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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장르에 통달한 고전주의 거장
홍성남(평론가) 2007-08-08

하워드 혹스 회고전, 8월10일부터 필름포럼에서 열려

고전기 할리우드영화를 대표하는 진정한 장인 하워드 혹스의 영화가 온다. 이미 잘 알려져 있는 주요작 <레드 리버> <신사는 금발을 좋아해> <천사만이 날개를 가졌다> 등을 포함하여 1934년작 <20세기>에서부터 1961년작 <하타리>까지 총 10작품이 8월10일(금)일부터 14일(화)까지 필름포럼에서 상영된다. 갱스터, 웨스턴, 스크루볼코미디, 누아르 등 할리우드 시대의 거의 모든 장르를 섭렵한 뛰어난 감독이었고 프랑스 누벨바그 세대가 존경해 마지않았던 작가 중 한명인 하워드 혹스. 그가 남긴 위대한 10개의 인장에 대해 알아보자.

<20세기> Twentieth Century │ 1934년 │ 흑백 │ 91분 혹스의 <20세기>는 같은 해에 개봉한 프랭크 카프라의 <어느 날 밤에 생긴 일>과 더불어 스크루볼코미디영화의 본격적인 출발점에 해당한다는 평가를 받는다. 영화는 이제 하향길에 접어들고 있는 극단주가 자신의 품에서 스타가 되었으나 지금은 자신을 떠나버린 연인을 되찾으려 하면서 벌어지는 두 남녀 사이의 시끌벅적한 ‘전쟁’을 다룬다. 시카고와 뉴욕 사이를 운행하는 고속열차를 제목으로 단 이 영화는 <연인 프라이데이>(1940)에 앞서 마구 터져나오고 서로 겹치는 대사들로 대단한 속도감을 빚어낸다. 또한 영화는 주인공을 맡은 두 배우의 눈부신 화학작용의 지원도 제대로 받고 있는데, 특히 주연 존 배리모어의 연기에 대해 오슨 웰스는 자기나 로렌스 올리비에도 그만큼 코미디 연기를 할 순 없다고 말한 적이 있다.

<요크 상사> Sergeant York │ 1941년 │ 흑백 │ 134분 시나리오와 연기에서 특히 뛰어나고 아마도 혹스의 영화들 가운데 제작비가 가장 많이 들어간 영화인 <요크 상사>는 혹스의 필모그래피에서 최상의 퀄리티를 가진 영화로 보긴 힘들지만 여하튼 그의 가장 ‘존중받는’ 영화들 중 하나이다. 실화에 기초해 만들어진 이 영화는 테네시주의 한 지역에 살던 농부가 1차대전 중 혁혁한 공로를 세우는 전쟁영웅으로 바뀌게 되는 이야기를 다룬다. 이것은 말 그대로 영웅의 이야기로 볼 수도 있으나 다른 한편으로는 원래 종교의 가르침을 중시하던 남자가 그것에 어긋나는 일을 하면서 마음속에서 겪는 혼란을 그린 비극으로 간주할 수도 있다. 이 영화로 혹스는 생애 유일한 아카데미 감독상 후보에 올랐으며, 주연을 맡은 게리 쿠퍼는 남우주연상 트로피를 가져갔다.

<스카페이스> Scarface │ 1932년 │ 흑백 │ 93분 <공공의 적>(윌리엄 웰먼, 1931), <리틀 시저>(머빈 르로이, 1931)와 함께 1930년대 갱스터 장르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영화로 이들 가운데 가장 폭력적인 작품으로 거론된다. 실제로 시나리오를 쓴 벤 헥트는 하워드 혹스에게 이렇게 이야기했다고 전해진다. “어떤 갱스터영화에서는 9명이 죽임을 당하더라. 그래서 우리는 25명을 죽여야겠다.” 영화는 무자비한 폭력을 이용해서 “세상은 너의 것”이라는 문구를 무모하게 현실화하려다가 결국에 추락하고 마는 갱스터 토니의 자취를 따라간다. 혹스는 실존 인물인 알 카포네를 모델로 삼아 이 주인공을 그려내되 또한 거기에 체자레 보르지아(르네상스 시대의 전제군주)의 면모도 집어넣고 싶어했다. 그렇게 해서 토니와 여동생 사이의 근친상간 이야기가 추가되어 이야기의 결은 좀더 복잡해졌다. 전반적으로 난폭하고 비극적인 톤의 이야기에 코미디적 터치를 무리없이 가미하는 데에서 혹스적 특성이 잘 드러난다.

