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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상 그 너머를 향해 괴물의 아버지들을 만나다
김도훈 2011-08-03

크리처 디자인의 역사를 살피다… <심해에서 온 괴물>의 레이 해리하우젠에서 <클로버필드>의 네빌 페이지까지

'펌프킨 헤드' 모형과 스탠 윈스턴.

<제국의 역습>의 톤톤 모형과 필 티벳.

레이 해리하우젠.

<토탈 리콜>을 작업 중인 롭 보탄(왼쪽).

<스피시즈>의 괴물을 작업 중인 스탭.

크리처 디자이너들은 새로운 시대의 예술가들이다. 잠깐, 그들에게 예술가라는 이름을 붙이는 건 너무 오버 아니냐고? 크리처 디자이너는 그저 연출자의 예술적 영감을 영상으로 재현하는 기술자들에 불과하지 않냐고? 만약 그런 의심을 갖고 있다면 전설적인 크리처 디자이너 스탠 윈스턴의 말을 들어보자. “나는 스스로를 예술가라고 생각한다. 나는 기술자가 아니다. 기술에 무지한 사람이다. 괴물을 창조하고, 그것으로부터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일을 사랑할 따름이다.” 증거가 필요하다면 지금 가장 부상하는 크리처 디자이너 네빌 페이지의 경우를 한번 살펴보자. 네빌 페이지는 J. J. 에이브럼스와 손잡고 <클로버필드>(2008), <스타트렉: 더 비기닝>(2009), <슈퍼 에이트>(2011)의 괴물들을 창조했고, 제임스 카메론의 <아바타>에 등장하는 모든 크리처를 디자인했다. 그가 단순히 감독들의 요구에 따라 괴물을 만들어내는 게 아님은 리스트만 봐도 금방 눈치챌 수 있을 것이다. 네빌 페이지가 디자인한 크리처들은 형태와 움직임이 같은 행성의 한 대륙에서 지구로 떨어진 형제들처럼 쏙 빼닮았다. <괴물>(1982)의 롭 보틴은 어떤가. 그가 창조한 괴물들이 지닌 신체훼손적 미학은 다른 크리처 디자이너들의 특징과는 충분히 구별된다.

레이 해리하우젠, 크리처 디자인을 시작한 사나이

물론 크리처 디자이너라는 직업은 단순히 크리처만을 디자인하는 것은 아니다. 그들은 동시에 전반적인 특수효과와 프로덕션 디자인에 깊이 참여한다. 우리 시대 가장 위대한 크리처 디자이너들의 역사는 할리우드 특수효과의 역사이기도 하다.

물론 모든 역사에는 아버지가 필요하다. 크리처 디자인 역사의 레이 해리하우젠에게서 시작됐다. 1920년생인 해리하우젠은 현대의 크리처 디자이너들에게 여전히 예술적인 영감을 주는 존재일 뿐 아니라 사실상 크리처 디자이너라는 직업 역시 그에게서 시작된 거나 다름없다고 할 수 있다. 해리하우젠은 괴물 고릴라가 주인공인 <마이티 조 영>(1949년작, 1998년에 론 언더우드 감독이 리메이크했다)을 시작으로 괴물을 창조하는 일을 천직으로 삼기 시작했고, 그의 경력은 핵실험으로 깨어난 고대의 해저 괴물이 뉴욕을 침공한다는 내용의 <심해에서 온 괴물>(1953), <지구에서 2천만 마일>(1957) 등 B급 괴물영화의 시대를 거쳐 <제이슨 앤드 아거노츠>(1963), <신밧드의 7번째 모험>(1958)처럼 고대 신화를 배경으로 한 영화들에서 절정을 맞이했다. 아마도 지금의 새로운 관객에게는 해리하우젠의 크리처들은 낡아빠진 구시대의 유물로 보일 것이다(지금이 어떤 시대인가. 심지어 CG가 아니라 애니매트로닉스로 만들어진 괴물도 유물 취급받는 시대 아닌가 말이다). 하지만 CG의 마법이 보편화된 지금에도 툭툭 끊어지듯 거칠게 움직이는 해리하우젠의 스톱모션 크리처들은 여전히 고전적인 마력을 지닌다.

