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이다. 지난해 이맘때, 누군가는 영화가 연애를 걸어온다며 행복하게 하소연했지만, 나는 망설이고 있었다. 습한 무더위와 영화 한편이 불러일으킨 소란과 정치와 종교의 파노라마를 애써 견뎠을 뿐인데, 여름은 어느덧 가버렸다. 공포영화보다 끔찍하고 액션영화보다 자극적인 온갖 사건들 틈에서 이상하게도 눈은 점점 더 무뎌지고 있었다. 불길한 징조. 추석을 겨냥해서 극장에 걸린 영화들을 흘낏 지나치면서 그 영화들과 대면하는 순간을 어떻게든 미뤄야겠다고 중얼거렸다. 그러나 어쩌다보니, 결국, 추석을 겨냥한 거의 모든 (한국)영화들을 보고 말았다. 갑작스럽게 가을의 첫 번째 다짐을 철회하며 여섯편의 영화를 떠돈 뒤, 2007년 후반기, 아니, 정확히 말해 <디 워>와 <화려한 휴가> 이후 한국영화의 몇 가지 흐름을 발견했다. 그 흐름을 읽어내는 일은 흥미로웠지만, 스크린 앞에 쓸쓸하게 앉아 있던 나는 별로 행복하지 않았다. 말하자면 매번 예의 바르게 사양하고 싶었던 이 가을, 영화들의 부산스런 속삭임.
2007년 여름, <디 워>가 전한 불길한 조짐
먼저 이 영화들에 대해 말하기에 앞서 지난 여름을 뜨겁게 달궜던 <디 워>에 대한 언급을 피해갈 수 없을 것 같다. 물론 무수한 말들이 있었다. 영화가 언어를 생산하는 것이 아니라, 말이 말을 생산하는 기이한 현상 앞에서, 몇 가지 견해를 덧붙이고 싶다. <디 워>와 관련된 애국주의 마케팅과 어설픈 이야기 구조에 대한 비판이 틀리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한여름, <디 워>를 보러 온 수많은 사람들 틈에 앉아서 나는 그것이 이 기이한 현상의 핵심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문제의 방점은 ‘심형래의 영화에는 가장 기본적인 서사구조조차 결여되어 있다’가 아니라 왜 그토록 많은 관객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를 지지하는가에 놓여야 한다. 애국주의 마케팅이 이 현상의 추동력일 수는 있지만, 전부라고 말할 수는 없다. <디 워>는 지금 이 시대를 사는 대중이 영화를 받아들이는 방식에 대한 가장 정확하고 끔찍한 대답을 하고 있는 중이다. 심형래는 아이들도 한눈에 간파할 수 있는 단순한 스토리 라인과 그걸 능가하는 강력한 CG만 있으면 영화가 된다고 믿는 사람이다. CG로 뒤범벅된 장면들을 제외한 대부분의 숏들은 최소한의 줄거리(이야기가 아니다)를 나열하는 수준에서 억지로 붙여지고 있었다. 한숏이 감당해야 할 최소한의 것들조차 온전히 마무리되지 못한 채 숏들은 빠르게 버려지고, 매번 그 숏들의 결함을 잊게 해줄 CG를 향해 달려가고 있을 뿐이었다. 심형래는 그렇게 만들었고 관객은 그런 방식에 동의했다. 그들이 숏의 미학적, 서사적 결함을 보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에게는 아무리 후진 숏일지라도 최소한의 줄거리만 전달해준다면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 것이다. 눈을 감고 소리만 들어도 무방한 일이다. <디 워>는 영화의 가장 기본 단위인 숏의 정체성이 줄거리 전달 도구, 즉 시놉시스만 미리 읽고 들어온다면 CG가 나올 때까지 잠시 졸아도 상관없는 사소한 요소임을 증명해 보였다. 그리고 7천원의 관람료와 교환될 수 있는 자격은 오직 화려한 CG에 있음을 거듭 일깨웠다. 이 끔찍한, 그러나 언제나 가장 정당한 근거로 제시되는 교환의 논리! 영화가 기술박람회가 되어버린 시대, 어떻게 재현할 것인가의 고민이 불필요해진 시대, ‘어떻게’의 책임을 기술이 떠안은 시대. 지난 여름을 보내며, 나는 한국영화가 당분간 점점 더 나빠질 것이라는 예감을 하고 있었다. 그렇게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가을의 영화들을 만나러 갔다.
