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편 대신 쇼크만 먹었다.” 한 투자·배급사 관계자의 말이다. 대개 추석 연휴가 끝나면 보름달을 품에 안은 승자가 극장가에 모습을 훤히 드러냈지만 올해는 딴판이다. 1등도 울고, 꼴찌도 울고, 모두들 울상인 기현상이 벌어지고 있다. 전체 박스오피스가 예년과 비교해 60% 정도밖에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흥행 수위를 차지한 영화조차 손익분기점을 넘길 수 있을지 의문이라는 말까지 나오고 있을 정도다. 잠깐의 이상 기류로 끝나면 좋으련만. 이 여파가 비단 추석에만 머물지 않고 연말까지 계속될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9일이나 되는 긴 연휴, 관객은 모두 어디를 찾아 떠난 것일까. 아니, 그들은 왜 떠난 것일까.
추석을 하루 앞둔 9월24일. KM컬쳐의 한 직원은 영화 관람을 위해 서울 강남에 위치한 메가박스 코엑스 점을 찾았다. 오전이라고 해도 점심 무렵이라 꽤 어지러운 행렬을 예상했는데 정작 메가박스 매표소 앞은 한산했다. 비수기 평일과 비교해도 그닥 큰 차이가 없었다. “전광판의 광고는 신나게 도는데 썰렁한 극장을 보면서 올해 여럿 울겠구나 싶었다”는 이 관계자의 우려 섞인 예상은 빗나가지 않았다. 투자·배급사인 시네마서비스에 따르면, 올해 추석 연휴가 낀 9월 넷쨋주 주말 이틀 동안 전국 박스오피스는 140만명 선이다. 예년의 같은 기간에 최소 200만명 이상의 관객이 극장을 찾았다는 것을 감안하면 관객 수가 무려 30% 이상 줄어들었다. 극장가 안팎에서 도는 “2007년 추석은 없었다”는 말이 과한 엄살은 아닌 것이다.
파이가 대폭 줄었으나 경쟁자는 많았다. 배부른 이가 있을 리 없다. 9월12일에 <권순분여사 납치사건> <두 얼굴의 여친> <즐거운 인생> <본 얼티메이텀> 등이 ‘추석프로’라는 이름으로 선보였다. 9월19일에는 <사랑> <상사부일체: 두사부일체3> 등이 추석대전에 가세했다. 10여편이 경쟁을 벌였으나 누구도 미소짓지 못했다. CJ CGV가 집계한 영화산업 분석자료(10월1일 기준)를 보면, 한국영화로는 <사랑>(서울 40만9451명, 전국 152만3816명)이 외화로는 <본 얼티메이텀>(서울 64만3천명, 전국 179만9300명)이 9월 상영작 중 흥행 수위를 차지했으나 정작 기대에는 한참 못 미치는 결과다. <사랑>을 배급한 롯데엔터테인먼트 이경헌 배급팀장은 “지난해하고 비교하면 숫자가 많이 안 좋다. <타짜>를 논외로 친다고 하더라도 그렇다. 지난해 추석시즌에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이 <타짜> 다음이었는데, 올해는 1등 영화가 그만 못하다. 아직도 200만 관객을 못 넘었다. 한국영화 중에 추석 때 돈 번 영화는 없는 셈”이라고 말한다.
극장가 안팎에선 이 같은 가뭄의 이유를 일단 킬러 콘텐츠의 부재로 설명한다. 분위기를 이끈 영화가 없었다는 것이다. CJ CGV 이상규 홍보팀장은 “아무래도 시선을 끄는 영화가 있으면 관객의 극장 유인이 손쉽다. 한편의 영화가 싹쓸이를 하는 경우 경쟁하는 영화까지 동반 상승하는 오버 플로 효과가 명절 특수에는 있다”면서 “이번 추석은 지난해 <타짜> 같은 작품이 없었던 것이 전반적인 극장가의 침체를 낳았다”고 설명했다. 지난해 <타짜>의 경우 추석 연휴인 10월5일부터 8일까지 나흘 동안 무려 전국관객 168만9084명을 끌어모았다. 이는 2주 동안 <사랑>을 찾았던 관객보다 더 많은 수치다. <타짜>보다 앞서 개봉했던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 <가문의 부활-가문의 영광3> 등도 흥행작 대열에 끼었다. 흥행 시너지를 냈던 지난해 가을과 올해는 누가 봐도 분위기가 확연히 다르다.
