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 정신없다. 얼굴들이 다 누렇게 떴다.” 9월19일 오후 서울 광화문 일민미술관 앞. 서울독립영화제 조영각 집행위원장은 독립영화전용관 인디 스페이스 개관을 앞두고 공청회 준비로 분주한 한국독립영화협회(이하 한독협) 회원들을 보더니 한마디 던진다. 전폭적인 지원과 충분한 시간이 주어진다고 해도 만만찮은 독립영화전용관 사업이다. 당장 10월부터 상영을 시작하는 인디 스페이스 앞엔 해묵은 숙제들이 산적해 있다. 그렇다고 “지금까지 뭘 했기에 뒤늦게 수선이냐”고 딴죽걸진 말자. “왜 독립영화인들은 전용관에 목숨 거는지 모르겠다”는 반응을 보이거나 “독립영화나 예술영화나 따로 전용 상영관을 만들 필요가 있나”라는 반문을 던졌던 이들을 설득하느라 걸린 시간만 무려 7년이니 말이다.
독립영화전용관 인디 스페이스(서울 중구 명동 중앙시네마 3관)가 11월8일부터 개관영화제를 열고 본격적인 활동에 들어간다. 전용관을 운영할 한독협 독립영화 배급지원센터는 9월19일 ‘독립영화전용관의 역할과 운영에 대한 공청회’에서 이같이 밝혔다. 11월21일까지 2주 동안 계최될 개관영화제는 ‘마이너리티’, ‘정치’, ‘영화’, ‘관객’이라는 키워드를 앞세운 섹션들로 꾸며진다. 인디 스페이스는 개관영화제에 앞서 김정중 감독의 <허스>, 김소영 감독의 <방황의 날들>, 민병훈 감독의 <괜찮아, 울지마>, 전수일 감독의 <개와 늑대 사이의 시간>, 황규덕 감독의 <별빛 속으로> 등 “최근 개봉했으나 상영기회를 충분히 갖지 못한” 작품들을 상영한다. 10월1일부터 상영되는 이 12편의 상영작 중에는 “꾸준히 독립영화를 만들어왔던” 민병훈, 전수일, 황규덕 등 세 감독의 전작들도 포함되어 있다. 또 11월2일부터는 CGV인디관에서 10월25일 개봉하는 양해훈 감독의 <저수지에서 건진 치타>가 관객과 1주일 동안 만날 예정이다.
상영기간 보장, 다채로운 독립영화 프로그래밍
인디 스페이스는 현재 “매월 2편 이상” 장편 독립영화를 개봉하고, 개봉영화당 “최소 2주간의 상영을 보장한다”는 프로그래밍 원칙을 세워두고 있다. 라인업은 배급지원센터의 심사를 거친 독립영화전용관 개봉지원작(연간 10편), 영화진흥위원회 다양성영화배급지원작(연간 2∼3편) 외에 연간 3∼5편 정도의 해외작품이 주가 될 전망이다. 이 밖에 연 2회의 기획전을 통해서는 실험영화, 애니메이션, 단편영화 등 “장편 극영화나 다큐멘터리에 비해 상영기회가 현저하게 적은” 부문의 독립영화들을 소개한다. 해외 독립영화의 경향을 일별하고 국외 독립영화단체들과의 연대를 위한 기획전도 연 2회 준비 중이다. 부산국제영화제의 아시아다큐멘터리네트워크(Asian Network of Documentary) 등과 함께 여는 2008년 1월 일본다큐멘터리특별전은 첫 발걸음. 인디 스페이스는 일본을 시작으로 매년 ‘아시아다큐멘터리특별전’ 등을 벌인다. 이 밖에 연간 4∼5회 정도 독립영화제 및 공공적 성격의 영화제도 개최할 예정이다. “사회적 이슈에 걸맞은” 작품을 선별하고, 또 시민사회단체 등이 주최하는 정기상영회도 진행한다.