변치않고 돌아온 이준익 월드 <즐거운 인생>
이준익의 <즐거운 인생>은 <라디오 스타>를 보지 못했다면 할 말이 많은 영화가 되었겠지만, 이미 <라디오 스타>에 대한 비판(<씨네21> 577호, ‘남자들만의 예쁜 유토피아’)을 쓴 상태에서는 그다지 새롭게 덧붙일 말이 없는 영화다. 가족에게 버림받고(혹은 가족을 버리고) 죽어버린 친구의 장례식장에 모인 중년의 남자들은 <라디오 스타> 때보다 확실히 더 비루해졌다. <라디오 스타>의 남자들은 우정 때문에 울지만, 이 남자들은 가족 때문에 운다. 박민수(안성기)와 최곤의 이상을 위해 결국 기꺼이 희생을 선택한 박민수의 아내에게 무심했던 이준익은 이 남자들의 희생을 가슴 깊이 연민한다. 퇴직당하고 집안의 구박덩어리가 된 기영, 낮에는 택배기사, 밤에는 대리운전기사로 가족을 부양하는 성욱, 기러기아빠 상호. 예상했던 대로 이준익은 아내들에게 관심이 없다. 그녀들은 어차피 자주 등장하지도 않지만, 우정, 꿈, 정서적 감흥은 언제나 남자들의 것이며 기껏해야 돈 벌어오라는 요구나 밴드를 그만두라는 말밖에 할 줄 모른다. <즐거운 인생>의 즐거움은 철저하게 남자들에게만 허락된다. 여기에는 세 남자들과 활화산의 죽은 옛 멤버를 대신해서 영입된 그의 아들(장근석), 그리고 상호의 어린 아들(상호는 영화 후반부의 공연을 앞두고 어린 아들에게 전화를 걸어 ‘아버지’의 공연 소식을 알린 뒤, 록의 거장들을 나열하며 그들을 기억하라고 말한다)로 이어지는 어떤 계보가 있다. 그 계보를 잇는 건 혈연이 아니라, 속물적인 여자들은 알지 못하는 록의 정신인데, 영화는 그걸 남자들의 정신으로 슬쩍 치환한다. 이를테면 기영에게 있어서 장근석과 고아성이 차지하는 비중은 현저하게 차이가 난다. 유사 아들이 진짜 딸의 자리를 차지해버린 듯한 느낌이랄까. 영화를 보기 전, 나는 장근석과 더불어 고아성 역시 이 밴드의 멤버가 될 것이라고 예상했기 때문에 그녀의 캐릭터가 생각보다 사소하게 다루어져 좀 의아했다. 출연 분량은 둘째치고 그녀는 이 영화에서 가장 모호한 캐릭터 중 하나이다. 그 자체로 뚜렷한 성격도 없고, 기영에게 어떤 영향을 끼치는 인물도 아니면서 그의 곁을 그림자처럼 스쳐가는 이 딸이 영화에 굳이 필요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하지만 이준익의 전작들을 돌이켜보면 이는 새삼스러운 일도 아니고, 그가 만들어낸 남자들만의 세상은 이미 여러 차례 비평의 대상이 되었기 때문에 여기에 언급을 덧붙이는 건 사족처럼 느껴진다.