올해 추석이 예년보다 너무 빨랐고, 연휴 기간이 여름 성수기가 끝나는 시점과 거의 맞닿아 있어서, 명절특수를 누리지 못했다는 분석도 있다. 시네마서비스 이원우 배급팀장은 “결과론적인 이야기지만 10월 둘쨋주 정도에 연휴가 있었더라면 어땠을까 싶기도 하다”면서 “여름 성수기에 <디 워> <화려한 휴가> 등 2편의 영화가 대략 1500만명 이상의 관객을 가져갔고, 할리우드 블록버스터들도 예년 이상의 성과를 냈다. 다시 말하면 여름방학이 끝나고 비수기로 들어선 상황에서 관객이 다시 극장으로 나올 텀이 다른 해보다 짧았다”고 지적한다. 반면 애초 9월20일에 개봉하기로 했던 영화들까지 대거 9월13일에 전진배치되면서 추석을 노렸던 영화들 5편이 한날에 개봉하는 바람에 박스오피스가 줄어든 측면도 있다. 한 제작사 관계자는 “개봉이 몰리면서 마케팅 경쟁도 더 치열해졌는데, 명절에는 광고 단가 등도 올라가 있는 상태라 부담이 더욱 컸을 테니 타격들이 이만저만 아닐 것”이라고 말했다.
본격적인 비수기라 불리는 10월에 들어선 지금 극장가가 반등포인트를 쉽게 찾을 것 같진 않다. 10월3일 개봉한 <행복>은 예매율 1위를 기록하고 있지만 폭발적인 기세라고 보긴 어렵다. 개봉 첫주 주말 이틀 동안 전국에서 27만여명을 불러들였고, 평일에는 4만3천명 정도의 관객이 찾고 있다. <러시아워3>는 17만2602명, 평일에는 2만여명 선을 기록 중이다. 일각에선 지난해 연말 흥행작이었던 <미녀는 괴로워>나 <박물관이 살아있다!>처럼 한두편의 흥행작이 연내에 나오기야 하겠지만 2006년처럼 해를 넘겨 극심한 비수기가 계속되는 일이 재연될 수도 있다고 말한다. CJ CGV 이상규 홍보팀장은 “올해 9월은 추석 연휴가 포함됐는데도 지난해 같은 기간에 비해 겨우 관객이 10% 늘었다”면서 “지난해 추석이 끼어 있던 10월과 올해 10월의 결과를 비교하면 격차는 상당할 것”이라고 예상했다. 한편 올해 부산국제영화제에서 만난 한 제작자 역시 내년 설 개봉을 목표로 촬영 중인 대작의 개봉 시점을 옮기는 것을 검토 중이라면서 더이상 명절 특수를 기대하기란 어려운 것 같다고 털어놨다.
