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5년, 남영동 대공분실 515호 숨겨진 22일의 진실이 밝혀진다
1985년 남영동 치안본부 대공분실 515호…그곳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아무도 모른다.
전 국민의 숨소리까지 검열하는 군부 독재가 기승을 부리던 1985년 9월 4일, 민주화운동가 김종태는 가족들과 목욕탕을 다녀오던 길에 경찰에 연행된다. 예전부터 자주 경찰에 호출되었던 터라 큰 일은 없으리라 여겼던 그는 정체 모를 남자들의 손에 어딘가로 끌려간다. 눈이 가려진 채 도착한 곳은 남영동 대공분실. 경찰 공안수사당국이 ‘빨갱이’를 축출해낸다는 명목으로 소위 ‘공사’를 하던 고문실이었다. 그날부터 김종태는 온갖 고문으로 좁고 어두운 시멘트 바닥을 뒹굴며 거짓 진술서를 강요 받는다. 아무 양심의 가책 없이 잔혹한 고문을 일삼는 수사관들에게 굽히지 않고 진술을 거부하는 김종태. 하지만 ‘장의사’라 불리는 고문기술자 이두한이 등장하면서 그의 인생을 송두리째 뒤바꾸는 잔혹한 22일이 시작된다.
대한민국 현대사에서 사라진 22일,
2012년 11월, 지워져서는 안 될 기록이 펼쳐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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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REAL HISTORY ]more
故김근태는 1985년 남영동 대공분실에 끌려가 '장의사집 둘째 아들'로 통하는 고문 기술자 이근안에게 모진 고문을 당했다. 전기와 물이 그의 몸을 할퀴고 지나갔다. 이후 그는 남은 생을 정신적 육체적 고통 속에서 살아야 했다.
이 잔혹한 고문을 고발하는 김근태의 진술이 이미자의 '노래 테이프' 중간에 녹음된 채 미국인권단체에 건네지면서, 남영동 대공분실의 존재는 세계적으로 알려졌다. 이로써 김근태는 '세계 양심수'로서 1987년 로버트 케네디 국제인권상을 받았지만, 그를 가두고 고문했던 국가보안법은 27년이 지난 오늘도 여전히 건재하다. 그는 자신의 책 <남영동> 에서 '인간도살장' 안에 갇혔던 느낌에 대해 다음과 같이 술회한다.
"고문을 할 때는 온 몸을 발가벗기고 눈을 가렸습니다. 그 다음에 고문대에 뉘면서 몸을 다섯 군데를 묶었습니다.머리와 가슴, 사타구니에는 전기 고문이 잘 되게 하기 위해 물을 뿌리고, 발에는 전원을 연결시켰습니다. 처음엔 약하고 짧게, 점차 강하고 길게, 강약을 번갈아 가면서 전기 고문이 진행되는 동안 죽음의 그림자가 코 앞에 다가왔습니다. 이때 마음속으로 '무릎을 꿇고 사느니보다 서서 죽기를 원한다.'는 노래를 뇌까리면서 과연 이것을 지켜내기 위한 인간적인 결단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를 절감했습니다.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울 때마다 아우슈비츠 수용소를 연상했으며 이런 비인간적인 상황에 대한 절망에 몸서리쳤습니다."
故김근태 상임고문의 자전적 수기<남영동>中에서
故 김근태
1947년 2월 14일생- 2011년 12월 30일 사망
1965년 서울대 경제학과 입학
1971년 박정희 정권 부정선거 파동 반대 활동, 교련 데모에 적극 참여.
서울대 내란 음모 사건으로 수배
1985년 8월 민주화운동청년연합 이적단체로 구속
1985년 9월 22일간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고문당함
1987년 김근태&인재근 부부 ‘로버트 케네디 인권상’수상
1988년 87년 6월 민주 항쟁 이후 석방
1989년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전민련 결성을 주도하고 정책기획실장, 집행위원장
1995년 민주당 입당
1996년 15, 16, 17대 국회의원
2004년 7월-2005년 12월 노무현정권 보건복지부 장관
2006년 열린우리당 최고위원 및 당 의장
2007년 고문 후유증 파킨슨병 진단
2008년 민주당 상임고문
2011년 민주통합당 상임고문
2011년 12월 30일 뇌정맹혈전증 2차 합병증으로 별세
[ DIRECTOR’S TALK ]
<남영동 1985>는 故김근태님의 자전적 수기 『남영동』을 토대로 만들어졌다.
