등장했을 때만 해도 그를 단골로 수식하던 표현이었다. 지금의 젊은 관객에게야 거의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의 이야기이고, 지금의 그 역시 기억을 떠올리기조차 민망해하지만 한때 그는 <억수탕>(1997), <바리케이드>(1997) 등 충무로의 잘나가는 주연급 배우였다. 1990년대 중후반, 변화하는 한국 영화계의 상징이 장선우와 박광수로부터 홍상수와 김기덕으로의 이동이었다면, 홍상수의 데뷔작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1996)에 출연하고 김기덕이 <악어>(1996)와 거의 동시에 준비했던 두 번째 영화 <야생동물 보호구역>(1997)에 출연할 ‘뻔’했기에 그의 갑작스런 퇴장은 많은 사람들을 안타깝게 했다. 하지만 그는 거의 15년 만에 돌아와 출연한 홍상수의 <북촌방향>(2011) 이후 <건축학개론>을 지나 <남영동1985>와 <26년>, 그리고 현재 맹촬영 중인 한재림의 <관상>에 이르기까지 새로이 연기에 대한 맛을 느껴가고 있다. 아직은 뻔뻔하게 여기저기 부딪혀보고 싶다는, 이제야 배우로서의 행복을 알아가고 있다는 그를 만났다.
-<남영동1985>는 어떻게 출연하게 됐나. =나와 가장 친한 친구가 권해효인데 내가 연기를 그만두고 베트남으로 갔을 때도 나를 제일 깊이 이해해준 친구였다. 그러다 <북촌방향>에 출연하게 되고 다시 연기를 하겠다고 하니 해효는 물론이고 해효와 10년 넘게 함께했던 소속사 ‘안투라지’의 최길수 대표가 정말 많이 도와줬다. 그런데 안투라지에는 나와 권해효, 박원상 그렇게 셋밖에 없다. (웃음) 지난해 부산국제영화제 때 박원상과 함께 <부러진 화살>을 보는데 너무 감동을 받아서 나도 모르게 제일 먼저 일어나 박수를 쳤다. 영화적으로 아주 훌륭하고 어쩌고를 떠나서 영화가 지닌 진실의 힘이 이런 거구나, 하고 감탄했고 기회가 된다면 정지영 감독님과 그 어떤 작업이라도 해보고 싶었다. 말하자면 <남영동1985>에 같은 소속사 배우인 박원상이 주연을 맡으면서 ‘끼워팔기’가 된 거다. (웃음)
-<남영동1985>의 문성근과 이경영은 각각 <네온 속으로 노을 지다>(1995)와 <엄마에게 애인이 생겼어요>(1995)로 만났던 사이다. 감회가 남다르겠다. =‘나이 먹는 게 괜찮구나’, ‘배우로서 늙는 것도 참 좋은 거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해주는 선배들이다. 특히 이경영 선배는 <26년>에서도 함께했는데 한때 한국영화의 대들보 같던 선배가 너무 멋지게 나이 들어가는 모습을 보면서 기분이 좋고 또 위안과 용기가 된다. 물론 지난 몇년간 <무적자>(2010)나 <써니>(2011), <모비딕>(2011) 등 여러 작품에 출연하셨지만 스탭들에게 ‘선생님’ 소리 들으며 촬영장에 잠깐 왔다가는 것과 달리 하루 종일 현장에 붙어 수다 떨고 같이 생활하듯 찍었으니 기분이 남달랐을 거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으니까. 어딘가에 ‘소속’된 느낌으로 촬영현장에 ‘계속’ 같이 있는다는 거, 그게 무척 행복했다.
-그런 행복을 다시 느끼기까지 너무 오랜 세월이 걸렸다. 과거 ‘서울대 출신 배우’라는 연예기사가 메인을 장식했을 정도로 잘나갔었다. 그러다 갑작스레 연기를 그만뒀다. =당시 솔직히 큰 이득이 되긴 했다.(웃음) 연극하던 시기에 이현승 감독을 알았고 <네온 속으로 노을 지다>에 출연하게 됐다. 두 번째 영화인 <엄마에게 애인이 생겼어요>에서 갑자기 큰 역할을 맡게 됐다. 아직도 그 영화로 놀림받곤 하는데(웃음) 좀 과한 대접이었다고 생각한다. 충분히 준비 안된 상태에서 여러 영화들에 출연했고 지금 생각해도 좀 부끄럽다.
