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 에리히 폰 스트로하임과 ‘푸 만추’ 시리즈의 작가 색스 로머가 공존하는 에릭 로메르라는 이름처럼 로메르의 영화에선 자연과 인간, 이성과 감성, 고결함과 속됨, 철학과 종교, 남성과 여성 등 상이한 존재가 조화를 이룬다. 그것을 꿰뚫어본 프랑수아 트뤼포는 로메르를 일컬어 ‘가장 지적인 동시에 가장 진실한 최고의 프랑스 영화감독’이라고 했다. 로메르가 필름으로 쓰는 에세이는 파스칼의 <팡세>를 닮았다. 파스칼이 끝맺지 못한 원고들이 <팡세>로 남았듯이, 완결 대신 순환을 선택한 영화들이 로메르의 세계를 구성한다. 감정이 싹트다 오해와 의심과 머뭇거림이 지나간 어느 지점에서 로메르의 영화는 멈춘다. 하지만 그의 영화가 매번 제자리를 맴도는 건 아니다. 자연의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존재의 진실을 파악하는 순간, 로메르의 영화는 운명같이 정점에 오르고, 우리는 성숙의 경지를 바라본다. 숙성과 수확의 계절 가을에는 로메르의 영화가 제격인 것이다. 10월5일부터 24일까지 서울아트시네마에서 ‘에릭 로메르 회고전’이 열린다. 40년에 걸쳐 만들어진 17편의 작품과 재회하는 자리다.
우선 로메르의 영화를 특징짓는 연작으로는 ‘여섯개의 도덕 이야기’ 중 <몽소 빵집의 소녀> <수잔느의 경력> <모드 집에서의 하룻밤> <클레르의 무릎> <오후의 연정> 등 5편이, ‘희극과 격언 6부작’ 중 <비행사의 아내> <아름다운 결혼> <해변의 폴린느> <보름달이 뜨는 밤> <내 여자 친구의 남자 친구> 등 5편이, ‘사계절 이야기’ 중 <가을 이야기>가 상영되며, 그외에 두편의 단편영화 <소개 혹은 샤를로트와 그녀의 스테이크> <파리의 나자>와 두편의 시대극 <O 후작부인> <갈루아인 페르스발>, ‘사계절 이야기’ 사이에 위치한 <파리의 랑데부>, 장 두세, 클로드 샤브롤, 장 뤽 고다르, 장 루슈 등과 만든 <내가 본 파리>가 우리 곁을 찾는다. 이들 작품을 두루 챙겨보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로메르와 처음 만나거나 무얼 볼까 망설이는 사람은 로메르와 30년을 함께한 배우 베아트리스 로망의 작품과 랑데부하는 건 어떨까 싶다. 10대 소녀 시절부터 로메르의 영화에 출연했고, 연작마다 한편 이상 참여했으며, 로메르 영화의 한 결산에 해당하는 <가을 이야기>의 주연을 맡은 그녀가 변해가는 모습은 로메르 영화의 미묘한 변화 과정을 반영하는 것이기도 하다. 로망은 ‘도덕 이야기’의 다섯 번째 작품 <클레르의 무릎>에 처음으로 등장했다. 그녀는 중년 남자의 욕망의 대상인 클레르가 아닌, 역으로 그를 동경하고 관찰하는 소녀 로라로 분했다. 아직까진 타인의 시선을 받는 게 낯설고, 스캔들의 대상이 되기엔 순진한 십대 소녀가 느끼는 사랑이란 호기심 많은 아이의 게임에 가까운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로라는 신체 접촉은 거부하나 대화를 나누며 성장한다. 거침없이 자기 의견을 말하며, 진짜 사랑을 갈망하는 로라는 이후 로망이 맡은 인물들의 근사한 시작점이다. ‘도덕 이야기’가 욕망과 유혹 앞에서 도덕적 선택을 해야만 하는 남자에 관한 연작이라면, ‘희극과 격언’은 사소한 불운 앞에서 고민에 빠지고, 나름대로 계산해보고, 갈팡질팡하는 여자가 주인공인 연작이다.‘희극과 격언’의 두 번째 이야기 <아름다운 결혼>에서 로망은 성급한 결심 때문에 곤란을 겪는 20대 여자 사빈느로 나왔다. <아름다운 결혼>은 유부남과의 교제가 갈등을 빚자 홧김에 있지도 않은 남자와 결혼하기로 결정한 사빈느를 빌려 사랑과 결혼과 구애에 있어 개인의 의지에 대해 생각해보는 영화다. <가을 이야기>의 마갈리는 로망이 거친 캐릭터의 종합이다. <아름다운 결혼>의 사빈느가 희망했던 대로 시골 마을에서 포도 농장을 경영하는 마갈리는 고집이 세고 쉽게 타협하지 않는 인물이다. 로메르는 후기작인 <가을 이야기>가 여전히 사고하는 행위와 생각을 다룬 작품이라고 말했는데, 마갈리는 ‘도덕 이야기’의 젠체하는 남자들과 달리 도덕과 종교와 철학을 시시콜콜 떠들 필요가 없다. 자연과 일체가 되어 사는 여인은 오랜 세월 동안의 사유를 거쳐 자신의 도덕적 기준을 갖춘 인간으로 성장했기 때문이다. 그녀의 멈칫거림은 신중함을, 그녀의 고집은 확고한 신념을 뜻한다. 로메르의 영화가 여성의 영화로 완성되고 있다는 사실은 그의 영화가 자연에 근접하고 있다는 것의 방증이다. 끝으로 로메르의 영화에서 인물들의 매력만큼 미적 감각이 넘치는 대사와 영상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대사를 이해하는 것이야말로 정말 중요하다고 믿는 로메르의 영화에서 허투루 써진 대사는 없다. 그리고 자연과 시골 마을을 좋아하면서도 단지 풍경을 담은 영화에는 관심이 없는 로메르는 인물의 이동과 이야기와 얽힌 풍경을 어떻게 보여줄 것인가에 힘을 쏟았다. 그렇다면 좀체 음악을 삽입하지 않던 로메르가 <가을 이야기>의 마지막에서 들려주는 노래는 또 어떤가. 가수는 “삶이 여행이라면, 날씨가 화창하기를 빌게요. 모두 무사히 여행하길 바랄게요”라고 노래한다. 바로 에릭 로메르의 마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