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윤철: 당신이 자주 인용하는 발터 벤야민의 말이 생각난다. 정치적인 것을 미학적으로 다루는 것은 파시즘이고 미학적인 것을 정치적으로 다루는 것은 자본주의라고. 정성일: 그 문장을 김우창 번역으로 스무살에 읽었다. 이후 모든 판단에서 하나의 좌표가 되었던 말 중의 하나다.
정윤철: 영화 자체의 미학과 영화가 갖는 정치성은 늘 대립할 수밖에 없는 문제인가. 정성일: 아니, 그 반대다. 동전의 양면이라고 생각한다. 똑같은 것을 누군가는 미학적으로 이해하고 누군가는 정치적으로 이해하는 거다. 나는 그것을 전적으로 미학의 입장에서 본다면 타락하고, 정치적으로만 본다면 프로파간다가 된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다루고 있는 것이 예술이라는 사실을 놓치면 안 된다. 우리는 어떤 대상을 다루는 것이 아니라 창조를 다루고 있다. 창조를 다룰 때는 미학과 정치, 혹은 삶과 사회, 혹은 과거와 미래 말하자면 지나간 시간과 도래해야하는 시간, 그 둘 사이의 중재의 문제라는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그러므로 예술가의 임무 중의 하나는 창조적 중재에 있지 않을까. 오직 예술가들만이 창조적 중재에 나선다. 정치가들은 협상을 하고, 장사꾼들은 판매할 뿐이다. 누구도 중재는 하려 들지 않는데, 그것을 해결할 임무가 예술가들에게 주어져있다. 그리고 그 중재의 기술을 읽어내는 것이 비평가의 몫이다.
정윤철: 하지만 질문을 던지지 못하는 영화에 관해서는 쓰지 않는다고 했다. 그런데 나쁜 영화라고 하더라도 쓴 소리를 해야만 발전이 되는 것이 아닐까.. 정성일: 나는 이기적인 사람이어서 영화에 관해 쓸 때는 두 가지 중의 하나다. 그 영화에 대해 ‘친화성’을 느끼거나 ‘적개심’을 느끼는 것. 내게 아무런 감흥을 불러일으키지 못하는 영화에 관해서 쓰는 것은 나를 무료하게 만들고, 뭐랄까 내가 망가지는 느낌이다. 나 말고도 비평가는 많으니까 다른 사람이 써도 충분하지 않겠나.
정윤철: 그렇다면 진짜 대중영화는 어떤가. 감독으로서 나는 평론이 계속 세상에 영향을 미쳤으면 좋겠는데, 감흥이 없더라도 잘 만든 대중적인 영화에 대해 글을 쓸 수는 없는 건가. 정성일: 나는 당신이 말하는 대중적인 영화도 좋아한다. 나는 지금도 홍콩무협영화를 좋아하고, 두기봉의 <흑사회>를 보면서 심금을 울린다고 생각한다. 나는 두기봉의 영화가 왜 아직도 한국에서 개봉이 안되는지 너무 궁금한 사람이다. 혹은 전적으로, 정말 전적으로 김태희의 클로즈업이 보고 싶어서 <중천>을 보러 간다. 아니면 대중들의 관심이 궁금해서 <미녀는 괴로워>를 보기도 한다. 내가 완전히 고립돼서 내 취향만 고집하는건 아니다. 나도 2007년 남한에서 살고 있는 사람이고 관심사를 공유하고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 몸이 내 마음이 더 좋아하는 영화들에 끌리는 건 너무 당연한 일이다. 어떤 평론가에게도 하루는 24시간밖에 없다. 그래서 내가 봐야 하는 영화와 내가 보고 싶어하지 않는 영화의 시사회가 겹친다면, 당연히 보고 싶은 영화를 선택한다. 하지만 <스윙걸즈> <박치기!> <훌라걸즈>같은 영화들을 보고 아 죽여주게 나를 울리는구나, 이런 느낌을 받기는 한다.
정윤철: 느낌을 받기는 해도 그런 영화들은 다른 사람이 쓸 것이라는 건가. 정성일: 내가 보고 싶어서 보기는 하지만, 허우샤오시엔의 <쓰리 타임즈>와 에릭 쿠의 <내곁에 있어줘>같은 영화들만큼 울림이 크지 않기 때문이다. 내가 감흥을 받아야 쓰고 싶은 말이 많아지지 별 느낌이 없는데 쓰고 싶지는 않다. 나는 같은 주에 <훌라걸즈>와 <좋지 아니한가>를 봤다. <씨네21>에 연재하는 <전영객잔>을 써야했는데, 나는 두 영화 중에서 <좋지 아니한가>를 택했다. 쓸 것이 많고 궁금한 게 많고 질문할 지점이 있기 때문이었다..
물론 칭찬은 안했지. 하지만 정성일의 관심권 안에 들었다는 생각에 묘하게도 기분은 나쁘지 않았어. 옛날 이장호 감독이 신상옥 감독 조감독을 할 때 5년 동안 감독에게 늘 이름 대신 야이 새끼야, 자식아 불려지다가 어느 날 녹음실에서 신상옥 감독이 ‘장호야~’ 하는 순간 선 채로 눈물을 주루륵 흘렸더랬는데 그런 건가...
정윤철: 하지만 이제는 누구나 평론가가 되어 인터넷에 평론을 쓰고, 별점이나 인터넷 평점이 판단의 기준이 되어버리고 있다. 이런 세태를 본다면 기존 영화평론이 관객에게 좀 더 가까이 다가가야 할 필요가 절실해지지 않았는가. 대중영화라고 할지라도 그 최소한의 미덕을 발굴해주고 시대의 변화에 발맞추려는 평론의 자세가 필요하지 않나. 정성일: 나는 반문하고 싶다. 읽는 행위 자체를 싫어하는데 어떤 시도를 한들 읽겠느냐는 거다. 지금 인터넷 글쓰기가 대세가 되어가고 있지만, 글이 약간만 길면 ‘스크롤의 압박’이라는 말로 제껴 버린다. 이런 현실에서 나는 무엇보다도 영화를 위해 영화비평이 대중에게 굴복하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비평마저 대중에게 굴복한다면 그 다음엔 더 이상 방어선이 없다. 그 다음엔 남는 건 하나, 영화는 돈에 굴복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영화비평은 한편으로 영화를 위한 일종의 방어선 같은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있다. 허우샤오시엔을 임권택을 데이빗 린치를 진지하게 사고하고 질문하는 방어선이 사라졌을 때, 그때는 방어할 수 있는 어떤 방법도 남아있지 않다. 시장에서 어떤 생산적인 담론도 만들지 못하고 버림받는다면 때는 영화가 굴복을 해야지. 나는 그때는 굉장히 끔찍해질 것 같다.
정윤철: 모든 감독의 꿈은 대중성과 예술성을 같이 잡는 것이 아닐까. 이루어질 수는 없다고 하더라도. 정성일: 그 시대는 끝난 게 아닐까. 영화는 태어난지 이미 100년이 넘었다.
정윤철: 질문을 마저 하자면 결국 비평도 대중성과 심도있는 분석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는 건 불가능한가. 그런 시대도 이미 끝난 건가? 정성일: 나는 영화에서의 대중성이라는 문제를 다른 판본으로 말하자면 상품성이라고 생각한다. 둘은 같은 말의 말장난이라고 생각하는 쪽이다. 영화가 대중성을 껴안는 한편으로 새로운 가능성을 위해서 나아가던 시대는 영화의 고전주의시대였다(3,40년대). 예를 들면 우리는 고전주의 회화를 납득할 수 있다. 그러나 인상주의를 통과하며 그림에서 형상이 부서졌고, 그림은 보는 이에게 교양을 요구하게 되었다. 그런데 지금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 소통을 하고 싶다고 고전주의 그림을 그린다면 그것은 퇴행이다. 영화는 계속 앞으로 가고 있는 거다. 그 100년이라는 역사를 왜 무효화시키려고 하는가. 영화도 관객에게 교양과 역사에 대한 이해와 시네마테크적인 경험과 영화에 대한 지식을 요구하고 있다. 그런데 관객은 게으르게 어떤 노력도 기울이지 않고 즉각적으로 자기가 알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영화를 원시적인 상태로 돌려보내는 거다. 영화는 고전주의 시대를 통과했고, 이제는 영화가 가지고 있는 여러가지 가능성의 길을 가고 있다. 그것을 왜 퇴행적으로 만들어야 하는가, 심지어 감독들이 왜 자꾸 고개를 뒤로 돌려 그런 퇴행을 바라보는가. 나는 거기에 대해서 분개하는 쪽이다.
