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되어야 할 그녀의 마지막 순간…
히틀러를 향한 용기의 칼날 - 백장미단히틀러가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킬 무렵 독일에서는 히틀러 정권에 저항하는 학생 모임들이 우후죽순으로 생겨난다. 뮌헨에서 결성된 백장미단 역시 히틀러 정권을 비판하면서 독일 국민들을 일깨우기 위해 저항하는 학생 단체. 사랑과 시와 재즈를 읊조리는 여느 순수한 여대생과 다름 없었던 스무 한 살의 여대생 소피 숄. 그녀는 오빠 한스가 가입되어 있는 백장미단에 가담하게 되고, 젊은이들의 움직임을 도모하기 위해 행동을 결심한다.
영원한 자유를 향한 용기 – 소피 숄
백장미단의 유일한 여성 멤버가 된 소피 숄. 그녀는 1943년 2월 18일, 오빠 한스와 함께 이른 아침 학교에서 히틀러를 비난하는 전단을 몰래 뿌리던 중 발각되고, 현장에서 체포된다. 자신과 오빠 그리고 동료들을 보호하기 위해 거짓 진술을 하는 소피. 그러나, 증거를 잡아낸 게슈타포 심문관 로버트 모어 앞에서 그녀는 끝내 진정한 자유와 정의를 위해 목숨을 바치기로 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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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틀러를 타도하려는 독일 젊은이들의 두려움 없는 움직임
“우리는 조국을 사랑했으나, 왜 사랑하느냐는 질문에는 대답하지 못했다.”
- 잉에 숄
백장미단를 비롯한 히틀러의 국가 사회주의에 반대했던 젊은이들 중 몇몇은 한 때 히틀러 유겐트(독일 나치스의 청소년조직)의 단원이었다. 독일을 최강국으로 만들겠다는 히틀러의 약속을 순수하게만 받아들였던 그들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무분별한 학살까지도 감행했던 정부에 정신적인 상처를 받고, 결국 게슈타포의 감시를 피해 비밀 조직을 결성하게 되었다. 소피와 한스 숄 남매 역시 어린 시절을 히틀러 유겐트에 바쳤다. 특히 백장미단의 주 멤버였던 한스는 히틀러 유겐트의 열혈 단원이었지만 히틀러가 약속한 미래가 더이상 독일이 진정으로 꿈꾸던 평화와는 거리가 멀다는 것을 깨닫고 그와는 정반대의 길을 선택한다. 나치에 의해 자행되던 압제와 독재에 항거하기 위해 이들 젊은이들은 용기로 무장하고 독일인의 남은 양심을 흔들어 깨우기 위해 앞장섰다.
이렇듯 독일의 몇몇 젊은이들은 곳곳에 자유를 외치는 전단을 뿌리고 길거리에 ‘히틀러 타도’를 쓰는 등 지하조직 활동을 해나갔다. 이 중 가장 두드러진 활동을 한 조직이 바로 뮌헨 대학의 백장미단이었던 것. 백장미단은 위험을 무릎 쓰고 복사기와 타자기 그리고 우표 등을 몰래 구해 전화번호부를 보면서 자신들이 만든 전단을 뮌헨 뿐만 아니라 독일 전역에 널리 퍼뜨리려 했다. 1943년 소피 숄을 비롯한 세 명의 운명이 결정되었던 계기가 된 전단은 후에 남은 멤버들에 의해 영국과 스칸디나비아 반도 전역에 뿌려졌다.
이러한 백장미단의 투쟁 활동은 소피 숄과 한스 숄의 누이인 잉에 숄에 의해 수기로 남겨졌다. 우리나라에서는 <아무도 미워하지 않는 자의 죽음>이라는 제목으로 잘 알려져 있는 이 책은 군사독재 시절을 겪은 과거의 우리나라 젊은이들에게도 큰 영향을 끼쳤다.
영화 <소피 숄의 마지막 날들>은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기 전 나치 지배 아래 압제에 항거해 진정한 자유를 위한 용기 있는 외침을 감행했던 바로 그 백장미단, 그리고 그 단체에서 유일한 여성이었으며 가장 어렸고, 또한 첫 희생자였던 소피 숄의 눈부셨던 마지막 날들을 그리고 있다.