그보다 이 영화에서 주목할 만한 건 정진영이 연기한 기영의 캐릭터인데 성욱과 상호에 견주어볼 때, 기영은 생활인으로서의 최소한의 책임도 벗어던진 베짱이 같은 존재다. 서류가방 대신 기타를 메고 집을 나서고 생활에 찌든 친구들을 가로막고 길거리에서 싱글벙글 노래를 부르며, 아내의 구박에도 태연하게 악보를 쓰는 그는 가장 즐거워 보이지만, 그만큼 비현실적으로 보인다. 정진영의 의도인지는 모르겠으나 기영의 표정이나 걸음걸이, 말투, 목소리는 나머지 두 남자들의 그것들이 땅에 밀착한 데 비해 허공에 붕 떠 있다. 기영은 분명 이준익의 판타지일 것이다. 그는 많은 남자들이 성적 대상으로서의 여자에 대해 환상을 품을 때, 생활을 책임져주고 심지어 남자들끼리의 유희에 간섭도 하지 않는 여자를 꿈꾼다. 우스운 질문. 성적인 착취와 경제적인 착취, 느끼함과 무관심, 어느 쪽이 더 나을까?
만남의 대가를 안고 가는 <마이파더>
그리고 황동혁의 <마이파더>를 보았다. 미국으로 입양되었던 아이가 성인이 되어 아버지를 찾았는데, 그 아버지가 사형수이며, 알고 보니 진짜 아버지가 아니었다는 내용은 알려졌듯이 애런 베이츠의 실화를 배경으로 한다. 많은 평자들이 지적했듯, 가족의 의미를 확장하는 주인공의 선택, 그리고 거부와 부정이 아니라 포용과 긍정으로 삶을 대면하는 주인공의 태도는 성숙하다. 대니얼 헤니는 화려한 모델의 이미지를 부수고 나와서 감정을 다스리며 충분히 박수받을 만한 연기를 보여주었다. 그러나 이 영화의 사려 깊은 시선이 이미 실화에 빚지고 있다고 볼 때, 영화적으로는 종종 미흡한 구석이 눈에 띄었다. 입양문제에서 그치지 않고 한국에 주둔하는 미군문제를 끌고 들어와서 간접적인 사회적 발언과 입양된 자의 정체성 문제를 동시에 건드리는 건 주목할 만한 시도다. 그러나 의도적으로 사악한 백인 미군을 등장시켜 줄곧 한국군과 충돌하게 만드는 설정이나, 제임스 파커의 의도와 상관없이 그를 자꾸만 한국군 안으로 소환하게 만드는 상황 등은 오히려 그의 마지막 선택을 ‘민족’과 결부지어 읽게 하는 불필요한 요소로 보인다. 게다가 엔딩 크레딧과 함께 삽입된 다큐멘터리는 애런 베이츠와 사형수 아버지가 실제로 만나는 과정을 담고 있는데, 이 영상은 영화를 반복할 뿐만 아니라, 그 짧은 시간에 영화의 감동을 압도하는 힘을 갖고 있다. 영화 자체를 위해서는 그다지 좋은 선택이 아니었다는 말이다. 현실에 이미 영화를 넘어서는 삶이라는 강력한 울림이 있을 때, 영화는 무엇을 해도 실화의 그림자를 넘어서지 못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화를 떼어놓고 생각해본다면, <마이파더>의 미덕은 영화가 만남이라는 사건보다 만남 이후에 대면하게 되는 만남의 대가 혹은 고통을 끝까지 안고 간다는 데 있다. 아버지가 살인마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 문제는 비교적 간단했다. 그 아버지를 받아들일 것인지, 아닌지만 결정하면 되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사형수 아버지가 진짜 아버지가 아님을 알게 되었을 때는 무엇을 선택할 수 있을까. 제임스 파커는 황남철이 진짜 아버지가 아님을 알게 되고, 황남철 역시 제임스가 가짜 아들일 수도 있음을 알게 되는 순간과 맞닥뜨리지만 그건 결국 중요한 문제가 되지 못한다. 제임스가 자신의 한국 이름을 엄마의 성을 딴 공은철에서 황은철로 바꾸는 장면은 기억도 없는 혈육보다 지금 눈앞에서 자신의 보살핌을 필요로 하는 누군가가 진짜 가족이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그런데 제임스가 황남철을 온전히 받아들인 시점은 미국의 아버지가 죽은 뒤라는 점을 놓쳐서는 안 된다. 황남철과 제임스 파커로서가 아니라, 이들이 서로의 진실을 모른 체하며 아버지와 아들이라는 기표를 끝까지 버리지 않을 때, 다시 말해 서로를 아버지와 아들로 호명할 때, 나는 감동을 뒤로하고 이 땅에서 ‘아버지가 된다는 것’, 그리고 그 아버지의 ‘아들이 된다는 것’에 대해 생각에 잠겼다. 아버지와 아들의 상실감과 불안은 혈연적 아버지나 아들의 존재 유무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나 아들로 부를 누군가가 부재한다는 사실, 스스로를 아버지나 아들로 호명할 수 없다는 사실에서 비롯된다. 아버지 혹은 아들이라는 기표가 부재할 때, 뿌리째 흔들리는 남자들.
