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미와 철수의 청춘 스케치>를 끝내고 일약 청춘스타의 자리에 오른 박중훈은 그야말로 유명세를 톡톡히 치르게 된다. 몰려드는 광고와 TV, 라디오 출연은 물론 끊임없는 캐스팅 제의까지. 그러던 중 당시 <이장호의 외인구단>으로 역시 터프한 청춘스타로 이름을 날리던 최재성과의 만남은 운명적이었다. 1970년대 <고교얄개> 시리즈로 유명한 청춘영화의 거장 석래명 감독이 연출한 <아스팔트 위의 동키호테>(1988), 그리고 이듬해 <내 사랑 동키호테>(1989)에 연이어 출연하게 된 거다. 미래형 자동차를 개발하려는 패기 넘치는 대학생들로 출연했는데, 박중훈은 특유의 ‘구라’로 동급생들에게 연구비를 타내고 재치있는 언변으로 연상녀(나영희)의 환심을 끌려는 순진하고 매력적인 사기꾼 대학생 같은 역할이었다. 당시 박중훈과 최재성은 전국 방방곡곡 최고의 인기를 누렸는데 진유영 감독의 <지금은 양지>(1988)에는 장례식장에서 행패를 부리는 두 남자로 카메오 출연하기도 했다. 터프한 최재성과 웃기는 박중훈 콤비, 그리고 왕년의 청춘스타 진유영까지 가세해 영화는 승승장구했다. 그렇게 박중훈은 늘 웃음을 안겨주는 캐릭터였다.
<미미와 철수의 청춘 스케치>를 다시 보면 정말 감회가 새롭다. 요즘 새롭게 각광받는 인기 코미디언 최양락씨도 꽤 큰 비중으로 함께 나왔고, 특히 마지막 군대 면회장면에서 빡빡 깎은 내 머리를 보면 더 그렇다. 지금 생각하면 정말 얼굴 빨개지는 얘기이기도 하고 은근한 자랑이기도 한데 그때의 나는 정말 순진했던 것 같다. 시나리오상으로 입대한 설정이라는 것만 보고는 그냥 머리를 밀어버렸기 때문이다.
단 몇초를 위하여 머리를 박박 밀다
남들처럼 제도교육을 받으며 살아오면서 나에게는 묘한 열등감 같은 게 있었다. 사실 반에서 공부 잘한다 뭐 그런 얘기를 듣는 사람들은 10% 안팎일 거다. 나머지 90% 정도는 공부를 잘하지 않거나 못하는 사람들일 거다. 그런데 나는 늘 중상위권이었으니 집안에서 보자면 공부 못하는 축에 들었고, 늘 나는 열등한 사람이라는 콤플렉스에 시달리며 살았다. 당시의 나는 뭘 해도 잘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별로 없었다. 그땐 왜 그랬나 싶은데, 고등학교 연극부장을 하고 남들보다 뛰어난 유머 감각이 있다고 생각하면서도 그걸 정작 자랑스러워하지는 않았다. 시대와 집안환경 사이에서 열등감만 컸다. 그래서 내가 영화배우를 꿈꾸면서 했던 첫 번째 생각이자 두려움은 무조건 열심히 해야 한다는 거였다. 내가 정한 길이니까 죽을 각오를 하지 않으면 나 같은 열등생은 절대 안되리라는 역발상이었다. 신인 시절 나는 시나리오를 받으면 대본 앞머리에다가 늘 ‘이 영화를 위해 죽을 수도 있다’고 써놨었다. (웃음) 그래서 영화 마지막에 강수연이 면회 와서 살짝 모자를 벗을 때 몇초뿐인데도 난 그냥 삭발을 해버렸다. 늘 열등감에 싸여 무조건 열심히 해야 하고 죽을 각오가 돼 있던 나에게 그정도는 정말 새발의 피였다. 그걸 알아주고 대단하다고 말해주는 사람도 있고, 아니면 여전히 가발로 착각하는 사람도 있겠지만(웃음) 나는 그게 배우가 관객에게 믿음을 주는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면서 난 다시금 배우라는 직업에 대해 생각하게 됐다. 사실 그전까지 나는 배우의 꿈이 있었던 것 같지는 않다. 굳이 얘기하자면 연기를 하는 ‘액터’가 아니라 무대 위에 서는 ‘퍼포머’를 꿈꿨다고나 할까. 그건 배우건 가수건 혹은 또 다른 것이건 관계없었다. 실제로 탤런트 시험 응시했다가 떨어진 것 말고도 강변가요제 나가려다가 곡을 못 받아서 포기한 적도 있고, <젊음의 행진> 통기타 가수 모집에 응시했다가 떨어진 적도 있다. 아마 <깜보> 출연하기 전에 타이밍 좋게 개그맨 시험이 있었다면 당연히 거기에도 지원했을 거다. 닥치는 대로 뭐든지 해서 무대에서 서고 싶다는 욕망은 확실한데 ‘무조건 영화배우’는 아니었다. 어쩌다 영화배우로 풀렸다고나 할까. 그런데 막상 영화 일을 하다보니 영화하는 사람들이 멋있더라. 검열에 핍박받고 척박한 환경에서도 영화 만드는 모습이 부모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던 열등생인 나와 비슷한 느낌도 있었고. (웃음) 그처럼 후진 80년대 영화계를 버텨나가는 선배들이 멋있게 느껴진 거다. 물론 그때는 사회가 후졌던 거지 영화계는 물론이요 문화예술계가 후진 건 아니었다.