빡빡한 일정이 말해주듯이 인디 스페이스를 운영하는 입장에서 프로그래밍은 적잖은 고민이다. 특히 신작을 중심으로 프로그래밍을 해야 하지만 지금까지 상영되지 못했던 독립장편 또한 배제할 수 없다. 2003년부터 2005년까지 제작된 독립장편은 극영화, 다큐멘터리 모두 100편 가까이 되지만 이중에서 개봉한 작품은 고작 15편에 불과하다. 김소혜 프로그래머는 “신작들의 경우, 아트플러스 등에서도 개봉 기회를 얻지 못한 작품들에 우선 순위가 주어질 것이다”라며 “미개봉작들의 경우 기획전 외에도 모닝쇼, 나이트쇼, 교차상영 등 다양한 실험의 형태로 관객과 만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단관 상영관들의 네트워크를 최대한 활용할 것”이라며 “얼마 전 개관한 문화플래닛 상상마당 등과도 논의해서 서로 플러스될 수 있는 프로그램들을 개발하고, 함께 중앙시네마를 임대해서 사용하는 스폰지 등과도 공동으로 특별한 극장임을 알리기 위한 논의들을 계속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오랜 기다림, 산적한 과제들
독립영화전용관이 좀더 빨리 만들어졌다면 이러한 고민들은 좀더 빨리 해소되거나 몇 가지 해법들을 찾을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독립영화전용관에 대한 논의는 2000년 3월 김대중 정부가 내놓았던 한국영화진흥종합계획 안에 ‘단편영화 상영공간 확보’ 사업이 명시되면서 불붙었으나, 그동안 “임대공간의 부재, 시네마테크전용관과의 변별점에 대한 이해부족, 전용관 설립방식에 대한 견해 차이, 전용관 지원 예산에 대한 입장 차이” 등으로 사업이 지연되어왔다. 영상미디어센터 미디액트와 시네마테크전용관 서울아트시네마가 2002년 5월에 각각 둥지를 마련한 것에 비해 한참 늦은 셈인데, 독립영화전용관의 필요성에 대한 설득이 말처럼 쉽지 않아서이기도 하다. 조영각 서울독립영화제 집행위원장은 “1기 영화진흥위원회 때는 감독협회 등에 독립영화전용관 사업 명목으로 5억원이 지원됐고 결국 다른 목적으로 돈이 쓰이는 해프닝 같은 일도 있었던 것으로 안다”면서 “2기 영진위 때는 우선 사업이 아니라는 이유로 밀렸고, 결국 3기 영진위가 만들어지면서 사업 추진에 속도가 붙었다”고 설명했다.
인디 스페이스는 독립영화 진영엔 일종의 전진기지다. <다섯은 너무 많아> <안녕, 사요나라>를 시작으로 극장배급 사업을 추진했고, 2005년에는 한독협 내 배급위원회를 설립해 “지속 가능한 독립영화 배급” 방식에 대해 고민했던 독립영화인들에게 인디 스페이스는 단지 독립영화를 상영하는 공간으로서의 의미 이상이다. 김화범 배급지원센터 전용관 팀장의 지적처럼 “지역 및 시민사회의 공동체 커뮤니티를 담보하는” 것에서 더 나아가 “새로운 경향의 독립영화를 발굴하고 또 이를 수용할 독립영화 관객을 생산해낼 수 있는” 선순환 구조를 만들어야 한다. 이뿐이랴. 모든 독립영화들이 인디 스페이스에서 상영될 수 없는 현실을 감안하면, “전용관 이외의 다른 창구의 배급 형태 또한 연구해야 한다”. 공청회에서 황윤 감독이 지적했듯이, 서울이 아닌 다른 지역에 제2, 제3의 전용관을 어떻게 만들어낼 것인지도 관건인데, 인디 스페이스로서는 좋은 선례를 만들어야 하는 책임이 있다. “첫술에 배부를 수 없다”지만 첫술 뜨는 인디 스페이스의 어깨는 그래서 무거워 보인다.