정윤철: 영화는 꿈이지만 관객은 꿈꾸어서는 안 된다는 고다르의 말에 전적으로 동의하는가. 정성일: 그렇다. 고다르의 영화를 보면서 중3때 깨달았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난 꿈꿀 수 없다.
정윤철: 중3때!!! 본의 아니게 고다르의 영화를 보면서 선악과를 깨문 격이다. 그러니까 신이 내린 거겠다. 정성일: 그분이 오신 거지(웃음) 나중에 다시 보니 프랑스 문화원에서 본 <기관총 부대>는 고다르 영화 중 에서도 그렇게 쇼킹한 영화는 아니었다. 그런데 그전까지 주말의 명화와 홍콩액션영화만 보면서 관습적인 영화에 너무 익숙해지다 보니 이야기에만 심취해 있었던 것이다. 나는 그 영화를 보며 문득 이게 영화를 보는 방법인가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져볼 수 있었다. 내가 항상 하는 이야기인데, 영화에서 카메라를 발견하는 순간, 너는 영화를 볼 때면 언제나 카메라가 먼저 보이게 될 것이다, 라고 말한다. 사실 보통 관객에게는 카메라를 발견하지 못하는 것이 행복한 거다. 이야기에 몰두할 수 있고 인물에 몰두할 수 있으니까. 그런데 그렇게 영화를 보는 건 고전적인 거고 나아가 원시적인 거다.
그러나 인간은 때때로 퇴행을 즐긴다. 어린애였던 시절, 짐승이었던 때를 그리워한다. 사랑에 빠지는 것도 퇴행 아닌가. 순간적으로 어린 애가 되는 것이다. 아무튼, 중3 이후로 영화의 신이 내려 카메라 귀신이 보이는 이 박수무당에게 그 자신이 쓴 몇몇 평론에 대한 의문점을 물어보았고, 그는 진지하고 긴 답변을 한다.
정윤철: 당신은 무엇이 현대적인 영화라고 생각하는가. 한국이든 다른 나라 영화든. 정성일: 그것은 아마도 현대라는 단어를 어떻게 정의하는가에 따라서 달라질 거다. 현대가 컨템포러리가 될 수도 있고 모던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다음에는 현대를 언제부터 언제까지로 놓을 것인가하는 문제가 있다. 영화에서 현대라는 문제를 다루기가 굉장히 까다로운 까닭은 영화가 이미 근대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영화는 근대의 맨 끝자락에 도착했다. 회화에 모던이 도착했던 인상주의 시대에, 혹은 제임스 조이스가 <율리시즈>를 쓰고 마르셀 프루스트가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쓰던 시대에, 영화가 시작됐다. 그 두 작품은 플래시백을 비롯해 영화적인 기법을 사용했는데, 영화는 처음부터 그런 서사구조를 가지고 있었다. 나는 오히려 이렇게 생각한다. 영화에서 모던이 끝날 때 영화 자체의 운명도 끝나는 것이고, 영화라는 것을 생각하는 것 자체가 모던이라고. 거기엔 어떤 동시성이 있다. 나는 그런 점에서 만일 영화가 박물관으로 간다면 모던한 것에 종말이 왔기 때문일 거라고 생각한다. 그다음에 영화가 어떤 방식으로 변할지 우리는 예단할 수 없다. 오늘날 미술은 인스톨레이션의 개념이 되었고 더 이상 과거의 프레스코화 개념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캔버스로 작업하는 미술은 과거의 방식에 사로잡혀 있다. 예술도 수많은 변화에 조응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지금 현재 보고 있는 영화의 방식이 아직까지 지속되고 있다는 것은 아직까지는 우리가 모던한 사고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그러한 영화에 두 번째 혁명의 시기가 시작됐다고 생각하는 쪽이다. 뤼미에르 이후 수많은 변화가 있었지만 그것은 기본적으로 동일했다. 그러나 우리 시대에는 이행의 시기가 도래했고 그 핵심은 디지털이다. 그것이 어떻게 혁신될지는 지켜보아야 하겠지만. 지금은 누구나 영화감독이다. 감독은 카메라를 들고 나와 영화를 찍는데, 지금은 핸드폰만 켜면 영화감독 아닌가. 프레임과 지속시간과 주연을 결정하고 블로그에 띄어 상영을 한다. 너무나 편한 매체이기 때문에, 예전에 종이와 펜만 있으면 이야기를 썼듯, 카메라는 더 이상 특권이 아니다. 오늘날 영화는 점점 프로와 아마추어의 경계가 희미해지고 있다. 미장센단편영화제에서 처음으로 영화를 만든 감독이 큰 상을 받은 다음 충무로로 오고 있다. 한 감독이 처음으로 만든 3시간짜리 영화가 부산영화제에서 상영된다. 올해부터 영화진흥위원회에서 한편에 15억원씩 지원하는 프로젝트가 생기는데, 그걸 연출하는 감독은 훈련된 연출자가 아닐 수도 있다. 들뢰즈가 생전에 <리베라시옹>과 인터뷰를 했을 때 세번째 책 <디지털 이미지>를 쓰게 될 거라고 말한 적이 있다. 그는 그 책을 쓰지 못했지만, 우리는 목격은 하고 있다. 혹은 그 시대로 들어왔다. 다만 우리는 디지털 이미지 시대에 걸맞는 미학이나 철학을 갖고 있지 못하다.
정윤철: 현대적인 영화가 모던 자체라고 해도 일반 관객으로서는 내가 보는 영화가 쌍팔년도 영화인지 재탕영화인지 현대적인 영화인지 알아야할 것같다. 정성일: 반대로 질문하겠다.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나.