<베이비 길들이기> Bringing Up Baby │ 1938년 │ 흑백 │ 102분 <베이비 길들이기>에는 “사랑의 충동이란 종종 갈등의 형태로 모습을 드러낸다”라는 대사가 나온다. 이 말은 하워드 혹스의 영화 거의 대부분에 들어맞는다고 할 수 있는데 이 스크루볼코미디영화도 예외가 될 순 없다. 영화는 잃어버린 공룡 뼈를 찾으려 하는 소심한 고생물학자와 별 이유도 없이 그에게 방해가 되기만 하는 듯한 젊은 여인이 만나고 함께하면서 빚어지는 떠들썩한 소동을 따라간다. 흥미로운 것은, 이 영화의 이야기가 ‘광기’라고까지 부를 수 있는 어떤 힘에 의해 아주 멀리까지 나아가려 한다는 점이고 또 그 과정에 남성/여성, 정상/광기, 포식자/먹이, 포획/감금 등의 서로 대립하는 영역들이 그 너머의 자리를 넘보거나 자리바꿈을 하려 한다는 점이다. 해롤드 로이드가 자기가 본 것들 가운데 구성이 가장 뛰어난 코미디라고 평가했던 이 영화는 개봉 당시보다는 시간이 흐르면서 진가를 인정받는 대단히 ‘모던한’ 코미디영화다.

<천사만이 날개를 가졌다> Only Angels Have Wings │ 1939년 │ 흑백 │ 121분 비행에 대한 애정을 가졌던 혹스는 자신의 그 실제 관심사를 스크린에 재창조하는 작업을 몇 차례 했었는데, <천사만이 날개를 가졌다>는 그처럼 무엇보다 자신을 매혹시킨 주제를 다룬 영화들 가운데 하나이다. 실화를 기반으로 만들어졌다는 이 영화는 남미에서 우편물을 배송하는 일을 하는 비행기 조종사들과 그 지역에 새로 발을 딛게 된 사람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그린다. 영화 속 조종사들은 창공을 날아다닐 특권을 가졌으면서도 공간의 광활함을 느끼기보다는 오히려 그 협소함 안에 갇혀 있다. 그들에게 자신들의 직분이란 다분히 위험한 운명의 길로 들어가는 것이다. 이처럼 모험으로서의 실존을 이야기하는 <천사만이 날개를 가졌다>는 혹스적인 모험영화의 전형을 보여준다. 그런 점에서 하워드 혹스에 대한 비평서를 쓴 제럴드 매스트는 이 영화에서 혹스가 이룬 것에 대해 경탄하지 못한다면 혹스에 대한 경외감을 가질 수 없다고 썼다.

<빅 슬립> The Big Sleep │ 1946년 │ 흑백 │ 114분 혹스는 스스로를 이야기꾼이라고 부르길 좋아했지만 적어도 <빅 슬립>에 대해서는 그런 호칭을 잠시 유보해야 할 것 같다. 레이먼드 챈들러의 유명한 소설을 스크린에 옮겨놓은 이 필름 누아르의 고전은 필립 말로우의 수사 과정을 따라가지만 그가 알아낼 ‘결과’가 중요한 것 같지는 않다. 그러니 이 영화를 제대로 ‘음미’하려면 다른 길을 따라가야 한다. 우선 혹스 자신은 이 영화에서 플롯은 전혀 중요하지 않았고 자기가 하려 한 것은 모든 신들을 흥미롭게 만드는 것이라 말한 적이 있다. 한편 원작자인 챈들러는 혹스가 <빅 슬립>에 가져온 것은 분위기와 은밀한 사디즘의 터치라고 이야기한 바 있다. 그리고 영화에서 러브스토리가 펼쳐지는 과정도 혼돈의 미로를 거니는 중요한 길 중 하나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레드 리버> Red River │ 1948년 │ 흑백 │ 133분 존 포드와 자신을 비교하면서 혹스는 자기가 포드보다 코미디는 더 잘 만들지만 웨스턴에 대해서는 반대라고 말한 적이 있다. 그러면서 자신의 웨스턴영화 <레드 리버>는 포드의 웨스턴보다 못하다고 이야기했다. 하지만 혹스가 만든 첫 번째 웨스턴인 <레드 리버>는 그의 필모그래피에서도, 또 웨스턴영화의 역사에서도 중요한 걸작으로 꼽힌다는 것을 부인할 사람은 거의 없다. 텍사스에서 미주리까지 무려 만 마리나 되는 소를 몰고 가는 카우보이들의 험난한 여정을 그린 이 영화는 그들이 겪는 외적인 위협과 내적인 갈등 모두를 흥미진진하게 그려낼 줄 안다. 한편으로 <레드 리버>에서 혹스가 존 웨인으로부터 이끌어낸 난폭하면서 권위적인 인물의 연기는 존 포드의 질투를 불러일으킬 정도였다고 한다.