소피 숄, 그녀가 5일 동안 찾아낸 진정한 ‘자유’에로의 여행
“우리는 길을 포장하도록 허락 받았지만, 그 전에 그것을 위해 죽어야만 한다.”
- 소피 숄
<소피 숄의 마지막 날들>은 백장미단의 첫 희생자들, 특히 소피 숄이라는 유일한 여성 멤버가 그녀의 의지와 소신을 지켜나가는 과정을 그려 나간다. 무엇보다도 영화는 소피 숄의 심리 변화를 미묘하게 포착하고 있으며, 심문에 이어 재판, 그리고 집행에 이르는 5일간의 에피소드를 철저히 소피 숄의 태도를 관찰하는 방향으로 진행된다.
어릴 때부터 자유롭게 자란 소피 숄은 항상 정의의 편에 서있을 것을 가르친 아버지에게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 히틀러 유겐트 단원 활동에서부터 백장미단, 그리고 죽음에 있어서까지도 그녀는 철저히 자기의 소신을 지켜나갔다. 소피 숄은 학문에 있어서 뿐 아니라 예술에도 재능을 보여 ‘퇴폐 미술가’들의 모임에서 미술 활동을 했다. 또한 철학과 신학에 대한 깊은 관심은 히틀러 유겐트에서 벗어난 후, 그녀에게 대안적인 세계를 제공해 주었다. 소피가 뮌헨 대학에서 생물학과 철학을 공부하던 시절, 그녀를 정치적 활동에 연루시키지 않으려는 오빠 한스 숄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백장미단에 가담하게 된다. 정치활동뿐 아니라 예술과 자연을 즐기던 백장미단은 대학 초년생인 소피 숄에게 이상적인 본보기였던 것이다.
소피 숄은 1942년 여름, 처음으로 백장미단의 전단을 제작하고 돌리는 일에 참여한다. 1943년 2월 18일 그녀는 여섯번째 전단을 학교에 몰래 돌리다 오빠와 함께 체포되었다. 소피 숄의 죄를 자백받기 위해 시작된 며칠간의 지리멸렬한 심문과정. 심문관 모어와 소피 숄은 서로 한 치의 양보 없이 팽팽하게 맞서고, 소피 숄은 그녀와 오빠, 그리고 백장미단의 자유를 위해 거짓 증언과 합리화를 시도하지만 모어의 치밀한 추궁 끝에 결국 자신을 희생하고 자기가 믿는 정의만을 말할 것을 결심한다. 목숨을 내건 모어와의 심문 과정은 소피 숄을 자기자신만의 자유가 아닌 정의를 위해 떳떳하게 싸우도록 만들었고, 이 과정을 통해 그녀는 ‘진정한 자유’라는 이상에 근접하는 순간을 맞이한다. 모어는 소피 숄의 그러한 모습에 마음이 움직여 어떻게든 살리려고 애쓰지만 그것마저도 그녀는 거부한다. 삶에 대한 애착으로 가득차 있을 스물 한 살의 젊은이에게는 너무도 힘든 결단을 내린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그녀는 정의를 통한 진정한 자유를 깨닫게 된다.
사형집행 전날, 소피 숄은 세례를 받으려는 아기를 안고 가던 중 낭떠러지의 갈라지고 있던 틈으로 자신은 떨어지고 아기는 구하는 꿈을 꾸었다고 하는데, 이것이 그녀에게 자신의 죽음이 결코 헛되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을 주었다고 한다. 영화에서 소피 숄은 눈부시게 내리쬐는 태양을 향해 미소 지으며 여유 있게 사형장으로 걸어간다. 실제로도 그녀는 죽는 순간까지 삶에 대한 긍정적인 자세와 웃음을 잃지 않았다. 영화보다 더욱 극적인 역사적 사실은 소피 숄의 찬란했던 죽음이 그 어떤 죽음보다 고결했음을 말해준다.
실제 상황에 충실한, 가공되지 않은 사실의 재현
영화 <소피 숄의 마지막 날들>의 대부분은 소피 숄과 심문관 모어와의 조사 과정으로 구성되었다. 어둡고 칙칙한 모어의 사무실과 감옥, 그리고 재판장에서 우리는 영화가 최대한 사실에 충실하려한 노력을 엿볼 수 있다. 마크 로드문트 감독은 대사 하나까지 새롭게 찾아낸 심문 기록과 주변 인물들의 증언을 토대로 하여 실존 인물과 상황들을 그대로 담아내고자 했다. 특히나 1990년 동독의 문서국에 숨겨져 있던 미출판 자료를 통해 게슈타포 심문관 모어와 소피 숄의 사실적이고도 흥미진진한 대치 상황을 영화 속에 그려낼 수 있었다.