정윤철: 나는 영화가 100년밖에 되지 않은 예술이므로 다른 예술과 비교하면 이해가 쉬울 것 같다고 생각한다. 그중에서도 미술과 비교해보려고 노력하는 편이다. 처음 인상파가 등장했을 때 사람들은 왜 이따위 그림을 그렸느냐고 욕을 했다. 그런데 인상파가 자리를 잡게된 이유는 그전 그림은 이야기를 하려고 했던데 비해, 그러니까 예수의 승천이나 왕의 대관식이나 그리스 신화 등을 그렸던데 비해, 인상파는 그릴 필요가 없다고 여겨졌던 것들을 그렸기 때문이었다. 해바라기나 해지는 인상이나 나무들을. 인상파 회화들은 캐릭터 자체가 가지고 있는 생명의 에너지와 아름다움을 느낌과 인상으로 받았고 감정을 그리기 시작한 거다. 나는 거기서 모던 회화가 시작됐고, 세잔이 나오고 입체파로 넘어오고, 미술이 인간의 내면으로까지 들어갔다고 믿는다. 그렇다면 어떤 이야기를 담으려고 시작됐던 영화는 그 다음부터는 뭘 그릴 것인가를 생각해야만 한다. 이야기는 약하더라도 캐릭터와 사람을 다룰 때, 그것이 모던한 영화의 시작이라는 생각이 든다. 소위 말하는 플롯 위주의 영화가 아닌 캐릭터 위주의 영화, 더 나아가 인간의 내면으로까지 뛰어드는 영화가 모던한 영화라는 생각이다. 인간의 내면으로 뛰어들면 어떻게 될 것인가. 인간의 내면에는 시공간의 개념이 없고, 기억이라는 것에는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없지 않은가. 그런 것들을 이미지로 다루는 영화가 모던한 영화가 아닐까. 알랭 레네의 <히로시마 내사랑>같은 영화를 보면 사람의 마음 속의 기억과 감정들을 다루고 있는데, 그것이 모던 영화의 시작을 대표한다고 본다. 이야기 자체는 약하지만 인간의 감정이 드러나고 캐릭터가 드러나는 영화들, 그러니까 홍상수나 로베르 브레송처럼, 대충 찍은 것 같아도 인간의 캐릭터가 매우 또렷이 보이는 영화들 말이다. 어떤 거대한 이야기가 아닌, 인간의 기억과 시간을 다루는 영화들, 인간 그 자체에 대해 다루는 영화들이 모던한 영화가 아닐까. 정성일: 회화의 결론 중의 하나가 인상주의에서 나왔다. 그래서 대상을 그리는 대신에 대상과 그림 사이에 있는 공기를 가지고 오고 싶어한 거다. 공기를 그릴 수 있는 방법은 딱 하나다. 공기에 떨어지는 빛의 스펙트럼을 그리는 것뿐이다. 문제는 거기서 한걸음 나가는 순간 형상이 부서진다는 것이다. 그다음에 등장하는 인물은, 그러니까 세잔 다음으로 도착하는 인물은, 피카소와 뒤샹과 베이컨이다. 그렇게 형상이 부서지기 시작하다보면 그다음부터 세상은 정확하게 몬드리안의 그림이 된다. 선과 면만 남는 거다. 영화는 시간이라는 것을 다루어 왔는데, 시간이라는 뇌의 스크린을 다루는 영화들은, 끝났다는 느낌이 든다. 그것이 끝나갈때, 뇌의 스크린이 환상의 구조라고 말할때, 세상은 뭐가 되겠느냐는 것이다. 그때 세상은 표면이 된다. 완전한 표면만 보인다. 나는 영화가 음악에 비해 유치한 예술이라고 생각한다. 음악이 인간의 정신을 최대한도로 끌어올리는 예술이라면 한없이 내려온 밑바닥에는 영화가 있다고 생각한다. 영화는 어떻게 해서든지 세상을 다루고자, 세상에서 벌어지고 있는 사건을 찍었다. 사건이란 사실상 이야기고, 이야기가 되어지지 않는다면, 의미가 생겨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영화의 역사란 사실상 어떻게 이야기를 효과적으로 전달할 것인가의 문제였다. 매치 컷과 인비저블 커팅과 더블액션을 비롯한 수많은 방법들도 이야기를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한 기술이었다. 그런데 영화는 어느 순간 그것을 포기하기 시작했다. 영화는 시간을 다루기 시작하면서 액션을 포기했고, 그것은 사건을 포기했다는 의미였다. 그리고 시간으로 넘어갔지만, 영화가 시간을 포기할 때 그리하여 영화가 세상의 표면만 찍을 때, 그것은 힘을 잃어버렸다. 음악도 회화도 문학도 마찬가지다. 즉 이야기가 없는 영화들을 가지고 관객을 효과적으로 설득한다는 것이 점점 힘들어지고 있다는 점을 생각할 필요가 있다. 키아로스타미의 <테이크5>는 50분 동안 다섯개 쇼트로만 이루어져있다. 첫번째 쇼트는 길을 보여주고, 두번째는 들판을 보여주고, 마지막 쇼트는 바다에 파도가 들어오는 장면을 보여준다. 세상의 표면을 보여주면서 세상을 다루는 것이다. 거기엔 시간도 없고 오직 세상의 표면이라는 것만 있다. 키아로스타미는 그것이 영화가 갈 마지막 길이라고 믿는 거다. 몬테이로가 찍은 <백설공주>는 대사는 들리지만 계속 검은 화면만 보인다. 그리고 가끔 하늘을 한번 보여준다. 그러니까 세상은 두 가지라는 거다. 하늘과 암흑으로 가득한 세상. 그 영화가 미학적으로 멀리 나간 것은 사실이다. 그것이 필연적인 귀결이라고 하지만, 그렇게 가야만 하는지 질문할 필요는 있다. 문제는 만드는 사람도 비평도 그것이 극영화라고 믿는다는 사실이다. 예전에는 실험영화와 극영화가 있었지만, 나는 오늘날 남은 실험영화는 하나뿐인 것 같다. 현대의 실험영화는 광고다. 나머지는 다 그냥 영화라는 생각을 하는 거다.
정윤철: 우리는 아무리 컴퓨터그래픽이 많고 제작비가 많아도 스필버그의 영화가 현대적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마이너리티 리포트>가 미래를 찍는다고 해도 그건 기승전결 구조를 갖추고 헤피엔드로 끝나는 고전적인 영화다. 관객이 이 영화가 현대적인 영화구나 아니면 구시대적인 영화구나라는 것을 알면서 본다면, 영화를 보는 눈이 좀 밝아질 수 있지 않을까. 그러니 관객들에게 현대적인 영화를 간단하게 정의해준다면. 정성일: 내가 보는 현대적인 영화는 피로를 찍은 영화다. 말하자면 보들레르가 말한 근대를 살아가는 피로, 속도로 살아가는 피로 말이다. 나는 영화가 그것을 다룰 때 모던한 것을 다룬다고 생각한다. 고다르와 레네와 허우샤오시엔과 린치를 볼때, 모던한 것을 살아가는 피로가 보인다. 피로의 감정, 피로의 인상, 피로의 감각이.
정윤철: <해변의 여인>을 보면서 홍상수가 한국에서 유일하게 모던한 것을 다루는 감독이 아닌가 했다. 모던의 특징은 피로함이라는 건가. 정성일: 그것은 영화가 주는 인상, 감각의 피로함이지, 조폭으로 사는 것의 피로함은 아니다(웃음). 거기에 현대영화의 핵심이 있지 않나 싶다. 왕가위의 영화를 보면 피로하지 않은가. 지아 장커의 <소무> <임소요> <세계>에서도 중국에서 자본주의 사회의 속도로 살아가는 것의 피로함이 보인다. 심지어 그 무게가 사람을 죽이기까지 한다.
정윤철: 그렇다면 긍정적이거나 희망적인 영화는 현대적인 영화가 되기 힘든 것인가. 나는 <해변의 여인>을 보면서 피로감을 느꼈지만, 고현정이 차를 몰고 구덩이에 빠졌다가 거기서 빠져나와 해변을 달리는 장면을 보면서 다른 느낌을 보았다. 또다시 구덩이에 빠질 지도 모르지만, 힘들었던 시기를 지나고 달려나가는 인간의 뒷모습에서, 그래도 살아야지 어쩌겠어라는 느낌을 본 것이다. 정성일: 나는 정반대를 보았다. 그 차는 앞으로 가지 못하고 유턴한다. 그 차가 갔던 길을 돌아올때 지옥으로의 영겁회귀 같은 느낌이 들었다. 결코 벗어나지 못한다는 느낌이다. 아마 그 차는 다시 구덩이에 빠질 거고, 고현정은 내년 봄에 다른 남자와 다시 해변에 오겠지, 하는. <해변의 여인>에 나오는 강아지는 동일한 강아지인데도 호명만 계속 변한다. 나는 대상과 호명 사이의 불일치, 그 사이에서 겪어야하는 피로를 봤다. 의도인지 결과인지는 알 수 없지만 <좋지 아니한가>에 나오는 인물들도 모두 피로하다. 천호진은 완전히 지쳤고 황보라도 지쳤고 박해일도 지쳤다. 그 모두가 피로감에 어쩔 줄을 모른다. 그 정서는 <가족의 탄생>도 공유하고 있는 것이다. 혹은 복수를 하기 위해 그 무거운 총을 들고 돌아다녀야만 하는 금자도 피로한 거다. 그런 인물들이 모던한 영화 속에 나타나서 활동하기 시작했다.
정윤철: 그것은 주제적인 측면이 아닐까. 정성일: 그런 것을 주제로 다루지 않는 영화도 모두 거기에 휩싸여있다. 아니 오히려 <우아한 세계>처럼 피로를 다루는 영화는 피로하지 않다. 그 영화는 즉시 장르영화로 몰입하게 된다. 그런데 <좋지아니한가>는 피로함을 찍으려고 한 영화가 아니지만 우리 시대를 살아가는 인물을 찍기 때문에 피로를 피해가지 못한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피로에 사로잡혀 있는 것이다. 한국영화 뿐만 아니라 아시아와 미국과 유럽의 영화들이 모두 그야말로 휩싸여 있다.
