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이탈리아 시골 예찬 코미디
어느 감독의 수난 The Passion 카를로 마자쿠라티/ 이탈리아/ 2010년/ 106분/ 오픈 시네마
이탈리아 코미디의 특징. 배경은 대개 시골이다(세련된 코미디는 토스카나 즈음이 배경이고, 좀더 왁자지껄한 코미디는 언제나 남부가 배경이다). 주인공은 뭔가 넋이 나간 듯한 남자다(베니니든 모레티든 못생겼든 잘생겼든 간에 말이다). 사람들은 호들갑스럽다(이탈리아 사람들은 원래 그렇다. 그 나라 총리를 한번 보라). <어느 감독의 수난>도 우리가 알고 있는 전형적인 이탈리아 상업코미디의 표본이다. 5년째 영화를 못 찍은 중년 감독 지아니는 드디어 TV 여배우의 영화 데뷔작을 찍을 기회를 얻게 된다. 그런데 토스카나에 있는 별장의 물이 새면서 16세기 프레스코화가 훼손된다. 시장과 지역 경찰은 문화재청에 신고하지 않을 테니 대신 일주일 뒤 공연할 연극 <그리스도의 고난>의 연출을 해달라고 강요한다. 이제 그는 어중이떠중이 마을 주민들로 구성된 팀을 데리고 연극을 준비하는 동시에 새 영화의 시나리오까지 완성해야만 한다. 이탈리아의 중견 감독 카를로 마자쿠라티와 배우 실비오 올랜도의 협업으로 완성된 <어느 감독의 수난>은 이탈리아 영화계에 대한 풍자와 시골에 대한 예찬이 따스하게 엮인 코미디다. 특히 마지막 <그리스도의 고난>이 훌륭하게 마무리되는 과정은 꽤 감동적이다. 올해 베니스영화제 경쟁작. 글 김도훈
22. 시골마을의 테마파크 대소동
웰컴 투 샤마타운 Welcome to Shama Town 리웨이란/중국/2010년/104분/아시아영화의 창
중국의 어느 시골마을에서 일확천금을 놓고 벌어지는 소동극이다. 샤마타운은 전설적인 영웅 호전자가 살았던 곳이다. 21세기의 샤마타운은 그의 유명세로 근근이 먹고산다. 마을 사람들이 합심해 호전자의 이야기를 테마파크용 공연으로 개발해 관광객에게 보여주는가 하면, 마을의 이장은 호전자의 유품을 방송에 내보내 더 많은 관광객을 유치하려 애쓴다. 한편 호전자의 유품을 통해 전설로만 알려진 보물이 샤마타운에 있을 것이라 믿은 고고학자와 그와 합심한 사업가가 샤마타운에 나타난다. 그들은 테마파크 개발을 돕겠다고 마을 사람들을 유혹하는 동시에 유적을 찾겠다는 명목으로 발굴에 나선다.
<웰컴 투 샤마타운>은 순박한 시골 사람들과 이기적인 도시인의 이분법적인 대결을 그리는 영화가 아니다. 인생이 한방이라고 믿는 건 양쪽 모두 마찬가지. 다만 샤마타운의 사람들은 마을의 정체성을 특화하려는 것이고, 도시인들은 그런 것과 상관없이 탐욕을 부린다. <웰컴 투 샤마타운>은 중국에 불어닥친 개발 흐름과 그로 인한 불안을 꼬집는 코미디라는 점에서 펑샤오강의 초기작들을 연상시킨다. 리드미컬한 연출과 풍부한 유머는 블랙코미디로서나 웰메이드 대중영화로서나 부족함이 없다. 글 강병진
23. 황당하고 평범한 대가족
사랑이 찾아올 때 When Love Comes 장초치/대만/2009년/107분/갈라 프레젠테이션
참 지긋지긋한 가족이다. 어머니는 아들을 낳겠다는 신념으로 가족이 운영하는 식당 한구석에서 늦둥이를 낳더니, 비슷한 연배인 삼촌은 자폐증에 걸려 하루 종일 새 그림만 그린다. 그런 삼촌에게 시시때때로 신경질적으로 대하는 아버지, 어떤 일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매일 아침 유수로 몸을 단련하는 할아버지 등 3대가 한집에 사는 만큼 집안은 하루라도 조용할 날이 없다. “햇살을 좋아하는” 레이천에게 가족은 “항상 어두운 하늘”이다. 설상가상으로 레이천은 임신을 하고, 믿었던 남자친구는 나 몰라라 한다. 아버지를 비롯한 가족이 이 사실을 알면서 집안은 발칵 뒤집힌다. 그러면서 가족에 조금씩 균열이 드리운다.
