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웃음’은 만국공통의 언어이지만, 웃음 코드는 민족, 국가 그리고 지역과 계층에 따라 천차만별로 달라진다. 얼마 전 개봉한 <보랏: 카자흐스탄 킹카의 미국 문화 빨아들이기>가 어떤 이들에게는 신랄한 풍자를 통해 시원한 웃음을 선사하기도 했지만, 다른 이들에게는 지울 수 없는 불쾌한 경험으로 기억되는 것만 보아도 웃음을 유발하는 데 취향과 가치관의 문제가 얼마나 미묘하게 얽혀 있는지를 알 수 있다. 가깝고도 먼 나라 일본이 온갖 매체를 통해 선사하는 유머들을 보며, 우리는 때로 그 기발한 상상력에 놀라며 자지러질 듯 웃어젖히다가 다음 순간 이해할 수 없는 거리감을 느끼기도 한다. 일본의 희극영화를 볼 때도 분명 우리는 할리우드나 유럽 코미디영화와 달리 묘한 동질감을 느끼는 동시에 그들과 우리가 확실히 다른 문화권과 전통 안에 있음을 감지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런 일본 코미디영화들의 변천사를 몇편의 대표작을 통해 만나볼 기회인 ‘일본 코미디 특별선’이 2월28일(수)부터 3월7일(수)까지 서울시네마테크와 필름포럼시네마 주최로 필름포럼에서 열린다.
‘일본 코미디 특별선’에서는 1930년대부터 1990년대까지의 일본 코미디영화의 대표작 가운데 8편이 선정되어 상영된다. 이중 가장 오래된 아마나카 사다오의 1935년작 <백만냥의 항아리>(百万兩の壺)는 1920년대 말부터 1960년대까지 30편 이상의 영화가 만들어진 단게 사젠의 이야기를 코믹하게 그린 시대극이다. 동생의 결혼선물로 선대의 유물인 항아리를 준 야규 가문의 영주는 평범해 보였던 항아리가 백만냥의 가치가 있다는 사실을 나중에 알게 된다. 뒤늦게 동생에게 그것을 되돌려 받으려 하지만 이미 동생 겐자부로의 아내가 넝마주이에게 팔아버린 뒤다. 이후 형은 장안의 모든 항아리를 다 사들이고, 동생은 항아리를 찾는다는 핑계로 기생집에서 살다시피한다. 그러다 이 사건에 외팔이 사무라이 단게 사젠까지 끼어들게 된다. 봉건영주인 형제를 형은 탐욕스럽게 동생은 무능력한 호색한으로 그림으로써 지배계층을 풍자했다. 평론가 사토 다다오는 감독이 외눈박이 로닌 단게 사젠을 평범한 아저씨의 모습으로 묘사한 것을 높이 평가하면서, 모든 등장인물들을 우스꽝스럽게 표현함으로써 영화 내에서 계급적인 격차를 없앴다고 평가했다. 오즈 야스지로가 그의 죽음을 일본 영화계의 최대 손실이라고 평했던 야마나카 사다오의 이 작품은 2004년 쓰다 도시오 감독에 의해 리메이크되기도 했다.
1957년에 제작된 가와시마 유조 감독의 <막말태양전>(幕末太陽傳)도 주의깊게 보아야 할 작품이다. 이마무라 쇼헤이가 공동 각본을 맡았던 이 영화는 일본의 봉건시대와 현대의 경계되는 시기인 1860년대 에도의 한 유곽을 배경으로 여러 인물들의 복잡한 관계가 맺고 풀리는 과정을 담고 있다. 이 영화는 일본의 전통적인 희극 양식인 라쿠고를 소재로 삼아 영화적으로 적용한 작품 가운데 거의 유일하게 성공한 작품으로 그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이야기는 사헤이지라는 영리한 평민과 유곽의 게이샤들, 그리고 서양 세력에 반발하는 사무라이들을 중심으로 펼쳐진다. 친구들과 무전취식을 한 뒤 유곽에서 일하게 된 사헤이지는 자신의 기지를 이용해 게이샤들을 곤경에서 구하기도 하고, 무사들의 혁명에 필요한 지도를 제공하고, 빚에 팔려 창부가 될 처지에 놓인 어린 소녀를 유곽에서 탈출시키기도 한다. 결국 모든 인물들이 원하는 바를 얻도록 해준 뒤 사헤이지는 유유히 유곽을 빠져나간다. 그레고리 베렛은 이 작품이 일본 근대화 전야에 칼에 의지하여 국가의 운명을 걱정하는 사무라이와 기지에 의지하여 개인적 안위를 지키려는 평민의 대조적인 삶의 태도를 말하고 있다는 점에서 흥미롭다고 지적하기도 했다. ‘태양족 영화’로 유명한 <미친 과실>에 출연했던 이시하라 유지로에게 젊은 사무라이 역을 맡긴 가와시마 유조 감독은 막부 말기라는 시대적 상황 속에서 기성세대에 반발하는 새로운 세대인 태양족의 모습을 그려보고자 했다.