영화 세트 또한 최대한 실제로 사건이 일어났던 장소들에서 그 모습을 그대로 반영하려고 했으며, 촬영에 있어서도 특수효과를 배제한, 가공되지 않았다는 느낌이 드러난다. 3년의 영화제작 기간 동안 정보수집으로만 2년을 보냈다는 마크 로드문트 감독의 집념이 이 영화의 성공을 이끌어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면서도 마크 로드문트 감독은 소피와 모어 사이의 감정을 갈등과 대립, 심지어 그들의 교감까지도 놓치지 않고 그려내는데 성공했다. 감독은 “각본은 인물의 내면 세계에 매우 커다란 비중을 싣고 있다. 이 영화에서는 인물의 감정과 행동, 갈등이 가장 중요하다. 우리는 소피 숄을 다룬 다른 영화들과는 달리, 주인공이 죽을 때까지의 ‘감정적인 여행’에 주목했다.”고 말한다.
이러한 노력의 결과물인 <소피 숄의 마지막 날들>은 2005년 베를린영화제에서 당당히 은곰상의 영예를 얻음과 동시에 많은 영화팬들에게 강한 인상을 남겼다. 더불어 이보다 더 완벽할 수 없게 소피 숄로 다시 태어났던 줄리아 옌치도 여우주연상을 거머쥐며 영화의 완성에 큰 공헌을 했다. 명감독과 명배우의 노력으로 탄생된 <소피 숄의 마지막 날들>은 유럽을 울린 것만으로 만족하지 않고 2006년 아카데미 외국어영화상 후보에까지 오르며 그 감동의 순간을 널리 알렸다.
마크 로드문트 감독 인터뷰
1. <소피 숄의 마지막 날들>은 무엇에 대한 영화인가?
소피 숄 인생의 마지막 6일-대학 구내에서 선전지를 배포하기 위해 준비하는 과정에서부터, 발각, 심문, 선고, 그리고 처형의 과정까지-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소피 숄이라는 존재, 그녀의 과거, 그리고 백장미단의 이상이 드러나는 극단적인 상황에 대한 영화이다.
2. 백장미단에 관해 만든 다른 영화들과는 어떻게 다른가?
이 영화는 소피 숄이 체포되는 것에서 시작하여 그녀가 5일간의 감정적으로 혼란스런 시간을 거쳐 죽음에 이르는 과정에 동참한다. 그리고 그녀가 자신의 의무를 다하며 목숨을 건 압박을 견디는 동안 그녀가 성장하는 과정을 볼 수 있다. 그 모든 과정은 소피의 관점으로 담담하게 펼쳐진다. 또한 우리는 악명 높은 ‘피의 재판관’ 롤란드 프라이슬러를 재현해냈으며, 소피가 스타델하임 감옥에 머무는 기간도 잡아냈다. 마지막 담배 한 개피, 부모님과의 이별, 마지막 식사, 마지막 기도, 그리고 처형까지. 하지만 무엇보다도 소피 숄에 대한 다른 수많은 영화들과 이 영화가 구별되는 점은, 198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공개되지 않았던 자료를 참고할 수 있었다는 점일 것이다. 1990년에 공개되기까지 동독의 문서국에 숨겨져 있던 미출판 자료들을 참고로 한 게슈타포의 심문 장면은 굉장히 흥미롭다. 특히 내 관심을 끌었던 것은 26년의 경험을 가진 심문 전문가이자, 게슈타포 장교였던 로버트 모어가 소피 숄과의 5시간에 걸친 취조 끝에 그녀가 무죄라고 믿게 되었다는 사실이었다. 5시간 동안 그녀는 눈도 깜박하지 않고, 궁지에 몰려도 머뭇거리지 않으며 그의 취조를 이겨낸 것이다. 굉장한 성취가 아닐 수 없다. 지금까지 심문 장교에 대해서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는데, 우리 이전에는 어느 누구도 그에 대한 조사를 하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3. 촬영은 어떻게 이루어졌는가?