미국으로 돌아간 제임스에게 황남철이 보낸 편지에는 제임스의 친어머니의 사진이 동봉되어 있다. 그에게 도착한 사진에서 중요한 것은 그가 그토록 그리워했던 어머니의 얼굴이 아니라, 사진이 제임스에게 도달한 경로, 그 과정이다. 어머니의 사진은 그 자체로는 무의미한 텅 빈 편지지만, 황남철이 온갖 수모를 기꺼이 겪은 뒤 획득한 사진이 마침내 제임스에게 도착한 순간, 살인마 황남철은 아버지가 되고 입양아 제임스는 그의 아들 황은철이 된다. 그가 편지를 개봉하는 모습 바로 전에, 미국 아버지의 분신과도 같던 낡은 차의 시동이 오랜 침묵을 깨고 마침내 다시 걸리는 장면을 배치한 것은 사뭇 의도적인 선택처럼 보인다. 죽었던 두 명의 아버지가 되살아나는 순간, 그리고 한없이 평온해진 아들의 얼굴.
두 가지 모성 신화 <어머니는 죽지 않는다>와 <권순분 여사 납치사건>
한쪽에서 그렇게 아버지가 살아날 때, 다른 쪽에서는 어머니의 영원함을 노래하고 있었다. 바야흐로 부모의 계절. 하명중의 <어머니는 죽지 않는다>는 노년의 최호(하명중)의 내레이션으로 이렇게 시작된다. “이 이야기는 나의 첫사랑, 그녀의 이야기다.” 어릴 때부터 어머니와 살던 집이 철거되기 직전, 늙은 아들이 다 쓰러져가는 빈집에 뛰어들어가 어머니와의 과거를 회상한다. 어머니를 개성댁, 이 여사라고 부르는 아들과 그 아들을 끔찍이 사랑하는 어머니의 이야기는 한편의 멜로다. 이들은 열렬히 사랑했고, 그러다가 아들은 지쳐서 어머니를 떠났고, 홀로 남은 어머니는 남은 일생을 아들을 기다렸고 아들은 뒤늦게 후회를 하며 어머니를 그리워한다는 이야기. 영화는 복고적인 연기와 내용을 전면화하며 직설적인 방식으로 어머니를 스크린 위로 불러낸다. 도입부에서 최호는 이것이 ‘어머니의 이야기’라고 말했지만, 사실, 이것은 어머니를 기억하는 ‘아들의 이야기’다. 어머니가 아들에게 보낸 수백통의 편지가 개봉되지 않은 채 되돌아올 때, 영화는 아들을 향한 어머니의 언어를 어머니의 입으로도, 뒤늦게 편지를 발견한 아들의 입으로도 들려주지 않는다. 여기에는 오직 죽은 어머니를 기억하고 그리워하는 아들의 언어만이 존재한다. “당신을 뭐라 다른 이름으로 부를 수 없어서 어머니라 부릅니다.” 다른 그 무엇으로도 대체될 수 없는 절대적인 이름의 주인은 사실 아들의 기억 속에서 되살려진 혹은 재구성된 어머니다. 어머니를 향해 중년 남자가 보내는 이 한편의 투박한 연애편지는 희생적인 어머니에 대한 세상 모든 아들의 판타지와 그렇게 이어져 내려오는 모성신화를 노골적으로 옹호하고 있었지만, 나는 이내 그런 생각을 접기로 했다. 미학적, 서사적 야심없이 오직 한 가지 메시지만을 전달하기 위해 만들어진 영화들은 비판을 하면 할수록, 오히려 비판의 논리가 유치해지는 경향이 있다. <어머니는 죽지 않는다>도 그런 종류의 영화다. 나는 그 어머니와 그 자식의 관계에 단 한순간도 몰입하지 못했으나 정작 나를 잠시 뭉클하게 했던 건 극장 앞자리에 홀로 앉아 안경을 벗고 연신 눈물을 훔치는 어느 중년 남자의 초라한 뒷모습이었다. 그는 무엇을 보고 있었던 걸까.