레이 해리하우젠 이후 가장 유명한 크리처 디자이너를 꼽는다면? 지난 2008년 작고한 스탠 윈스턴의 이름이 가장 먼저 거론되어야 한다. 미술과 조소를 전공한 윈스턴은 TV영화 <가고일>(1972)을 시작으로 크리처 디자이너라는 이름을 명함에 박아넣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가 이후 만들어낸 창조물들은 80, 90년대 SF와 호러 장르 속 불멸의 아이콘이 됐다. <프레데터>(1987)와 <에이리언2>(1987), <레비아탄>(1989), <쥬라기 공원>(1993) 등이 모두 그의 손에서 나온 작품들이다. 윈스턴의 괴물 중에서 딱 하나의 대표작을 꼽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꼭 짚고 넘어가야 할 영화는 그가 직접 감독한 호러영화 <펌프킨 헤드>(1988)다. 스탠 윈스턴은 <에이리언2>에서 퀸 에일리언을 창조한 기술을 좀더 발전시켜 이 기념비적인 호박머리 괴물을 완성시켰다. 이후 <쥬라기 공원>과 함께 할리우드는 CG 크리처의 시대로 넘어갔고, <펌프킨 헤드>는 아날로그 기술로 만든 크리처의 시대를 증언하는 거의 최후의 걸작으로 남아 있다.

만약 당신이 <스타워즈> 시리즈의 팬이라면 크리처 디자이너라는 단어를 듣자마자 필 티펫을 떠올렸을 것이다. 필 티펫은 조지 루카스와 함께 <스타워즈>의 거의 모든 크리처를 창조해낸 크리처 디자이너다. 장르팬들이 가장 좋아하는 그의 창조물로는 <스타워즈 에피소드5: 제국의 역습>(1980)에서 호스 행성의 설원을 달리던 톤톤, <로보캅>(1987)의 악당 로봇 ED-209, <스타쉽 트루퍼스>(1997)의 벌레들이 있다. 필 티펫은 현재 ‘티펫 비주얼 이펙트 스튜디오’를 직접 운영하고 있으며, 최근에는 <이클립스> 시리즈의 특수효과와 크리처 디자인을 맡았다. 아쉽게도 필 티펫은 조지 루카스의 새로운 <스타워즈> 시리즈에 참가하지 않았는데, 그 결과는 우리 모두가 잘 알고 있다. 에피소드1, 2, 3에서 지금 머릿속에 곧바로 떠오를 만큼 매력적인 괴물이 있는가?

B급 장르영화 팬들이 가장 숭배하는 크리처 디자이너는 롭 보틴이다. 스탠 윈스턴 회사에서 일을 시작한(사실 지금 활동 중인 대부분의 크리처 디자이너들이 스탠 윈스턴의 제자들이다) 롭 보틴은 ‘악몽의 창조자’라고 이름 붙일 수 있다. 그가 창조한 소름끼치는 괴물들은 스탠 윈스턴과 필 티펫의 대표작들을 PG-13용 괴물로 보이게 만들 정도다. 롭 보틴의 장기를 가장 잘 설명해주는 작품은 역시 존 카펜터의 <괴물>(1982)이다. 장르팬들이라면 인간의 머리에서 거미 같은 다리가 튀어나와 빠르게 기어서 도망가는 <괴물>의 괴물을 결코 머릿속에서 지우지 못할 것이다. 이후 롭 보틴은 기예르모 델 토로의 <미믹>(1997)에서 인간의 형태를 흉내내는 바퀴벌레 괴물을 특유의 끈적거리는 이미지로 창조하며 <괴물>의 장기를 재현한 바 있다. 그의 또 다른 대표작으로는 <토탈 리콜>(1990), 그리고 스티븐 소머즈의 <딥 라이징>(1998) 등이 있다.