영화 찍고 광고 찍으며 라디어 DJ까지
<미미와 철수의 청춘 스케치>를 끝낸 다음 새 작품을 찾고 있는데, 당시 영화계에는 유학을 갔다온 박광수라는 심상치 않은 사람이 있다는 소문이 돌았다. 데뷔작으로 <칠수와 만수>를 준비한다는 얘기를 듣고 미팅을 하게 됐는데 서로 좋은 인상을 갖고 헤어졌다. 그 사이에 석래명 감독이 최재성과 함께 <아스팔트 위의 동키호테>를 하자고 해서 먼저 하게 됐다. 당시 장발이 유행이었는데 삭발한 머리가 많이 자라지 않은 상태라 파마를 했다. 그러면 그나마 길어 보이니까. 그래서 <아스팔트 위의 동키호테> 초반부를 보면 알 수 있는데, 가수 박일준을 닮았다는 얘기를 참 많이 들었다. (웃음)
그리고 당시는 1987년 여름 <밤을 잊은 그대에게> 라디오 DJ도 하던 때였다. 송승환, 길은정으로부터 이어받아 최수종, 하희라에게 마이크를 넘겨주기까지 1년 정도 진행했다. 매일 생방송이었는데 당시 내 생활이 어땠냐면, 월·화·수·목은 낮에 학교 가고 밤에는 라디오 생방송을 했다. 또 수·목에는 생방송 전에 목·금·토 분량 녹음을 하고, 금·토·일은 영화를 찍었다. 그리고 틈틈이 광고도 찍고 TV 출연도 했다. 그러니까 정말 쉴 틈이 없었다. 매니저도 없을 때니까 집에서 어머니가 김밥을 싸주시면 운전하면서 김밥을 먹으며 이동할 정도였다.
<아스팔트 위의 동키호테>는 처음으로 내 목소리로 연기했다는 점에서 기억에 남는 작품이다. 당시는 한국영화가 거의 후시녹음이고 더빙이어서 자기 목소리로 영화에 등장하는 경우가 드물었다. 인기배우들이 겹치기 출연을 많이 하면서 성우가 더빙하는 게 익숙한 풍경이었다. 한국영화 최초로 동시녹음 시대를 연 작품이 정진우 감독의 <자녀목>(1984)인데 아마 <칠수와 만수> 이후부터 본격화됐을 거다. 내가 동시녹음을 처음 한 게 <칠수와 만수>였고 내 목소리로 동시녹음을 한 첫 작품이 바로 <아스팔트 위의 동키호테>였다. 당시 후시녹음은 디지털 시대가 아니다보니 한롤이 15분 정도라면 그 롤 안의 등장인물이 1명이건 10명이건 시작부터 끝까지 다 목소리를 맞췄다. 하나라도 NG가 나면 처음부터 다시 했다. 굉장한 테크닉을 요하는 일이라 신인배우들이 그 속에서 후시녹음을 하는 건 거의 불가능했다. 그래서 내 전담 성우가 <깜보>부터 <됴화> <미미와 철수의 청춘 스케치>까지 다 했다. 그런데 <아스팔트 위의 동키호테>부터는 직접 녹음을 다 했다. 더빙을 잘하는 게 배우의 가치를 드러내는 건 아니지만 코믹 연기의 애드리브 등 배우가 직접 챙겨야 하는 부분들이 있는 거다. 처음이라 시행착오가 많았지만 어쨌건 그때부터 나는 내 목소리를 찾게 됐다.