<사랑이 찾아올 때>는 핵가족 시대의 대가족을 그린다. 이들에게 특별한 사건은 일어나지 않는다. 여느 가족처럼 매일 반복되는 크고 작은 일들이 서로에게 상처를 주고, 또 의지가 된다. 서극, 허우샤오시엔의 조감독 출신인 장초치 감독은 주인공 레이천을 비롯해 극중 인물 모두에게 골고루 러닝타임을 할애한다. 인물을 바라보는 시선이 따뜻하게 느껴지는 것도 그들의 입장을 조금 더 이해하려는 적극적인 태도 때문이다. 덕분에 누구 하나 탓할 수가 없고, 작은 변명이라도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이는 개인과 가족의 일상을 통해 개인의 무기력과 분노, 대만 현대사의 그늘 등을 이야기한 스승 허우샤오시엔의 초기작인 <동동의 여름방학> <동년왕사>나 가족의 부재를 통해 현대 대만의 미래를 그린 최근작인 <밀레니엄 맘보>와의 차이점이다. 글 김성훈
24. 웃기기 위해 태어난 남자
꼬마 코미디언 The Little Comedian 위타야 통유용, 메즈 다라톤/타이/2010년/130분/아시아영화의 창
남을 웃기지 못하면 나도 웃을 수 없다? 날 때부터 누군가를 웃겨야만 한다는 의무감을 갖고 태어난 코미디언의 어쩔 수 없는 숙명을 그린 영화다. 12살 소년 톡은 누구보다도 남을 웃기는 일이 괴롭다고 여기는 중이다. 타이에서 3대째 전해 내려오는 유명 코미디극단 집안의 대를 이을 장남으로 태어난 그의 결정적 단점은 사람들을 웃기지 못한다는 것. 그런데 어느 날 우연히 친구 따라 찾아간 피부과에서 만난 미모의 여의사는 톡의 황당한 말장난 개그에 뜻밖의 웃음을 보인다. 이제 톡은 가족에게 인정받기 위해서, 그리고 처음으로 자신의 개그 코드를 이해해준 그녀의 마음을 사로잡기 위해서 비장의 개그를 연마하기 시작한다. 자칫 한없이 유치할 것 같은 소재와 이야기임에도 <꼬마 코미디언>이 잘 짜인 가족드라마이자 유쾌한 성장영화로서 손색없는 모습을 갖추게 된 데는, 탄탄한 각본과 리드미컬한 연출력이 조화를 이룬 덕분이다. 우리와는 조금 정서가 다른 만담류의 말장난 개그가 자주 등장하지만, 자꾸 듣다보면 이상야릇한 언어유희의 독특한 매력에 빠져드는 자신을 발견할 듯. TV와 모델 등으로 다양하게 활동하는 타이 출신의 폴라 테일러가 미모의 여의사 역을 맡았다. 글 김현수 객원기자
25. 짝사랑을 하고 있다면 필견!
하트비트 Heartbeats 자비에 돌란/캐나다/2010년/102분/월드 시네마
누구든 곧장 노예로 만들어버릴 수 있는 폭탄, <하트비트>는 바로 이유도 논리적 설명도 불가능한 짝사랑에 관한 기발하고 재치있는 소품이다. 프란시스와 마리는 파티에서 다비드상과 똑 닮은 니콜라를 만나 한눈에 반한다. 절친한 친구 사이지만, 맘에 드는 이성 앞에서라면 둘의 우정도 위태하다. 서로 관심없는 척하면서도 사실은 니콜라에게 잘 보이기 위한 각자의 방법을 동원하는 것. 약속을 앞두고 한껏 치장을 하는 것은 기본, 니콜라가 맘에 들어하는 일이라면 빠지지 않고 하려 든다.
