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는 일본영화의 미래다. 올해로 5회를 맞는 메가박스일본영화제가 ‘일본영화의 새로운 힘’이라는 주제로 11월12일부터 16일까지 메가박스 코엑스에서 열린다. 일본영화와 만나는 통로 구실을 했던 영화제는 과거의 일본영화 소개에서 벗어나 일본영화의 현재와 미래를 보여줄 신인감독들의 작품을 선보인다. 일본영화 평론가이자 영화제 프로그래머인 데라와키 겐에게서 ‘2007년 최고의 수확’이라는 찬사를 받은 도미타 가쓰야 감독의 <국도 20호선>, 옛사랑의 딸과 하루를 보내는 청년의 이야기를 그린 하기우다 고지 감독의 <귀향> 등 총 17편의 상영작 중 12편이 젊은 감독의 작품이다. 될성부른 나무는 떡잎부터 알아본다고, 남다른 떡잎을 가진 감독과 배우들을 미리 만나는 시간이 될 것이다. 더불어 영화제는 지난해 만화와 영화의 만남을 소개했던 것과 비슷하게 올해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 5편을 소개한다. 일본영화 초창기부터 밀접한 관계를 맺은 영화와 소설이라는 두 매체가 어떻게 화학작용을 일으키는지 비교해보면 재밌을 것이다. 일본영화의 현재와 미래를 가늠할 상영작 17편을 간단히 정리했다.
전체 17편 중 12편이 젊은 감독의 작품
남들보다 먼저 새 얼굴의 등장에 열광할 수 있다면 그것은 분명 설레고 기쁜 일이다. 구로사와 아키라, 오즈 야스지로, 미조구치 겐지 등의 시대를 지나 기타노 다케시, 이와이 순지, 이누도 잇신 등을 이어 일본영화계에 새로운 피를 수혈해줄 젊은 감독들이 요 몇년 사이 하나둘 등장하기 시작했다. 대형 영화사 촬영소의 쇠퇴로 일본영화계의 신인감독 육성 시스템이 무너진 지 오래지만 여전히 시네키드들은 다양한 경로를 통해 자신들의 재능을 뽐낸다.
개막작으로 선정된 <플레이 플레이 소녀>는 <러브드 건>을 통해 자유로운 장르 혼합과 스토리 전개를 보여줬던 와타나베 겐사쿠 감독의 작품. 고등학교 야구 응원단 이야기를 청춘영화와 스포츠영화라는 틀로 풀어나가면서도 감독 자신의 개성을 발휘, 독특한 방식으로 관객의 이목을 집중시킨다. 한국인에게는 낯선 일본식 응원단 문화나 만화 같은 상상력으로 스토리를 전개하는 부분에선 간혹 웃음의 포인트를 찾지 못해 난감해지는 경우도 있다. 응원단장 모모코 역을 맡은 아라가키 유이는 최근 인기몰이 중인 일본의 신인 여배우. 국내 개봉을 앞둔 <연공: 안녕, 사랑하는 모든 것>과 영화제의 또 다른 상영작 <와루보로>에 출연해 일본에서 신인상을 다수 수상했다. <와루보로>는 젊은 배우들의 몸을 사리지 않는 연기가 돋보이는 영화다. 모범생에서 불량 학생으로 변하는 코짱 역을 맡아 근사한 연기를 선보인 마쓰다 쇼타는 이 영화로 마이니치 영화 콩쿠르에서 신인상을 수상했다. 스미다 야스시 감독의 <와루보로>는 1980년대 도쿄 다치카와 마을에 사는 중3 학생 코짱과 얏코를 중심으로 한 6명의 불량학생 ‘니시키 패거리’ 이야기다. 남자들간의 진한 우정과 젊은 날의 무모한 열정을 비장하기보다는 경쾌하게 그려냈다.
<햐크 하치> 역시 배경은 학교다. <플레이 플레이 소녀>가 고교 야구부 응원단원이 주인공인 영화라면 <햐크 하치>는 고교 야구부 후보 선수들을 주인공으로 삼은 영화다. 고교 야구의 강호, 게이힌 고등학교의 야구부 보결 부원인 마사토와 노부가 춘계 고시엔 대회에 출전하려고 벌이는 필사적인 노력과 그와 무관하게 닥쳐오는 시련에 대한 얘기가 주축. 땀흘리는 배우들의 모습이 감동적인데, 모리 요시타카 감독은 현장감이 살아 있는 야구 훈련 장면을 카메라에 담기 위해 배우들에게 실제 야구부와 똑같은 특별 훈련을 시켰다고 한다. 1979년생인 모리 요시타카 감독의 장편 데뷔작이다.
