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수와 만수>를 시작으로 1990년 장선우의 <우묵배미의 사랑>과 박광수의 <그들도 우리처럼>이 나란히 개봉하면서 박중훈은 (스스로 얘기하듯) 본의 아니게 ‘민중배우’처럼 인식됐다. <아스팔트 위의 동키호테>와 <바이오맨>을 찍은 청춘스타가 갑작스레 그런 사회의식이 뚜렷한 영화에 연달아 출연했으니 그렇게 보일 법도 했다. 바꿔 말해 그것은 박중훈에게 청춘스타 그 이상의 애정과 지지가 쏟아진 계기가 됐다. 사람들은 이제 그의 얼굴에서 평범한 유쾌함 그 이상의 것을 찾기 시작했다. 그런 다음 그는 작가를 꿈꾸며 출판사에서 일하는 영민(박중훈)과 대학 동창생 미영(최진실)의 달콤하고 진지한 신혼 이야기인 이명세의 <나의 사랑, 나의 신부>와 조우하게 된다. 이명세 특유의 소박하고 아기자기한 영화적 세계, 그리고 감성과 미학이 일치하는 세련되고 풍부한 화법의 영화와 만나면서 박중훈은 또 다른 면모를 보여주게 된다. 1990년 그렇게 그는 ‘진짜’ 영화배우가 된 것이다. 이후 그는 <나의 사랑, 나의 신부>의 성공을 지켜보며 미련없이 미국으로 유학을 떠난다. 더불어 <나의 사랑, 나의 신부>는 이제 고인이 된 유영길 촬영감독과 배우 최진실을 추억하게 하는 애틋한 작품이기도 하다.
1990년 <우묵배미의 사랑>과 <그들도 우리처럼>이 나란히 개봉하면서 나는 본의 아니게 ‘민중배우’처럼 인식됐다. 1987년 <미미와 철수의 청춘스케치> 개봉 당시 순전히 영화 흥행에 영향을 미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시위하던 사람들을 ‘빨갱이’라 부르던(웃음) 내가 졸지에 그렇게 된 거다. 시대의 소박한 일상과 아픔, 그리고 치열한 문제의식을 담고 있던 그 두편의 영화를 거치면서 나는 나도 모르게 다른 존재로 규정돼 있었다. 흥행에서 크게 성공한 작품들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기분이 좋았다. 사회는 여전히 민주화되기 이전이라 많은 사람들이 나에게 심정적인 지지를 보내고 있다는 뿌듯한 마음이 들었기 때문이다. 청춘스타라는 것 이상으로 든든한 기분이었다. 평범한 농부가 졸지에 유대인이 되어 수용소 생활을 하다가 또 갑자기 영웅 대접을 받게 되는 <25시>(1967)의 앤서니 퀸이 된 듯한 기분이었다고나 할까. (웃음)
나는 왜 상복이 없다고 느껴질까
<우묵배미의 사랑>은 상복도 있었다. 영화평론가협회상 남우주연상, 백상예술대상 남우주연상 두개를 받았는데 처음으로 연기상을 연달아 받아봤다. 그 기분도 꽤 괜찮았다. (웃음) 대종상도 후보에 올랐는데 받지는 못했다. 당시 <코리안 커넥션>의 신성일 선배님이 대종상 남우주연상을 받았는데, 이거 참 지금은 신성일 선배님과 절친한 사이라 이런 얘기도 할 수 있는데, 선배님이 ‘이제 마지막’이라며 가까운 심사위원들에게 은근슬쩍 전화로 압력을 넣으신 것 같더라. (웃음) 난 20대 초반이었으니까 다른 영화인들도 “20대에 무슨 남우주연상이냐. 그런 건 선배들이 받는 거고 너도 좀 나이 들면 받게 될 거야” 뭐 그런 식으로 위로를 했다. 뭐 그런가보다 했는데, 세월이 흘러서 내가 나이가 드니까 시상식이 공정해져버렸다. 90년대 중반 지나면서 이제 나도 좀 적당히 나이가 들었고 드디어 상복이 터지겠구나 했더니 상이 공정해진 거다. (웃음) 게다가 나중에 <게임의 법칙>(1994)으로 대종상 후보에 올랐을 때는 대마초 사건이 터졌고. 지금까지 연기상을 10번 넘게 받았지만 상복이 없었다는 느낌이 드는 건 바로 그래서다.
