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여년 전쯤 데리다가 해체론을 들이댄 뒤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은 변화했다. 영화 속 포스트모더니즘은 좀더 세련되게 공간을 분할하기 시작했고, 여성에 대한 시각 역시 확장되고 더 면밀히 세분화됐다. 최근 ‘실험영화나 확장영화’ 같은 단어가 많이 들리는 것은 따라서, 영화가 세상과 소통하고 있다는 증거라 여겨도 좋을 듯하다.
오는 12월9일부터 15일까지, 제2회 오프앤프리국제영화제가 아트하우스 모모에서 열린다. 지배적 예술과 상업영화로부터의 탈피(Off dominant, Off commercial)를 목표로 한 이번 영화제는 비영리(Free of charge)를 표방해 전 작품을 무료로 상영한다. 게다가 ‘융합미디어 예술’이란 카테고리 안에서 15개국의 실험영화와 미디어아트 등 총 100여편의 작품을 초대한다.
지난해의 피나 바우쉬와 차학경에 이어 올해는 세계적 전위예술가 ‘캐롤리 슈니만’의 특별전이 기획되었다. 60, 70년대의 퍼포먼스를 필름에 옮긴 <퓨즈> <키치의 마지막 식사>부터 2008년 <무한 키스>까지 총 7편의 작품이 이번 리스트에 포함돼 있다. 작가가 직접 자신의 질에서 탯줄 형태의 텍스트를 꺼내 읽는 퍼포먼스를 담은 <내밀한 두루마리>처럼, 그녀의 작품들은 여성의 육체에 대한 탐욕적 시선을 비판하고 여성의 시각에서 성을 이야기하는 데 집중한다. 이는 여성으로서 특권을 누리고 있다는 감정을 더이상 느끼지 않는 법을 배워야 한다고 주창한 ‘1세대 서구 페미니스트 필름’의 시선을 가늠하게 한다.
79년 이후 ‘조각, 설치, 사진’ 등 매체를 넘나들며 공동작업을 해온 ‘피슐리와 바이스’ 듀오의 작품도 초청된다. <사물들이 가는 방식>과 <정당한 방법> <하찮은 저항자의 관점> 같은 작품들은 재기 넘치지만 결코 무게를 잃지 않는 주제의식으로 관객의 두뇌를 자극시킨다. 화가로 데뷔한 뒤 94년부터는 영상에 발을 들인 일본 실험영화계의 신성 ‘이시다 다카시’ 또한 중요한 작가이다. 빛과 공간의 관계를 미술과 영화의 경계를 넘은 유연한 시선으로 분해한 <Reflection>을 비롯해 그의 대표작 5편이 우리를 기다린다.
공모 형식으로 진행된 ‘오프 인 포커스’ 부문에는 이형석과 성시흡 등 국내 신진 작가들이 대거 포진해 있다. 광고나 애니메이션의 아트디렉터로 활동 중인 정지숙의 <기다림 설레임>도 이중 한편이다. 신촌블루스의 보컬이었던 강허달림의 노래에서 시작된 이 프로젝트는 뮤직비디오를 넘어, 시각예술의 장르로 음악을 확장시킨다. 이 밖에 전소정의 단편 <Three ways to Elis>를 통해 ‘키치와 쓸락, 장르간 패스티쉬’ 등의 포스트모더니즘적 요소를, 장편 실사애니메이션 <China Town>을 통해 자본주의와 인간, 서구와 아시아의 관계를 역학적으로 탐구할 수도 있다. ‘기행영화’라는 제목으로 한곳에 멈춰 서서 공간을 분해하는 <Travelogue>와 자본주의의 상징인 ‘아케이드’에 관한 발터 베냐민의 고찰에 바쳐진 실험영화 <The Passage Clock> 역시 흥미롭다.
누구나 영화를 만들 수 있다는 건 모든 장르가 영화에 침범할 수 있다는 것의 다른 표현일 것이다. 영화의 경계를 허물기 위해 주창된 이번 영화제는 실험영화를 어려워하는 일반관객을 위해 ‘해설과 함께하는 영화보기’ 프로그램도 운영한다(offandfree.blog.m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