김상진의 <권순분여사 납치사건>은 납치당한 여장부가 납치범들을 압도하며 이 상황을 적극 활용한다는 납치-역전극이다. <귀신이 산다> 이후 3년 만에 내놓은 작품이라 김상진식 코미디의 진화를 보고 싶은 바람이 컸던 탓인지, 영화는 제자리를 맴도는 듯했다. 그의 코미디가 <주유소 습격사건> 이후로 자기 살을 깎아먹으며 제자리를 맴돌고 있는 건 아닌지 의심이 든다는 말이기도 하지만, 이 영화 자체도 시작부터 끝까지 고만고만한 웃음을 짜내며 간신히 제자리에 버티고 서 있는 것 같은 느낌을 준다는 말이기도 하다. 이미 권력관계가 정해진 채 시작된 납치극이므로 관건은 공간의 이동에서 얼마나 흥미로운 이야깃거리를 건져내어 긴장감있게 엮어낼 것인지에 있다. 그러나 영화가 심어놓은 유머의 지점들은 극적 흐름에 스며들지 않고 너무 산만하며, 개인기를 하듯 순간에만 의존하는 인물들의 실없는 조크와 행동은 가장 긴장감이 요구되는 시퀀스에서조차 어김없이 등장해서 맥을 풀어놓는다. 오히려 <권순분여사 납치사건>은 코미디의 관점이 아니라 조금 다른 각도에서 바라볼 때 말하고 싶은 것이 생기는 영화다. <어머니는 죽지 않는다>가 노골적인 사모곡이었다면, 이 영화는 강한 어머니, 나아가 강한 여자에 대한 무의식적인 선망이 담긴 작품으로 읽을 수 있다. 강한 어머니 권순분은 철없는 아들을 달래고 가르치듯, 처음부터 납치범들을 제압하는데, 우스운 것은 이 남자들이 점차 자신의 본분을 망각하며 권순분을 어머니 대하듯 한다는 점이다. 이미 납치극에 발을 들여놓고 어쩔 줄 몰라하는 남자들을 대신해서, 권순분은 모든 상황을 제자리로 돌려놓을뿐더러, 그들의 새 출발을 위해 국밥 비법까지 전수한다. 강한 어머니는 영화의 결함을 홀로 떠받치고, 아들의 죄를 사하고, 급기야 아들의 미래까지 열어준다는 것! <슈렉>의 동키와 용의 로맨스를 떠오르게 하는 거대한 여자 선녀(박준면)와 나약한 남자 근영(유해진)이 사랑에 빠지는 과정도 역시 그런 맥락에서 읽을 수 있다. 강한 여자에 대한 두려움은 그녀에 대한 사랑의 도착된 표현?