1990년 즈음에는 이명세 감독, 시인이기도 했던 이세룡 감독, 배창호 감독, 안성기 선배, 동아수출공사 이권석 상무, 그리고 최인호 작가, 그렇게 자주 어울렸다. 당시 <고래사냥> 시리즈 조감독과 <기쁜 우리 젊은 날> 각본 등 배창호 감독님 밑에서 착실하게 감독수업을 받고 있던 명세 형도 참 재밌는 사람인데, 술이 들어가면 참 솔직하고 격식이 없어진다. 광수 형도 그렇지만 워낙 내가 어렸을 때 본 형들이라 좋게 말하면 내게 허물없이, 안 좋게 말하면 쉽게 대하는 편이다. 워낙 친했다는 얘기다. 한번은 명세 형도 나한테 연기 지적을 한 적이 있다. 최인호 작가는 없던 어느 날로 기억되는데 술이 취해서는 여러 사람들한테 들이대더니 나에게도 “너 새끼야, 연기 똑바로 해” 그러면서 뒤통수를 빡빡 두번 정도 때렸다. 뭐 기분이 나빴다기보다 광수 형도 그렇고 어쨌건 내 연기에 만족하지 못하는 부분이 있기 때문에 그런 얘기를 하는 거라 생각하고 좀 되돌아보는 계기가 되긴 했다.
그로부터 몇달 뒤 명세 형이 전화가 와서 보자고 했다. 전에 술 취해서 그런 얘기했던 거 미안하게 생각한다며 그 답례로 나에게 줄 선물이 있다고 했다. 그게 바로 <나의 사랑, 나의 신부> 시나리오였다. 그런데 당시 내 입장에서는 워낙 시나리오가 많이 들어오던 때라 딱히 선물은 아니었다. (웃음) 역시 시나리오가 재미있었다. 명세 형 데뷔작인 <개그맨>(1989)을 보고서도 굉장히 독특하고 신선하면서 어디로 튈지 모르는 재기 넘치는 감독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런 사람의 두 번째 영화니 기대를 안 할 수가 없지. <개그맨>과 다른 스타일이면서도 무엇보다 위트가 넘치고 좀더 부드럽고 디테일한 감성이 살아 있는 작품이었다.
‘뭐라 드릴 말씀이 없어’서 못 갔던 조문
바로 계약을 하긴 했는데 캐스팅이 문제였다. 제작사인 삼호필림에서는 이미연과 함께하자고 했다. 당시 CF는 물론 데뷔작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1989)로 이미연의 주가가 치솟는 상태였다. 그런데 아무래도 결혼한 역할이라 그랬는지 이미연쪽에서 안 한다고 했고 다시 영화사에서는 ‘최진실이라고 귀 큰 여자가 한명 있는데 적역이라고 생각한다’며 어떠냐고 물었다. 진짜 귀가 눈에 크게 들어와서 ‘귀 큰 여자’라고 표현을 했었는데, 난 잘 모르는 배우인데다 인지도에서도 좀 떨어진다고 생각하다 보니 좀 투덜댔다. 그래도 몇번 만나고 의견을 조율하면서 좋은 감정으로 영화를 시작하게 됐다. 그런데 영화 개봉할 때쯤에는 최진실의 인기가 더 올라가서 어떤 포스터 버전에는 아예 내 얼굴이 나오지도 않았다.
<나의 사랑, 나의 신부>를 생각하면 최진실과 함께 떠오르는 또 다른 고인은 바로 유영길 촬영감독이다. <칠수와 만수> <우묵배미의 사랑> <그들도 우리처럼>을 함께했고 <나의 사랑, 나의 신부>가 마지막이었다. 이후 촬영하다 엎어진 <들소>라는 작품까지 합하면 총 5편이 된다. 언제나 사려깊은 분이었고 사람에 대한 깊은 성찰이 있었다. 그래서 테크닉적인 면과 별개로 카메라가 경망스럽지 않고 진중하다. 그를 보면서 감독이건 촬영감독이건 배우건 모든 결과물은 그 사람의 성품대로 나오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다. 박광수, 장선우, 이명세, 허진호, 이창동 등 당대 신인감독들의 중심을 다 잡아준 한국영화 중흥의 어머니 같은 분이었다. 현장에서는 늘 편하게 ‘아빠’라고 불렀는데 지금도 마음의 짐으로 남아 있는 건 유영길 촬영감독님의 하나뿐인 아들이 1995년쯤인가 교통사고로 세상을 떴는데 그때 망설이다가 끝내 가지 못했다는 거다. 내가 거기서 갑자기 정색하고 ‘감독님’이라 부르기도 그렇고, 또 늘 그랬던 것처럼 아빠라고 얘기하기도 그래서 계속 고민하다가 정말 뭐라 위로를 드릴 말씀이 없어 못 갔다. 나중에 그 얘기를 명세 형한테 했더니 그럴 때는 정말 내가 생각했던 그대로 ‘정말 뭐라 위로를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라는 말을 건넸으면 됐을 거라고 했다. 나의 그 어떤 고민의 무게도 고인의 가족의 아픔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닌 거다. 그때 또 명세 형한테 배웠고, 반성을 참 많이 했고, 또 고인 생각에 마음이 무거워졌다. 정말 더 많은 작품들을 나하고도 함께하면서 계속 한국영화와 더불어 사셨어야 하는 분인데.