오구리 슌의 알몸, 우에노 주리의 사투리
이노우에 야스오 감독의 <이웃 13호>와 야스다 마나의 <행복의 스위치>는 사실 감독의 이름보다 배우의 이름이 도드라져 보이는 영화다. 일본에서 많은 사랑을 받는 배우이자 아이돌 스타인 오구리 슌은 <이웃 13호>에서 겉으로 보기에는 온화하고 평범한, 그러나 가슴속에 끔찍한 기억을 안고 사는 쥬조 역을 연기한다. 흉측한 살인마이자 복수심에 불타는 사이코인 쥬조의 또 다른 인격체는 나카무라 시도가 맡았다. 뮤직비디오 감독으로서 탁월한 영상 감각을 보여줬던 이노우에 야스오 감독은 빛과 사운드의 미세한 변화를 통해 서스펜스를 쌓아나가는 능력을 선보인다. 감독은 또 보너스처럼 오구리 슌의 알몸을 영화의 첫 장면부터 마지막까지 간간이 보여주는데, 아름다운 몸과 붉은 조명이 어우러져 독특한 비주얼을 만들어낸다. <행복의 스위치>에선 우에노 주리의 간사이 지방 사투리를 확인할 수 있다. 간사이 지방의 소도시를 배경으로 가전제품 가게를 운영하는 엄격한 아버지와 세 자매의 이야기를 다룬 코믹 가족극으로, 우에노 주리는 아버지에게 반항하며 도쿄에서 일러스트레이터로 일하는 둘째딸 레이 역을 맡았다. 야스다 마나 감독은 가전제품 회사에서 일한 본인의 경험을 살려 영화 속 디테일을 잘 표현해냈다. 잔잔하고 소박하지만 따뜻한 기운이 감도는 가족영화다.
이 밖에도 유년 시절 친구 사이인 두 남자와 한 여자의 우정과 사랑을 멜로드라마로 엮은 도키 요시마사 감독의 <천국은 기다려준다>, 영화감독을 꿈꾸는 이들의 등용문, 피아필름페스티벌에서 2년 연속 입선해 주목받은 후카가와 요시히로 감독의 가설 흥행장을 무대로 한 세 꼬마들이 벌이는 이야기 <늑대소녀>, 결혼 적령기 여성의 심리를 담담하게 묘사한 사이토 다카시 감독의 <빌딩과 동물원>, 카페를 배경으로 독특한 인물들의 이야기가 희극적으로 펼치는 요시다 게이스케 감독의 <카페 이소베>, 중학생들의 집단 따돌림과 자살문제를 다룬 나카니시 겐지 감독, 아베 히로시 주연의 <파랑새> 등이 준비되어 있다.
소설 원작의 영화 탄탄한 구성 돋보여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들은 기본적으로 탄탄한 구성과 스토리를 안고 간다. 문자가 영화 언어로 바뀌는 과정에서 관객의 기대치를 충족시키지 못하는 경우도 종종 있지만 원작과는 또 다른 지점에서 빛을 발하는 영화들이 분명 존재한다. <사국> <8월의 크리스마스>(한국영화 리메이크작)를 만든 나가사키 순이치 감독의 <서쪽의 마녀가 죽었다>는 동명의 원작 소설이 묘사한 시골 생활과 할머니와 손녀의 교감을 너무도 생생하게 그려낸 작품이다. 일본의 유명 아동문학가 나시키 가호의 원작 소설은 일본에서 100만부가 넘게 팔린 베스트셀러. 영화는 예민한 성격의 마이가 학교 생활에 적응하지 못해 숲속 저택에서 혼자 사는 ‘서쪽 마녀’ 외할머니 댁에서 잠시 생활하면서 활력을 되찾고 성장해가는 과정을 그린다. 일상과 자연을 가꾸고 자기 스스로에게 엄격하며 남을 의심하지 않는 일 등 아동문학을 바탕으로 한 영화답게 외할머니의 교훈은 쉼이 없다. 하지만 순순히 마이가 되어 그 말을 주워 삼키게 되는 것 또한 어쩔 수가 없다. 그것이 이 영화의 힘이고 원작 소설의 힘이다.
다이빙에 청춘을 건 소년들의 이야기, 모리 에토의 소설 <다이브>는 <무지개 여신> <아오이 유우의 편지> 등을 연출한 구마자와 나오토 감독의 손에서 살아 숨쉬는 스포츠영화로 재탄생했다. 세명의 중학생 도모키(하야시 겐토), 요이치(이케마쓰 소스케), 시부키(미조바타 준페이)가 올림픽 대표 선수 자리를 놓고 선의의 경쟁을 펼친다는 게 줄거리. 인물들의 관계와 심리에 주목한 것은 물론, 공들여 찍었음직한 다이빙 경기장면이 시원시원한 영화다. 현재보다 미래가 더 기대되는 세 배우들의 힘찬 다이빙 연기도 볼 만하다.
아쿠타가와상 수상 작가 나카사토 쓰네코가 1977년에 발표한 소설을 원작으로 하는 <가을비의 일기>는 사와이 신이치로 감독이 그려낸 중년 남녀의 애절한 성인 순애보. 불륜 멜로드라마로 스토리가 진부하기는 하지만 와타리 데쓰야, 요시나가 사유리 두 배우의 호연에 절로 영화에 몰입하게 된다. 일본의 아름다운 가을 산사와 자연의 모습도 인상적이다. 국내외 많은 팬을 거느린 무라카미 하루키, 요시모토 바나나의 소설을 영화화한 작품도 만날 수 있다. 오코리 가즈키 감독은 무라카미의 데뷔작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를 영화로 만들면서 사진과 자막, 뉴스 영상 등을 활용해 젊은이들의 불안한 심리를 다소 실험적으로 표현했다. <가족 게임> <실락원>의 모리타 요시미쓰 감독이 영화로 만든 요시모토 바나나의 소설 <키친>은 영화로서도 대성공을 거둔 작품. 개봉 당시(1989년) 일본 아카데미상과 마이니치 영화 콩쿠르 등 주요 영화상을 휩쓸었다. 영화와 소설의 성공적 만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