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BC <출발 비디오여행>의 2007년 12월30일자 방송분이 이미 정리했다. 당시 ‘찰스와 순위’ 코너를 진행하던 찰스는 2007년 최고의 다작배우로 임창정을 꼽은 뒤 “하지만 진정한 다작배우는 따로 있다”며 정인기를 소개했다. “출연 작품만 11편! 맡은 캐릭터의 면면도 다양하여 의사, 변호사, 작가에 볼펜팔이, 전문 이동 문방구 주인까지! 그야말로 진정한 다작배우라는 걸 아시는지!” <M> <내 생애 최악의 남자> <우리 동네> <우아한 세계> <두사람이다> <브라보 마이 라이프> <꽃미남 연쇄 테러사건> <검은집> <화려한 휴가> <최강로맨스>에, 목소리로 출연한 <천년여우 여우비>까지 2007년의 한국영화는 정인기가 나오는 영화와 안 나오는 영화로 구분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런데 2008년의 1/4분기가 지나고 있는 현재도 그의 다작 행렬은 여전하다. <추격자>에서는 똥물을 맞은 시장과 연쇄살인범 때문에 동분서주하는 이 형사를 연기했고, <마이 뉴 파트너>에서 극중 조한선의 선배형사를 연기했던 정인기는 인터뷰를 하는 도중에도 출연했지만 아직 개봉하지 않은 여러 작품들을 이야기했다. 한국 영화계가 불황의 여파로 제작편수를 급격히 줄이지만 않는다면, 아마도 그의 1년당 출연편수는 올해도 기어이 경신될 듯 보인다.
-이 불황에도 끊임없이 작품을 내놓고 있다. <추격자>에 이어 <마이 뉴 파트너>에도 나오는데, 또 숨겨놓은 작품은 없나. =<추격자>의 막바지 촬영 중에 <눈에는 눈 이에는 이>에 출연했다. 이 영화에서는 차승원의 선배로 나오는데, 문서를 위조하는 탁월한 능력을 가진 남자다. 김태균 감독의 <크로싱>에도 출연했고, 송해성 감독의 <멜로스>도 곧 촬영에 들어갈 것 같다. 그리고 독립영화 2편을 준비하고 있는데, 그 영화들도 4월 초쯤에는 촬영에 들어갈 것 같다. 아, 양익준 감독의 <똥파리>에도 잠깐 출연한다.
-2007년에 정말 바빴겠더라. 개봉한 작품만 11편인데, 출연한 작품은 더 많을 것 아닌가. =그때는 TV드라마 <꽃피는 봄이 오면>도 했었는데, <검은집>이랑 스케줄이 겹쳤다. 여러모로 양쪽에 많이 미안했다. 지방과 서울을 자주 오가야 하기도 했고, 스케줄 맞추느라 피가 마르는 일도 더러 있었다. (웃음)
-불러준 감독이 많은 건가, 본인이 뛰어다닌 건가. =아무래도 단편이나 독립영화에 뛰어다닌 덕을 많이 본 것 같다. 그동안 작업한 단편 중에 <미성년자 관람불가>와 <불법주차>를 따로 복사해서 여러 영화사를 찾아다니기도 했다. 또 현장에 있는 연출부 친구들 가운데 나랑 같이 단편을 만든 친구들이 많은데, 그들이 캐스팅을 제의해온 경우도 많다.
-혹시 출연했지만 나중에 편집된 영화는 없나. 아무래도 비중이 적은 역할을 주로 하다보면 그런 일이 비일비재할 것 같은데. =결과물에서는 아주 잠깐 나오지만 <싱글즈>에서는 원래 조연쯤 되는 분량이었다. 안타까웠지만 그렇다고 대세에 지장을 줄 수는 없으니까 할 수 없는 일이지. <허브>는 아예 출연분량이 삭제됐다. 강혜정이 엄마랑 허브농장에 가기 전에 기차표를 끊는데, 내가 역무원을 연기했다. 처음에는 이 아이를 이상하게 여기다가 나중에는 웃으며 조심히 가라고 말해주는 장면이었는데, 개봉날 보니까 날아갔더라. (웃음) 그런데 한번은 아예 없어진 줄 알고 시사회를 갔더니 내 장면이 있었던 경우도 있다. <내 청춘에게 고함>이었는데, 마지막에 나오더라.