김근태는 이 책에서 1985년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자신이 당한 끔찍한 고문(拷問, torture)을 적나라하게 묘사한다.
국어사전에서는 ‘고문(拷問)’을 다음과 같이 풀이하고 있다.
“죄를 진 혐의가 있는 사람에게 자백을 강요하기 위하여 견디기 어려운 육체적 고통을 주며 신문(訊問)함” 혹은, “숨기고 있는 사실을 강제로 알아내기 위하여 육체적 고통을 주며 신문함”
그러나 우리는 27년 전 이곳 서울 한복판에서 거리낌 없이 자행된 하나의 사건을 통해, 이 단어의 뜻풀이가 바뀌어야 함을 말할 것이다. 즉, ‘고문(拷問)’은 “죄를 진 혐의가 있는 사람에게 자백을 강요하기 위해, 혹은 숨겨진 사실을 강제로 알아내기 위해 견디기 어려운 육체적 고통을 주며 신문하는 것”이 아니라, “없었던 사실을 실제 있었던 사실로 강제로 만들어내기 위해 견디기 힘든 육체적 고통을 주며 신문하는 것”이었음을 영화 속에서 밝힐 것이다.
영화 <남영동 1985>는 인간의 끔찍한 야만성, 비인간성을 증언한다.
고문이 인간의 육체뿐만 아니라 영혼까지 파괴하는 끔찍한 행위임을 고발한다.
그 증언과 고발에는 다음과 같은 질문들이 수반될 것이다.
고문 피해자들이 육신이 파괴되고 고통을 호소할 때, 정말로 가해자들은 그 고문행위를 즐기는가?
인간에게 그런 가학적 욕구가 숨어 있다면, 이를 부추기는 것은 무엇일까?
육체와 정신이 파괴된 고문 피해자들은 현재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는가?
그들의 파괴된 심신은 치유가 불가능한 것인가?
비단 故김근태 뿐이겠는가. <남영동 1985>는 질풍처럼 경제성장을 이뤄온 우리 현대사 이면에 카메라를 들이대고 감추고 싶은 상처를 들여다본다. 고개를 돌려버리고 싶은 잔혹한 진실을 들추어낸다.
상처는 덮어두면 곪는다. 곪은 상처는 터지지 않으면 썩은 채 굳어버린다.
역사적 상처도 마찬가지다. 곪아 터지지 않고 썩은 채 굳어버려 치유할 수 없는 내상이 되기 전에, 그 상처를 들추고자 한다.
지나간 시대, 군부 절대권력이 부도덕한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국민에게 가했던 가공할 폭력들.
국가가 그 이름을 걸고 국민에게 가했던 그 야만적인 폭력들.
과연 피해자들은 20년이 지난 지금, 이 폭력을 용서할 수 있을까?
또한 이들이 용서한다고 해서, 과연 그것이 역사적 화해로 승화할 수 있을까?
영화 <남영동 1985>는 바로 이 질문들을 던지기 위해 만들었다.
정지영 감독
[ ABOUT MOVIE ]
<부러진 화살>에 이은 정지영 감독의 2012년 두 번째 문제작!
2012년 상반기 대한민국을 뒤흔든 최고의 문제작은 단연코 <부러진 화살>이다. 누구도 흥행을 점치지 않았던 <부러진 화살>은 시사회 이후 무서운 속도로 입소문을 타며 1월 18일 개봉, 전국 3,435,333명(영진위 통합전산망 집계기준)의 놀라운 흥행 스코어로 상반기 히트작에 자리매김했다.