군대에서 “스필버그!”를 외치다니…
<나의 사랑, 나의 신부>는 1990년 12월 피카디리에서 개봉했는데 첫날부터 흥행되는 걸 보니 기분이 좋았다. 개봉 첫날 극장 앞에서 그런 관람 행렬을 본 게 당시로서 거의 2년 만이었다. 게다가 예전에는 ‘청춘스타’로서의 인기였다면 이제 정말 ‘영화배우’로서 인기를 얻어가는구나 하는 뿌듯함도 있었다. <나의 사랑, 나의 신부>는 <철수와 미미의 청춘스케치>처럼 밝은 영화지만 좀더 깔끔하고 영화적으로 세련된 맛이 있다. 그런 감성과 스타일의 영화가 사람들에게 사랑받는다는 느낌이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 이명세 감독의 영화는 개봉되는 그 시대에 보면 동시대 영화 같은 느낌이 별로 없는데, 시간이 지나서 다시 보면 옛날영화 같은 느낌이 전혀 들지 않는다. 비교하자면 <미미와 철수의 청춘스케치>는 개봉 당시에는 그렇게 ‘최신’ 영화일 수 없었는데 지금 보면 좀 올드해 보이지 않나. 난 전자 같은 작품들이 걸작이라고 생각한다. 모든 배경으로부터 초월한 영화 같은 영화, 그리고 미학과 스타일이 감독 그만의 세계로 접수되어 오롯이 살아 있는 영화 말이다. <해리가 샐리를 만났을 때>도 그런 느낌이 있고 박찬욱 감독의 <올드보이>도 그런 영화다.
이명세 감독은 정말 영화에 인생을 ‘올인’하는 사람이다. 막 얘기하자면 정말 영화에 관해서만큼은 ‘또라이’다. 아마 하루 24시간 동안 영화 생각만 하고 살 거다. 어느 정도 또라이냐면(웃음) 한 인터뷰에서 스티븐 스필버그가 ‘훌륭한 영화감독의 첫 번째 조건’으로 ‘체력’을 꼽았다고 하더라. 그래서 군대에서 운동장을 돌 때 구호로 ‘핫둘셋넷’이 아니라 “스필버그! 스필버그!” 하면서 뛰었다고 하더라. 그리고 군대 내에서 투표할 때 여당을 지지해야 하는데 야당을 찍어서 늘 찍히는 인물이었고. 정말 영화에 인생을 올인했다는 얘기는 스스로도 하는 얘기다. 자기만큼 영화라는 매체 자체에 대해 깊이 생각하는 사람은 없을 거라고 자신있게 얘기하는 사람이니까 그 집요함과 성실함만큼은 알아줘야 한다. 그러면서도 고고하고 딱딱한 예술가가 아니라 기본적으로 휴머니스트다. 난 그게 정말 마음에 든다. 그래서 내가 그에 대해 또라이라고 말할 때는 100% 긍정적인 의미에서다. 내가 <나의 사랑, 나의 신부>를 끝내고 유학을 가게 되는데 그때 가장 편지를 자주 주고받았던 사람 중 하나도 바로 명세 형이다. 남자들끼리의 다정한 펜팔이었지. (웃음)
20대 후배들에게 해주고 싶은 이야기
<나의 사랑, 나의 신부> 이후 미국 유학을 다녀와 <투캅스>(1993)에 출연하기까지 나는 처음으로 영화배우로서 ‘공백기’를 가지게 된다. 물론 <투캅스>를 촬영할 때도 20대였지만 실질적으로 <나의 사랑, 나의 신부>가 나의 철없던 20대와 작별하는 영화였다고 생각한다. 20대가 나에게 굉장히 중요한 시기였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데 어쩌면 나에게 부끄러웠던 시기였던 것 같기도 하다. 남을 배려할 줄 모르고 내가 최고라 생각하면서 우쭐댔고, 예술가는 뭔가 특별해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타협’이라는 걸 굉장히 꺼려했다. 사회의 일반적 상식과 함께하면서 충분히 자신의 예술가적 자질을 발휘할 수 있는데도 말이다. 그래서 바쁜 가운데 나 자신의 행복을 찾지 못하고 정서적으로 혹사시키면서 그걸 예술가의 멋진 면모인 양 착각했던 것 같다.
그 어디서건 20대는 스스로에게 빠져드는 나이인 것 같다. 20대 여자배우들은 모든 사람들이 자기만 볼 거라는 생각에 자기 외양의 화려함과 아름다움에 너무 도취되고, 20대 남자배우들은 무게 잡고 괜히 터프한 척하면서 사회에 대해 반항적 태도를 유지하는 게 자신의 가치가 빛나는 거라 착각을 하는 것 같다. 나 역시 충분히 안으로 단단할 수 있는데 그러지 못했던 것 같다. 그래서 지금 나의 20대를 떠올려보면 ‘도대체 왜 그랬을까?’ 싶을 정도로 부끄러운 기억들이 너무 많다. (웃음) 내가 못 그래서였는지, 나는 지금의 나와 한참 차이나는 혈기 넘치는 20대 배우들을 만나면 그런 얘기들을 들려주고 싶다. 그런 게 바로 지금의 너를 한 차원 뛰어넘는 경지라고. 모든 후배들이 정말 매력적인 20대를 살아줬으면, 하면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