정윤철: 19세기에 고호와 세잔은 보잘것없는 존재였지만 지금은 역사에 크게 자리 잡고 있고, 당시 잘나가던 살롱전 입상 화가들은 루브르 지하창고에서 썩고 있다. 그렇게 볼 때 평론가의 역할은 새로운 재능을 발굴하는 것도 있을 것이다. 지금 주목하고 있는 감독이 한국에 있는가. 정성일: 작년에 데뷔한 감독 중에서는 조창호와 신재인을 주목하고 있다. 두 감독 모두 주제와 형식에서 새로운 영화, 이제까지 없던 영화를 찍었다. 특히 신재인은 한국에서 본적이 없는 영화를 만들었다. 그래서 나는 그들의 다음 영화가 궁금하다.
정윤철: 중견감독은 어떤가 정성일: 임권택 감독의 다음 영화가 궁금하다. 홍상수와 김기덕의 다음 영화가 궁금하고, 정지우와 정윤철, 윤종찬, 임순례, 임상수의 다음 영화도 궁금하다. 박찬욱이 어떻게 매너리즘에 빠지지 않고 다음 영화를 밀고나갈 것인가, 김지운이 어떻게 장르를 혁신할 것인가, 류승완이 어떤 방식으로 자신의 세계를 계속 방어할 것인가도 궁금하다. 지금 갑자기 떠올렸기 때문에 놓친 이름이 많을 거다.
정윤철: 가장 먼저 언급한 세 감독, 임권택과 홍상수와 김기덕에게 조금이라도 더 관심이 가는 이유는 무엇인가. 정성일: 가장 큰 이유는 그들의 영화는 항상 앞으로 나아가기 때문이다. 그들은 멈추지 않는다. 그것은 그들이 끊임없이 반성적 성찰을 하고 있다는 뜻이다. 같은 것을 반복하거나 뭔가 머뭇거리고 있거나 심지어 퇴행하고 있을 때, 그것을 지켜보는 일은 괴롭다. 무언가 앞으로 나아간 감독의 영화를 볼 때, 그리고 그것을 쫓아가려고 할 때, 비평가도 한걸음 나아간다. 같이 성장하는 것이다. 나쁜 감독의 영화를 계속 쓰면 비평가도 퇴행한다. 그런 의미에서 내겐 그 세 명의 감독이 매우 소중하다.
정윤철: 한국영화의 문제에 대해 짚고 넘어가겠다. <친구>가 개봉한 다음에 당신은 그 영화의 성공에 어떤 사회적 무의식과 욕망이 담겨있는가를 물으며 지난 1년 동안 괴로웠다는 내용이 담긴 글을 쓴 적이 있다. 그렇다면 7년이 지난 지금 우리 사회의 무의식과 욕망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정성일: <좋지아니한가>에 관한 글을 쓰면서도 했던 이야긴데, 나는 한국영화가 갑자기 가족이라는 화두에 왜 이렇게 매달리고 있는지가 매우 크고 중요한 질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이 영화들의 공통점은 가족을 때려부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들은 맹렬하게 가족과 싸우고 있다. 그런 점에서 <좋지아니한가>는 이래도 좋은가, 이렇게까지 부서져도 좋은가, 라고 반문하는 듯한 느낌이 있었다. 이 영화의 마지막은 가족이 힘을 합해 싸우고 나서 집을 향해, 밥솥이 있는 집을 향해 뛰어올때, 비루하더라도 참고 사는게 좋지 않겠는가라고 물어보는 듯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좋지아니한가>가 매우 흥미로운 텍스트라는 생각이 들었다. 왜 이토록 가족과 싸워야만 하는지 생각해보니 한 가지가 떠올랐다. 내가 노무현 시대에 가장 납득할 수 없었던 스타는 문근영이었다. 문근영은 개인으로서는 착한 소녀지만, 저 소녀에게 스타라고 불릴 만한 힘이 있는지 의아했다. 흥미로웠던 것은 문근영에게 붙은 국민 여동생이라는 수식어였다. 왜 스타가 여동생이어야 하는가. 말하자면 가족주의인 것이다. 가족이 되어야만 스타를 사랑할 수 있다. 이 가족의 모습이 흉물스럽게 나타난 것이 월드컵이었다. 월드컵은 계급과 정치적 견해와 사회적인 삶의 질과 이해관계, 이 모든 것들이 갑자기 마법처럼 사라지고, 모두가 한자리에 모여 일치단결했을 때 보여준 무시무시한 하나 되기였다. 이것은 가족 되기의 또 다른 판본이다. 나는 그런 점에서 관객 1400만명이 본 영화 <괴물>이 딸을 죽여야만 끝날 수 있었을 때 무시무시했다. 딸을 죽이면 이 가족은 복원이 안된다. <괴물>에서 변희봉은 이렇게 말한다. “얘들아, 현서가 죽어서 우리가 한자리에 모였다.” 그런데 현서가 다시 죽었으므로 이 가족은 다시는 모이지 못할 것이다. 그 가족 부수기에서 나는 마법적 하나 되기와 국민 되기에 대해 비판적 거리를 유지하고 싶어 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런데 ‘가족을 부수면 정말 살 수 있어?’라는 질문을 <좋지아니한가>가 바인딩해서 되던진다는 느낌이었다. 이처럼 영화는 하나의 시대정신에 대한 무의식적인 메시지와 징후를 우리에게 되돌려준다. 흥미로운 것은 이런 식으로 가족을 다룬 영화들이 <괴물>을 제외하고는 단 한편도 성공하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한국 사회는 여전히 여기에 동의하지 않고 있구나라는 느낌을 받았다. 국민들은 여전히 하나 되기에 몰두하고 있다. 그것은 무시무시하다.
정윤철: 5년 전에 진보적인 모든 세력이 노무현을 밀었다. 그런데 노무현은 패러다임의 변화가 올 정도로 에측불허의 행동을 했다. 적이라면 싸우면 되지만, 내부에서 그런 문제가 생기니 치명타를 입을 수밖에 없고, 가치관에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받게 됐다. 그런 것이 영화계에도 영향을 미칠 것같다. 2,30년에 걸친 진보운동 끝에 노력하면 된다는 이성주의가 해피엔드를 맞는 듯했는데, 그것이 산산조각 나고 카오스 상태가 되어버린 것같다. 그야말로 신자유주의 시대가 될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영화는 탈역사화되고 흥미 위주로 가지 않겠는가. 우리가 믿었던 거대한 사상, 사회를 바꿀 수 있다는 믿음이 사라졌으니, 어디에 기댈 수 있을 것인가. 그렇다면 영화 자체로 파고들자, 영화만 잘 만들자, 그런 생각을 갖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비평가로서의 걱정은 없나? 정성일: 우리 시대의 이데올로기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정윤철: 돈이다. 정성일: 그걸 이데올로기로 말한다면?
정윤철: 개인이 잘 사는 것 아닐까? 정성일: 이런 생각을 해봤다. 각각의 시대는 이전 시대에 대한 반작용이라고. 내가 생각하기에 70년대는 교양의 시대였다. 그때는 <사상계> <창작과 비평> <문학과 지성>을 비롯한 많은 계간지가 나왔고, 지금과는 다르게 파워가 있었다. 그런데 교양과 지성의 단점은 입으로만 떠들지 행동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 반작용으로 80년대는 행동의 시대가 되었다. 모두가 실천으로 나갔다. 그런데 정치의 결정의 다른 판본은 도그마이므로, 90년대는 다양성의 시대를 요구했다. 90년대는 문화의 시대였다. 막시즘만 진보가 아니고 페미니즘과 이반과 수많은 다양한 목소리들이 진보를 말했다. 이 문화의 시대의 약점은 실속이 없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우리 시대의 이데올로기는 실용주의가 된 것 같다. 지금 사람들은 실용적인 게 아니면 견디지를 못한다. 그래서 사람들이 부동산과 주식에 미친 것이다. 나는 이 실용주의 시대에 대한 반작용이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것이 무엇인지는 내가 돗자리를 깔지 않았으니 모르겠지만(웃음), 새로운 대통령이 나오면 보일 것 같다. 실용주의 시대가 계속될지, 아니면 반작용이 나와 실용주의를 끝장내고 다른 시대를 불러올지. 영화를 만드는 사람들이 그것을 선점할 것인지 아니면 시대에 매달려 질질 끌려갈 것인지 지켜보아야 한다. 비평가는 예언하는 것이 직업이 아니라 어떤 일이 일어난 다음에 평하는 것이 직업이다. 비평이라는 것은 시대에서 가장 뒤에 오는 것이다.