안성기, 박원상, 문성근 등 연기파 배우들이 포진한 작품이었으나 스타파워가 큰 한국영화 시장에서 <부러진 화살>의 성공은 정지영 감독의 뚝심 덕분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정지영 감독은 잘못된 재판 과정에 대한 항변, 권력층을 향한 속 시원한 한방의 카타르시스로 관객들을 사로잡은 <부러진 화살>에 이어, 2012년을 마무리하는 두 번째 문제작으로 <남영동 1985>를 내놓았다.
상업적인 기획영화 위주의 극장가에서 진지한 문제의식을 가진 영화로 흥행 돌풍을 일으켰던 정지영 감독이 <남영동1985>로 또 한번 큰 반향을 일으킬지 영화 관계자들은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부산국제영화제를 뒤흔든 최고의 문제작! 오피니언 리더들이 극찬한 영화!
지난 10월 6일, 부산은 영화 한편으로 술렁이기 시작했다. 바로 <남영동1985> 갈라 프레젠테이션 부문 공식 상영이 있던 날, 부산영화제의 모든 이목은 이 영화에 집중됐다. 전날 미리 기자시사회를 통해 본 기자들의 반응은 이미 하루 만에 영화를 화제작 반열에 올리기에 충분했다. 그리고 갈라 프레젠테이션 공식 상영이 있던 날, 레드카펫에는 출연배우와 감독, 그리고 故 김근태 의원의 부인인 인재근 의원이 함께해 그 의미를 더했다. 영화의 전당 하늘연 극장을 가득 메운 관객들의 박수소리는 영화 상영 전보다, 오히려 상영 후 더욱 우렁차게 울렸다. 충격과 분노 끝에 흐르는 눈물을 참지 못한 관객들은 눈물을 훔치며 뜨거운 박수를 보냈다. 인재근 의원은 박원상을 끌어안고 눈물을 멈추지 못했다. 고문기술자 이두한 역할을 맡은 이경영은 고개를 숙인 채 “죄송합니다.”라며 관객들에게 사죄했다. 부산국제영화제 기간 내내 배우와 영화를 향한 오피니언 리더들의 찬사가 끝없이 이어졌다. 이준익 감독, 김대승 감독, 배우 안성기, 장률 감독 등 수많은 감독 및 배우들이 <남영동1985>를 보기 위해 극장으로 발걸음 했다. 이러한 부산영화제의 뜨거운 열기는 삽시간에 전국을 뜨겁게 달구었고, <남영동1985>는 대한민국이 주목해야 할 문제작으로 급부상했다. 현재도 오피니언 리더들의 추천사가 이어지고 있는 가운데 <남영동1985>가 일으킨 부산발 감동이 11월 22일, 대한민국을 뒤흔들 수 있을지 귀추가 주목된다.
故 김근태 님의 자전적 수기를 바탕으로 한
1985년 남영동 대공분실의 잔인한 기록
故 김근태 전 민주통합당 상임고문(이하 직위 생략)의 자전적 수기 『남영동』은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김근태 자신이 겪은 비인간적 고문을 고발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 원고가 출판사에 도달한 시기는 1987년 1월 17일, 박종철 고문치사사건이 있은 몇 개월 후다. 이미 원고는 여러 출판사를 거친 탓에 너덜너덜해진 상태였고, 당시 정치 분위기로 봤을 때 출간 자체가 어려운 상황이었다. 그러나 출판사의 굳은 결심 아래 『남영동』은 세상의 빛을 보았고, 2012년 지금까지 5쇄를 거듭하며 꾸준히 판매되고 있다.
영화 <남영동 1985>는 영문도 모른 채 남영동 대공분실에 끌려간 김종태가 간첩 활동에 대한 거짓 진술을 토해내는 고문의 과정 22일을 그리고 있다. 김근태 외에도 피해자는 수많았다. 당시 고문 피해는 학생 운동, 민주화 운동 관계자뿐만 아니라, 평범한 일상을 살아가는 이들에게도 언제든 들이닥칠 수 있는 일이었다. 사상이 의심되는 자는 여지없이 각 지역 고문실로 연행되어 가혹한 고문을 받았고., 스스로 빨갱이라고 진술한 뒤 반 송장이 되거나 죽어서야 고문실을 나갔다. 모든 것이 ‘국가보안법’이라는 이름 아래 자행된 일이었다.