-그러면서 갑자기 연기를 그만두게 된 건가. =어느 순간 너무 연기를 못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연기를 감춰준 감독님들이 대단한 거다. 연극은 잘 모르겠는데 영화는 그게 좀 가능하다. (웃음) 그렇게 뭐가 뭔지 모르니 촬영과정에 깊이 녹아들지도 못했다. 이렇게 계속 하는 게 민폐라고 생각했다.
-그럼에도 수많은 작품 제의가 들어왔을 텐데, 당시 못해서 아쉬운 작품은 없나. =<야생동물 보호구역>이었다. 조재현 형이 같이 하자고 몇번이나 연락해서 설득했는데 결국 못했다. 굉장히 재미있는 작업이 됐을 것 같고 나의 그런 고민들이 바뀌는 전환점이 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해봤지만 이미 다 지나간 일이다. (웃음) 그리고 그때 계속했다면 아마 바로 들통났을 거다.
-역시 ‘가정’에 불과한 얘기지만 당시 홍상수와 김기덕의 초창기를 함께했고 또 할 수 있었던 배우라, 참 많이 안타깝다. =나는 운도 많이 따랐다.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도 내가 따낸 역할이었다기보다 그야말로 우연히 뽑힌 거였다. 당시 홍상수 감독은 신인에다 넉넉한 예산을 확보할 수 없었으니 당연히 내가 1순위 배우도 아니었을 테고. 물론 시나리오가 이상하긴 했지만 나에게는 너무 매력적인 이야기여서 출연을 결심한 것이었다. 지금 또 생각나는 건,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과 <악어>가 그때 거의 동시에 촬영 중이었는데 양쪽 젊은 스탭 친구들이 우연히 어울려 술을 마신 적이 있다. 양쪽 얘기가 달라도 너무 달랐다.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 스탭들은 ‘감독이란 사람이 도통 카메라를 움직일 생각을 안 해’ 그러고, <악어> 스탭들은 ‘우리 감독은 카메라를 물속으로 가지고 들어가’ 그러면서 서로 ‘우리 감독이 훨씬 더 또라이야’라는 걸로 내기를 할 태세였다. (웃음)
-한참 세월이 흘러 <북촌방향>에는 어떻게 출연하게 됐나. =아버지가 편찮으셔서 한국에 잠깐 들어왔을 때였다. 간호하면서 돈도 떨어진 상황이었는데 우연히 찾아뵈었던 홍상수 감독님이 ‘해봐’ 그러셨다. 나중에 작품을 끝내고는 “살은 좀 빼고 배우는 계속해. 그게 너한테 제일 나아” 그러셨다. 고맙게도 포스터에 내 얼굴도 들어가고 이름도 넣어주셨다. 그러니 ‘내가 다시 할 수 있을까’하는 생각에 솔깃한 거다. 결국 아버지는 <북촌방향>을 끝낸 3개월 뒤쯤 돌아가셨는데, 마지막 말씀이 뒤통수를 꽝 때렸다. “재밌게 살아” 그러셨다. 우리 아버지는 그야말로 아주 세속적이고 평범한, 그러면서 또한 실패한 인간의 삶을 사셨다. 고등학생 때는 공부 열심히 하라는 잔소리만 하셨고, 나중에 연극한다고 하니까 ‘극단에 불 지르겠다’고 노발대발하신 분인데 나이 들어 직업배우가 되니까 PD나 감독한테 술 많이 사고 잘 보여야 한다고 하셨다. (웃음) 평소 아버지는 대체 무슨 재미로 세상을 살까, 그런 생각도 했었는데 마지막 가실 때 딱 그러시는 거다. 왜 그런지는 물어보지도 못했다. 그냥 모세가 모리아산에서 불현듯 들은 하늘의 목소리 같은 거였다. (웃음) 그게 연기를 다시 해야겠다고 마음을 굳힌 계기가 됐다.
-하지만 자신의 결심과는 별개로 사람들이 갑자기 막 찾아주는 건 아니다. <건축학개론>에 잠시 출연하기까지 또 시간이 꽤 흘렀다. =그때 결심이란 건 다시 배우가 되기 위해 ‘딴 일을 안 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반년 이상을 혼자 있었다. 그러면서 여기저기서 생활비를 막 빌려서 살았다. 그때 우연히 같은 아파트 옆집에 살던 사람이 바로 이용주 감독이었다. 딱 봐도 굵은 뿔테 안경에 덥수룩한 머리를 하고 그냥 거지였다. (웃음) 늘 마주치면서도 입봉하고 그런 것도 몰랐는데, 어느 날 갑자기 자기가 두 번째 영화를 하는데 출연 좀 해주면 안되냐고 하더라. 생각보다 비중이 적어서 아쉽긴 했지만 시나리오는 참 괜찮았다. 그런데 흥행은 정말 안될 것 같더라. (웃음) 결과적으로 <건축학개론>의 교수 역할은 나에게 큰 도움이 됐다. 사람들이 ‘어, 김의성이 상업영화쪽으로도 뭔가 하려고 하는구나’ 생각하면서 업계 관계자들에게 눈도장 찍게 된 영화라고나 할까.