정윤철: 스크린쿼터가 축소됐다. 영화인들은 다양성을 위해서 스크린쿼터 축소를 반대한다고 하지만 한국영화가 멀티플렉스를 독점하고 있는 현실을 보면 회의가 들기도 한다. 이제 스크린쿼터 축소는 기정사실화됐고, 앞으로는 극장과의 싸움이 남아있다. 우리는 생산자이고 관객은 소비자라면 극장은 유통사업자다. 영화를 관객과 만나게 해주는 극장은, 아무리 영화가 시대를 앞서가며 다양성을 창조한다고 하더라도, 돈이 되는 영화를 상영하려고 할거다. 그렇다면 투자자와 배급자가 같은 한국영화의 산업구조에서 과연 한국영화의 미래가 있는가라는 걱정이 든다. 교차상영같은 것들을 보면 극장의 파워가 너무 세진 것같다. 비평가에게 그런 것을 물어본다는 것이 애매할 수도 있겠지만, 당신의 의견을 묻고 싶다. 정성일: 문제는 그걸 막을 방법이 하나밖에 없다는 것이다. 정부를 끌어들이는 것. 하지만 나는 그 방법이 여우를 내쫓기 위해 늑대를 끌어들이는 꼴이라고 생각한다. 아무리 좋은 제도라고 해도 그것을 운영하는 방식에 성패가 달려있다. 더구나 한국은 어떤 정당이 정권을 잡는가에 따라 운영방식이 너무나 유동적이다. 일하는 사람들의 진정성은 믿지만, 운영방식은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 그래서 나는 이 문제는 우리들의 화두로 남을 수밖에 없지 않나싶다. 계속 몰고 나가면 자본주의를 바꾸어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는데, 그건 너무 근본적이고 위험하다. 그리고 일개 영화평론가가 이야기하기엔…(웃음)
정윤철: 당신은 십몇 년 동안 한국영화를 지켜보아왔다. 그 동안 감독과 프로듀서에게 답답하거나 안타까웠던 것은 없었는지 묻고 싶다. 정성일: 나에게 신기한 것은 한국의 프로듀서는 신인감독을 너무 좋아한다는 사실이다. 그들(프로듀서들)은 사실상 감독이나 마찬가지다. 감독을 하고 싶은데 자기 손에 피를 묻히기는 싫은 거다. 그러니까 그들에게 감독은 일종의 카게무샤인 셈이다. 죽으면 까내고 또 까내고. 나는 모시고는 일을 못하겠다는 거지. 이렇게 된다면 프로듀서와 감독의 관계는 창조적인 관계가 되기 힘들다. 다르게 생각해 보면 머리가 큰 감독들은 프로듀서를 제작부장처럼 쓰고 싶어할 뿐이고 의논 상대로 생각하지는 않는다. 우리는 머리 큰 감독과 머리 큰 프로듀서가 만나 멋진 결과를 끌어내는 것을 본 적이 없다. 창작에 대한 감독의 고민과 시스템적인 힘과 창조적인 의논의 대상으로서 프로듀서가 만나 변증법적으로 승화된 결과가 없는 것이다. 이건 제도나 방식의 문제가 아니다. 당사자들이 이런 결과에 관해 반성적으로 물어봐야만 한다.
정윤철: <매트릭스> DVD에 메이킹 필름이 수록돼 있는데, 프로듀서인 조엘 실버가 헬기 위에 턱하니 앉아 인터뷰를 한다. 그는 50줄에 접어든 중견이다. 차승재 대표하고 나이도 비슷하고 외모도 비슷한데(웃음), 현장에서 뛰는 모습이 보기 좋더라. 한국에선 웬만한 프로듀서는 삼십대에 이미 영화사를 차리지 않나. 물론 감독들도 많이 그러기는 하지만. 그래도 감독은 현장에서 뛰는데, 프로듀서는 30대 후반쯤 되면 현장에서 보기 힘들다. 40대 감독은 가끔 있지만 40대에 현장에서 뛰는 프로듀서들이 얼마나 있는가. 감독은 신인이 많다고 하더라도 4,50대의 프로듀서가 필요한데 말이다. 현장 경험이 많은 프로듀서들이 많아야 하는 게 아닐까. 한국영화는 그런 모습을 지향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정성일: 나는 안에서 보지는 못했지만, 바깥에서 보기엔 감독과 프로듀서가 의논해 예술적 창작을 한다는 느낌을 받지 못했다.
정윤철: 이번에는 <오아시스>에 관해 묻고 싶다. 당신은 <오아시스>에 관해 <씨네21>에 기고한 매우 긴 글에서 그 영화는 환상을 만들고 있다, 장애인이 소재지만 가부장적인 이야기를 한다, 고 말했다. 그런데 이창동 감독이 진짜 하고 싶었던 이야기는 사랑 이야기가 아니었을까. 두 보잘것없는 인간들 사이에 생겨난 사랑 말이다. 홍종두는 겉으로는 멀쩡하지만 정상적인 판단력이 부족한 어린아이 같은 사람이다. 정신적으로 장애가 있는 사람과 육체적으로 장애가 있는 사람에게 장애가 없는 사람과 같은 것을 기대하기란 힘이 드는 일이다. 그렇게 하지 못했다고 하여 영화 전체가 위험하고 문제가 크다고 이야기하는 것은 너무하지 않은가. 정성일: 나는 한공주와 홍종두를 가련하게 생각한다. 진심으로 두 사람이 잘됐으면 좋겠고 행복했으면 좋겠고 사랑을 맺었으면 좋겠다. 내가 역겹게 생각하는 건 이 영화가 환상을 만들어가는 구조다. 이야기는 사랑인데, 이야기의 이데올로기는 가부장제다. 공주와 종두는 그것이 사랑이라고 굳게 믿는다. 그런데 그들을 맺어주는 구조는 가부장제 이데올로기의 생산 구조와 정확하게 맞물려 있다. 그래서 나는 <오아시스>가 보수적일 뿐만 아니라, 휴머니즘이라는 이름으로 위험한 수준의 가부장제 이데올로기를 재생산한다고 생각한다.
정윤철: <오아시스>는, 영화가 끝난 다음에 어떤 비극이 다시 올지는 모른다고 해도, 행복할 것 같은 조짐을 보이며 끝난다. 하지만 그런 영화는 굉장히 많다. 행복의 조짐으로 끝나는 것이 그렇게 잘못인가. 정성일: 나는 <오아시스>의 마지막을 믿기 힘들다고 생각한다. 종두는 감옥에 갔으니 별 네 개를 달고 나올 거다. <오아시스>는 모든 이야기를 한시간만에 빨리 끝내고 그 다음으로 갔어야만 했다. 별 네 개를 달고 나온 전과자가 공주와 행복할 수 있는가, 그들은 그런 현실을 견딜 수 있는가. 그 이야기가 있어야만 <오아시스>는 오아시스가 있는지, 너희는 정말 복지사회에 살고 있다고 생각하는지, 장애인과 더불어 살 수 있는지, 물어볼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런데 <오아시스>는 그 직전에 끝난다. 종두의 보이스 오버 내레이션과 함께 희망이 보이는 것처럼. 더 망연자실한 것은 그 장면에서 공주가 바닥을 청소하는데, 그것은 정확하게 아내의 모습이라는 것이다. 보이스 오버 내레이션과 그 쇼트를 결합해 그들은 행복한 가정을 이루었다는 것처럼 끝내는 것은 완전한 환상이다. 거기에서 완벽한 만족감을 느끼는 것은 장애인이 아닌 우리다. 우리를 환상의 구조에 밀어 넣고선, 우리는 공주와 종두가 얼마나 불쌍한지 알고 있어, 우리는 그들을 동정했어, 라고 면죄부를 주는 거다. 그렇다면 이 영화는 같은 사회에서 공존의 방식을 묻고 있는가. <오아시스>가 그저 전과자와 교육받지 못한 여자의 문제라면 거기서 끝나도 된다. 하지만 장애인을 끌어들이고 별넷단 남자를 끌어들였다면, 그들이 정말 이 사회를 견딜 수 있는가를 물어야한다. 임권택 감독의 <길소뜸>을 생각해보자. 만약 <길소뜸>이 신성일과 김지미가 아들을 찾으러 가는 장면에서 끝났다면, 열린 구조이기 때문에 멋있을 수 있었을 거다. 관객은 그들이 아들을 만나 행복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겠지. 그런데 <길소뜸>은 모든 이야기를 한 시간으로 압축하고 1시간 5분만에 어머니가 쓰레기가 되어 있는 아들을 만나는 장면을 보여준다. 그녀는 교육도 제대로 받지 못하고 지저분한 아들을 싫어하고 경멸한다. <길소뜸>은 분단으로 헤어진 이산가족이 만났을 때 그들은 정말 잘 살았을까, 라는 공존의 문제를 끌어들인 것이다. 그런데 <오아시스>는 공존의 정치학을 질문해야하는 시점에서, 왜 영화를 끝내버리는 것인가. 앞의 이야기를 한시간 만에 끝내고 종두가 감옥에서 나왔다면 이 영화를 그렇게 비판하지 않았을 것이다. 심지어 앞의 이야기가 없더라도 관객은 무슨 일이 일어났던 건지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질문을 던져야하는 순간 영화를 끝내는 행위는 정치적으로도 윤리적으로도 납득할 수 없다. 그럴 바에는 왜 이야기를 꺼냈느냐는 거다. 나도 얼마 안되는 원고료를 쪼개 성금을 보내지만, 그런 행동이 스스로도 역겹다. 면죄부를 받는 거거든. 일요일에 교회에 가서 헌금을 내는 것과 같다. 이 돈을 내면 죄사함을 받을 거야. 그런데 죄가 사해지는가.
