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멜로여, 현실 없는 멜로여!
2001-02-23

올 겨울 멜로영화 속 낡은 것과 새로운 것

◆<불후의 명작>에서 <번지점프를 하다>까지

1970년대 어느 가수는 네 박자의 구성진 목소리로 “고향의 물레방아 오늘도 돌아간다”고 노래했지만, 돌고 도는 게 어디 물레방아뿐이랴. 세상은 여전히 궤변과 협잡과 야욕으로 돌고, 충무로에는 올망졸망한 멜로드라마가 군내를 풍기며 돌아간다. 네 박자를 한국 대중가요의 뿌리로 친다면 멜로는 한국 영화산업의 밑천일 것이다. 액션에 이어 판타지에도 멜로를 버무리더니 퓨전멜로라는 그럴싸한 이름까지 뽑아낸다.

풍부한 디테일, 그러나 ‘인간’은 없다

고래심줄처럼 질긴 멜로, 낡았으나 아직 닳지는 않은 소재들, 유난히 멜로에 약한 관객. 그래서 ‘잘하면 대박, 밑져야 본전’이라는 믿음은 신인감독들이 멜로의 전선에 던지는 출사표가 된다. 그들이 선보이는 멜로엔 수십년 동안 우려먹었던 원시적 갈등구조인 삼각관계가 사라지고 있으며, 남자주인공까지 수시로 준비된 눈물을 펑펑 쏟아낸다. 이따금 문어체 대사와 말장난 같은 개그가 튀어나오긴 해도 군데군데서 웃음을 끌어내는 유머감각, 온갖 색실이 수놓인 듯한 화면, 경쾌한 리듬감도 돋보인다. 무엇보다 일상성에 대한 세부묘사의 치밀함을 강점으로 꼽아야겠다.

하지만 그 디테일은 꼼꼼한 세상읽기와 인간이해로 이어지지는 못한다. 그저 곱고 착하고 따뜻하게, 심지어 눈물까지 예쁘게 담아내려 골몰할 뿐이다. 이야기를 책상머리에서 끌어낸 탓인지 삶의 다양한 형태들이 구체적으로 풍성하게 드러나지 않는다. 남녀 두 주인공만 밀고 당기고 지지고 볶을 뿐 그들 가족과 이웃의 삶은 없다. 감독이 자신의 시대나 상황에 대해 어떠한 의문도 갖고 있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한국감독들은 겉늙어버린 운명론자인가, 지독한 연애지상주의자인가, 영악스런 도망자인가. 어쩌면 그들은 백치의 상태를 즐기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최근 개봉한 멜로영화 네편의 테마는 흘러간 가요의 노래말로 풀어볼 만하다. “나는 다시 태어나도 당신만을 사랑하리라”던 남편의 다짐은 <번지점프를 하다>의 주제와 맞물리고, “하루를 살아도 행복할 수 있다면 나는 그 길을 택하고 싶다”는 <하루>의 중반부터 깔아도 되겠다. <불후의 명작>이 “내게도 사랑이, 사랑이 있었다면 그것은 오로지 당신뿐”이라고 털어놓자마자 <나도 아내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안녕하세요. 또 만났군요. 다시는 못 만나나 생각했죠”로 화답한다. 설마 ‘노래방멜로’가 탄생하는 것은 아니겠지.

<불후의 명작>, 맞춤법 틀린 옛 일기장

에로비디오와 서커스와 김소월과 함중아와 모차르트가 어울릴 수 있을까. <불후의 명작>의 감독 심광진은 휴머니즘의 깃발을 앞세워 함께 묶어보려 했으나, 순수함과 소박함과 미욱함과 처량함을 구분하지 못한 채 나르시시즘의 수렁에 빠져든다. 초반을 포르노풍으로 화끈하게 달구고 비디오업계의 기발한 장삿속으로 웃기더니 중반부터 멜로와 동화와 만화적 요소가 뒤죽박죽된다. 말이 좋아 복고고 향수지 기억에서 사라져가는 것들을 불러세우면 세울수록 시대착오로 읽힌다. 아마 30대 이상의 관객층을 겨냥하고 만들었을 터인데, 노인 관객이 봐도 좀이 쑤시고 어리둥절할 대목이 많다.