-지금은 한창 <관상>을 촬영 중인데, 주인공 송강호의 데뷔작이 바로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이기도 하다. =<런닝맨>에도 출연했는데 그건 거의 끝났고, <관상>은 너무 재밌게 출연하고 있다. 또 괴물 같은 영화가 하나 나올 것 같다. 송강호하고는 거의 17년 만에 만나는 거라 <관상> 리딩하던 첫날 정말 즐겁게 마셨다. 술자리에서 강호가 대뜸 “이 형님이 나를 맨 처음 영화하게 해주신 분이야”라고 말하니 좀 쑥스럽기도 하고. (웃음) 연극하던 당시에 좀 알고 있었는데, 홍상수 감독에게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의 극장 지배인 역할로 강호를 추천했었다. 결국 다른 배우가 그 역할을 맡으면서 비중이 줄어들긴 했는데 어쨌건 틀린 얘기는 아니다. (웃음) 그래도 주머니에 넣어둔 송곳은 언젠가 주머니에서 빠져나오게 돼 있다. 그게 뭐 내 덕분이겠나. 강호가 주목받은 건 사실 나중에 <초록물고기>(1997) 때였으니까. 아무튼 <관상> 현장에서도 다른 사람들 보라고 그러는지, 나한테 무척 깍듯하게 대하니까 좀 대접을 받고 있긴 하다. 그런 식의 배려라는 생각이 드니까 고맙기도 하고. 그런데 이젠 다들 잘 알 테니 좀 살살 해도 된다. (웃음)
-이제 배우 김의성의 목표라고 한다면. =1년 정도는 좀더 뻔뻔하게 여기저기 부딪히며 해보려고 한다. (웃음) <건축학개론>도 짧게 나온 거라 다시 쉬면서 ‘이제 돈 빌릴 데 진짜 없는데 큰일이네’라고 느끼던 시점에, 올해 무려 6편이나 출연했다. 소속사의 최 대표와 나의 올해 목표는 ‘최대한 많이 출연하자’는 거였는데 그건 이미 이뤘고, 내년 목표도 크게 다르지 않다. 문득 ‘감독들이 지금 왜 나를 쓸까?’라고 생각해본 적이 있다. 갑자기 많은 작품을 하게 되니 한시적일 수도 있다고 생각하니까. 굉장히 신선한 캐릭터를 만들고 싶은데 적당한 나이의 완전 초보를 쓸 수 없으니, 영화계로서는 낯도 익고 안정적이지만 바깥 관객에게는 날것처럼 느껴지는 배우, 그게 바로 지금 나의 상품성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그런 신선함도 1년까지 가진 않을 거다. 그런 게 다 걷히면 사람들이 다 아는 배우 김의성으로 남게 될 테니, 그땐 진짜 잘해야 한다는 부담감이 있다.
-<남영동1985>와 <26년>은 아무래도 영화가 지닌 무게감 때문에 꼭 덧붙이고 싶은 얘기가 있을 것 같다. =두 영화 모두 인권에 대한 영화라고 생각한다. 지난 정권 동안 인권 상황이 워낙 후퇴했다. 그런 게 쉽게 무너지는 모습에 너무 큰 충격을 받았다. 끊임없이 부딪히고 더 단단하게 다져야 한다. 그리고 내가 배우로서 더 알려지고 어느 정도 관심있는 발언권을 갖게 된다면 스탭 처우 문제도 꼭 얘기하고 싶다. 그것 역시 인권의 테두리 안에 있다. 내가 거의 15년 만에 영화현장에 돌아와보니 하드웨어는 뭐가 뭔지 모를 정도로 발전했더라. 내가 방금 연기한 걸 모니터로 바로 볼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신기할 정도였으니까. 그런데 그 15년이라는 시간이 흘러 기계는 바뀌었어도 조명부 막내의 삶은 여전하더라. 그런데도 우리가 ‘발전’을 얘기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배우로서 내가 지금 뒤늦게 느끼는 행복을 영화하는 사람들 모두가 느꼈으면 좋겠다는 거다. (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