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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아장커의 <스틸 라이프> [1]
정성일(영화평론가) 사진 이혜정 2006-11-03

…(후렴) 지금은 가을이니까, 라고 노래하면서 나는 지아장커의 <삼협호인>(三峽好人, Still Life)(과 함께 찍은 다큐멘터리 <>(東, Dong))이 보고 싶다고 간절하게 하소연하면서 글을 맺었다(<씨네21> 제572호, ‘그래, 지금은 가을이니까’). 그리고 기적이 찾아왔다. 갑자기 소원이 이루어졌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이 글은 ‘소원 성취한’ 속편이다. 나는 서울에서 그 두편의 영화를 보았고, 그런 다음 지아장커와 만났다.

솔직히 말하면 <세계>를 본 다음 나는 불안했다. 이 영화는 어딘가 부서져 있었다. 베이징에 있는 테마 파크에서 만나고, 헤어지고, 배신하고, 호소하고, 떠나간 다음, 결국 죽음으로 끝나는 이 영화는 유릭와이가 HD카메라로 찍은 2.35 사이즈의 시네마스코프 디지털 화면 위에 (말 그대로) 스펙터클하게 펼쳐진다. 그러나 이야기는 산만하게 진행되고, 결말은 음울하고 비관적이다. 지아장커는 세 번째 영화 <임소요>를 만든 다음 갑자기 방향을 다른 쪽으로 바꾼 것처럼 보였다. 인상적이지만 종종 이야기는 핵심을 벗어나 있었고, 인물들이 서성거리는 공간 속에 머물고 있는 시간(dead time)은 때로 무의미하게 여겨지기도 했다. 그러나 그것이 미학적이라기보다는 지아장커가 세상과 관계맺는 방식의 변화처럼 여겨졌다. 하지만 일부러 그 자신의 영화를 부셔가면서까지 그럴 필요가 있을까, 라는 의문이 들었다. <세계>는 실패가 아니라 의도적인 이탈처럼 여겨졌다. 무언가 이 영화는 이미 만들어진 지아장커의 영화를 거북하게 만들고 그런 다음 다시, 라고 선언하는 것 같았다. <세계>는 결론이 아니라 이행이다.

<스틸 라이프>

(이 글에서 따옴표 안의 말은 모두 내가 지아장커와 서울에서 만나서 나눈 대담의 발췌이다) “나는 <임소요>까지 사회적인 관계, 사회 안의 관계에 대해서 관심을 가졌어요. 그 사람이 사회 안에서 무엇이냐는 것이지요. 이를테면 소매치기(<소무>), 방랑가극단(<플랫폼>), 어린 실직자들(<임소요>). 그런데 <임소요>를 찍던 도중에 문득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어요. 무엇보다도 그 누가 아니라 현대 중국 안에서 살아가는 다양한 삶을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더이상 개인, 그 누구를 다루는 대신에 그 안에서 살아가는 모습 그 자체를 찍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세계>는 그러므로 변해야만 했습니다. 그 변화는 중국의 변화에 대한 나의 변화입니다. 지금 중국을 살아가는 젊은이들은 두 가지 세계에 함께 살고 있습니다. 하나는 현실이고, 다른 하나는 디지털 세상입니다. 그것을 함께 보여주는 것이 중요했습니다. 그래서 세상을 살아가는 ‘후현대’(後現代, postmodern)를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미학적인 기법으로서가 아니라 살아가는 모습으로서 말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이야기만으로는 표현하기에 충분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애니메이션, 시네마스코프, 자막이 필요해졌습니다. 하지만 그 ‘후현대’ 안에는 동시에 전통적인 과거가 공존하고 있습니다. <세계>의 주인공들은 현재만이 아니라 과거의 문제를 함께 안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다음 그걸 다시 부정해야 했어요. 왜냐하면 <세계>를 만들면서 그 안에는 더 큰 변화, 역사가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삼협호인>은 역사의 변화 안에 놓인, 그런데 그 앞에서 그래도 살아야 하는 사람의 문제를 다루어야 했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변화하고 있는 중국에 살고 있는 내가 나아가야 할 길이라고 결심했습니다.”