원승환 한독협 독립영화 배급지원센터 소장
“독립·예술영화 시장의 파이를 키우겠다”
-독립영화전용관의 필요성을 이해시키는 과정이 지난했다. =영진위 등에서도 원칙적인 동의는 했지만 실행이 쉽지 않았다. 아무래도 주목도가 높은 영화들을 위주로 사업을 진행했으니까. 아트플러스 네트워크도 독립영화보다는 20억원 이상 들인 <와이키키 브라더스> <고양이를 부탁해> 등과 같은 영화들이 관객과 만날 기회를 갖지 못하는 상황이 벌어지자 만들어진 것 아닌가. 2기 영진위의 경우, 독립영화는 영화제 등을 잘 활용하면 되지 않느냐는 입장이었는데, 영화제에서 2회 상영하는 것만으로는 관객과 제대로 만날 수 있겠나.
-그동안 독립 장편들이 많이 만들어졌다. =3기 영진위가 적극적으로 전용관을 사고하게 된 것도 그런 변화 때문이기도 하다. 처음 전용관 논의를 했을 때만 해도 상영관에서 소개할 수 있는 콘텐츠가 많지 않았다. 그러다가 최근 몇년 동안 독립 장편 제작이 활성화됐고, 또 몇편의 경우 주목할 만한 성과를 거두었으며 영진위 또한 자체적으로 제작 지원을 하고 하니까. 반면 멀티플렉스 환경이 급속하게 변하면서 난점도 생겼다. 과거 <둘 하나 섹스> <하우등> 같은 영화들이 나올 때는 단관이라고 해도 영향력이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단관 상영의 한계가 분명히 있다. 게다가 관람문화나 영화담론, 독립영화나 예술영화 등에 더욱 각박해진 상황이다.
-인디 스페이스를 포함해 독립영화 유통, 상영과 관련해 가장 큰 어려움은 뭔가. =관객과 어떻게 만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 부족하고 경험이 거의 없다. 기회가 없었고, 있었다고 해도 산발적이었다. 한독협의 경우 2004년부터 배급사업을 추진했으나 개별 감독의 전략이나 마케팅에 의지한 측면도 컸다. 독립영화 배급에 손댔던 회사들 역시 전문 배급사로 거듭나지 못했고. 영진위도 1년에 몇편 하는 식으로 지원을 하다보니까 모두들 노하우를 축적하지 못했다. 그렇다고 전용관 하나 생겼다고 뭐가 바뀌겠어 하는 생각은 금물이다. 올해 부산국제영화제에서 두 번째 공청회를 갖고, 또 개관 전후로 설명회를 추가로 열 계획인데, 이 과정에서 독립영화인들의 다양한 아이디어와 목소리를 경청하겠다. 또 모든 작품을 다 그렇게 할 수는 없지만 상영작 중 몇편은 마케팅 등에도 적극적으로 힘을 쏟을 생각이다.
-당장 시급한 문제는 어떤 것인가. =독립영화를 경험할 수 있는 공간임을 최대한 알려야 한다. 그렇다고 무작위로 초대한다거나 할인권을 남발하는 식은 아니다. (웃음) 지역, 시민사회단체 등 인디 스페이스와 함께할 수 있는 파트너들과 독립영화를 경험할 수 있는 상영형태를 다양하게 개발하려고 노력 중이다. 또 스폰지, 씨네큐브 등 아트플러스 네트워크쪽과도 시장의 파이를 키울 수 있는 방법을 함께 강구할 생각이다. 독립영화전용관에서 예술영화를 소개할 수 있는 방법부터 제안해야겠지. <우리학교>의 사례 등을 보면 독립영화 관객이 더 늘어나는 것이 불가능한 일은 아니라고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