법정 촬영의 경우, 우리는 재판과정을 담은 의사록과 기소장, 그리고 롤란드 프라이슬러 재판장의 사형선고문 등의 자료를 참고했다. 또한 실제 그 자리에서 있었던 사람들의 증언도 참고했다. 이 모든 자료들을 바탕으로, 그 스스로도 법조계에서 일해왔던 프레드 브라이너 도르퍼(각본가)는, 스릴 넘치는 재판 장면을 그려냈다. 그외의 촬영도 가능한한 실제 장소에서 촬영했다. 그러나 백장미단이 전단지를 인쇄했던 슈바빙의 작업장은 안타깝게도 더이상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면밀한 연구를 통해 다시 만들어야 했다. 뮌헨 게슈타포들의 본부가 있었던 브리너 거리의 비틀바허 청사는 1964년 무너졌으나, 바바리아 북부청사 등, 비슷한 외양을 가진 건물에서 대신 촬영할 수 있었다. 다행히 비틀바허 청사의 자세한 평면도가 남아있었기 때문에 우리는 제작사 스튜디오에서 건물의 내부를 충실하게 재현해낼 수 있었다. 그리고 물론, 루드비히 막시밀리언 대학과 뮌헨 법정에서도 촬영을 진행했다.
4. 정보수집에 많은 시간을 들인 것으로 알고 있다.
우리는 현재 83세인 심문관 로버트 모어의 아들과 4시간 넘게 인터뷰를 했고, 로버트 모어라는 사람에 대해서 깊이 알게 되었다. 또한 아넬리스 크누프 그라프라는, 백장미단의 멤버인 윌리 그라프의 누이와도 만나서 인터뷰했는데, 그녀는 모어로부터 4개월 동안 취조를 받았기 때문에 그와 그의 사무실에 대해서 매우 상세하게 설명할 수 있었다. 더욱이, 그 4개월동안 그녀의 감방동기가 다름 아닌 소피 숄과 같은 감방에 있었던 엘제 게벨이었다. 또다른 중요한 증인은 소피 숄의 여동생이며, 후에 소피의 약혼자였던 프리츠 하트나겔과 결혼한 엘리자베스 하트나겔이다. 우리와의 대화가 그녀로서는 카메라 앞에서 경험한 첫번째 인터뷰였다. 그녀는 개인적인 기록을 우리에게 보여주기도 했는데, 이 모든 증언들은 우리가 이야기를 가능한 실제에 가깝게 전달하는데 많은 도움을 주었다.
5. 대본은 주인공들의 내면 세계를 강조하는 것처럼 보인다.
프레드(각본가)와 내 자신에게 감성적인 부분은 이 영화에서 무엇보다도 중요한 부분이었다. 캐릭터들의 감정, 그들의 관점, 그들의 갈등이야말로 이야기를 끌고 가는 중요한 끈이었기 때문이다. 심문 부분을 읽으면서, 나는 무엇보다도 그 대사들의 긴장감에 충격을 받았다. 게다가 이 영화에서 우리들이 볼 수 있는 것처럼, 훌륭한 배우들이 연기하게 되면 이런 감정적으로 밀도 있는 장면들도 완전히 새로운 차원으로 완성된다. 예를 들어, 줄리아 옌치가 스스로를 소피 숄의 감정으로 몰입시키며 그녀를 실제 사람으로 되살려놓는 것을 보는 것은 언제나 놀라운 일이었다.
6. 만약 골라야 한다면, 무엇이 더 중요한가? 영화화에 집중하는 것과, 완전히 역사적 디테일에 충실해지는 것 중에.
전자다. 하지만 우리가 조사한 사실들과 영화적 요소들이 서로 상충하지 않았기 때문에 운이 좋았다. 우리는 마치 퍼즐처럼 실제와 영화를 함께 끼워넣을 수 있었다. 우리는 사건의 전말을 알고 그 위에 감성적인 구조물을 세웠으며 그로 인해 소피 숄이 가졌을 법한 느낌과 감정 상태를 쫓아갈 수 있었다. 우리가 가진 모든 정보와 우리가 바라보는 관점을 응용하는 방식으로 줄리아 옌치와 나는 소피 숄에 접근했고, 그녀를 만들어냈다. 나는 이런 어려운 감정적 여행에 그녀가 동참해주어 정말 기쁘다.
