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극지수 ★★★ 비극지수 ★★★ 리비도지수 ★★★★
왜소한 체격의 키 작은 청년 디떼는 시골 식당의 웨이터다. 그는 식당을 찾는 부자 노인들을 관찰하며 ‘부자로 산다는 것’에 대해 혹은 돈의 습성에 대해 생각한다. 때마침 지폐로 카펫을 만들 정도의 돈을 번 어느 상인이 ‘무엇을 사고 어디에다 팔지 알아야 돈을 번다’고 설파하는 모습에 매혹된 디떼는 인생의 목표를 백만장자에 두기 시작한다. 그는 한 일터에서의 배움이 무르익고 자신의 운이 다했음을 느낄 때마다 좀더 큰물로 옮긴다. 그때마다 그의 곁에는 새로운 여자가 생기고 부에 대한 새로운 깨달음이 생긴다. 스펀지처럼 모든 것을 빨아들이는 디떼. 여자를 유혹하는 기술이 발전하는 만큼 직급을 승격시키는 기술 또한 늘어간다. 하지만 어느덧 히틀러의 시대가 도래하고, 이 체코 청년은 시대의 급물살을 타는 법 또한 익히게 된다.
<가까이서 본 기차> <줄 위의 종달새> <거지의 오페라>로 잘 알려진 체코 해학의 거장 이리 멘젤의 <나는 영국왕을 섬겼다>는 특유의 위트와 통찰력으로 어수룩해 보이는 주인공의 어수룩하지 않은 인생사를 통해 격변의 시대를 보여준다. 영화는 히틀러 시대가 종결된 뒤 백만장자의 꿈을 이루자마자 재산을 몰수당하고 감옥에 들어가 15년의 세월을 보낸 디떼가 노인이 되어 출옥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노인 디떼는 한층 평온해진 얼굴로 자신의 파란만장한 청년 시절을 회상하는데 그의 가난한 현재에 화려했던 과거가 플래시백으로 삽입된다. 단지 돈을 벌고 싶었던 소박한 청년은 밤새 여자를 끼고 놀며 쾌락에 젖는 이들과 ‘노동은 신성하다’고 말하는 자가 같은 계층임을 배운다. 디떼는 소비하고 소모하는 부자들 틈에서 사랑, 농담, 유희, 그리고 운 덕에 백만장자의 꿈에 다가서지만, 그가 살고 있는 시대는 사랑, 농담, 유희, 운이 아무에게나 허락되지 않은 나치의 시대! 그러니까 이 시대에 누군가가 모든 걸 사랑, 농담, 유희, 운으로 치환할 수 있으려면 그는 분명 순진무구한 표정으로 시대의 곰팡이, 시대의 폭력, 착취를 모른 척하며 그 덕을 보고 있는 것이다. 이리 멘젤의 그러한 자의식은 어김없이 희극과 비극을, 성적 에너지와 시대의 스산함을 한데 섞은 장면들에서 드러난다. 이를테면 체코인 디떼가 독일 여성과 결혼을 앞두고 게르만 순수 혈통을 생산할 자격이 있는지 정자 검사를 받을 때, 라디오에서는 나치 정권의 소식이 들려오고 그는 발기가 되지 않아 창백해진다. 그 장면에서 디떼의 얼굴은 나치의 총살을 앞둔 청년들의 겁에 질린 얼굴들과 교차된다. 우스꽝스럽던 장면이 금세 슬픔을 머금는다.
자본주의와 공산주의 사이. 역사의 가해자와 피해자 사이. 그리고 채플린과 히틀러 사이. 이리 멘젤이 창조한 디떼는 그 사이에서 롤러코스터를 탄, 순진하고 악한, 선하고 간교한 소시민의 형상이다.
TIP/ 독일인의 순수 혈통을 찬양하며 디떼와 결혼한 독일인 행동주의자 리자 역을 맡은 배우는 율리아 옌치다. 놀랍게도 그녀는 <소피 숄의 마지막 날들>에서 히틀러 정권에 저항하다가 끝내 죽음을 택한 백장미단의 여대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