영화는 프란시스와 마리의 신경전을 통해 짝사랑에 올인한 이들의 심리를 포착한다. 중요한 건 니콜라가 과연 누구를 선택하느냐가 아니다. 바로 그를 흠모하는 프란시스와 마리, 혹은 이 세상 모든 짝사랑하는 이들이다. 영화는 둘 외에도 구체적인 자신의 경험담을 토로하는 남녀의 인터뷰 영상을 삽입해 활기를 더한다. 첫 장편 <나는 엄마를 죽였다>로 칸 황금카메라상을 수상한 21살 자비에 돌란 감독의 두 번째 장편. 사뭇 비장한 전작과 다른 <하트비트>의 연출에 대해 “전작에 대한 기대와 부담을 더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전혀 다른 스타일의 작품을 하는 것”이라는 당돌한 답변을 내놓는다. 빈티지와 모던, 로코코까지 시대를 아우르는 스타일과 음악적 취향이 총망라된 작품. 돌란 감독은 연기자로 활동해온 경력까지 살려, 니콜라를 좋아하는 게이 프란시스까지 직접 연기한다. 글 이화정
26. 진짜 백상어가 등장하는 서스펜스
더 리프 The Reef 앤드루 트라우키/ 오스트레일리아/ 2010년/ 87분/ 미드나잇 패션
스티븐 스필버그의 <죠스> 이후 수많은 상어영화들이 만들어졌다. 기억나는 영화가 있으신지? <죠스>의 졸렬한 후속편들은 거론할 가치도 없고, 저예산영화 <오픈 워터> 정도가 일부 마니아의 지지를 받았을 따름이다. 진짜 피를 말리고 숨을 멎게 만드는 상어영화를 기다려왔다면 <더 리프>는 썩 괜찮은 선물이다. 일단의 오스트레일리아 커플들을 태우고 호주의 산호초 해안을 여행하던 요트가 암초에 부딪혀 전복된다. 일행은 선택해야 한다. 뒤집힌 채로 조류 때문에 육지에서 점점 멀어지는 배 위에서 구조를 기다릴 것인가. 아니면 어떻게든 가까운 육지를 향해 헤엄칠 것인가. 결국 일행은 단 한명을 배에 남기고 헤엄을 치기로 결심한다. 그러나 갑자기 나타난 한 마리의 백상어가 마치 재미있는 놀이를 하듯 한명 한명 사냥하기 시작한다. <더 리프>는 오스트레일리아에서 벌어진 실화를 각색한 영화다. 제작진은 실제 백상어를 촬영한 뒤 (두어번의 특수효과를 제외하면) 오로지 편집의 힘만으로 숨막히는 서스펜스를 창조해낸다. 올해 미드나잇 패션 부문의 장르영화 중 절대 놓치지 말아야 할 작품이다. 적어도, 손톱의 절반 정도는 물어뜯게 될 거다. 글 김도훈
27. 메이드 인 차이나의 도시남녀
3중 충돌 Driverless 장양 /중국/2010년/101분/아시아영화의 창
차디찬 도시 남녀들의 일상이 서로 얽히고설키면서 그들의 사랑과 질투, 배신과 이별 등 각기 다른 이야기가 한데 뒤섞이는 영화다. 유려한 영상과 복잡한 구성의 드라마가 워킹타이틀이 만든 겨울 시즌용 로맨스물의 베이징 버전을 보는 듯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결혼생활에 권태를 느끼던 지시옹은, 10년 전에 헤어졌던 샤오윤과 우연히 회사 주차장에서 마주친다. 상대에게 결코 이름을 가르쳐주지 않고 하룻밤 사랑에 몸을 내던지는 위태로운 청춘인 리지아의 곁에는 언제부턴가 이름 모를 소녀가 주변을 맴돌기 시작한다. 한편 교통사고로 사랑하는 딸을 잃은 왕야오는 딸과 함께 사고를 당한 아내의 병상에서 오열한다. 이들은 모두 도시에서의 자신의 삶을 긍정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비대해진 욕망의 크기에 버거워한다. 그들 스스로 덜어내고 비워내고 감싸줄 수 있는 여유를 다시 찾을 수 있는 곳은 어딜까? 부딪쳐야만 여기가 교차로란 걸 아는 도시인들의 위태로운 자화상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글 김현수 객원기자
28. 보지 않아도 느낄 수 있는 감동
맹인영화관 The Spectacular Theatre 루앙/중국/2010년/120분/뉴 커런츠
<맹인영화관> 속 인물들에게 ‘영화’는 각기 다른 의미를 갖고 있다. 불법 DVD를 파는 가난한 청년 첸유에게는 생계수단이고, 시각장애인을 위해 영화를 상영하는 가오에게는 자신을 떠난 아내와의 추억을 간직할 수 있는 매개체다. 그리고 가오의 영화관에서 매일 영화를 ‘듣고 상상하는’ 시각장애인들에게는 새로운 세계를 경험하는 창구일 것이다. <맹인영화관>은 이들의 따뜻한 만남을 그리는 영화다. 첸유가 느낀 이 극장에 대한 첫인상은 기괴함이다. 그는 시각장애인이 영화를 볼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할 수 없고, 주인인 가오가 왜 돈도 받지 않고 이 극장을 운영하는지 이해할 수 없다. <맹인영화관>은 그들 또한 한명의 관객으로서 영화에 감동할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어이 첸유에게 이해시키고, 영화를 단지 눈으로만 볼 필요가 없다는 의견을 제시한다. 또한 한 시각장애인 커플을 통해 영화뿐만 아니라 사람의 아름다움과 사랑 또한 듣고 만지고 상상하는 것만으로 경험이 가능하다고 말한다. 영화에 대한 과한 애정이 낯뜨거울 수는 있지만 멜로와 유머, 인간의 성숙이 함께 담긴 <맹인영화관>은 감동을 받기에 부족함이 없는 드라마다. 글 강병진
29. 철도 마니아에게 이 영화는 축복!
