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디다큐페스티발2011이 3월24일부터 30일까지 롯데시네마 홍대입구점에서 열린다. 올해 11번째 행사를 치르는 인디다큐페스티발의 슬로건은 ‘다큐 재개발’. 사람들을 죽음으로 내모는 재개발 시대에 맞서 다큐멘터리를 ‘재개발’하자는 뜻이다. 빈말은 아니다. 지난해 국내신작전 출품작은 58편이었지만, 올해는 그 곱절에 가까운 100편의 다큐멘터리가 출품됐다. 예심을 맡았던 공미연 감독의 지적처럼 다양한 이력과 직업을 가진 이들이 직접 카메라를 들고 세상의 폐부를 바라본 작품들이 예년보다 훨씬 늘어났다. 국내신작전에서 상영하는 24편(장편 15편, 단편 9편, 개막작 <러브 인 코리아>)의 다큐멘터리들은 ‘다큐 재개발’이라는 슬로건의 실체를 보여줄 것이다. 한편, 국내신작전에는 지난해 영화제가 선정한 3편의 제작지원작도 함께 상영되며, ‘올해의 초점’ 섹션에서는 올해 20주년을 맞이한 푸른영상의 대표작들이, ‘다큐멘터리 발언대’ 섹션에선 ‘죽어가는 4대강’을 다룬 <江 원래>가, ‘아시아의 초점’ 섹션에선 최근 중국 다큐멘터리 경향을 일별할 수 있는 작품들이 상영된다(www.sidof.org).
러브 인 코리아 / 감독 박제욱 / 2010년 / HD / 80분 한국에 정착한 지 10년이 다 된 마붑 알엄은 방글라데시 영화제작진의 한국 촬영을 돕기로 한다. 하지만 와킬 하멧 감독과 스탭들은 촬영 이틀 만에 숙소에서 사라진다. 감독과 스탭들의 실종 사태에 배우들은 당황하고, 프로듀서도 자신도 모르는 일이라고 고개를 젓는다. 사정이 곤란해진 건 마붑 알엄이다. 자국에서 22편의 상업영화를 만든 감독이 종적을 감추면서 졸지에 이주노동자 브로커가 됐으니 말이다. 마붑 알엄은 결국 와킬 하멧이 한국을 찾은 진짜 이유가 무엇인지 알아내기 위해 고향 방글라데시를 찾는다. <러브 인 코리아>는 황당한 사건들이 꼬리를 무는 다큐멘터리다. <반두비> <로니를 찾아서>의 주인공인 마붑 알엄은 방글라데시의 검은손들로부터 위협을 당하기도 한다. 하지만 극영화 아닌가 하는 착각은 다른 이유 때문이기도 하다. 대개 이주노동자 소재 다큐멘터리에서 대상은 타자일 뿐이다. 반면, <러브 인 코리아>는 딱한 인생의 소유자들로 이주노동자들을 통칭하는 한국을 벗어나 그들의 간절한 삶을 ‘드라마틱하게’ 가이드한다.
마이스윗홈-국가는 폭력이다 / 감독 김청승 / 2010년 / HD / 130분 세 중년 남자는 불구속 피고 신분이다. 특수공무집행방해 및 치사 혐의. 용산참사 때 망루에 올랐던 그들은 살아남아 법정에 서게 됐다. 철거민들이 던진 화염병 때문에 참사가 빚어졌다는 주장을 반복하는 검찰에 반박하려는 그들의 입가에는 웃음이 아직 남아 있다. 감방에 가면 서울대 법대 입학 준비나 하자는 농담도 나눈다. 그러나 재판부가 용산참사에 대한 최소한의 상식적인 판단을 내려줄 것이라는 기대마저 무너진다. 용역깡패들을 앞세워 패악질하는 자본에 쫓겨 살려고 망루에 올라간 그들의 분노와 답답함은 공권력에 반하는 유죄증거 1호로 채택된다. 재판부의 선고를 일주일 앞두고 고향과 옛집을 찾은 그들은 속엣말을 털어놓는다. 착잡한 감정의 신변정리만은 아니다. 철거민인 그들은 물러선 변호인들을 대신해 자신들을 직접 변론한다. “국가는 폭력이다.” ‘마이 스윗 홈’을 빼앗긴 그들이 남긴 최후 변론이다. 마지막 장면은 철거민들의 행복한 삶을 앗아간 실제 화인(火因)을 분명히 보여준다.