디지털 광속문명시대에 완행열차의 아련한 애상감을 즐길 수 있는 소재였다. 하지만 우유 종류를 나열하는 장면에서 드러나듯 이야기를 자질구레하게 잔뜩 풀어놓고 꿰지는 못한다. 선술집에서의 사랑 고백은 어색하기만 하고, 작가가 밝혀지지 않는 화첩 찾기는 엉뚱하다. 특히 피에로를 ‘인간폭탄’으로 만들어 이봉창 의사와 연결시키는 장면은 괴이쩍은 SF영화를 연상시킨다. 선배 감독들의 화면을 무작정 차용한 심광진 감독은 “실패하더라도 작은 희망까지 빼앗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대사로 위안을 삼아야겠다. 몽당연필에 침을 발라가며 썼으나 맞춤법이 틀린 일기장을 훔쳐본 기분이 드는 영화다.

<나도 아내가…>,냄새가 난다.

요구르트는 바닥을 이빨로 뚫어 마셔야 제 맛이 난다. 개 짖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면 ‘컹컹컹’은 ‘형형형’으로 들린다. 울화통이 치밀거든 자동 세차장 소음 속에서 한껏 소리를 지르고, 앞날이 불안하거든 재미삼아 나뭇잎으로 점을 쳐봐라. <나도 아내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우리 주변에 흔하게 널린 삽화들을 집요하게 따라잡으면서 주인공 봉수와 원주의 거리를 좁혀간다. 박흥식 감독은 따분하고 메마른 일상을 과장되지 않게 묘사하면서 웃음에 페이소스를 담는 재주를 발휘한다. 옆구리가 시린 노총각의 심정을 어둠 속의 휴대폰 불빛으로 처리하는 장면은 아무도 쉽게 흉내내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박흥식은 조연출을 맡았던 의 감동을 되살리려 지나치게 애를 쓴다. 시퀀스마다 죽음에 대한 소묘를 통해 사소하고 평범한 것들이 지닌 의미를 키워보려 하지만, 작위적인 설정 탓으로 그리 크게 울림을 주지 않는다. 봉수는 어머니를, 원주는 아버지를 어릴 적에 잃었다. 어머니를 들먹이며 신세를 한탄하는 이혼녀 태란 역시 유년기가 불우했을 것이다. 노총각의 몸을 냉기를 녹여준 태란이 돈에 얽혀 줄행랑치는 대목은 영화의 완성도에 치명타를 날린다. 공중돌기를 멋지게 보여준 마루운동 선수가 착지할 때 엉덩방아를 찧는 것과 다르지 않다. <접속>에서 짝사랑하는 김태우의 구두를 신어본 전도연이 설경구와 발 길이를 재본다. 감독은 ‘의도된 우연’보다 ‘양해된 우연’에 신경을 썼어야 했다.

<하루>,엽기에 가까운 동화

“괜찮다, 괜찮다, 괜찮다…” 일찍이 ‘시의 정부(政府)’로 불렸으니 ‘군사독재의 정부(情婦)’라 비아냥거려도 괜찮다? 애초에 무조건 울리면서 한몫 챙기기로 작심했으니 반세기전 악극단 정서도 괜찮다? 서정주의 시 <내리는 눈밭 속에서는>을 들려준 <하루>는 얄밉도록 치밀하게 기획된 최루성 멜로다. 그동안 백혈병과 뇌종양으로 막대한 흥행수익을 올렸기 때문에 무뇌아라는 신종 시한부 인생은 ‘대박의 필요조건’을 갖춘 셈이다. 이야기는 불임 부부의 안타까움, 6년 만에 임신에 성공한 기쁨, 태어날 아이가 하루밖에 살 수 없는 슬픔 등 크게 세 단락으로 나뉜다.

한지승 감독은 이전 작품 <고스트 맘마> <>의 공간과 분위기를 <하루>로 옮겼는데, 알록달록한 소품 등 집안 구석구석을 예쁘게 치장해 동화나라로 둔갑시킨 수법은 치졸하기보다 엽기에 가깝다. 보는 이들은 겪는 이의 아픔을 절반도 느끼지 못할 것이다. 부모를 일찍 여의고 친척 밑에서 외톨이로 자란 여자에게 입양이란 남의 불행을 떠맡는 일이라는 발상부터 진부하다. ‘뜨물 먹고 주정하는’ 식의 영화는 주민등록등본까지 흔들어 청승을 떨더니 여자주인공이 아기의 장기를 기증하고 입양을 결단하는 엔딩에 묵직한 느낌표를 던지려 하지만, 박수를 치기엔 찜찜하고 눈물을 흘리기엔 간지럽다. 우리 사회엔 팔다리와 하반신이 없는 선천성 기형아를 입양해 친자식과 함께 키우는 젊은 부부도 있기 때문이다.

