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깜보>는 검열 등의 문제와 맞물려 흥행에서 참패했다. 하지만 <깜보>는 박중훈이라는 신인배우를 발굴하게 해준 영화였다. 당시 영화평론가 김종원은 <깜보>에 대해 쓰면서 박중훈을 두고 “제2의 안성기가 될 재목”이라고 했다. 그 섣부른(?) 평가를 확인하는 데는 채 1년도 걸리지 않았다. <깜보>의 이황림 감독이 제작자로 나선 <됴화>에 짧게 출연한 뒤, 곧장 <미미와 철수의 청춘 스케치>로 당시로선 ‘초대박’을 터트린 것이다. 오랜 침체기를 보내고 있던 한국영화계에는 딱히 청춘영화 혹은 코미디 배우라고 할 만한 계보가 끊겨 있던 상황이었다. 5공화국 말기, 사회는 혼란스러웠고 시대는 변화하고 있었다. 그러다 6·10 민주화항쟁이 전국적으로 일어나며 민주화에 대한 갈망이 용솟음쳤고 그것은 곧 6·29 선언으로 이어졌다. 같은 해 7월4일 개봉한 <미미와 철수의 청춘 스케치>는 6·29 선언 직후 개봉한 첫 번째 한국영화였다. 지쳐 있던 사람들은 즐거움에 대한 갈망, 새로운 얼굴에 대한 욕구를 <미미와 철수의 청춘 스케치>에서 해소했다. 70년대에 <바보들의 행진>이 있었고, 2000년대에 <엽기적인 그녀>가 있었다면, 80년대엔 바로 <미미와 철수의 청춘 스케치>가 있었다. 그렇게 한국영화의 새로운 국면이 열리게 됐다.

눈물과 함께 <깜보>가 망하는 걸 지켜봐야 했지만 다행히 나에 대한 평가는 꽤 좋았다. 달리 말하면 그 시절엔 정말 쓸 만한 배우가 없었다. 편당 제작비는 적고 완성된 한국영화의 90% 이상이 망해도, 외화 쿼터를 따내기 위해 한국영화가 꾸준히 만들어지던 때라 실패가 많은 만큼 기회 또한 많은 시절이었다. 요즘이야 탤런트가 TV에서 인기를 얻어 영화까지 하는 게 인기의 바로미터지만, 당시는 정반대로 영화배우 수가 절대적으로 적고 탤런트를 훨씬 선호하던 시대였다. 사실 <투캅스> 이전 내 영화들을 봐도 <미미와 철수의 청춘 스케치> <나의 사랑 나의 신부> 정도가 히트작이고 그외 영화들은 다 적자였다. <칠수와 만수>는 ‘똔똔’ 정도는 됐고 <우묵배미의 사랑>은 망한 영화였다.

내가 정말 ‘똥배우’란 말이냐!

어쨌건 <깜보>가 끝나고 출연 제의가 많이 들어왔다. <젊음의 행진> <가족오락관> 같은 TV 프로에도 나가면서 여학생들 사이에서도 인기가 생기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황림 감독이 다음 작품 준비한다며 다른 작품들을 못하게 하셨다. 게다가 1986년 같은 해 여름 최재성이 출연한 <이장호의 외인구단>이 뻥 히트를 치면서 정말 부러웠다. 빨리 다음 작품을 하고 싶어 조바심이 나는데 못하게 하니까 원망만 쌓여갔다. 그렇게 시간을 보내다가 겨울에 이황림 감독이 제작한 유지형 감독의 <됴화>에 출연하게 했다. 당대 최고 스타들인 남궁원, 이대근, 임성민, 방희, 강수연 등이 출연한 영화라 난 또 새파란 신인 같은 기분이었다. 그래도 좋은 선배들도 많고 <깜보>와는 다른 사극이다 보니 역할은 작았어도 정말 이를 악물었다. 나에게 중요한 터닝포인트가 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재밌는 건 그때 조감독이 바로 강제규 형이었다.

그런데 <깜보>보다 더 힘든 영화가 <됴화>였다. 극중에서 강수연을 탐하다가 벌을 받는 역할이었는데 영화 찍으면서 유지형 감독에게 ‘똥배우’라는 소리까지 들었다. 이제 막 뭔가를 시작하려는 신인배우에게 얼마나 모멸적인 얘기인가. 내가 똥배우라니. 내 연기가 성에 차지 않았을 수도 있고, 좀 호락호락해 보이지 않으면서 주인공인 강수연하고도 친하게 지내니까 다른 스탭들도 나를 좀 얄밉게 봤던 것 같다. 벌거벗겨진 채 거꾸로 나무에 묶여 벌을 받는 장면이 있는데, 그때가 1987년 1월 한겨울로 영하 20도가 기본인 외설악이었다. 밤새 거꾸로 묶여 있었는데 촬영을 좀 쉴 때도 자기들끼리 막 농담하고 그러면서 난 안중에도 없더라. 나중에 촬영 끝나고 내려오니 너무 춥고 어지러워서 현기증이 났다. 그래도 하늘 같은 선배들이 많아서 모닥불 근처에는 가지도 못했다. 그때 같이 힘내자면서 도와줬던 사람이 바로 강제규 형이었다.