하얀 정글 / 감독 송윤희 / 2011년 / HD / 87분40초 “OO병원에 가시는 손님께선 이번 역에서 하차하시기 바랍니다.” 지하철에서 친절하게 안내를 해줄 정도로 한국은 병원 접근성이 높다. ‘경제를 살리기 위한’ 정부의 의료 민영화 방침 때문이다. 반면 입원하라고 해도 ‘경제적인 문제’ 때문에 삶을 포기하는 이들은 부지기수다. 본인부담률이 높은 한국은 OECD 국가 중 공공의료 혜택은 꼴찌에 가깝다. <하얀 정글>은 ‘하얀 거탑’의 폐부를 도려내서 눈앞에 생생하게 내보이는 다큐멘터리다. 자본의 굴레 안에서 의사들은 매출에 따라 1등부터 꼴찌까지 순위가 매겨지고, 환자들은 수술비보다 더 많은 입원비를 감내해야 한다. 심지어 과도한 진료비 청구에 의문을 품은 환자는 의사로부터 “살려줬더니 뒤통수친다”며 “재발하면 가만두지 않겠다”는 협박까지 듣기도 한다. <하얀 정글>은 ‘영업사원’ 취급받는 의사들의 고백과 돈이 없어 죽어가는 환자들의 탄식을 외면하며 침묵하는 이들이 누구인지 날선 메스를 들고 추적한다.
신봉리 우리집: 흔한 이야기 / 감독 엄태화 / 2010년 / DV/ 18분30초 <신봉리 우리집: 흔한 이야기>에는 ‘우리’를 먹어치우는 게걸스럽고 탐욕스런 도시가 등장한다. “처음 봤을 때 도둑 들기 딱 좋을” 외진 집을 자연의 친구들과 함께 더없는 보금자리로 일군 (화자이기도 한) 감독의 안온한 일상은 신봉리가 신봉동이 되면서 산산이 깨진다. <신봉리 우리집: 흔한 이야기>는 박탈과 상실의 기록이다. 대규모 아파트 공사가 시작되면서 감독은 더이상 알래스카에서 온 장군이와 진도에서 온 마마를 데리고 산책할 수 없다. 이름없는 고양이 두 마리가 슬그머니 마당에서 웅크리고 잠을 청하는 광경도 더이상 보지 못한다. 숲속의 자장가는 공사장의 굉음에 묻히고, 졸졸 흐르던 계곡은 흙탕물로 변하고, 언덕 위의 하얀 집은 뭉개진다. 감독은 이 모든 것을 흔한 일처럼 묵묵히 지켜보지만 그 시선의 뒤편에는 분노가 웅크리고 있다. “멋진, 너무나도 멋진 그러나 너무나도 똑같은” 아파트의 모델하우스가 ‘우리 집’이 될 수 없음을 카메라는 이미 잘 알고 있다.
그 자식이 대통령 되던 날 / 감독 손경화 / 2011년 / HD / 66분30초 아버지의 ‘그 자식’과 딸의 ‘그 자식’은 다르다. 아버지의 ‘정치’와 딸의 ‘정치’는 다르다. 아버지의 ‘가난’과 딸의 ‘가난’은 다르다. <그 자식이 대통령 되던 날>은 아버지와 딸이 서로의 생각을 논박하는 다큐멘터리다. 딸인 감독은 카메라를 방패삼아 “가난하고 힘없는데 (데모하지 않고) 보수정당을 지지하는 것일까”라는 오래된 질문으로 아버지를 공격한다. 부자들의 경제학을 비웃는 딸에게 아버지는 “부자가 있는 곳에 사람들이 모인다. 근데 부자를 욕하면 보따리를 안 풀 것 아닌가”라며 방호한다. 기세등등하던 딸의 목소리는 점점 작아진다. 자신에게 “가난은 긍정할 수 있는 선택이었지만” 아버지에게 가난은 떨칠 수 없는 숙명이었음을 깨달은 딸은 더이상 아버지의 삶이 틀렸다고 단정하지 않는다. 마법은 아버지에게도 일어난다. 다큐멘터리 감독으로 살아가기로 맘먹은 ‘빨갱이’ 딸에게 ‘보수꼴통’ 아버지는 의도치 않은 격려와 조언을 들려준다. “부를 공평하게 누리면서 다 같이 행복한 사회가 틀림없이 올 것”이라고. 딸은 그제야 아버지가 읊조리는 찬송가를 편안히 들을 수 있다.
