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총 110편의 개봉작 중 (단) 83편만을 보고서 머릿속에 떠다니는 몇 가지 정리되지 않은 생각들.
1. 한국영화는 때깔이 좋다
2007년 한국영화는 따뜻한 톤의 때깔 좋은 화질이 눈에 띄었다. 다른 아시아영화들과 비교해볼 때 더더욱 그러했는데 요즘엔 독립영화에서조차 그런 게 느껴질 정도다. 이건 실로 한국영화를 설명하는 하나의 특징이 되어가고 있다. 그럼에도 흥미로운 점은 어떤 이들(특히 할리우드 산업형 타입의 사람들)은 이 같은 특징을 매우 높이 치켜세우는 반면, 다른 이들(무뚝뚝한 영화평론가들)은 한국영화가 활력을 잃어가는 징조로 해석하는 듯하다는 것이다. 나는 한국영화가 지금 같은 정신을 계속 유지하면서 동시에 때깔까지 좋으면 안 될 이유는 전혀 없다고 생각한다(배럭 오바마가 그러하듯이). 하지만 몇몇 한국영화는 포장이 지나치게 잘된 나머지 사람 냄새가 거의 안 나는 듯 느껴지기 시작한 것도 사실이다(힐러리 클린턴이 그러하듯이).
2. 웰메이드 한국 코미디는 어디로?
한국 프로듀서들은 ‘대중’을 위한 영화와 ‘웰메이드’ 영화를 만드는 것 사이에서 항상 딜레마를 겪는 것으로 사려된다. 영화계에는 저급한 유머를 내세우는 코미디가 ‘웰메이드’ 코미디보다 항상 더 수익이 좋다는 전제가 있는 듯한데 그게 사실인지는 잘 모르겠다. 난 <반칙왕> 같은 영화가 그립다. 누구에게나 쉽게 다가가면서도 연기도 좋고 재미있고 고급스러운 코미디 말이다. 2007년 가장 안타까웠던 영화 중 하나가 <못말리는 결혼>이다. 만약 이 영화가 ‘웰메이드’ 영화를 지향했다면 크게 히트했을 거라고 짐작되기 때문이다. 이 영화의 주된 컨셉은 충분한 잠재력을 지니고 있었고 김수미의 연기는 지난해에 본 한국영화 중에서 최고로 웃겼다. 하지만 영화의 다른 많은 결점들이 영화를 아래로 끌어내린 듯하다. 웰메이드 코미디를 만든다는 게 쉽지 않다는 건 알지만 한국영화에는 그런 영화가 좀더 필요하다.
3. 한국 독립영화들이 지나치게 내면에만 초점을 맞춘다?
한 이탈리아 친구가 부산국제영화제에서 많은 한국 독립영화 시놉시스들을 읽고 내게 던진 질문이다. 시놉시스는 대부분 독립영화를 만드는 젊은 감독들에 관한 것이었다고 한다. 그는 물었다. “왜 그들은 시각을 넓히지 않는 거지?” 물론 개인적인 경험에 대해서도 좋은 영화를 만들 수 있는 건 잘 알지만 나 또한 그의 의견에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은하해방전선>을 매우 재미있게 보긴 했으나 그 영화를 특출나게 만든 건 주제의 익숙함이 아니라 영화적인 야심과 창의성이었다. 나는 오늘날 고군분투하며 살아가는 많은 젊은 감독들이 직면하는 상황에 강하게 동조하지만, 그러나 (매우 말하기 괴롭지만) 자기 연민이 영화에 파고들게 되면 영화가 갖는 임팩트는 약화된다. 내가 2007년에 가장 좋게 본 독립영화 또한 강력한 상상력을 보여줬던 <포도나무를 베어라>와 (<판타스틱 자살소동> 중 조창호 감독이 만든) <날아라 닭!>이었다.
4. 2007년 가장 좋았던 영화 속 캐릭터들
이제 긍정적인 분위기 속에서 글을 마치기로 하자. 영화 만들기의 가장 어려운 일 중 하나가 살아 숨쉬는 듯한 흥미롭고 호감가는 캐릭터를 만들어내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2007년에는 몇몇 훌륭한 연기를 볼 수 있었고 더불어 몇몇 매우 잘 쓰여진 캐릭터들도 있었는데, 이에 대한 찬사는 배우, 작가, 그리고 감독에게 고르게 돌아가야 할 것이다. 2007년에 내가 가장 좋아한 영화 속 인물들은 다음과 같다. <열세살, 수아>에서 이세영이 연기한 내성적인 십대, <즐거운 인생>에서 보는 이의 가슴을 아프게 한 김상호, <행복>에서의 황정민(그의 강점만큼이나 결점 때문에), <세븐데이즈>에서의 김윤진(그녀의 지적 능력과 강렬함 때문에), <좋지 아니한가>에서의 황보라(그 영화의 정신을 잘 표현해냈기에), 그리고 <싸움>에서의 김태희(또 하나의 <엽기적인 그녀>의 복제품이 아니라 진짜 인간적인 감정을 보여주는 코믹한 여주인공을 연기했기 때문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