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 중 누군가 죽으면 그 배급 통장을 활용하기 위해 그를 매장하지 않고 가능한 한 사망신고를 하지 않으려고 했다. 어머니들은 약간의 빵 부스러기를 더 타기 위해 죽은 자녀들과 함께 침대에 누웠다. 봄이 올 때까지 얼어붙은 시체들이 아파트 안에 방치되었다.” 전설로 남은 첼리스트 므스티슬라브 로스트로포비치의 아내이자 볼쇼이 오페라의 프리마돈나였던 갈리나 비슈네프스카야는 2차 세계대전 당시 레닌그라드의 참상을 ‘살아 있는 시체들의 밤’이라고 회고한 적 있다. “전쟁, 휴머니즘을 말하다”라는 주제로, 10월6일부터 8일까지 서울아트시네마에서 열리는 제2회 러시아·유라시아영화제에서 소개되는 6편의 영화들 또한 전쟁이라는 극한 상황에 처한 군상의 비참함을 통해 ‘인간의 조건’을 되묻는다.
개막작 <뻐꾸기>(2002)는 2차 세계대전이 끝날 무렵 핀란드 국경지역에 버려진 독일군 포로와 배신자로 낙인 찍힌 소련군 대위가 맞닥뜨리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다. 원치 않는 전쟁에서 나치의 저격수가 된 베이코와 전쟁 중 아군에 적으로 내몰려 유배당한 이반은 사사건건 대립하지만 소수민족 여인 이반의 도움으로 전쟁이 망가뜨린 자신들의 ‘선한 기운’을 되찾는다. <수용소에서>(2007)는 ‘적과의 화해’뿐 아니라 ‘적과의 동침’을 소재로 삼았다는 점에서 <뻐꾸기>보다 한발 더 나아간다. 1946년 레닌그라드 임시수용소에 51명의 독일군 남자 포로들이 머물게 되면서 전범자를 색출해내야 하는 간수들과 어떻게든 자신의 죄과를 숨겨야 하는 포로들은 불가능할 것만 같던 사랑을 꿈꾼다. 연민을 어쩌지 못해 위험에 처하는 군의관으로 베라 파미가가, 인과응보를 철칙으로 삼아온 잔혹한 소련군 장교로 존 말코비치가 출연하는 러시아·영국 합작 전쟁영화다.
<수용소에서>는 독일군 포로의 아이를 가졌다는 이유로 스스로 목숨을 끊는 소련 여인이 등장하는데, <어떤 전쟁>(2009)은 “차마 자신이 낳은 독일군의 아이를 목 졸라 죽이지 못해” 버려진 소련 여인들의 실제 수난을 기록한 작품이다. 전쟁 중에 독일군의 아이를 임신했다는 이유로 작은 섬에 감금당한 채 노예처럼 살아가는 소련 여인들은 종전 소식을 듣고 환호하지만 이내 자신들의 미래가 고향이 아닌 또 다른 수용소라는 사실을 깨닫고 절망한다. 독일군의 학살과 이에 대한 마을 사람들의 증오로 얼룩진 마을을 어떻게든 구해내려는 정교회 사제 알렉산드르의 삶을 그린 <사제>(2010) 또한 대부분의 여타 상영작들처럼 실화를 바탕으로 삼았다. <레닌그라드>(2009) 역시 탈출구가 봉쇄된 채 독일군의 쉴새없는 포격에 노출되어 90만명이 사망한, 심지어 기아로 인해 인육을 먹는 사태까지 벌어진, 70년 전 레닌그라드의 참상을 담고 있다.
상영작 중 가장 눈에 띄는 작품은 알렉산드르 벨레진스키 감독의 <살아남은 자>(2006)다. 대부분의 상영작이 지옥 같은 삶을 묘사하면서, 그럼에도 삶의 희망을 꺼내드는 것과 달리 <살아남은 자>는 여전히 계속되고 있는 전쟁의 기억을 언급하며 결국 파괴된 삶보다 더 평온한 죽음을 선택하는 이를 주인공으로 삼고 있다. 체첸 전쟁에 용병으로 뛰어들었다 다리 하나를 잃고 찌질이 취급을 받는 키르와 위태위태한 키르의 삶을 지켜주기 위해 유령이 된 그의 전우들이 키르의 뒤를 따르는 설정이 흥미롭다. 한·러 수교 20주년, 2차 세계대전 종전 65주년을 기념해 한양대학교 아·태지역 연구센터가 주최하는 이번 영화제에선 연구센터 일원인 이희원 중앙대 연구교수의 작품 해설 및 러시아 역사에 대한 설명도 곁들여진다(입장료는 무료. 문의: 02-2220-1494, www.eurasiahub.org, www.cinematheque.seoul.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