CG괴물의 시대… 리얼리티를 잃다

물론 크리처 디자이너라기보다는 초현실주의 미술가에 더 가까운 사람이지만 H. R. 기거의 이름을 빼놓고 넘어갈 수는 없을 것이다. 일찍이 명망 높은 미술가였던 기거가 영화계에 뛰어든 것은 1976년 알레한드로 조도로프스키의 <> 영화화에 참여하면서부터다. 프로젝트는 실현되지 못했지만 함께 작업한 특수효과 기술자 댄 오버논의 초청으로 그는 <에이리언>(1979)에 참여했고, 결국 영화 역사상 최고의 크리처 중 하나를 창조했다. 물론 그는 전통적인 의미로서의 크리처 디자이너가 아니기 때문에 단 세편의 영화 <에이리언>과 <에이리언3>(제임스 카메론의 <에이리언2>에는 참여하지 않았다), <스피시즈>(1995)에만 직접적으로 참여했다. 비교적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영화지만 <스피시즈>의 마지막에 등장하는 완성형 여성 외계인은 더없이 H. R. 기거다운 걸작이다. H. R. 기거를 가장 잘 설명하는 말은 미술평론가 프랑크 리날리의 표현일 거다. “많은 영화에서 괴물들을 만들 때 기거의 작품과 비슷하게 만들어지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기거레스크’(Gigeresque)라는 새로운 단어로서 이 현상을 설명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스탠 윈스턴과 필 티펫과 롭 보틴 이후 우리가 주목해야 할 크리처 디자이너는 누가 있는가. 크리처 디자인의 역사는 레이 해리하우젠 이전과 이후 스탠 윈스턴 이전과 이후, 그리고 <쥬라기 공원>(1993) 이전과 이후로 나눌 수 있다. <쥬라기 공원>이 등장하면서 아날로그 괴물의 시대는 저물고 CG 괴물의 시대가 왔다. 그 덕분에 우리가 얻는 것? CG 기술을 통해 좀더 자유롭게 스크린 속을 뛰어다니는 괴물이다. 우리가 잃은 것? 리얼리티의 효력이다. 아직 CG가 지금처럼 섬세해지기 전인 90년대 장르영화 속 괴물들은 아날로그 괴물들이 지닌 현실적 무게감을 거의 갖고 있지 않았다. 1997년 스탠 윈스턴이 참여한 <레릭>(1997)이 대표적인 예다. 그 영화 속 괴물은 실제 인간 캐릭터들과 어떠한 육체적 화학작용도 만들어내지 못할 뿐만 아니라 질량 자체가 없는 듯 화면 속을 부유하는 CG 공기인형에 불과했다. 지금 당장 90년대 만들어진 괴물영화들의 클립을 유튜브로 다시 한번 살펴보시길. 정말이지 90년대는 괴물 영화팬들의 악몽이었다.

기술과 고전적 미학의 결합

다행히도 최근의 크리처 디자이너들은 좀더 완성된 CG를 통해 아날로그 괴물들이 지녔던 무게감을 되살리는 데 천천히 성공을 거두고 있다. 현재 할리우드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크리처 디자이너는 이미 언급한 <클로버필드> <슈퍼 에이트>의 네빌 페이지다. 곧 그는 쥘 베른의 고전 SF를 영화화하는 데이비드 핀처의 차기작 <해저 2만리: 캡틴 네모>에 크리처 디자이너로 참여할 예정이다. 네빌 페이지와 함께 가장 활발하게 활동 중인 크리처 디자이너로는 알렉 길리스와 톰 우드러프 주니어 콤비가 있다. 두 사람은 스탠 윈스턴의 회사에서 일하며 특수효과, 크리처 디자이너로 활동했고, 가장 최근작으로는 <에이리언 vs 프레데터>(2004)와 <스카이라인>(2010)이 있다. 길리스과 우드러프 주니어 콤비는 <에이리언 vs 프레데터>에서 스탠 윈스턴의 <에이리언2>에 경의를 바치기 위해 CG를 자제한 아날로그 방식으로 퀸 에일리언을 되살린 바 있다. 영화적 완성도와는 상관없이 이들이 창조한 새로운 퀸 에일리언은 아날로그 방식의 크리처에 CG를 더하는 작업이 여전히 유효하다는 어떤 증거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