선철규의 자립이야기 ‘지렁이 꿈틀’/ 감독 장애 in 소리 / 2010년 / DV / 25분35초 중증장애 때문에 누워서 생활하는 선철규씨는 ‘지렁이’라 불린다. “빨빨거리고 싸돌아다니는 걸 좋아하는 번개맞은” 지렁이다. 인권운동센터에 SOS를 타전해 ‘탈시설’을 요청하고, 장애우들이 함께 사는 ‘체험홈 느티나무’에 들어간다. 하지만 동료들은 남에게 부탁하는 걸 싫어하는 선씨의 유별난 독립심에 거부감을 느끼고, 선씨는 또 한번의 ‘모험’을 감행한다. 선씨의 홀로서기는 느리지만 절대로 퇴보하지 않는다. 그를 구성원으로 받아들이길 주저하는 사회야말로 더 굼뜨다. 그가 ‘두근두근’ 하는 마음으로 세상을 ‘클릭’할 때, 주어진 환경에 적응하는 것이 ‘자립’이라고 말하는 게으른 세상은 지렁이처럼 조금씩 꿈틀거린다.
울음 / 감독 황선숙 / 2010년 / DV / 6분30초 집 밖에서 엄마를 만나도 아는 척하지 않는 7살 소녀가 엄마와 함께 병원을 찾는다. 나이 든 의사는 “엄마가 좋아, 싫어? 싫지?”라 고 묻고, 7살 소녀는 답하는 대신 ‘으앙’ 하고 울음을 터트린다. <울음>은 실제 정신치료 면담 과정을 사운드로 기록한 실험 다큐멘터리다. 부모에 대한 유년기의 양가감정은 누구나 경험하는 것이기에 소녀의 울음은 공포스러울 정도로 강렬한 환기다. 흥미로운 건 소녀가 울음을 그친 뒤 “이제 됐죠?”라고 말하며 병원 문을 나선 뒤에 보여지는 조각난 이미지들에 대한 반응이다. 날카로운 형태로 스케치한 이 무의식의 이미지들은 누구의 것인가. 아이의 것인가, 엄마의 것인가, 감독의 것인가, 아니면 보는 이들의 것인가. 황선숙 감독은 “많은 관객의 오해와 달리 아이는 치료자에게 공감을 받는다”고 했지만 소녀의 ‘울음’은 끝내 침묵하기 위한 무의식의 술책처럼 보이기도 한다.
레즈 / 감독 선호빈 / 2011년 / DV / 80분 2006년 4월, 고려대학교에선 일부 ‘운동권’ 학생들이 (통합된) 보건대학 학생들의 총학생회 선거권을 요구하며 보직교수 9명을 감금, 억류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언론은 “스승의 그림자도 밟지 않는다”는 옛말을 상기시키며 막무가내식 행동을 저지른 패륜아들의 출교 조치를 앞다투어 보도했다. 같은 학교 학생들은 “수능공부해야지 왜 남의 학교에서 노숙하느냐”고 출교 조치 뒤 천막 농성을 시작한 학생들을 비난했다. 교수들은 학교의 명예에 먹칠을 한 운동권 학생들의 “도덕적 미성숙”은 단호히 엄벌에 처해 뿌리를 뽑아야 한다고 했다. 과연 그럴까. 고려대학교는 ‘버르장머리 없는’ 일부 운동권 학생들에 대한 처벌을 본보기 삼아 땅에 떨어진 사제간의 도를 세우고 싶었던 것일까. <레즈>는 학생들에 대한 출교 조치는 다름 아닌 마녀사냥이었다고 말한다. 글로벌 기업과 손잡고 글로벌 리더를 육성하겠다는 글로벌 대학의 선언이 왜 ‘시대’를 읽지 못하는 까막눈의 망상인지 한번 확인해보시라.