7. 주제와 시대에 대한 직접적 언급을 피한 것처럼 보인다.
아주 신경 쓴 부분이다. 영화 속 현실과 가능한 거리를 줄여 현대의 관객들이 무리없이 영화 속으로 들어갈 수 있기를 바랬다. 그렇기 때문에 제복과 만卍자도 되도록 쓰지 않으려고 노력한 것이다. 의상에 있어서는 1940년대의 오리지널 의상을 쓰길 바랬지만, 동시에 현대의 시각으로 봤을 때 가장 거부감이 없는 것으로 옷을 골랐다. 역사적 장면들을 재현하기보다는 현대적 이슈를 다루고 싶었다. 부정에 맞닥뜨린다면 우리는 어떻게 할 것인가? 신변의 위협을 무릅쓰고 과연 어떤 행동을 할 수 있을 것인가? 현재도 전세계에 전쟁과 독재는 만연하고 있다. 우크라이나 주민들은 탱크에 깔리는 위험을 무릅쓰고도 거리로 나아가 시위를 벌였다. 나는 이슬람 광신자들에 대항하여 더 많은 무슬림들이 항거하기를 기대한다. 우리는 매일매일의 삶에서 시민으로서의 용기라는 이슈에도 직면한다. 예를 들면, 약자의 권리가 유린되고 있는 학교에서나 직장에서의 폭력이 있다. 부정에 대항하고 그러한 부정을 모른 척하지 않는다면, 이것은 언제나 중요한 이슈로 남을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왜 관객들이 영화를 보면서 역사수업을 받고 있다고 느끼지 않아야 하는가’에 대한 답이 될 것이다.
소피 숄 역의 줄리아 옌치 인터뷰
1. 어떻게 역할을 준비했는가?
많이 읽었다. 특히 소피 숄의 편지들과 일기, 그리고 마지막 심문 의사록을 읽었다. 촬영을 시작하기 전에 나는 알렉산더 헬트(로버트 모어 역)와 종종 만나서 대사와 심문 신을 맞춰보곤 했는데, 그 또한 이런 작업이 필요하다고 느껴줘서 다행이었다고 생각한다. 그 후엔 감독님이 촬영해온 아넬리스 크누프 그라프와 엘리자베스 하트나겔의 인터뷰 자료를 봤는데, 아주 흥미로웠다. 어떤 장면에서든지, 나는 내가 말 그대로 소피를 따라 하려고 하면 결과가 그리 좋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그녀와 다르게 생겼고, 목소리의 느낌도 다르다. 대신에, 그녀 같은 느낌을 잡아내어 보려고 했다. 그녀가 쓰는 글에서 느껴지는 그녀의 느낌 같은 것 말이다. 이것은 최소한 그녀가 어떤 식으로 생각했는지, 그녀에게 어떤 것이 중요했는지를 우리에게 알려준다. 이런 방식으로 나는 가능한 그녀와 가까워지려고 노력했다.
2. 역사적 인물을 연기하는 것이 다른 배역보다 어렵다고 생각하는가?
상당히 어렵다고 생각한다. 배우로서, 연기하는 모든 인물에 충실하고 싶어한다. 하지만 실제로 ‘살았던’ 사람을 연기하는 상황에 놓이면 다른 문제가 발생한다. 그들을 알았던 사람들에 대한 거대한 책임감이 생기는 것이다. 나는 정말이지 참견자이거나 엉터리로 흉내만 내고 싶지는 않았다. 마크 로드문트 감독은 나의 걱정거리를 이런 말로 덜어주었다: “확실히, 우리는 역사에 충실하려고 하고, 가능한 진실에 가까워지려 노력하고 있어. 하지만 그것이 디테일에 집착하고 있다는 뜻은 아니야. 결국 우리는 우리가 발굴해낸 그리고 우리가 촬영해낸 버전의 이야기를 할 뿐이야.” 이 말에 설득당했다.
3. 게슈타포 심문 과정에서 그녀는 강철 같은 신경을 보여준다.