“어느 한편이 독식했으면 차라리 나았을까”, “배급 시기를 잘못 택한 것일까”. 영화계 한편에선 외부적인 환경보다는 내부적으로 이유를 찾아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CJ엔터테인먼트 이상무 부장은 “영화인들은 추석이든 설이든 새로운 영화라고 관객에게 내놓지만 막상 관객 눈에는 그 나물에 그 밥처럼 보이는 것 같다. 올해 추석에 나온 영화들은 코미디부터 가족드라마까지 장르적으로 다양했음에도 불구하고 관객의 눈과 귀를 사로잡지 못했는데 이는 한국영화의 위기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라면서 “현재 기획, 제작 중인 영화들의 방향을 다시 재점검해야 하는 것 아닌가 싶다”고 말한다. 제작비를 줄이는 소극적인 방식으로는 수익률을 제고할 수 없다는 뜻이다. 그는 “영화 자체에 대한 평가와 별개로 <화려한 휴가>나 <디 워>가 왜 흥행했는지 좀 따져볼 필요가 있다”면서 “관객을 잡아끌 만한 소재나 스케일이 없다면 해마다 극장가는 몸집을 키우는 레저, 여행사업 등에 명절을 빼앗기게 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내년 이맘때쯤 과연 충무로엔 보름달이 뜰 것인가. 보름달을 한손에 넣을 만큼 한국영화는 원기충전해 있을 것인가.
“메뉴가 없으니까 관객이 극장에 안 나왔던 거다”
<즐거운 인생> 영화사 아침 정승혜 대표
“괴롭다는 말밖에는 별로 할 말이 없는데….” 촬영을 시작한 이준익 감독의 <님은 먼 곳에> 때문에 지방 출장을 다녀오던 중이던 정승혜 대표. 올해 추석 시즌에 개봉한 <즐거운 인생> 이야기부터 꺼내자 “이렇다 저렇다 말할 만한 상황이 아닌 것 잘 알잖나”라고 반문했다.
-올해 추석에 개봉한 영화들의 흥행 성적이 모두 저조하다. =괴롭다는 말밖에 안 나온다. 우리 같은 경우는 지난해 추석에 개봉했던 <라디오 스타>에 이어 샘플이 두개가 생겼는데, 두편 다 잘된 것도 아니고 하다보니 뒤돌아보기도 싫다. 다른 영화들에 비하면 순제작비나 마케팅비를 상대적으로 적게 들인 터라 그나마 다행이라고 여기면서도 어쨌든 순익분기점을 맞추진 못했으니까 할 말이 없다. 쇼크는 남들보다 좀 덜 먹었겠지만 망했다는 건 똑같은 거니까. 눈앞의 결과가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는 거지.
-왜 이런 결과가 나왔다고 보나. 여름방학 성수기가 끝난 지 얼마되지 않아서 추석연휴가 왔기 때문이라고들 말하기도 한다. =지난해 박스오피스의 60% 수준이라고 하던데. 이런 저조한 결과의 이유를 누군가는 잘 모르겠다고 하기도 하고 외부적인 요인으로 돌리기도 한다. 그러나 실상 간단하다. 메뉴가 없으니까 관객이 극장에 안 나왔던 거다. 올해는 지난해 <타짜>만큼 눈이 돌아가는 영화가 없었다. 관객이 원하는 영화를 못 만든 거지. 이번 추석 때 한국영화에 대한 관객의 애정이 식었음을 분명히 느꼈다.
-추석 땐 경쟁이 치열하고, 또 그러다보니 마케팅 비용도 올라간다. 다른 때에 개봉한 영화들보다 부담이 클 것 같다. =한국에선 이상하게도 제작비가 적으면 마케팅비도 적다. 큰 영화들은 자주 알려지니 굳이 마케팅 비용을 많이 들이지 않아도 되고 반면에 작은 영화들은 마케팅비를 더 많이 써야 하는데 그렇지가 않다. 특히 추석은 경쟁작들에 밀리면 안 되니까 배너도 많이 하고 1단 광고할 거 2단, 3단 광고 하는 식이다보니 들어가는 돈이 많아진다. 그런데 이런 결과를 맞았으니 참담한 거다. 투자자들에게 미안할 따름이다. 만들 때는 27억, 28억원 정도의 제작비 정도는 건질 거라고 봤는데 이번 추석에 마음의 빚만 늘었다. 모두들 반성하고 곱씹어야 할 시점인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