불안과 기대, 망설임과 믿음 사이에서 나는 조심스럽게 <삼협호인>을 보았다. 하지만 그건 모두 쓸데없는 알리바이였다. 시작한 지 첫 5분 만에 다 잊었다. 그리고 이 영화는 무언가 굉장한 것을 지금 시작하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 영화를 볼 때 이런 순간의 더할 나위 없는 기쁨이 있다. 지금 내 눈앞에서 걸작이 펼쳐지고 있는 것을 지켜보고 있을 때의 첫 느낌. 누구의 글에도 의지하지 않고, 그 누구의 설명으로부터도 자유롭게 이제까지 한번도 경험하지 못한 것을 펼쳐낼 때 그것을 내 눈으로 처음 보는 순결한 환희. <삼협호인>은 지아장커의 최고 걸작이라는 말로는 부족하다. 그는 갑자기 왕가위의 <해피 투게더>, 혹은 차이밍량의 <하류>에도 비견할 만한 영화를 만들었다. 아니, 어쩌면 더 멀리 나아갔을 지도 모른다. <삼협호인>은 (내가 모든 중국영화를 본 것은 아니지만) 21세기 중국영화 중에서 왕빙의 <철서구>와 함께 가장 좋은 영화이다. 이렇게도 설명할 수 있다. <삼협호인>은 21세기 영화이다. 이 영화는 구스 반 산트의 <게리>, 허우샤오시엔의 <밀레니엄 맘보>, 압바스 키아로스타미의 <10>, 데이비드 린치의 <멀홀랜드 드라이브>, 아핏차퐁 위라세타쿤의 <열대병>, 필립 가렐의 <평범한 연인들>만큼 멀리 나아갔다. 그런 다음 마침내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과 마주쳤을 때 나는 거의 망연자실해졌다. 맹세할 수 있다. 이 마지막 장면은 내가 지난 10년간 본 영화 중에서 최고의 라스트 신이다. 그 울림이 너무 커서 거의 멍한 상태가 되었다. 그리고 그날 나는 아무 일도 하지 못했다.

<삼협호인>과 <>, 하나의 사태에 대한 두개의 시선

다음날 비로소 <삼협호인>과 함께 작업한 다큐멘터리 <>을 보았다. 그리고 깨달았다. 두 영화는 매우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으면서 서로 다른 작품이었다. 좀더 정확하게 하나의 사태에 대한 두개의 시선이다. 같은 것을 다큐멘터리와 극영화로 반복하거나, 혹은 단지 동일한 대상을 다큐멘터리로 다가간 다음 극영화로 발전시킨 것이 아니라 두 영화는 하나의 질서에 대한 외재적 관찰과 내생적 개입으로 이루어진 서로 다르게 긍정된 세계의 재현 프로그램이다. 자, 여기 싼샤(三峽)가 있다. 이 지역은 2000년 동안 중국의 물길을 잇는 도시였다. 그 아름다운 풍경은 중국 인민폐 10위안에도 그려져 있다. 그런데 중국 정부는 여기에 세개의 댐을 세운다는 발표를 했다. 이 말은 이 도시 전체가 물속에 잠긴다는 뜻이다. 수많은 환경운동가들과 학자들의 비판이 잇따랐지만 공사는 1993년에 시작되었다. 이 공사는 세계 최대 규모가 되었다. 1750개의 마을이 물속에 가라앉았고, 이주민은 110만명이 넘었다. 그리고 이 숫자는 지금도 계속 늘어나고 있다. 비판은 침묵을 강요당했고, 이 공사는 2009년까지 계속될 것이라고 한다. 두편의 영화는 모두 싼샤에서 진행된다. 그때 <>은 이 장소에 대한 공간적인 표면의 변화, 부서져가는 건물, 달아나고 있는 긍정된 세계, 그 변화 안에 살고 있는 인민들의 삶을 쳐다본다. 혹은 이 영화의 주인공은 싼샤 그 자체이다. 하지만 <삼협호인>은 싼샤에 도착한 두 남녀의 이야기를 통해서 싼샤에서 사라져버린 시간의 무게를 다룬다. 문득 사라진 시간, 저 물 안에 잠겨버린 시간, 되돌이킬 수 없는 시간, 응시 안에 수축된 시간, 과거를 찾아 두 남녀가 떠도는 이 텅 빈 형식의 공허함은 현대 중국을 살아가는 인민들의 사라진 현재라는 시간이다.

“<세계>를 끝낸 다음 나는 문화혁명 시대에 작은 시골 도시의 건달들의 이야기를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이미 미술작업까지 끝난 상태였는데, 화가인 리우샤오동(劉小東)이 찾아와 싼샤에 가서 11명의 노동자들의 그림을 그릴 계획인데 그걸 다큐멘터리로 찍을 생각이 없느냐는 제안을 했습니다. 리우샤오동은 지하전영 감독들과 아주 친한 사람입니다. 그는 왕샤오솨이의 <극도한랭>에 출연도 했으며, 장위엔의 <북경잡종>에서는 미술감독을 했습니다. <세계>에서는 가라오케에서 노래를 부르는 아저씨로 나옵니다. 나는 1990년에 처음으로 리우샤오동을 만났는데 그는 이전의 중국 화가들과 전혀 달랐습니다. 그의 작품 중 트럭에서 노동자가 웃통을 벗고 웃으면서 일터로 향하는 그림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때 거기에는 중국의 일상이 있었습니다. 나는 그가 어떻게 그런 일상을 담을 수 있는지가 궁금했습니다. 그래서 리우샤오동에게서 전화가 왔을 때 흔쾌히 동행하게 되었습니다. 싼샤는 2000년에 댐 건설을 시작해서 2004년에도 공사를 하고 있었습니다. 우리가 도착했을 때 싼샤는 이미 과거가 되어 있었고, 이미 거기서 살고 있는 사람들은 사라져버린 과거에 대해서 아무도 말을 하지 않고 있었습니다.”