정윤철: 이창동 감독은 가난과 힘든 삶과 공존의 문제를 제기하고 싶었던 것이 아니라 보편적인 사랑을 말하고 싶었던 것같다. 그들도 우리처럼 사랑할 수 있다, 더 솔직하게 사랑할 수 있다고. 종두가 공주방의 창문을 가리는 나무를 잘라주듯이, 이것이 사랑이라고 말하고 싶었을 텐데. 정성일: 그렇다면 그것이 신파가 아니고 무엇인가. 그리고 그런 신파를 하면서 장애인을 끌어들이는 건 너무하지 않은가. <오아시스>는 장애인을 가장 비참한 데까지 끌어내어 영화를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신체적 우위에 서게 만들고, 가련함이라는 감정을 자동적으로 끌어낸다. 만약 공주네 집에 돈이 무지 많아 유일한 문제는 장애일 뿐인데, 종두를 만나 같이 산다. 그러면 보는 사람은 화가 날거다. 인간은 동정심을 만들어 내는 자동인형 같은 반응을 영화 안에 전제하고 있거든. 나는 사랑이라는 말을 던질 때에 사랑은 정말 본질적인 것인가, 라고 반문한다. “나는 너를 사랑해”의 다른 판본은 “나 너랑 하고 싶어”다. 모든 숭고한 말에는 외설적인 이면이 있다. 그런데 <오아시스>는 숭고한 면만 있는 것처럼 진행하며 외설적인 이면이 습격해 오는 것을 온갖 방식으로 방어한다. 그러므로 내게는 이 영화가 매우 값싼 신파처럼 보이는 거다. 그럴 수도 있겠지만, 그게 걸작을 찍은 것처럼 얘기 되어서는 곤란하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정윤철: 해피엔드를 싫어하는 건가. 정성일: 납득할 수 있다면 좋아한다. 그런데 대부분의 해피엔드는 기만이다. 대부분의 비극이 기만인 것처럼. 절대적인 비극과 해피엔드가 가능한 것인가.
정윤철: 그 말을 뒤집어 이야기하자면 비극적인 엔딩을 바라는 것도 아니라는 뜻인데. 정성일: 영화가 끝나면 우리는 현실로 돌아가야하니까.
정윤철: 그렇다면 납득할 수 있는 엔딩을 좋아하는 거겠다. 정성일: 정확하게는 윤리적이고 미학적이고 정치적인 질문을 견딜 수 있는 엔딩을 좋아한다.
정윤철: 무식한 질문일 수도 있겠지만 정치와 윤리와 미학에 순위를 매긴다면. 정성일: 윤리가 가장 먼저다. 정치적이고 미학적인 것은 영화에 따라 위치가 뒤바뀔 수 있다고 생각한다.
정윤철: 만약 <오아시스>와 장애인 소재의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를 비교한다면 어떤가. 정성일: 물론 <오아시스>가 훌륭하다.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는 상업영화고, <오아시스>는 내러티브 구조나 형식에 있어서 이창동이라는 감독의 미학적인 시도들이 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오아시스>는 나의 윤리적이고 정치적인 질문을 견디지 못했다. 내가 <오아시스>에 관해 그렇게 길게 썼던 것도 그 영화에 미학적인 동의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다만 정치적이고 윤리적으로 동의를 하지 못했기 때문에 부정적인 감흥을 불러일으킨 거다.
정윤철: 나도 <오아시스>의 엔딩은 좋아하지 않는다. 그런데 당신은 종두가 강간을 했고, 그것을 무마하기 위해 쇼트를 교묘하게 배치했다고 썼는데, 우리도 알다시피 종두는 충동을 제어하지 못하는 남자가 아닌가. 그러니까 강간을 하고 나서도 집에 가서는 엄마하고 묵찌빠를 하면서 노는 거고. 정성일: 내 얘기가 그거다. 종두 같은 인간은 언제든지 공주를 강간할 수 있다. 그런 일은 대한민국에서 매일같이 벌어지는 일이다. 그게 문제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 장면을 왜 그렇게 붙여놓았느냐는 거다. 마치 아무 문제가 아니라는 것처럼. 어떤 남자가 강간을 하고 집에 가서 엄마하고 묵찌빠를 할 수도 있는 일이다. 하지만 강간신 다음에 이걸 붙여놓으면 전혀 다른 이야기가 된다. 나는 종두는 용서할 수 있지만, 그렇게 붙여놓은 편집은 용서할 수 없다. 내가 <오아시스>에서 역겹게 생각하는 건 이야기가 아니라 바로 그 시네마틱한 부분이다. 공주가 종두에게 전화할 수도 있다. 그런데 왜 그사이에 옆집 부부가 공주 집에 와서 섹스하는 장면을 보여주고, 그것으로도 부족해 오빠 부부가 공주를 장애인 임대 아파트에 데리고 가서 함께 사는 것처럼 거짓말하는 장면을 보여주는가. 물론 그런 인간은 무지하게 많다. 하지만 강간과 묵찌빠와 섹스와 오빠라니. 그 다음에 공주가 전화 거는 장면이 나오면 관객은 자동적으로 공주도 섹스하고 싶은 거야, 라며 강간을 용서하게 된다. 그런 편집은 너무나 비윤리적이다. 당신이 나보다 더 잘 알겠지만, 영화에서 이미지는 전적으로 운이다. 그 순간 바람이 불 수도 있고 해가 비칠 수도 있고 구름이 지나가며 얼굴에 그늘이 질 수도 있다. 하지만 구름이 지나간 다음에 한 여자의 얼굴이 붙는 것은 백만분의 일의 우연도 아니다. 나는 <오아시스>가 그런 식으로 장면을 붙인 것을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정윤철: 당신은 <사이보그지만 괜찮아> <다세포 소녀>에 관한 비평도 썼는데, 이런 영화까지 정치적인 기준으로 생각을 한다는 것이, 나는 조금 그랬다. 정성일: 나는 그 두 편의 영화가 굉장히 정치적인 영화라고 생각한다.
정윤철: 어떤 면에서 정치적이라는 건가. 당신은 <사이보그지만 괜찮아>의 마지막을 비판했는데, 그처럼 판타지적인 엔딩에서 어떻게 정치적인 보수성을 발견했는지 궁금하다. 정성일: 왜 판타지로 피해갔느냐는 거다. 판타지가 동원되는 것이 이 영화에서 그렇게 중요했을까. 나는 그 영화를 보며 <오아시스>와 똑같은 궁금증을 품게 됐다. 그런 엔딩은 얼마든지 만날 수 있는 것이지만, 그 엔딩 다음에 왜 정신병원이 나오는 에필로그를 붙였을까. <사이보그지만 괜찮아>의 마지막은 우리에게 문득 질문하게 만든다. 어느 쪽이 진짜인가. 그렇다면 이 영화가 진짜 다루고 싶었던 것은 정신병원인가 정신병인가. <사이보그지만 괜찮아>는 끝내 대답하지 않는다. 그 에필로그는 구조로만 따지면 전혀 필요가 없는데, 무엇을 매개하는지 답을 피하기 위해 구태여 갖다 놓은 것이다. 그것은 질문을 피하기 위한 알리바이다.