정지영 감독은 주인공을 김근태 개인에게 한정시키지 않고 고문이 누구에게나 닥칠 수 있는 불행이라는 점을 상기시키기 위해 ‘김종태’라는 이름을 부여했다. 고문기술자 역시 시대가 만들어 낸 괴물이라는 의미로 실명 대신 ‘이두한’이라는 가명으로 등장한다. <남영동1985>는 수많은 피해자들을 대변해 고통스럽고 충격적인 사실들을 덤덤하면서도 날카롭게 들이미는 한편, 고문공화국이라 불렸던 대한민국의 한 시기, 그 날 선 과거를 생생하게 재현함으로써 독재정권 하의 고문 실체를 낱낱이 밝히고 있다.
남영동에서의 순간을 모두 기억하는 김종태가 20년 후 교도소에서 이두한과 만나는 장면은 보는 이들을 고통스러우면서도 숙연하게 만든다. 무릎을 꿇고 용서를 비는 죄수 이두한을 바라보는 김종태는 지난 20년간 하루도 빠뜨리지 않고 스스로에게 던졌던 질문을 다시금 떠올린다.
“과연, 저 자를 용서할 수 있을까?”
여기서 관객들은 자신에게 질문을 던지게 될 것이다.
‘나는, 그리고 대한민국은 과연 이 치욕스러운 현대사를 용서할 수 있을까?’
[ PRODUCTION NOTE ]
정지영 감독, 1985년 야만의 시대에 맞서다.
김근태 민주통합당 상임고문이 세상을 떠난 2011년 12월 30일, 정지영 감독은 <부러진 화살>의 개봉준비로 바쁜 일정을 소화하고 있었다. 평소 김근태를 존경해왔던 정지영 감독은 그가 세상을 떠난 이후 한동안 부채감을 가졌다고 술회한다. 그는 민주주의를 위해 자신을 희생한 김근태의 삶 앞에 부끄럽지 않고 싶었고,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찾고 싶어 했다. 故 김근태의 자전적 수기 ‘남영동’의 영화화는 그렇게 결정되었다.
정지영 감독은 올해 2월 충주에 있는 지인의 농장에 자리를 잡고 불과 1개월 만에 초고(<야만의 시대>)를 탈고했다. 그가 이토록 짧은 기간 안에 초고를 완성시킬 수 있었던 원동력은 이 어두운 시대의 이야기를 잊혀지기 전에 꼭 다시금 언급해야 한다는 사명감, 이런 역사가 또다시 반복되어서는 안 된다는 절박함 때문이었다.
정지영 감독에게 깊은 인상을 남긴 것은 故 김근태가 2005년, 자신을 고문했던 이근안을 직접 면회했던 사건이다. 故 김근태는 자신을 잔인하게 학대한 고문기술자를 20년 만에 만나고 돌아와, 여전히 그를 용서하지 못하는 자신을 탓했다고 한다. 정지영 감독은 『남영동』의 영화화가 단순히 고문을 폭로하고 고발하는 것을 넘어 다음 세대가 이 역사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지 비전을 제시할 수 있는 작업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 생각은 다양한 고문 피해자들을 만나는 작업으로 이어졌다. 실제 고문피해자들의 모임인 ‘진실의 힘’을 찾아가 여러 차례 그들의 사연을 경청했다. 때로는 같이 슬퍼하고, 때로는 모진 꾸지람을 듣기도 했다. 이 과정을 거쳐 단순히 ‘고문은 나쁜 것’이라는 단편적인 인식을 넘어 가슴으로 이 이야기에 접근할 수 있었다. 정지영 감독의 <남영동1985>는 그의 전작인 <남부군>, <하얀 전쟁>에서 보여준 지적이고 논리적인 연출과는 달리 대중의 눈높이와 감성으로 접근했던 <부러진 화살>에 이어 한층 깊어진 감수성을 확인하게 한다.