-과거 <씨네21>과의 인터뷰에서 노동연극을 통해 연기를 시작했다고 했다. 특별한 계기가 있었나. =서울예대 연극과를 다녔는데, 주위 친구들이 죄다 운동권이었다. 자연스럽게 나도 관심을 갖게 됐고 예술로 사회를 변화시켜보자는 그런 사람들끼리 모임을 만들기도 했다. 군대에 있는 동안에는 정말 열심히 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제대하면 정말 열심히 연기해서 인민배우가 돼보자, TV나 영화쪽으로 가는 배우가 아니라 진짜 노동자와 함께하는 배우로 말이다. 그래서 졸업도 하기 전에 대학로에 있던 노동극단에 들어갔다.
-운동을 향한 뜻으로 연극을 했다 하더라도 막상 열악한 현실에 부딪혔을 때는 갈등도 많았을 텐데. =90년대 중반부터 뭔가 이상하게 돌아가는 게 있다고 생각했다. 그때 우리 극단이 모 은행의 노조창립기념공연을 준비했는데, 이 이야기를 전부 다하려면 지금 국회의원 준비하는 분까지 들먹여야 하는데 참…. (웃음) 아무튼 우리가 한 시간 반을 공연했는데, 노래 2, 3곡 부르고 가버리는 초청가수들보다 2, 3배 적은 돈을 주더라. 그때 서태지와 아이들도 뜨고 그러면서 대중문화가 휩쓸던 시기였다. 이념도 깨졌고, 동구권도 몰락했으니 더이상 우리가 하는 공연에 관심을 갖지도 않았을 때고. 평소에는 50명 오던 관객이 나중에는 5명도 오지 않고, 평소 공연 때면 표라도 사주던 노동조합들도 외면하고 그랬다. 진짜 열심히 해보려 했는데, 그런 상황이 되니까 결국 하나 둘 영화쪽으로 기웃거리게 된 거다.
-영화는 어떻게 시작한 건가. =영화를 해보려고 고민을 정말 많이 했다. 경력으로 보면 연극만 했는데, 그 연극이라는 게 유명한 것도 아니고 <진짜 노동자>니 <해방이 온다>니 이런 제목들의 작품이었으니까. (웃음) 그래서 이렇게 이질감이 많은 배우가 영화쪽으로 갈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일까 고민하다가 단편을 해보자는 생각을 했다. 카메라도 적응하고 컷을 쪼개면서도 감정선을 이어가는 그런 연습을 해보고 싶었다. 물론 그전에도 <구미호>나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처럼 아는 분들 소개로 한 적은 있었는데, 정말 나를 알려준 건 신재인 감독의 <그의 진실이 전진한다>였다. 그 영화가 영화제에서 상도 받고, 그러면서 얼굴이 알려졌고 더 많은 독립영화들에 출연하면서 충무로에도 알려졌다.
-단편영화, 독립영화는 이후에도 꾸준히 출연했다. 독립영화계 영화인들에게도 너무나 감사한 배우로 정평이 나 있더라. =아시아나국제단편영화제에서 상받았을 때, 수상소감으로 “뼈를 묻겠다”고 했었다. 그런데 요즘은 너무 미안하게도 많이 도와주지 못하고 있다. 어쩌다보니 1년에 2, 3편을 하되 조금은 가려 할 수밖에 없는 입장이 됐다. 장편영화도 중요하고 독립영화도 중요한데, 지금은 장편영화에 중요성을 놓게 되더라. 그런 상황이 안타깝지만, 나로서는 최소한의 선택으로 갈 수밖에 없어서 정말 미안하다.
-연극에 투신했던 배우들이라면 누구나 있는 이야기일 것 같다. 연극만으로 생계를 꾸리기는 힘들지 않았나. =집사람이랑 한 6년간 연애를 했는데, 막상 결혼을 해야겠다고 생각하니까 막막하더라. 가진 건 몸뚱아리뿐이니 공사판이라도 가서 일을 해볼까 하다가 결국 선택한 게 도배기술을 배우는 거였다. 그때만해도 IMF 전이라 도배기술자들이 돈을 많이 벌었다. 신도시가 막 들어설 때였으니까 일거리가 많았거든. 기술자가 돼 밑에 시다를 하나 부릴 정도가 되면 한달 반 일해서 500만원 정도를 벌 수 있었다. 그래서 형님에게 돈 50만원을 빌려서 학원에 등록하고 기술을 배웠다.