이번 영화제에서는 오즈 야스지로의 잔잔한 유머감각이 돋보이는 <오하요>(1959)도 만날 수 있다. 몇 걸음만 옮기면 이웃집 방문까지 닿을 듯 집들이 오밀조밀 모여 있는 한 동네에서 ‘말’ 때문에 벌어지는 여러 가지 해프닝을 다루고 있다. 부녀회 회비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여자들간의 오해와 갈등이 소곤소곤 서로의 입을 타고 들락거리고, 텔레비전 때문에 벌어진 부모와 자식간의 말다툼은 아이들의 입을 다물게 만든다. 제목이자 인사말인 ‘오하요’는 의례적인 측면에서의 언어가 갖는 역할에 대한 감독의 관심을 표현해주는 동시에 그런 의례의 세계에 익숙한 어른들과 그렇지 않은 아이들간의 차이와 소통을 표현해주는 지표로 사용된다. 텔레비전이나 세탁기와 같은 새로운 문물은 가족이나 이웃 사이의 갈등을 야기하는 원인이 되기도 하고, 현대식 생활습관을 가진 커플이 결국 주민들의 호감을 사지 못하고 동네를 떠나게 되는 모습에서 현대사회에 대한 감독의 비판적인 태도가 살짝 드러나기도 한다. 그러나 그런 가전제품들이 다시 화해의 도구로 사용되고, 전통적인 커뮤니티의 간섭으로 인해 질식할 것 같은 개인의 심리도 드러내는 균형감각도 잃지 않는다. 이 작품에서도 오즈의 트레이드 마크라고 할 수 있는 고정된 카메라와 겹겹이 층을 이룬 미장센을 확인할 수 있다.
현대 일본의 소시민 가정을 가장 독특한 감수성으로 포착한 작품은 아마도 모리타 요시미쓰의 1983년작인 <가족게임>(家族ゲ-ム)일 것이다. 1980년대 물질적 풍요 속에서 오히려 극도의 정신적 불안 상태에 빠진 일본 중산층 가정의 풍경을 풍자적으로 해부한 영화로 스스로도 뛰어난 풍자코미디영화를 만들었던 이타미 주조가 가장인 누마타를 연기하고 있다는 것도 눈여겨볼 만하다. 누마타의 가장 큰 걱정은 공부에는 통 관심이 없는 차남 시게유키의 성적을 올려 명문고등학교에 진학시키는 것이다. 그는 가정교사 요시모토를 고용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성적을 올려줄 것을 부탁한다. 요시모토가 물리적, 언어적 폭력을 동원해 시게유키를 복종시키며 부모가 원하는 만큼 성적을 올리는 동안 모범생이었던 시니치는 점점 학교에서 멀어진다. 가구나 소품들을 자유롭게 이동시키며 독특한 카메라워크를 구사하는 이 영화의 유머감각은 매우 특이하다. 마치 부조리극처럼 인물들간의 대화는 소통불능 상태에 빠지는 경우가 허다하며, 상황 전개는 럭비공처럼 예상하지 못했던 방향으로 튀어나가기 일쑤다. 감독은 시종일관 어색하고 딱딱한 가족 구성원들의 관계와 외부인인 가정교사가 가족 내에서 갖게 되는 기묘한 지위를 보여줌으로써 현대사회에서 가족이 어떤 식으로 해체되는지를 꼬집는다. 제작된 해 유수 영화제에서 각광을 받고, <키네마준보> 베스트10의 1위를 차지했던 이 작품을 통해 모리타 요시미쓰는 대형 스튜디오들이 몰락하기 시작한 1980년대 일본 영화계의 주목받는 신인으로 떠올랐다.
이외에도 이번 영화제에서는 오즈 야스지로, 기노시타 게이스케와 함께 쇼치쿠 전성기의 3대 감독으로 손꼽히는 시부야 미노루의 <금일휴진>도 소개된다. 더불어 1969년부터 1996년까지 총 48편이 만들어져, 세계에서 가장 긴 영화 시리즈로 유명한 <남자는 괴로워>(男はつらいよ)를 만들었던 야마다 요지 감독의 <바보는 전차와 함께 온다>도 함께 상영된다. 자신의 다양한 관심사를 충족시키는 영화를 만들기 위해 코미디, 시대극, 탐정물, 다큐멘터리 등 다양한 장르에 도전했던 이치가와 곤 감독의 희극 <만원전차>도 상영작 리스트에 올라 있다. 마스무라 야스조에게 “구로사와 아키라와 함께 이미지만 가지고 허구적 내러티브를 창조할 수 있는 유일한 감독”이라는 칭송을 받은 그는 이 작품에서 평범한 샐러리맨의 일상이 몰락해가는 과정을 따라가면서 전후 일본사회의 경제적 기적을 냉소적으로 조망한다. 이 영화제에서 만날 수 있는 가장 최근의 일본 코미디영화는 나카하라 슌 감독의 1991년작 <열두명의 마음 약한 일본인>(12人の優しい日本人)으로, 이 작품은 시드니 루멧의 <12명의 성난 사람들>에서 모티브를 얻어 제작되었으며 연극과 드라마로도 큰 인기를 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