340만 흥행의 주역 <부러진 화살>의 배우&스탭들,
용감하게 다시 뭉치다.
<남영동1985>를 제작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무거운 정치 시대 소재인 탓에 투자도 쉽게 받을 수도 없었고, 끔찍한 고문 장면에 응할 배우가 있을지도 의문이었다. 소재가 소재인지라 시나리오를 여러 사람에게 보여줄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정지영 감독이 의미 있는 작업을 한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부러진 화살>의 배우와 스탭들이 하나 둘 뭉치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합류 의사를 밝힌 것은 <부러진 화살>에서 박준 변호사로 호연한 박원상이었다. 처음 박원상의 캐스팅 이야기가 나왔을 때 정지영 감독을 제외한 제작진은 ‘이두한 역’을 떠올렸다. 그러나 감독과 배우의 생각은 달랐다. 초고를 읽은 박원상은 바로 다음날부터 다이어트에 돌입해 한 달 만에 10kg이상 감량함으로써 故 김근태를 연상시키는 모습으로 나타나 스탭들을 깜짝 놀라게 했다. 촬영 첫날 카메라에 비친 박원상의 모습은 완벽한 민주화 운동가 ‘김종태’의 모습이었다. 게다가 육체적으로 힘든 고문 장면들을 촬영하면서도 꿋꿋이 버틸 수 있었던 그의 엄청난 체력 또한 제작진에게는 뜻밖의 선물이었다.
한편 고문기술자 이두한 役은 캐스팅이 어려웠다. <부러진 화살> 개봉파티가 있던 날 이경영은 다음 작품에 맞는 역이 있으니 같이 하자는 정지영 감독의 말을 흔쾌히 받아들였다. 그러나 그는 정지영 감독이 언급한 ‘다음 작품에 맞는 역’이 그토록 까다로운 역할일 줄은 꿈에도 몰랐다고 한다. 일명 ‘꽃중년’이라고 불리는 외모의 이경영이 어떻게 고문기술자 역을 할 수 있느냐는 반대 의견도 있었다.
그러나 시나리오 전달 과정에서 이경영과 악수를 나누며 손을 잡아본 정상민 대표는 정 감독이 옳았음을 직감했다. 이경영의 크고 투박한 손은 그의 영화 속 이미지들과는 크게 대조적이었다. 정말 고문기술자의 손처럼 느껴진다는 정 대표의 말에 이경영은 ‘내 몸 몇 군데가 좀 그렇지.’ 라며 직접 두툼한 견갑골과 팔뚝을 보여주었다.
결국 이경영은 이미 촬영 중인 한 편을 제외한 나머지 스케줄을 모두 포기하고 <남영동1985>의 고문기술자 이두한 역을 흔쾌히 수락했다. 이로써 이경영은 정지영 감독의 영화에 가장 많이 출연한 배우가 되었다. (<하얀 전쟁>, <헐리우드 키드의 생애>, <부러진 화살>, <단편 이헌의 오딧세이>, <남영동1985>) 또한 실력 있는 중견배우인 명계남, 김의성, 서동수, 대중에게 친숙한 이천희, 연기파 신인 김중기 등 많은 배우들이 영화의 취지에 공감하며 <부러진 화살>과 마찬가지로 노 개런티로 출연을 약속했다.
스탭들의 참여도 잇따랐다. 연출, 제작팀, 촬영팀, 조명팀, 미술팀, 동시녹음팀, 무술팀, 특효팀, 특수시각효과, 사운드팀 등이 <부러진 화살> 때처럼 소액의 개런티로 제작에 참여하기로 결정했다.
대한민국 현대사에 숨겨진 끔찍한 비극,
남영동 대공분실 515호를 재현하다.