이석훈의 <두 얼굴의 여친>은 바로 그 지점을 코미디로 변주한 영화인데, 궁핍하고 찌질한 대학 7학년생 구창과 다중인격자 유리(아니, 하니)의 로맨스에도 아버지가 부재하는 유약한 소년과 강한 여자의 조합이 등장한다. 이 로맨틱코미디는 얌전하고 착한 소녀를 사랑한다고 믿고 있으나 그 판타지를 걷어내면 터프하고 위협적인 여자와 마주칠 수밖에 없는 남자를 통해 사랑에 대한 나름의 흥미로운 견해를 전개하지만, <엽기적인 그녀>로 재기발랄하게 시작해서 갑자기 <타이타닉>과 <남극일기>로 자못 무게 잡는 영화의 과잉된 욕망 때문에, 후반으로 갈수록 휘청거린다.
환상 안에서 버티기 위한 죽음 <사랑>
이제 마지막으로 곽경택의 <사랑>을 이야기할 차례다. 곽경택은 자신의 운명을 다시 <친구>의 그 자리에서 시작하고 있다. <친구>가 끝까지 미련을 둔 가치가 남자들간의 의리였다면, <사랑>이 끝까지 지켜내는 건 남자의 사랑이다. 그러나 곽경택이 어떤 가치를 이야기하건 여자 인물들은 경상도 사내들의 성적 대상에서 벗어날 수 없는 운명에 놓여 있다. 그는 의식적으로 그걸 점점 더 능숙하게 지속하는 듯한 인상을 주며 자신의 서사에서 결코 빼놓을 수 없는 어떤 인장처럼 다루고 있고, 그걸 보는 경험은 언제나 불쾌하지만, 솔직히 이에 대해 매번 분노하는 것도 피로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래서 나는 다른 이야기가 하고 싶어졌다. “여자는 순간이다.” 보스는 미주가 죽은 뒤 인호에게 말한다. 이 유사 아버지는 그에게 지나간 여자 따위는 잊고 다시 시작하자고 제안한다. 그러나 인호는 아버지의 가르침을 부정하며 제안을 거절한다. 말하자면, 인호의 사랑은 과연 남자들의 연대를 단절시키는가? 자신의 모든 것을 앗아간 아버지에게 복수하지 않고 스스로 물러나는 인호의 제스처를 영화는 최대한 숭고하게 담아내지만, 여기에는 뭔가 꺼림칙한 구석이 있다. 영화는 인호가 “사랑없는 인생은 필요없다”며 절벽에서 뛰어내리는 순간 멈춰버리는데, 마지막 화면을 가득 채운, 삶과 죽음 사이에서 정지된 남자의 얼굴 앞에서 문득 궁금해지는 것. 그는 왜 죽어야만 할까? 영화에서 사랑은 건달의 악행을 덮어주고 나아가 그 악행을 정당화해주는 구실로 작용하지만, 영화는 끊임없이 남자-인호의 순수한 사랑을 건달-인호의 일상으로부터 분리하는 환상의 막을 작동시키고 있다. 사랑을 지키기 위해 남자는 분열되고 그 분열의 끝에는 죽음이 있다. 끝까지 그 환상을 거두지 않기 위해 영화가 선택한 결론. 이를테면 오해 속에서 미주가 목숨을 끊은 뒤, 인호는 보스에게 복수를 하는 대신, 그 세계에서 미련없이 물러나 미주를 따라 절벽에서 몸을 던진다. 그리하여 죽음의 순간, 건달-인호는 잊혀지고 오직 지고지순한 남자-인호만 남는다. 마침내 사랑은 영원히 순수하게 박제된다. 그러나 환상 안에서 버티기 위해 선택하는 죽음, 절벽에서 몸을 내던지는 그의 행위는 끝까지 자신이 누구인지 알기를 회피한 자가 선택한 비참한 자멸의 흔적처럼 보일 뿐이다.
가을의 시작, 시간을 견디고 또 견디며 영화를 찾아 나섰지만, 거기에 구원은 없었다. 그 끝자락에서 자멸의 흔적을 목격할 때쯤 나는 거의 지쳐버렸다. 그러나… 가을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영화는 반드시 한번쯤은 다시 내게, 그리고 당신에게 먼저 말을 걸어올 것이다, 가을이 끝나기 전에. 그렇게 믿어야만 한다. 그 기대마저 없다면 이 가을은 너무도 쓸쓸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