한번은 롱숏에 롱테이크로 눈길을 한참 혼자 걸어가는 장면을 찍을 때다. 무전기도 없던 시절이니 ‘컷’ 사인 신경 안 쓰고 그냥 무작정 걸었다. 한참 가다가 이쯤이면 되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돌아보니 아무도 없더라. 그 엄동설한에 정말 아득했다. 상투 틀고 북 들쳐 메고 맨살에 짚신을 신은 채로 다시 그렇게 1~2km를 걸어 혼자 숙소로 돌아오면서 21살의 내가 무슨 생각을 했겠냐고. 전의는 물론이고 복수심까지 일었다. 꼭 잘돼서 지금 나에게 이렇게 수모를 준 사람들에게 복수를 하겠다고 다짐했을 정도니까. 그때 개런티가 100만원 정도였다. 촬영 분량은 꽤 됐는데 영화에는 10분 정도 나왔던 것 같다.

강우석·강제규 형에게 삼겹살을 쏘다

그래도 <됴화>를 끝내면서 다른 작품을 할 수 있었다. 그때는 연방영화사의 주동진, 합동영화사의 곽정환, 태창영화사의 김태수, 화천공사의 박종찬, 동아수출공사의 이우석, 삼영필름의 강대진, 아세아필름의 이지룡 같은 분들이 군웅할거하던 시대였다. 당시 그들보다 젊고 화통한 40대 제작자였던 이태원 사장의 태흥영화사에서 이규형 감독이 <미미와 철수의 청춘 스케치>를 준비한다는 거였다. 이미 <됴화>에서 호흡을 맞췄던 강수연이 <W의 비극> 촬영을 막 끝낸 다음 주인공으로 결정됐고, 이규형 감독은 남자 청춘스타를 찾았는데 당시로선 딱히 그런 이미지의 젊은 배우가 없다보니 <깜보>로 괜찮은 평가를 받았던 나에게 만나자고 했다.

1957년생인 이규형 감독이 나보다 9살 많았는데 얘기를 해보니 딱히 나이 차도 느껴지지 않고 참 재미있는 사람이었다. 나를 캐스팅하겠다고 하면서, 요즘 한국영화에 너무 웃음이 없다며 유머가 넘치는 영화를 하고 싶다고 했다. 나도 흔쾌히 동의했고, 개런티로 무려 500만원을 받았다. 그땐 임성민 선배 같은 분도 500만원을 받고, 안성기 선배 정도가 최고로 1천만원을 받던 때였다. 너무 기분이 좋아서 개런티 받은 날 강우석, 강제규 형을 불러 딱 셋이서 삼겹살을 먹었다. 당시 두 사람은 실제로 삼겹살 먹을 돈이 없던 사람들이었는데, 내가 2차로 압구정에 있는 스페인하우스라는 가라오케까지 데려가서 쐈다. 그러면서 우리 꼭 이 다음에 흥행감독, 흥행배우가 되자고 다짐했다. (웃음)

영화는 정말 즐겁게 찍었다. 그런데 개봉이 문제였다. <깜보>의 악몽이 되살아나는 건가, 하는 걱정도 들었다. 왜냐하면 7월4일로 개봉을 잡았는데 6·10 민주화항쟁이 전국적으로 일어났고 내내 시위가 벌어져서 도심은 통제돼 있는 상황이니 종로에 있는 극장으로 간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실제로 한나라당적 집안에서 자라온 나로서는 데모하는 사람들을 다 빨갱이로 보던 때였으니, 물론 나도 그런 제도교육의 피해자이긴 했지만 얼마나 화가 났겠나. 데모하는 사람들 욕하면서 제발 좀 시위가 끝났으면 하는 마음뿐이었다. 그러다 극적인 6·29 선언으로 당시 민정당 노태우 후보자가 항복 선언을 하면서 그런 걱정이 말끔히 사라졌다. 정말 기뻤다. 그때는 인지도 조사는 물론 휴대폰도 인터넷도 없던 시절이라 영화가 어느 정도 흥행을 하는지 보려면 무조건 극장으로 가야 알 수 있던 때였다. 대략 극장 문을 열기 전 사람들이 어느 정도 줄을 서고 1회, 2회, 3회가 각각 언제 매진되는지 보면서 통계적으로 그 영화의 흥행 결과를 예측하던 때였다. 드디어 개봉일이 되자, 상영관인 서울극장으로 가기 위해 광화문에서 유턴을 해서 탑골공원쪽으로 가는데, 종로3가 서울극장의 표를 사려는 관객 줄이 종로2가까지, 그것도 블록에서 한번 꺾여서 더 이어져 있더라. 흥행이란 게 이런 거구나 싶었다. 이제 무대인사만 가면 팬들한테 머리카락이 뽑혔고 내가 피우다 버린 담배꽁초를 주워가는 사람들도 생기기 시작했다.