제작진은 실제로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취조를 당한 경험이 있는 정지영 감독의 지인과 대공분실을 찾았다. 1976년에 세워져 1990년대까지 시국사범을 취조하는데 사용된 이 건물은 남산의 안기부, 서빙고동의 보안사와 함께 군부독재 시대의 공포를 상징하는 건물이었다. 그러다가 2005년 10월 이후 경찰의 인권보호센터로 개칭한 뒤 인권교육을 위해 일반인에게도 개방되었지만, 끔찍한 고문이 자행되었던 현장인 탓인지 발길이 뜸하고 을씨년스러웠다. 물론 모든 방들은 원형만 유지한 채, 고문의 흔적들은 말끔히 지워졌고 고문실 하면 떠오르는 욕조도 철거되었다..
다만, 1987년 6월 항쟁을 불러일으킨 故 박종철 열사가 고문 받았던 취조실만이 그대로 남겨져 과거의 역사를 증언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공포와 호기심이 앞섰던 젊은 스탭들조차도 이 방에 들어서는 순간 역사의 무게를 느낄 수밖에 없었다.
우선 미술팀이 나서서 증언에 의존해 故 김근태가 고문 받은 515호실의 디테일을 재현하기 시작했다. 실제 건물에서 문고리 천장의 장식, 철조망, 샤워꼭지 하나까지 세세히 촬영해 비슷한 물건들을 제작했다. 가장 재현하기 힘들었던 소품은 고문기술자 이근안이 고안했다고 알려진 일종의 고문대인 ‘칠성판’이었다. 칠성판이란 원래 시신 밑에 깔았다가 입관 시 함께 들어가는 장례용품으로서, 이근안은 물고문과 전기고문을 할 때 피의자를 고정시키는 이 도구에 ‘칠성판’이라는 끔찍한 이름을 붙였다. 하지만 이 역시 실물이 남아있지 않은 탓에 오로지 증언에 의존해 제작해야 했다.
그렇게 제작한 ‘칠성판’은 언뜻 보면 좁고 평범한 탁자처럼 보였다. 사람을 눕힌 뒤 죽기 직전까지 고문했던 고문대라고는 믿겨지지 않았다.
고문 현장의 리얼리티, 열정과 의지의 비하인드 스토리
감독과 제작진에게 가장 어려웠던 문제는 고문을 사실적으로 보여주는 일이었다. 모두들 끔찍한 고문 장면을 직접 본 경험이 없을뿐더러 가해자나 피해자 입장이 되어본 적은 더더욱 없었다. 증언과 자료에 의존해 고문을 재현하면서 더 큰 난관이 닥쳤다. 사실적으로 보여주자니 어느 정도는 실제로 고문을 연출하는 수 밖에 없었다. 이 과정에서 배우가 상해를 입지 않도록 서둘러 안전 장치를 강구해야 했고, 이 과정에서 조감독은 여러 차례 실험 대상을 자청해 직접 고문 장면의 테스트 촬영을 진행했다.
그럼에도 김종태 역의 박원상은 여러 장면에서 고통스러워했다. 특히 코와 입으로 물이 세차게 쏟아져 들어오는 물 고문 장면이 고역이었다. 스탭들은 매 테이크가 끝날 때마다 달려가 배우의 안전을 확인하며 마음을 졸였다. 그런데, 촬영이 끝난 뒤 박원상의 고백은 또 한번 제작진을 놀라게 했다. 그는 어릴 때부터 물에 대한 공포가 심해 수영도 하지 못했다고 한다. 그런데 이번 <남영동1985> 촬영에서 물 고문을 견뎌내며 물에 대한 트라우마를 극복했다는 것이다. 스탭들을 안심시키려 한 말이겠지만, 아찔해지는 동시에 박원상의 프로 의식에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한편 어려운 장면들의 숨은 공신은 고문 수사관 역을 맡은 배우들이었다. 화면에서 고문을 받는 배우도 고통스럽지만, 이들 또한 이 장면들을 위해 때로는 여럿이 때로는 혼자 종태 역의 박원상을 들어 옮기거나 잡고 있어야 했다. 이렇게 ‘고된 노동’까지 하며 연기를 순탄히 진행하는 일은 결코 쉽지 않다. 특히 여러 번 다시 촬영하는 영화의 특성상 고문 받는 자나 고문하는 자나 녹초가 되는 상황이 빈번했다. 극중에서 “우리가 없으면 어떻게 저 자술서를 받아냈겠어!”라며 흥분하는 김계장(이천희)의 대사가 유독 그럴싸하게 들리는 것은 그 때문이다.
