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피 막달레나 숄(율리아 옌치)은, 신과 가족을 사랑하는 스물한살 대학생이다. 그러나 히스테리 단계에 도달한 나치즘이 인간됨 자체를 위협하는 1940년대 초 독일에서는 들꽃 한 송이도 단순한 삶을 누릴 수 없다. 모순 앞에서 소피의 선택은 단호하다. 그녀는 오빠 한스 숄(파비안 힌리히스)을 따라 뮌헨의 청년 저항 조직 백장미단원으로 활동한다. 그 결단은 이 맑고 곧은 젊은 여성에게 슈베르트의 피아노 선율에 기쁨을 느끼고, 라디오 유행가를 친구와 따라 부르는 일만큼 자연스러워 보인다. 이른바 ‘지배 민족’의 임박한 승리를 선전하며 전쟁을 독려하는 나치즘의 거짓과 야만을 폭로하고자 백장미단은 목숨을 걸고 팸플릿을 배포한다. 1943년 2월, 뮌헨 대학 강의실 복도에 여섯 번째 전단을 뿌리는 거사의 주역은 소피와 한스 남매. 그들의 전술은 무모하고 천진난만하다. 가장 치명적인 독은 로맨티시즘. 남매의 위태로운 모험이 마무리되는 순간 설명할 길 없는- 아마도 미학적인- 충동이 소피의 손을 움직여 팸플릿 더미를 공중에 흩날린다. 이를 목격한 대학 관리인은 남매를 범인으로 지목하고 소피와 한스는 체포된다.
제목이 공공연히 표명하듯 죽음은 이 영화의 전제다. 소피 숄의 이야기는 동생 잉게 숄의 수기 <아무도 미워하지 않는 자의 죽음>을 통해 널리 알려져 있으며 이미 영화화된 바 있다. 그러므로 여기에는 서스펜스나 트위스트가 있을 수 없다. 관건은 오직 연출 방식이다. <소피 숄의 마지막 날들>은 역사가 영화에 줄 수 있는 수혜가 무엇인지 보여주는 사례다. 마크 로테문트 감독은 독일 통일 뒤 공개된 게슈타포의 녹취록과 재판 기록, 목격자들의 인터뷰를 통해 마치 속기사와 같은 태도로 소피 숄의 마지막 엿새간을 재현한다. 풍성한 사료에 의지한 세부는 역설적으로 시대극의 위화감을 희석시켰다. 거사와 심문, 처형의 3막극으로 구성된 <소피 숄의 마지막 날들>에는 레지스탕스를 그린 영화에서 한번쯤 관객을 진저리치게 만드는 고문장면도 없다. 복도를 울리는 군화 발소리와 수인들의 서글픈 소곤거림, 멀리 들려오는 비명이 간간이 마음의 북을 울릴 뿐이다. 영화의 본론을 차지하는 ‘2막’의 태반은 탐문하는 모어 수사관(알렉산더 헬드)과 부인하는 소피의 숏-반응 숏으로 단조롭게 구성된다. 가방의 크기, 빨래, 열차 시각 같은 지엽말단적 문제가 하나씩 끌려나온다. 모어 수사관은 훗날 재판정에 선 일부 나치 전범이 보여주었듯이 지독히 성실한 공무원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한편 소피는 대단히 침착하고 유능한 거짓말쟁이다. 이미 결론을 알고 있는 구경꾼조차 혹시나 하는 희망을 품을 만큼. 의연하고자 이를 악문 소피와 함께 심문과 침묵, 기다림과 체념을 경험하면서, 관객은 육박해오는 죽음 앞의 시간이 어떤 냄새를 풍기는지 알게 된다.
로테문트 감독은 개입을 줄이고 객관적 사실로 하여금 직접 호소하게 만드는 원칙을 고수하지만, 영화는 처음부터 끝까지 소피 숄의 심장으로 숨쉰다. 소피가 모어 수사관의 취조실에 처음 끌려온 순간 카메라는 그녀의 시점숏으로 창문 너머 푸른 하늘을 흘끗 응시한다. “내가 다시 저 하늘을 볼 수 있을까?” 관객의 귀에는 소리없는 독백이 들린다. 석방의 희망이 눈앞에서 물거품이 되는 순간, 소피는 다시 창밖으로 시선을 던진다. 그러나 그곳에는 벽돌담이 버티고 있다. 스물한살의 여인은 단 한번도 무너지지 않는다. 소피는 수사관이 권하는 담배도 거절한다.(결말부에 이르러 관객은 그녀가 얼마나 간절히 담배를 원했을지 짐작할 수 있다.) 누군가가 옆에 있어주지 않으면 감당할 수 없는 동요가 닥치자 그녀는 화장실로 도망쳐 거울 속의 자신과 마주본다. 2005년 베를린영화제는 <소피 숄의 마지막 날들>에 은곰상과 여우주연상을 안겼다. 소피 숄로 분한 율리아 옌치를 비롯한 배우들의 연기는 역사와 인물에 대한 세심한 이해로 무장하고 있다. 소피의 패배는 예정된 것이지만, 심리적 투쟁에서 시종일관 그녀는 승자다. 이른바 ‘인민법정’의 판사가 소피와 동지들에게 퍼붓는 병적인 독설은, 스탈린그라드전투 이후 붕괴를 예감한 나치 체제의 단말마처럼 들린다. 소피에게 전향을 종용하는 모어 수사관의 얼굴은 경멸과 연민, 분노와 두려움으로 경련한다. 심지어 누가 누구를 심문하는지 알 수 없을 지경이다. 이 재판의 진정한 판결은, 백장미단원의 사형선고가 아니라, 잔다르크적 권위가 실린 소피의 예언이다. “오래지 않아 당신들이 지금 내 자리에 서 있을 거야!”
소피는 시행착오를 모르는 순결한 영웅에 대한 우리의 동경을 충족시킨다. 그녀와 한방에 수감된 왕년의 공산주의자 엘제 게벨(요한나 가스트도프)의 무기력함은 독일 공산당(KPD)의 쇠락을 대변하며 소피의 얼룩 한점 없는 이상주의와 대조를 보여준다. 그녀는 우리 모두가 “나중에 자라서” 혹은 “다시 청춘이 온다면” 한번쯤 그렇게 살아보리라 호기를 품었던 논리 정연한 인생의 표상이다. 아무도 감히 눈물을 보이지 않는 이별 의식이 끝나고 형리가 다가온다. 소피 숄은, 그녀의 이념을 하얀 강보에 싼 아기처럼 자랑스레 품에 안고 단두대를 향한다. 관객이 마지막으로 소피와 눈을 맞추는 순간 스크린 속 세계의 불이 꺼지고 어둠 뒤에서 칼날이 곡한다. 생에 대한 주체의 완전한 지배와 결단력을 증명하는 그녀의 죽음에 서린 아름다움은, 자살의 매혹과 닮은 데가 있다. 하지만 그것은 소피 숄의 이야기에 드리운 가장 눅진한 슬픔이기도 하다. 그녀의 삶은, 더럽혀질 시간조차 갖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