정윤철: 정신병인지 정신병원인지 하는 질문이 왜 중요한 것인가. 정성일: 이 영화가 다루고 있는 대상이 문제인가, 이 영화가 우리 사회에 대한 알레고리인가에 따라 전혀 다른 목표가 생기기 때문이다.
정윤철: 누가 보더라도 <사이보그지만 괜찮아>는 영군과 일순이 주인공이고, 그들이 서로 사랑할 수 있는지가 메인 플롯으로 보이지 않을까. 정성일: 누구나 알 수 있도록 만든 것은 박찬욱의 재능이고 그 안에 알레고리를 짜넣은 것도 그의 솜씨다. 하지만 그가 너무 나이브했던 것도 사실이다.
정윤철: 그들이 맺어지면서 해피엔딩으로 마무리되는 것이 정치적으로 보수적이라는 것인지. 정성일: 그건 상관없다. <사이보그지만 괜찮아>가 둘만의 이야기로 끝나버리는 것이 반동적이라는 뜻은 아니다. 영군과 일순을 비롯해 이 병원의 모든 인물은 정신적인 트라우마를 안고 있다. 그것은 이 병원이 한국사회의 압축판이라 것을 의미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정신병을 안에 숨기고 살아가지만, <사이보그지만 괜찮아>는 그걸 뒤집어놓았다. 그러므로 마지막에 이 세상을 어떻게 할 것인가, 끝을 낼 것인가, 환상 밖으로 나갈 것인가, 아니면 환상을 유지할 것인가, 질문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마지막 순간 <싸이보그지만 괜찮아>는 정신병원이 진짜인가 가짜인가, 그러니까 이건 정신병원을 찍은 걸까 정신병을 찍은 걸까라고 질문을 완전히 바꿔버린다. 박찬욱은 정치적인 것을 피해가고자 마지막에 그런 질문을 밀어넣었던 것이다. 왜 마지막에 패러다임을 완전히 지우는가. 박찬욱은 그것이 재미있었을지 모르지만 내겐 아니었다. 도대체 1시간 40분 동안 내가 보았던 영화는 무엇이었는가. 이 정신병원에서 우리는 어떻게 할 것인가라는 질문은 남한은 이 수많은 모순을 어떻게 할 것인가와 똑같은 질문이었다. 그런데 마지막에 이르러 박찬욱은 질문을 바꾼 것이다. 그것은 기만이다. 나는 문득 박찬욱은 용기가 없었거나 엔딩을 찾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엔딩을 찾지 못했다고 얘기하든지, 나는 그렇게까지 밀고나가고 싶지 않았다고 얘기했어야만 했다. 그런데 나는 그런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라는 것이다. 나는 이 영화가 영화 전체와 에필로그, 두개의 신으로 이루어져있다고 생각한다. 영화 쪽에서 에필로그를 볼 것인가, 에필로그 쪽에서 영화를 볼 것인가, 에 따라 영화가 달라진다. <괴물>이 그런 영화다. <괴물>은 세 개의 신으로 이루어져 있다. 프롤로그와 영화 전체, 그리고 송강호가 어두운 매점에 앉아 눈을 희번덕거리는 마지막 신. 의미심장하게도 이 세번째 신은 한강인데도 세트에서 찍은 장면이다. 한강이 나오는 모든 장면을 진짜 한강에서 찍었는데, 이 장면만 세트였던 것이다. 그순간 세상은 시뮬라크라가 되고, 영화는 질문한다. 어느 쪽이 진짜인가.
정윤철: 당신은 <다세포 소녀>가 프롤레타리아의 사랑을 가능하지 않은 것으로 본다고 비판했다. 그런데 <다세포 소녀>는 만화같고 키치적인 영화다. 물론 가난을 등에 업은 소녀를 아무 생각없이 쓰기는 했다. 하지만 코미디조차 그렇게 보아야만 할까. 정성일: 원작만화에서 가난을 등에 업은 소녀는 중요한 인물이 아니었다. 그런데 이재용은 왜 수많은 등장인물 중에서 그 소녀를 택했는가. 성적 취향의 다양성을 드러내자면 너무나 많은 인물이 있었다. 아니면 만화처럼 인물을 옮겨다닐 수도 있었을 거다. 그런데도 영화는 가난을 등에 업은 소녀에게 고정점을 두고 있으므로, 그녀의 퍼스펙티브로 영화가 진행될 수밖에 없다. 그런데 가난을 등에 업은 소녀는 이 영화에서 비웃음의 대상이 된다. 성적 취향에는 그토록 자유롭고 관대하면서 가난을 등에 업은 소녀는 조롱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내가 문제로 삼은 것은 각색이었다. 영화는 수많은 가능성 중에서 나오는 하나의 조합이다.
정윤철: 코미디는 장르적인 특성을 고려해야만 하지 않을까 한다. 그렇게 씹는 맛에 보는 영화인데 너무 정색을 하면 문제가 있지 않나. 정성일: 코미디를 만들 때는 풍자의 관대함과 풍자의 날카로움이 있다. <다세포 소녀>가 풍자의 관대함을 성적 자유에 맞춘 것은 아무 문제가 없다. 하지만 풍자의 엄격함이 가난을 등에 업은 소녀에게 맞춰진 것에 관해선 질문을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나는 <다세포 소녀>를 이야기하면서 완성도는 상관하지 않는다. 다만 성적 취향에는 이토록 관대하고 판타지를 투영하는 영화가 계급 문제에 있어서는 왜 이렇게 현실적인가를 묻고 싶다.
정윤철: 코미디나 대중영화에 있어서까지 그렇게 정치적인 것을 고려해야만 하는 걸까. 정성일: 나는 영화가 의도적으로 정치적인 것을 주장하는지 아닌지는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핵심이 되는 질문은 이런 거다. 만약 민주주의를 다룬다면, 그걸로 무엇을 얻고 싶은 건데? 예를 들면 누군가 스타벅스에서 커피를 마신다. 이스라엘에 군사자금을 대겠다고 커피를 마시는 사람은 없지만 거기서 커피를 마시는 반복적인 행위가 결국엔 팔레스타인 아이들에게 폭탄을 떨어뜨리는 행동이 된다. 그것이 가지는 무의식적인 정치적 함의에 대해 생각해보자는 거다. 나는 정치가 너무 싫다고 하면서 대통령 선거가 있는 날 놀러가는 것도 결국 정치적 행위인 것이다.
정윤철: 선거를 피하는 것은 기회를 없애는 거지만 영화를 만드는 것은 어떤 기회를 만드는 것이 기에 더 중요하다는 것인가? 정성일: 수많은 이야기와 인물 중에서 하필 그것을 선택한 정치적 의도가 무엇인가. 예를 들면 <좋지 아니한가>에서 천호진이 굳이 학교 선생님인 이유는 무엇인가. 그가 학교 교사인지 직장에 다니는지 자영업을 하는지에 따라 의미의 방점이 이동할 수밖에 없다. 거기에 정치적인 의도가 없다고 해도 그것이 불러 일으키는 효과마저 비정치적이라고 할 수는 없다. 말하자면 이펙트를 따지자는 거다. 의도가 무엇인지는 의미가 없다. 의도를 묻는 것은 예술을 창백하게 만들 수 있다. 의도는 자유라고 생각하지만, 그 의도가 가져오는 이펙트에 대해선 물어야한다고 믿는다.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보수적이라고 그의 영화까지 보수적이라고 하지 않지 않는가. 물론 그의 영화에는 많은 보수적인 의도가 깔려 있다. 그러나 그 이펙트는 보수적인 이데올로기에 봉사하지 않는다. 이스트우드가 공화당에 찬성한다고 하여 그의 영화도 보수적이라고 말하는 건 바보짓이다. 마찬가지로 감독이 민노당을 지지한다고 해서 그가 반드시 진보적인 영화를 만드는 건 아니다. 나는 그에게 비슷한 논쟁이 벌어졌던 <아멜리에>에 대한 키노의 기사를 보여준다.