-도배기술자 자격증도 있는 건가. =자격증이라고 나오는 건 없다. (웃음) 시다가 올려주는 벽지를 받아다 맨 위에서 자리를 잡아주고, 밑에서 시다가 다 붙이면 천장 끝 몰딩 밑부분을 칼로 자르는 그 순간, 기술자로 인정받는 거다. (웃음) 난 몰딩 밑까지는 못 가고 그 밑부분까지만 했다. 그래도 그 일로 탄 첫 월급으로 극단 사무실에 귤이랑 라면 한 박스씩 사들고 가기도 했다. 그때 날 봤던 극단 누님이 내가 양손에 박스를 들고 오는 모습이 꼭 갈비 두짝을 들고 오는 것 같았다고 하더라. (웃음) 기쁘기도 했지만, 참 슬프더라고.
-그럼 결혼자금은 어떻게 모은 건가. =그러니까 좀 있으면 몰딩 밑에 칼을 댈 수 있는 거였는데. (웃음) 임진택 선생님이 대표로 계시는 길라잡이 극단에서 <밥>이라는 마당극을 공연해보자고 했다. 그때 권태원 선배, 박철민이랑 같이 공연했는데 꽤 긴 시간 동안 전국 순회공연을 하면서 관객을 많이 모은 덕에 한달에 150만원에서 200만원 정도의 돈을 벌 수 있었다. 그래서 적금을 들었는데, 그때만 해도 4, 5번만 부으면 은행에서 대출을 해주던 시기여서 그 돈으로 단칸방을 마련해 결혼했다.
-연극과 영화를 통틀어 정말 잊을 수 없는 작품이겠다. =연극을 하는 배우로서는 가장 행복했고, 보람된 시간이었다. 봉고차를 타고 전국을 돌아다녔는데, 매일 하는 이야기라고는 거기 가면 뭘 먹을까, 내가 먹어봤더니 뭐가 제일 맛있더라 이런 이야기들이었다. (웃음) 특히 우리 세 배우가 뭐랄까, 영혼으로 교류하고 있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현장 분위기가 약간 처진다고 하면 서로 눈빛을 주고받으면서 다음 작전을 짜는 식으로 공연했으니까.
-하지만 연극을 하는 남편과 아빠를 바라보는 가족들의 마음이 좋지는 않았을 텐데. =정말 평생 고마울 수밖에 없는 존재다. 김윤석이 얼마 전 기자시사하면서 “나는 정말 최선을 다한 연기를 하고 집에 갔는데, 애들 자는 얼굴을 보면 다시 내일 생활고를 걱정해야 했다”고 하더라. 정말 깊게 공감했다. 고액의 개런티를 받는 배우가 아니라면 언제나 현실로 다가올 수밖에 없는 일이다. 그래도 우리 집사람은 나를 정말 많이 믿어줬다. 내가 가끔씩 이렇게 노느니 그냥 도배일을 해야겠다고 그러면 “그럴 거면 빨리 오디션이라도 하나 더 잡아오라”고 다그치곤 했으니까. (웃음) 하지만 딸을 보면 아직도 가슴이 아플 때가 있다. 영화 때문에 지방에서 한달 반씩 생활할 때면 지금 내가 뭐하는 짓인가 싶을 때가 있다. 평소에도 아빠 촬영 다녀올게 그러면 꼭 안기곤 한다. 언제는 한번 내 다리를 붙잡고 눈물을 글썽이더라고. 그때는 집사람한테도 화가 났다. “도대체 애한테 어떻게 이야기했기에 애가 이러냐고.” 그럴 때면 내가 왜 연기를 하고 있나 생각할 때도 있다. 다행히 최근 영화촬영이 끝난 뒤 부터는 계속 아이와 놀아주고 있다.
-필모그래피를 보면 2005년에 집중적으로 영화에 출연한 것 같더라. <댄서의 순정> <주먹이 운다> <역전의 명수> <그때 그사람들> 같은 상업영화부터 <미성년자 관람불가> 같은 단편영화도 그때 참여했다. =아내가 김포에서 초등학생을 대상으로 학원을 한다. 처음 개설했을 때가 2005년이었는데, 그때만 해도 운영이 어려웠다. 정말 큰일이다 싶었지. 내가 뭔가 도움을 줘야 하는데, 큰 빚을 지지 않고는 해결이 안 되는 상황이었으니까. 그런데 어쩔 수 없이 지금까지 해온 것이 배우니까 정말 전투력을 길러야겠다 싶더라. 그래서 열심히 돌아다녔다. 단편이며 독립영화며 가리지 않고 열심히 찍고, 상업영화도 계속 작은 역이라도 출연했고. 그때는 아마 내 프로필을 안 받아본 영화사가 없었을 거다.