제목을 <>으로 지은 것은 화가 리우사오동을 모두 ‘동’(Dong, 東)이라고 불렀기 때문에 그의 이름에서 가져온 것이(라고 한)다. 지아장커와 그의 스탭들은 마치 중국 산수화 같은 풍경을 가진 이곳, 그러나 도시로 눈을 돌려보면 매일 부서져나가고 있는 건물들의 황량한 공사가 쉴새없이 이어지고 있는 이곳에서 11명의 노동자들을 모델로 그림을 그리는 리우샤오동의 작업을 찍어나가기 시작했다.

“<>은 세 단락으로 나누어져 있습니다. 그 하나는 리우샤오동의 그림 작업에 관한 것이고, 그 다음은 그와의 인터뷰이고, 남은 하나는 그림의 모델이 되었던 노동자들에 관한 것입니다. 그렇게 위험하고 험난한 곳에서 일하는 이 사람들, 여기서 땀을 흘리고 일하는 사람들의 육체적인 아름다움에 대해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하루는 우리가 찍는 노동자 중에 나이 든 분이 있었습니다. 해가 아주 뜨거운 날이었는데 우리는 그가 하루 종일 일하는 모습을 찍었습니다. 그리고 해가 지자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돌아가는 모습을 보면서 나는 그가 집에 돌아가면 어떻게 살고 있을지가 궁금해졌습니다. 다큐멘터리는 그 사람의 생활을 찍지만 다가가면 갈수록 사람들은 자신의 비밀스러운 부분을 방어하려고 합니다. 내가 그의 비밀 안으로 들어가려면 이야기가 필요해집니다. 싼샤는 매일 바뀌고, 매일 부서지고, 매일 새로운 곳이 되어가고 있었습니다. 나는 싼샤에 다큐멘터리를 찍으러 왔기 때문에 아무 준비도 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조감독에게 다큐멘터리를 맡기고 내 자신이 직접 노동자의 연기를 하면서 3일 동안 시나리오를 썼습니다. 이 시나리오는 87신으로 완성되었습니다. 이것이 <삼협호인>의 시작입니다. 이 시나리오는 매우 느슨했고, 많은 부분은 현장에서 바뀔 수 있게 준비되었습니다. 대신 한 가지 원칙을 세웠습니다. 그것은 외지인의 시선으로 영화를 진행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내가 싼샤에 온 지 열흘밖에 되지 않았기 때문에 만일 이곳의 삶을 찍는다면 거짓말이 탄로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의 촬영이 순조로운 것은 아니었다. 하루는 촬영을 하던 11명의 모델 중 한 사람이 갑자기 건물이 무너져서 그 아래 깔려 죽고 말았다. 전통에 따라 그의 시신은 싼샤에 흐르는 강물에 떠나보냈다(이 장면은 <>에 나오며, 같은 장면을 <삼협호인>에서도 사용하였다). 리우샤오동과 지아장커는 너무 큰 충격을 받아서 더이상 작업을 할 수 없었다. 그는 여기서 이 작업이 끝났다고 생각했다. 리우샤오동도 더이상 붓을 들지 않았다. 왜냐하면 앞으로 어떻게 더 나아가야 할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물론 그런 일은 싼샤에서 매일 벌어지는 일이다. 이 도시에서 공사 중에 사람이 깔려 죽는 일은 더이상 뉴스도 아니었다.