<아멜리에>의 열기가 계속되자 ‘리베라시옹'지는 정치가들에게 입장을 물었다. “순진함이 신선했다”고 한 우익 장관에서, 반자본주의 투쟁을 읽어낸 파리 공산당 부시장까지 반응은 모두 놀라울 정도로 긍정적이었다. 좌익 공화 단체 ’제네라시옹 레퓌블리끄‘도 “민중을 진솔하게 그렸다”고 영화를 칭찬했다. 반면 카간스끼는 <아멜리에>의 감상적 파리묘사를 국민전선 선전 비디오 같다고 비난했다.’리베라시옹‘도 호평은 했지만 한 기자는 주네가 가장 저급한 ’프랑스다움‘을 이용했다는 암시를 남겼다. “아코디언 음악, 서민 구역, 프랑스기...섬뜩하다. 프랑스는 이런 과거를 가진 별 볼일 없는 국가일 뿐이다.” <아멜리에>의 내용을 생각하면 이런 분석은 과민반응이다. 찬반 양 진영 모두 영화가 코미디라는 사실을 망각한 것 같다. 코미디는 과장과 특정한 연기를 통해 사회현실을 모방하면서 동시에 거리를 두는, 따라서 이념적으로 양면적인 장르다. 코미디는 소위 진지한 장르가 무시하는 문제들을 이슈화하고, 동시에 종종 보수적 결론으로 그것을 무마한다. (..중략..) 비시정권하에서 나치 협력이란 치욕의 역사를 겪은 프랑스인들은 전후 무엇이든 그쪽으로 해석할 만큼 강박관념을 갖게 되었다. <아멜리에>는 따라서 저항이냐 협력이냐 하는 싸움이 전개되는 최신 전장이 된 것이다. 그러나 비시 정권하에는 사실 저항에서 무관심, 비겁, 암시장 등쳐먹기, 파시스트 협력 등 다양한 입장의 행동들이 존재했다. 전쟁이 벌어지면 늘 그렇듯이 백퍼센트 좌파, 백퍼센트 우파 행동이란 건 없다. <아멜리에>에 대한 이런 해석은 상관없는 작품에서 부당하게 역사적 경험을 읽어내는 것이다. -키노 2001년 1월호 SIGHT & SOUND 기사 번역문 중.
정윤철: 단 한순간만이라도 정치와 이데올로기를 잊고 즐기고 싶은 욕망도 있지 않나. 그래서 영화를 보는 거고. 정성일: 그 순간 그것은 욕망이 아니다. 그것은 사회적으로 자살해버리는 거다.
정윤철: 하지만 살다가 힘들면 죽고 싶듯이 영화를 보며 가상으로나마 사회적으로 자살하고 싶은 것이 아닐까. 정성일: 어떤 인간에게도 생명을 포기할 권리는 없다. 그것은 비윤리적이다. 사회적으로 자살하겠다고 하는 순간 사람은 훨씬 곤란한 문제에 부딪치게 된다. 자기를 진짜 괴물로 만들어 버리는 것이다.
정윤철: 모든 사람이 그렇게 생각한다면 좋겠지만, 그런 싸움은 너무도 지난한 것이다. 정성일: 1969년 동경대 야스다 강당을 점거하고 농성을 하던 전공투 극좌파 학생들이 잡혀갈때 누군가 벽에 낙서를 남겼다. 질 줄 알면서도 싸워야하는 싸움이 있다고. 그 싸움을 포기할 수는 없는 거다.
정윤철: 요즘 세대는 책읽기도 싫어하고 인터넷 20자평에 모든 영화의 운명이 왔다갔다 하고 있다. 당신은 앞으로도 계속 평론을 써야하는데 어떤 전술을 택할 것인가. 정성일: 나는 아직도 희망이 있다고 믿는다. 그래서 역설적으로 이런 태도가 더욱 만연했으면 좋겠다. 20자평도 귀찮아, 나에게 10자평만 줘, 이렇게. 그렇게 된다면 다음 세대가 지금을 비웃으며 반작용을 보이지 않을까. 80년대에는 모두 정치영화를 보았기 때문에 90년대에 타르코프스키와 키아로스타미와 앙겔로풀로스의 영화들이 몇 만 관객을 동원했다. 그 영화를 보던 사람들이 죽은 게 아니지만, 그때 조금 과하기도 했다. 그래서 반발이 일어났다. 나를 즐겁게 해줘. 나는 지금 현상에 대해서도 사람들이 계속 방관할 거라고 생각하진 않는다.
정윤철: 당신은 <키노>에 글을 쓰면서 <스바키 산주로>에서 주인공인 산주로가 아이들을 뒤돌아보며 던지는 마지막 장면의 대사를 인용한 적이 있다. “바보 자식들, 이제부터 너희들의 시대인 거야, 너희들이 어른이라구! ” 그렇다면 평론을 하는 후배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말이 있는가, 이제부터 너희들의 시대일 거라는 생각이 드는가. 정성일: 영화평을 쓰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 테오 앙겔로풀로스가 부산영화제 마스터클래스에 와서 했던 말이다. 그는 프랑스 영화학교인 이덱에 다니다가 학교를 그만두어야 했다. 이수하지 않으면 학교를 떠나야하는 필수과목이 있었다. 쇼트 나누기였는데, 앙겔로풀로스는 고전적인 편집방식이 너무 싫어서 선생이 요구하는 방식과 다르게 콘티를 짰다. 그러자 선생이 말했다. 앙겔로풀로스, 당신은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너무 잘 알고 있다, 당신의 천재성은 그리스에서나 발휘하고 지금은 내가 원하는 방식대로 하던지 학교를 나가라. 앙겔로풀로스는 밤새도록 고민하며 물었다고 한다. 나는 영화를 원하는가 그리고 영화는 나를 원하는가. 그리고 학교를 떠나 결국 그리스로 돌아갔다고 한다. 나도 묻고 싶다. 내가 글쓰기를 원하는가 그리고 글쓰기도 나를 원하는가. 어떤 영화는 글쓰기를 요구하지만 어떤 영화는 감흥이 없다. 완성도를 떠나 아무런 화학작용이 없는데도 글을 쓰는 건 자신과 영화 모두를 망가뜨리는 거고 쥐어짜는 거다.
정윤철: 마지막 질문이다. <키노>를 떠난 후 감독이 될 준비를 하고 있는 걸로 알고 있다. 완벽한 영화는 아직 찍지 않은 영화라고 한다. 언제쯤 완벽하지 못한 영화를 우리에게 보여 줄 생각인가. 정성일: 내가 영화를 만들고 싶은 이유는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해주겠다, 이런 생각은 아니다. 그런 건 유치한 20대에나 가능한 생각일 거다. 나는 책상에서 혼자 영화를 하는 것에 한계에 부딪쳤다. 생각이 나가지 않는다. 영화에 대해 생각하고 책을 보고 여러가지 방법을 써도, 내게 남은 방법은 한가지 밖에 없더라. 함께 영화를 만드는 것. 나는 영화의 가장 큰 힘은 여러 사람이 같이 만드는데 있다고 생각한다. 한 숏과 신을 놓고 나눌 것인가 붙일 것인가, 나누는 것이 결단인가 나누지 않는 것이 세상에 순응하는 것인가, 토론하고 싶다. 나는 세상과 영화에 대해 더 생각하고 싶은 것이다. 나는 영화에 대해 아직 욕심이 있고 더 멀리 가보고 싶다. 내 생각을 더 멀리 밀고 나가고 싶다. 학생 시절에 단편영화를 만들면서 나는 영화에 대해 쓰는 것과 차이를 느끼지 못했다. 영화를 만든다는 것은 영화에 관해 토론하고, 어떻게 찍을까 붙일까 나눌까 고민을 하는 거였으니까.
정윤철: 마지막으로 <씨네21>에 바라는 바는 없는가. 정성일: 이건 아주 특별한 표현이다. 필사적으로 버틸 것. 나는 <키노>를 해봤기 때문에 그것이 얼마나 어렵고 힘든지 알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