-그렇게 수많은 작품 중에 특별히 애착이 가는 작품이 있다면 어떤 건가. =<그의 진실이 전진한다> <미성년자 관람불가> <불법주차> 같은 단편영화들은 정말 큰 애착을 갖고 있다. 정말 행복했던 경험이었고, 나에게도 큰 도움을 준 작품들이다. 상업영화로는 처음으로 형사를 연기했던 <주홍글씨>가 기억에 남는다. 그 영화에서 연기한 안 형사는 어떻게 보면 그다지 도드라지는 캐릭터는 아니었다. 그런데 한석규 선배가 주인공을 한다고 하니까, 얼마나 영광이었겠나. 당대를 호령했던 최고의 브랜드인 분과 작업하는데, 정말 잘해야겠다 싶더라고. 그러다가 한석규 선배가 어느 날 명필름에서 남자 많이 나오는 영화한다고 오디션 보라고 해서 갔는데, 그게 <그때 그사람들>이었다. 영화내용도 몰랐는데, 한석규 선배의 친구 역이었다. 나는 그저 남자들이 모인 무리에 섞여 있을 거라 생각했거든. 그래서 아, 이 작품이야말로 정말 최선을 다해야겠구나 싶었지. (웃음)
-이후의 출연작을 보면 주로 노동에 지친 남자의 페이소스를 보여주는 경우가 많았다. 주인공을 조력하는 선배나 친구, 오빠, 형이기도 했고. 본인만의 특징적인 캐릭터를 만들려고 한 적은 없었나. =당연히 배우로서 밋밋한 모습만을 보여주고 싶지는 않았다. 하지만 역시 작품의 통일성과 분위기, 그리고 상대배우를 배려해야 하지 않을까 싶더라. 욕심도 있었지만, 아직은 그런 욕심을 부릴 상황이 아니었다.
-연극을 하다가 영화에 와서 코믹한 조연연기로 자리를 잡아서 주연급으로 올라서는 배우들도 많은데. =그러고 싶은 생각도 있다. 나도 연극을 할 때는 주로 재밌는 캐릭터를 연기했는데, 맡겨만 주면 잘할 자신이 있다. 그런데 잘 안 주시더라고. (웃음)
-그동안 비중은 작아도 수많은 역할을 해왔다. 그래도 꼭 연기하고픈 캐릭터가 있다면 어떤 건가. =가족 때문에 고민하고 갈등하면서 눈물 흘리는 아버지를 연기해보고 싶다. 내 마음에도 그런 느낌이 매우 많다. 하지만 그런 캐릭터로 주연을 맡긴다면 아마도 못하겠지. 내가 영화사를 문닫게 할 수는 없는 건 아닌가.
-충무로에서 실망을 느낀 적은 없었나. =소속사가 없기 때문에 경쟁도 해보지 못하고 캐스팅에서 밀릴 때가 있다. 요즘도 주로 현장에 가면 나 같은 배우들과 친하게 어울리는데, 다들 비슷한 이야기를 한다. 그러니까 주연배우의 소속사에서 조연배우들까지 패키지로 밀어넣는 거지. 지금은 많이 없어졌다고 하지만 몇년 전만 해도 심했다. 하지만 사실 그것도 그들의 능력이라고 생각한다. 나나 다른 배우들은 그런 능력이 없기 때문에 고생할 수밖에 없는 거고.
-그래도 지금 충무로에서 나름의 역할로 자리를 잡았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현 내 위치에서는 그렇게 볼 수도 있다. 하지만 내가 내 마음대로 막 나갈 수는 없다. 지금의 나는 작품의 분위기를 돕고 주연배우가 잘할 수 있도록 해주는 역할이다. 말하자면 주연배우가 차를 타고 터널을 지나가는데, 사고가 나지 않도록 불을 밝혀주는 존재인 거지. 만약 정말 어두운 공간이라면 좀더 밝게 해줄 수도 있는 거고. 그래도 언젠가는 나도 한번 쌩 하고 달려보고 싶다. (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