유행어 된 “미미 안뇽~”… 나만 보면 안뇽~안뇽~

그러고 보면 당시에는 시대가 암울하다 보니 청춘영화, 코미디영화 혹은 트렌디한 영화라는 게 없었다. 뭐라고 할까, 당시 극장은 들어가서 눈물 흘리며 나오는 일은 있어도 딱히 즐거운 기분으로 나오는 일이 별로 없었다. <깜보> 개봉으로부터 몇달 뒤 개봉한 <변강쇠>(1986) 같은 영화들이 거의 독보적인 충무로 코미디영화였을 정도니까. 게다가 그건 성인 관람가 영화 아닌가. 다른 한국영화들의 음악이나 편집도 지루하기 짝이 없었는데 <미미와 철수의 청춘 스케치>는 당시로선 뭔가 청량감을 주는 영화였다. “안녕 귀여운 내 친구야”로 시작하는 산울림의 주제곡 <안녕>도 큰 인기를 끌면서 음반도 베스트셀러가 됐다. 내가 영화에서 “미미 안뇽~” 그렇게 인사를 하는데 그것도 유행어가 돼서 사람들이 나만 보면 ‘안뇽~ 안뇽~’ 그랬다.

그때 강수연은 아역배우에서 시작해 이미 최고의 스타였다. 실제로 <미미와 철수의 청춘 스케치>와 비슷한 시기에 <씨받이> <감자> <연산군> 같은 영화들을 거의 동시에 촬영했었으니까. 지금의 문근영 이상 가는 스타였다. <됴화> 촬영 당시 한복을 입은 모습을 보고서, 태어나서 처음으로 여자를 보면서 예쁘다는 것 이상으로 정말 ‘아름답다’고 느꼈다. 나하고 정사장면도 살짝 있었는데 누워 있는 모습이 어찌나 예쁜지. (웃음) 그렇게 <됴화>에서 서로 한복 입고 잠깐 만났다가 다시 몇 개월 만에 청바지, 청치마 입고 만난 영화가 바로 <미미와 철수의 청춘 스케치>였다. 강수연과 함께한다는 것 자체가 당시로선 큰 행운이었다. 실제로도 굉장히 친하게 지냈었고. 같은 해 <씨받이>로 베니스영화제 여우주연상까지 받았으니 정말 내 일처럼 기뻤다.

베니스와 비교할 수 없겠지만 1987년엔 나도 상을 하나 탔다. 뒤늦게 <깜보>로 1987년 백상예술대상 신인상을 탄 거다. 그때 백상 사회봉사상을 탄 분이 바로 아버지 친구분이셨다. 똑같은 ‘백상’을 탄데다 TV에서 중계까지 해줬으니 아버지도 얼마나 기쁘셨겠나. 그래서 그때부터 나에 대한 인상이 좀 달라지셨다. 상도 타고 영화도 흥행하니까 소질이 있다고 보시고 인정을 해주신 거다. 당시 마침 아버지가 공직생활의 마지막으로 보건복지부 위생국장이 되셨는데, 관용차가 나오다보니 그전까지 타던 차량 스텔라를 중고로 팔까 하다가 나에게 주셨다. 또 백상 하면 함께 떠오르는 연예인이 바로 주현미다. 1987년 KBS에 코미디언 이상해가 진행하던 <스타데이트>라는 프로가 있었는데 각각 영화계와 가요계의 떠오르는 스타로 나와 주현미가 나갔다. 그렇게 꼭 연예계 동기처럼 인식이 됐는데, 또 그 백상 때는 주현미씨가 <내 마음 별과 같이>로 TV부문 주제가상을 탄 거다. 주현미 외에 이선희, 김범룡 같은 가수들도 내 연예계 동기쯤 될 것 같다.

그 스텔라를 김민종이 박살내는데…

그런데 그 영화계에 신인으로 내가 등장하면서 분위기가 많이 바뀌었다. 당시에는 주연배우 하면 당연히 신성일, 신일룡, 임성민 같은 깎아놓은 조각 같은 외모의 배우들을 떠올렸다. 그래서 농담으로 내가 60~70년대에 나왔으면 트위스트 김 같은 배우가 되지 않았을까 하는 얘기도 했었다. 나는 참 시대를 잘 타고난 것 같다. 암울하던 시대, 즐거움에 대한 갈망이 서서히 끓어오르던 시기에 등장한 것 말이다. 1980년대 말 <미미와 철수의 청춘 스케치>는 그런 의미를 지닌 영화였다. 그렇게 인기도 얻고 차도 생기고 1987년은 정말 최고의 해였다. 그런데 그 차는 나중에 후배 김민종이 박살내게 된다. (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