부산 사나이는 왜 시뻘건 얼굴로 쫓아왔나
<아스팔트 위의 동키호테>는 최재성과 나, 그리고 당시 TV드라마 <토지>로 인기있었던 최수지가 대학생으로 나온다는 사실만으로도 흥행은 뻔했다. 최재성이 동기, 내가 호태로 나왔고 내 개런티는 전보다 더 뛰어 700만원을 받았다. 1987년 가을에 촬영해서 1988년 봄 피카디리에서 개봉했는데 그때도 난리가 났다. 팬사인회 할 때 피카디리극장 광장에 하도 사람들이 많이 모여서 주변 건물 계단, 옥상에 사람들이 꽉 찼고 그 혼란스러운 와중에 극장 사장님이 롤렉스시계까지 잃어버려서 굉장히 죄송했다. 영화가 상영하고서도 나나 최재성 얼굴이 화면에 뜨면 사람들이 그냥 막 카메라 플래시를 터트려서 찍었다. 요즘으로 치면 몰래 디카로 스크린 찍고 인터넷에 올리는 그런 행위였을 거다.
부산 남포동 팬사인회 때는 이런 에피소드도 있었다. 행사가 끝나고 차로 옮겨 이동하는데 엄청난 인파가 우리를 따라붙었다. 차에 타서 손을 흔들며 떠나가는데도 계속 차를 두드리며 따라오는 거다. 그러면서 대로로 접어들어 사람들이 다 떨어져 나갔는데도 유독 한 사람만 끝까지 쫓아오는 거다. 몇 차선 도로인데도 아랑곳하지 않고 얼굴이 시뻘건 상태로 막 차창을 두드리며 쫓아오니까 속으로 부산 사람 참 독하다, 뭐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알고 보니 옷이 문에 끼어서 문 좀 열어달라고 소리치면서 쫓아오고 있었던 거다. (웃음) 자칫하면 큰 사고가 날 뻔한 아찔한 순간이었다.
영화 촬영 때는 이런 일도 있었다. <아스팔트 위의 동키호테>에는 최재성의 동생이자 고등학생으로 김민종이 출연했다. 데뷔작이나 다름없었고 나중에 속편 격인 <내 사랑 동키호테>에서는 비중도 더 커졌다. 그때 내 차가 스텔라였는데 중앙대학교에서 촬영하던 중에 민종이가 운전을 한번 해보고 싶다고 했다. 그러더니 좀 있다 어딘가에서 ‘퍽!’ 하는 소리가 났다. 운전 미숙으로 차를 들이받아서 완전히 찌그러트린 거다. 그때 수리비가 당시 돈으로 50만원이 나왔으니 대형 사고였다. 정말 죽여버리고 싶더라. (웃음) 그런데 민종이는 실제로 그때 돈 없는 고등학생이었으니 물어달라 하기도 그렇고 해서 그냥 알아서 처리했다. 민종이가 아직도 나한테 고마워하는 일화 중 하나다.
몇년 뒤에 나이를 솔직히 고백하다
당시 젊은 남자배우들 중에서는 최재성과 내가 가장 인기있었다. 솔직히 말하면 최재성이 7이나 6 정도 되고, 내가 3이나 4 정도였으니까 최재성이 나보다 더 인기있었다. 아무래도 그때는 웃기는 남자보다는 반항적인 이미지의 스타들이 더 인기있을 때였으니까. 그렇게 묘한 라이벌 관계였는데 나이 얘기를 빠트릴 수 없다. 당시 우리 둘이 동년배처럼 알려졌지만 사실은 아니다. 최재성이 64년생, 내가 66년생이다. 내가 나이를 속인 건데 그건 정말 의도적으로 속이려고 한 게 아니라 어쩔 수 없이 그렇게 된 일이었다. 나는 66년생이라도 65년생과 학교를 같이 다녀서 65년생 학번들과 맞먹었는데, 영화배우 하려다 보니까 영화사에서 어린 게 안 좋다고 1년을 높이라고 해서 64년생처럼 행세하게 됐다. ‘그냥 친구 해’라는 식의 한국적 정서로 슬쩍 1년 높인 건데 실제로는 2년을 높인 거라, 처음에는 그냥 그렇게 해야 하나보다 하고 시키는 대로 했다가 뒤늦게 꼬이게 된 거다. 주변에서도 다들 64년생인 최재성하고 친구 먹어, 그렇게 얘기들을 하니까 참 속으로 알면서도 바로 얘기를 못했다. 더 난감한 건 <미미와 철수의 청춘 스케치> 때 ‘보물섬’으로 나온 김세준이 63년생이었는데 ‘한살 차이는 그냥 친구지’라는 주변 얘기에 그냥 또 친구처럼 지냈었다. (웃음) 그런데 그게 참 괴로운 일이어서 몇년 지나 두 사람한테 다 고백했고 잘 해결했다. 역시 이규형 감독과 <청 블루 스케치>(1986), <굿모닝 대통령>(1989)을 함께했던 허준호도 64년생이었는데 나하고 특별히 같이 출연하거나 친해질 기회는 없었지만 그런 일 때문에 한때 나를 좀 안 좋게 보기도 했었다. (웃음) 물론 오해는 다 풀었지만, 학력 위조도 그렇고 사람은 거짓말하고 살면 괴로운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