철로 Railways 니시코리 요시나리/일본/2010년/130분/아시아영화의 창 올해 49살인 하지메는 남부럽지 않은 전기회사의 간부로 재직 중이다. 어렸을 적 막연하게 꿈꾸던 미래 따윈 잊고 산 지 오래다. 어느 날 갑자기 어머니가 쓰러졌다는 소식을 듣고 고향에 내려온 그는 충격적인 소식을 접한다. 갑작스런 친구의 죽음을 알게 되고, 시한부 인생을 선고받은 어머니를 옆에서 지켜보던 그는, 어린 시절 막연하게 꿈꾸던 철도기관사로서의 제2의 삶에 도전하기로 마음먹고 도시의 삶을 정리한다.
<철로>는 도시의 위태로운 삶 속에서 외줄타기하던 중년의 남자가 새 삶을 얻게 된다는 전형적인 성장영화다. 전개상 궁색해질 수 있는 이야기임에도 불구하고 영화가 감동을 자아내는 이유는 시마네현을 배경으로 한 시골 풍경과 철도 마니아라면 반색할 만한 오래된 기관차들, 그리고 배우들의 잔잔한 연기다. 철도 기관사의 일상을 경쾌하게 묘사하는 연출과 더불어 영화 전반에 흘러나오는 피아노 음악도 드라마의 감동을 배가한다. 글 김현수 객원기자
30. 올해의 상상력 1등 영화
사운드 오브 노이즈 Sound of Noise 올라 시몬슨, 요하네스 슈테르네 닐슨/ 스웨덴, 프랑스/ 2010년/ 98분/ 월드 시네마
올해 부산에서 가장 상상력이 발칙한 영화를 보고 싶다면? <사운드 오브 노이즈>는 최적의 작품이다. 주인공인 베테랑 경찰 아마데우스(!)는 스웨덴의 저명한 음악가문 출신이지만 청맹으로 태어난 탓에 어린 시절부터 음악을 혐오하며 자라난다. 당연히 가족과의 관계도 좋을 리 없다. 음악가 출신인 부모님은 그를 안쓰러워하고, 유명 지휘자인 동생은 그를 탐탁지 않게 생각한다. 그러던 어느 날 다섯명의 드러머로 구성된 사운드 테러리스트들이 ‘한 도시와 6인의 드러머를 위한 음악’이라는 주제로 음악적 테러를 벌이기 시작한다. 조사에 착수한 아마데우스는 점점 테러리스트의 지휘자인 여자에게 빠져들기 시작한다. 대체 이게 무슨 뻘소리냐고? 맞다. <사운드 오브 노이즈>는 일종의 뻘소리 같은 영화다. 뮤지션인 올라 시몬슨과 그래픽 디자이너, 만화가 출신인 요하네스 슈테르네 닐슨 감독은 뻘소리 같은 상상력을 무기로 도무지 예측할 수 없는 오락영화를 만들어냈다. 다섯명의 드러머가 도시의 수많은 기기들(수술 도구, 건축 장비, 혹은 거대한 송전탑에 걸려는 전선 등)을 악기삼아 연주하는 시퀀스를 보고 있노라면 절로 손발을 구르게 된다. 글 김도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