그렇다. 그녀는 몇 시간이고 지속된 심문 끝에 숙련된 심문 장교로 하여금 그녀가 무죄라고 믿게할 정도의 강인함을 보여준다. 자료를 읽어보면 소피는 조금 섬뜩하기까지 하다. 이 시간 동안엔 아마 굉장한 확신과 마음의 평온함을 필요로 했을 것이다. 그녀의 증언에 반하는 증거들이 나타나 더이상 빠져나갈 수 없었을 때 그녀의 강한 동정심과 친구들을 보호하고자하는 의지는 그녀가 스스로 모든 책임을 지겠다는 결심을 하도록 만든다. 그녀는 또 심문 장교가 건넨 기회를 거절하는 용기까지 보인다. 자신이 가진 이상을 지키고 이렇게 말함으로써, 그녀는 스스로 자신의 사형선고서에 사인을 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다시 말하겠어요, 죄인은 저에요.”
4. 그런 상황에 놓일 경우에 어떤 행동을 할 지 생각해본 적 있나?
물론이다. 하지만 나도 그녀처럼 행동했으리라 믿고 싶다고 밖에 대답할 수 없다. 알 수 없는 일이다. 나도 그녀처럼 할 것이다라고 말하는 건 주제넘은 행동이다. 하지만, 전쟁이란 상황도 다뤄져야 할 것이다. 소피는 아마 생각했을 것이다.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공습과 비인륜적인 전쟁에서 죽어가고 있다-훌륭한, 맞서 싸울 만한 이유를 가지고 있는 죽음이라면 선택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5. 영화 첫 부분에서 우리는 소피가 빌리 홀리데이의 노래에 맞춰 춤추고 노래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렇다. 우리는 소피가 어느 정도로 인생을 사랑하는 소녀였는지를 보여주기 위해서 그 장면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녀가 친구들과 하이킹을 하고 수영을 하면서 찍은 그녀의 사진들은, 그녀가 파티를 하고 와인을 마시면서 어떻게 즐거워했는지를 보여준다. 그녀는 단지 삶을 사랑하고 많은 것들에 흥미를 가진 젊은 여성일 뿐이었다. 이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한편으로 소피 숄처럼 올곧은 자세로 단두대를 향해 걸어간 사람을 본 적이 없었다는 집행관의 증언이 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백장미단의 다른 동료였던 크리스토퍼 프롭스트가 연행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눈물을 흘리는 그녀의 모습이 있다. 이것이 내가 당면한 가장 큰 문제였다. 모든 장면에서 나는 나 자신에게 소피가 무엇을 느끼고 있을지를 물어야 했다. 그녀 내면의 힘과 평정심이 주도하고 있는가, 아니면 두려움과 슬픔이 주도하고 있는가. 촬영 내내 나는 이 힘의 딜레마를 다뤄나가야 했다.
6. 힘, 그리고 죽음에 대한 두려움 사이의 영원한 투쟁인가?
바로 그렇다. 그것이 이 캐릭터가 스릴 넘치는 이유이다. 근접할 수 없는 거리에서 뭔가 대단한 존재인 듯이 그려졌었다면 흥미가 전혀 없었을 것이라 생각한다. 관객들은 소피가 일반적인 소녀가 두려워하는 것들을 두려워하는 소녀임을 깨닫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녀가 우리 역시 그러한 상황에서 내릴 수 있을 법한 결정을 내리는 것을 보게 된다. 우리는 단순히 처형 장면 뒤에 숨어서, 나는 소피 숄처럼 강하지 않아, 라고 이야기할 수 없다. 소피는 우리가 두려움과 약점을 극복할 수 있음을, 그리고 강해지기 위해서 싸워야함을 보여주었다.
7. 쌍안경을 통해서 과거를 들여다보는 식의 영화가 아닌 것인가?
전혀 그렇지 않다. 시민의 용기라는 이슈는 모든 시대에 걸쳐서 되풀이되고 있다. 예를 들어, 누군가가 지하철에서 저격당했다. 소피는 우리가 스스로에게 질문할 것을 요구한다.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 양심과 타협하는 행동을 취할 것인가, 아니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 대로 행동할 것인가. 이런 문제가 있는 한, 이 영화는 언제나 현재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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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작
프레드 브라이너스도퍼
마르크 로테문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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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본
프레드 브라이너스도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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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작
골드카인드 필름프로덕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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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상내역
- [제78회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 외국어영화상 후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