<신사는 금발을 좋아해> Gentlemen Prefer Blondes │ 1953년 │ 컬러 │ 92분 혹스의 영화(특히 코미디영화)에서 자주 찾아볼 수 있는 모티브는 성 역할의 뒤바뀜이다. 마릴린 먼로와 제인 러셀이 주인공을 맡은 <신사는 금발을 좋아해>는 혹스의 그런 경향이 노골적으로 드러나는 영화다. 여기서 이 두 여인은 마치 다른 혹스 영화에서의 두 남자주인공이 성별을 바꾼 것 같은 모습으로 과감하게 욕망과 쾌락을 찾아나선다. 이들이 빚어내는 소동을 그린 영화는 잘 알려져 있긴 하지만 보는 이들의 시선에 따라 평가가 나뉘는 작품이다. 이 영화의 기본적인 특성, 즉 극도로 저속한 영화라는 점, 그리고 인물, 이야기, 세트 등에서 완전히 리얼함을 무시한 영화라는 점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의 여부에 따라 상이한 반응이 나올 수 있다는 것이다.

<리오 브라보> Rio Bravo │ 1959년 │ 컬러 │ 141분 프레드 진네만의 웨스턴 <하이 눈>(1952)에 대해서 혹스는 호감을 가질 수 없었다. 그가 보기에 이 영화의 주인공처럼 마을 사람들에게 도움을 청하다가 결국에는 아무에게도 도움을 얻지 못한다는 것은 어리석은 남자가 할 일이었다. 그래서 혹스는 이와는 반대되는 상황을 보여주는 영화를 만들 생각을 했다고 한다. 따라서 <리오 브라보>는 <하이 눈>에 대한 혹스식의 반응이 되는 영화이며 여기에서 악한들에게 포위당한 보안관은 구차한 도움을 받으려 하지 않는다. 영화평론가 뤽 물레의 지적대로 <리오 브라보>는 ‘감금’에 대한 웨스턴이지만 그런 상황으로부터 뻔한 긴장감을 빚어내려 하지 않기에 창의적인 영화이다. 혹스는 그 같은 기본 설정을 인물들이 서로 관계를 갖는 데 활용하고 또 그런 과정 안에 로맨스, 코미디, 액션의 요소를 알맞게 충돌시켜서 매력적인 웨스턴을 만들어냈다.

<하타리> Hatari! │ 1961년 │ 컬러 │ 157분 <하타리>는 <천사만이 날개를 가졌다>의 한정된 공간과 그 안의 인물들이 좀더 가볍고 쾌활한 기운을 가지고 아프리카 초원지대로 온 듯한 느낌을 주는 영화다. 코뿔소, 기린, 원숭이 등을 사냥하는 백인들의 이야기를 다루는 이 영화는 혹스의 처음 생각대로라면 원래 비극이 될 예정이었다. 하지만 위험 속에서 웃음을 발견하는 혹스의 기질이 이번에도 발휘돼 종국에 영화는 보는 이들의 마음을 편하게 만들어주는 모험-로맨스영화가 되었다. 실제로 사냥하는 것을 화면에 포착한 장면들은 박진감 넘치고, 로맨스 플롯을 보면서는 여유있게 웃어넘길 수 있다. 프랑수아 트뤼포는 여기에서 영화 만들기에 대한 메타포를 발견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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