시 <내리는 눈밭 속에서는>은 <청춘>에도 두번이나 나왔다. 한국영화의 시읽기는 <기쁜 우리 젊은날>에서 황동규의 <즐거운 편지>로 출발했는데, <편지>는 그 시를 시집의 표지까지 보여주며 구슬프게 읊는다. 시집부터 소개하고 시를 읽어내려가는 버릇은 <꼬리치는 남자> <미술관 옆 동물원>으로 이어지지만, 시의 정서와 이미지를 영상 속에 전혀 녹여내지 못했다. 활자언어와 영상언어의 차이조차 모르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다. 타르코프스키는 서정시의 개념을 누구보다 넓고 깊게 제시한 시인이었다. 그의 ‘시적 서정성의 논리’를 이해하지 못하는 한 한국영화의 시읽기는 두메산골의 학예회 수준에 머무를 터이다.

<번지점프를 하다>, 속도조절에 실패하다

‘운명적 사랑’이라고 적으면 막막한 사막의 정경부터 떠오른다. 논리적 분석이 어려운 것은 그놈의 운명이라는 게 너무 자주 개연성을 깔아뭉개는 탓이다. 주인공의 사망신고를 미리 내고 그 죽음을 뛰어넘는 판타지 사랑은 충무로는 물론 할리우드와 중국에서도 숱하게 써먹은 소재다. 김대승 감독의 <번지점프를 하다>도 새로운 소재는 아니지만, 제목대로 비비 꼬여 솟구치고 떨어지는 이야기가 흥미를 돋운다. 전반부엔 인우와 태희가 사랑에 빠져드는 과정이 상큼하고도 나른하게 그려지는데, 여기서도 비는 ‘움직이는 비애’가 아니라 ‘인연의 물기’로 사용된다. 두 사람이 조심스레 접근하는 여관방 등 후반부의 도약을 위해 치밀하게 발판을 쌓아가는 장면에선 충무로에서 잔뼈가 굵은 감독의 이력이 읽힌다.

17년을 훌쩍 뛰어넘은 후반부는 운명적 사랑이란 서로의 영혼까지 알게 만든다고 방점을 찍는다. 스승과 제자에 동성간의 사랑이니 도덕론자가 보면 기겁할 법하나, 사실 동성애 모티브는 인연의 실타래를 푸는 추리적 요소로 작용할 뿐이다. 전반부의 숟가락과 라이터와 새끼손가락 에피소드가 복선임을 알아채는 건 쉽다. 그러나 끝까지 어색하고 당혹스런 느낌을 지우기 어려운 것은 속도 조절에 실패했기 때문이다. 카메라는 오뉴월 엿가락 늘어지듯, 때로는 칼춤 추는 선무당처럼 두 사람의 영혼을 비집고 들어간다. 운명적 사랑이라고 해서 엇박자를 치는 리듬까지 용납될 수는 없는 일이다. 현빈을 연기하는 신인배우가 적역으로 보이질 않은 점도 혼란을 부채질한다. 동성애자들에겐 억울한 기분이 들지도 모를 영화다.

프레임 하나하나는 인간과 세상을 읽어내는 감독 자신만의 ‘정신의 틀’이다. 굳이 리얼리즘을 꺼내지 않더라도 ‘현실’이라는 말처럼 매력적인 단어는 많지 않다. 멜로야말로 현실을 가장 생생하게 보여줄 수 있을 터인데도 주인공을 에워싼 세상 풍경은 가물거리기만 한다. 거창하고 심각한 사회적 발언을 주문하는 게 아니다. 좀더 멀리 보고 신인다운 야심과 패기를 가져달라는 것이다. “모든 살아 있는 문화는 본질적으로 불온한 것이다”라는 김수영 시인의 말을 신인감독들에게 들려주고 싶다.

박평식/ 영화평론가 psphark@chollian.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