고양이 춤 / 감독 윤기형 / 2011년 / HD / 76분15초 “고양이를 좋아하세요?”라고 묻는 두 남자가 있다. 한 남자는 자유롭게 삶을 누릴 것 같은 시인이고 여행가다. 또 한 남자는 승자독식의 세계에서 살아가야 하는 광고감독이다. 상반된 환경의 두 사람은 그러나 똑같은 병을 앓고 있다. 사람들의 마음을 읽어내야 하는 직업을 가진 두 사람은 대놓고 말하지 않지만 외로움과 투병 중이다. 시인 이용한이 ‘사료 축구’를 하고 ‘비닐 봉지 마술쇼’를 하는 길고양이 남매 희봉이와 깜냥이에게 마음을 뺏기고, 광고감독 윤기형이 잠보와 예삐라는 이름을 가진 길고양이들의 애정행각을 힐끗거리기 시작한 것도 그놈의 외로움 때문이다. “길 위에서 태어나 길 위에서 사랑하고 길 위에서 죽는” 길고양이를 뒤쫓으면서, 길고양이 파파라치가 된 길 위의 두 남자는 외로움을 조금씩 치유하는 법을 배워간다.
소피와 수진 사이 / 감독 최윤정, 가브리엘 로렁 / 2010년 / HD / 68분55초 수진은 6살 때 프랑스로 입양되어 소피가 됐다. 성인이 된 소피는 노란 원피스를 입고 낯선 나라에 처음 왔을 때 “이미 새 삶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소피가 이해하지 못하는 과거의 수진이 있다. 수진은 아빠의 손을 잡고 고아원에 들어갔고, 얼마 뒤 피부색 다른 또 한명의 아빠를 받아들여야 했다. 친부와 몇년 전부터 편지를 주고받은 뒤 드디어 한국을 찾게 된 소피. 그녀는 잃어버린 수진의 기억을 복구하고 싶어 하지만 믿기 힘든 이야기만 전해 듣는다. <소피와 수진 사이>는 설렘과 두려움 사이에서 수시로 진동하는 인물의 얼굴을 놓치지 않고 포착한다. 프랑스에서 소피는 수진을 상상하고, 한국에서 수진은 소피를 그리워한다. 이러한 상반된 감정은 동시에 수진이 소피가 됐던 과거의 그것이기도 하다. 반면 그녀의 친부는 죄스러운 과거에 고착되어 있다. 한국 방문 뒤 한동안 친부와 연락을 끊었던 소피의 선물은 “스스로 자란” 딸이 아빠에게 보내는 더없이 ‘친밀한’ 러브레터다.
잔인한 계절 / 감독 박배일 / 2010년 / HDV / 60분 언제서부턴가 청소부를 환경미화원이라 부른다. ‘공익’을 위한 그들의 노동에 대한 존중에서 ‘환경미화원’이라는 호칭이 비롯됐다고, 우리는 흔히 알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공식적인 명명은 위선이거나 기만일지도 모른다. 이렇게 생각해볼 수도 있다. 어쩌면 세상의 악취와 배설물을 처리하는 그들에 대한 혐오와 경멸의 감정 때문에 호칭을 표백한 것은 아닐까라고. <잔인한 계절>은 ‘쓰레기’ 치운다고 ‘쓰레기’ 취급받는 ‘환경미화원’들의 억울함을 담는다. 100만원이 채 되지 않는 임금을 용역업체에 갈취당하고, 몸에서 진동하는 썩은 내를 씻지도 못하고 귀가해야 하는 그들의 억울함을 세상은 냄새난다고 외면한다. 주면 주는 대로, 시키면 시키는 대로, 세상 밑바닥 ‘노예’들을 위로할 수 있는 노래는 없다. 붉은악마의 광란과 촛불집회의 연대도 더러운(실은 더럽혀진) 그들을 기억하지 않는다. 이름 모르는 ‘청소부 김씨’의 흘러간 유행가만이 그들의 고단한 하루를 어루만질 따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