촬영 현장을 지켜준 민청련의 상징, 두꺼비
<남영동1985>가 크랭크인 하던 4월 22일 아침. 남양주 종합촬영소 6번 세트에 두꺼비 한 마리가 들어왔다. 제작진은 스탭 한 명이 전날 두꺼비 꿈을 꾸었던 것을 기억하고 영화가 잘 될 조짐이라며 좋아하기만 했다. 그러나 열흘 뒤 故 김근태 의원의 부인인 인재근 여사가 방문해 놀라운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생전에 고인이 몸담았던 민청련(민주화운동청년연합)의 상징이 두꺼비라는 것이다. 이 단체가 두꺼비를 상징으로 쓴 이유는 이렇다. 두꺼비는 뱀에게 잡아 먹힘으로써 자신의 독으로 뱀을 죽이고 두꺼비 새끼들이 뱀을 자양분으로 새롭게 성장할 수 있는 토대를 만든다는 것이다. 따라서 두꺼비는 뱀 같은 독재정권에 대항하는 민주화 운동의 상징물로 쓰인 것이다. 촬영장에 두꺼비가 나왔다는 말을 들은 인재근 여사는 너무나 기뻐하며 다음 방문 때 민청련 창립 30주년을 기념해 제작한 두꺼비 걸개그림을 선물했고, 두꺼비 그림은 촬영기간 내내 세트안에서 배우와 스탭들을 지켜주었다.
눈물과 저항의 대표곡 ‘훌라송’과 ‘벨라 차오’가 심금을 울리다.
故 김근태 상임고문은 1985년 12월 민추위 사건 1심 당시, 대공분실에서 고문을 당하는 동안 투쟁가인 ‘훌라송’의 가사인 ‘무릎 꿇고 살기보단 서서 죽길 원하노라…’를 되뇌며 고문의 고통을 견뎠다고 진술한 바 있다. 당시 그를 지켜보던 방청석은 그가 벌인 힘겨운 싸움을 짐작하게 하는 이 한 마디에 눈물 바다를 이루었다고 한다.
영화에서 ‘종태의 테마’로 사용되는 훌라송은 80년대 시위에서 널리 불려진 노래로서 우리에게는 ‘손을 잡고 오른쪽으로 …’ 라는 가사가 들어가는 동요로도 잘 알려져 있다. 본래 이 노래는 ‘Johnny I hardly knew ya’라는 제목의 아일랜드의 노래로서 전쟁터에서 부상당한 채 돌아온 남편을 알아보지 못하는 아내의 비통한 마음을 노래한 민요이다. <남영동1985>에서 메인 테마로 사용된 이 음악은 원곡의 비통함, 가사의 비장함을 살린 편곡으로 영화의 감동을 배가시키고 있다.
‘종태의 가족의 테마’로 등장하는 ‘Bella Ciao’도 경쾌한 멜로디 때문에 사랑 노래쯤으로 오해를 받기도 하나, 역시 정치적 의미가 깊은 곡이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 점령군에게 치열하게 저항했던 이탈리아 파르티잔 젊은이의 안타까운 사랑을 그린 노래로서 자유를 사랑하는 세계 각국의 사람들 사이에서 여전히 애창되고 있다. 한편 극중 고문기술자가 부는 휘파람의 원곡인 ‘My Darling Clementine’은 19세기 미국 서부 개척시대의 골드러시를 배경으로 이주해온 광부가 수해로 익사한 딸을 그리워한다는 내용으로, 애절한 가사와 음조가 이두한의 물고문 장면에 묘한 아이러니를 부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