“더이상 촬영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너무 괴로웠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이 소식을 전하기 위해 리우샤오동에게 말해서 그 사람의 집을 찾아가면 어떻겠느냐고 말했습니다. 그날은 비가 내렸습니다. 그런데 그 가족들은 그저 담담하게 받아들였습니다. 왜냐하면 남자들이 대부분 돈 벌러 도시로 간 그 동네에서 그러한 소식은 매일 듣는 일 중 하나였기 때문입니다. 돌아와서 리우샤오동은 남은 11명의 노동자를 다 그렸습니다. 그런 다음에 리우샤우동이 11명의 여자를 그리면 어떻겠느냐고 제안했습니다. 중국에서는 음양의 조화가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리우샤오동은 이것이 이 그림의 주제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11명의 여자를 그리기 위해서 방콕에 가자고 제안을 했습니다. 무엇보다도 리우샤오동은 싼샤를 떠나고 싶어했습니다. 겨울이지만 그곳에 가면 날씨가 덥기 때문에 옷을 입어도 몸의 선이 드러나게 되므로 모델들을 다루기에 좋았습니다. 나는 싼샤의 강물이 흘러서 방콕까지 흘러가는 것처럼 물을 따라 두 장소를 연결하였습니다. 하지만 내 마음은 싼샤에 남았습니다. 다큐멘터리가 끝난 다음 싼샤로 돌아왔습니다. 시나리오가 완성되자마자 함께 일했던 배우들에게 연락을 했습니다. 자, 이제 이야기가 완성되었어, 너희들을 기다리고 있어. 그들은 무슨 이야기인지도 모르고 가방을 하나씩 들고 싼샤에 왔습니다. (웃음) 그 이외의 모든 배우들은 모두 싼샤의 거리에서 찾았습니다.”

“<삼협호인>은 내게 일종의 무협영화입니다”

<삽협호인>의 첫 장면은 강물을 따라 배를 타고 한 남자가 이곳에 도착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그는 여기에 오자마자 중국 인민폐를 미국달러로 바꾸는 마술쇼를 한다면서 끌고 간 다음 창고에서 돈을 뜯어내는 무리들과 만난다. 그런 다음 쪽지에 쓰여진 주소를 찾아 그곳에 간다. 그러나 이미 그곳은 물에 잠긴 지 오래다. 이 남자는 16년 만에 다시 여기에 온 것이다. 떠나간 아내와 자신의 딸을 찾아 이곳을 찾아온 한산밍이라는 이 사내는 아내의 오빠를 찾아가지만 그의 동료들에게 매를 맞을 뻔한다. 그는 낮에는 건물을 부수는 공사장에서 일하고 휴일에는 아내를 찾는다. 그러던 어느 날 오후 문득 옥상에서 하늘을 본다. 영화가 시작하고 난 다음 39분인 이 순간(이 영화의 상영시간은 1시간52분이다), 거의 동일한 프레임의 구도로 한 여자가 하늘을 본다. 그때 이 여자는 하늘을 날아가는 UFO를 본다. 32살의 셴홍은 남편을 찾아 이곳을 찾아왔다. 2년 동안 전화 한통 한 다음 아무 연락이 없는 남편을 찾아온 셴홍은 남편의 친구인 왕동민을 찾아가 남편에게 연락을 해달라고 부탁한다. 하루 종일 연락을 하던 왕동민을 옆에서 지켜보던 셴홍은 남편이 이곳에서 제법 성공했으며, 젊은 여자와 동거 중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싼샤댐 방파제에서 남편을 만난 셴홍은 새로운 남자가 생겼으니 이혼서류에 도장을 찍어 달라고 말한다. 어디로 갈 거냐는 남편의 질문에 그녀는 잠시 생각한 다음 그 남자와 상하이로 갈 것이라고 대답한다. 셴홍은 배를 타고 싼샤를 떠난다. 떠나가는 배를 옥상에서 내려다보는 한산밍에게 아내가 있는 곳을 알려주는 연락이 온다. 움막 같은 집에서 아내를 만난 한산밍은 아내가 오빠 빚 때문에 여기에 팔려왔으며, 딸은 이미 이곳을 떠났다는 것을 알게 된다. 한산밍은 광산촌에 돌아가 돈을 벌어서 아내를 찾으러 와야겠다고 결심한다. 그는 여기 와서 만난 노동자들과 함께 고향인 샹시로 돌아간다.

지아장커는 두 남녀, 한산밍과 셴홍을 다루면서 단 한 장면에서도 두 사람이 스쳐 지나가거나 혹은 우연히 만날 기회를 주지 않는다. 영화는 한산밍으로 시작해서 거의 3분의 1이 지나간 다음에 셴홍으로 넘어간 뒤 내내 셴홍을 따라가다가 그녀가 배를 타고 떠나자 다시 한산밍으로 돌아온다. 두 사람은 서로의 존재를 전혀 알지 못한다. 다만 두 사람은 같은 곳에서 와서 같은 도시에서 서로의 상대방을 찾은 다음 서로 다른 곳으로 떠난다. 이때 영화는 두 사람을 평행 편집으로 보여주는 대신 하나의 이야기 안에 하나의 이야기가 있거나, 혹은 하나의 이야기 중간에 다른 하나의 이야기가 있거나, 또는 하나의 이야기와 다른 이야기가 있는 것으로 보여준다. 두 이야기는 홍상수처럼 서로 모방하지도 않고, 에릭 쿠처럼 비스듬히 서로 겹쳐져 있지도 않으며, 스와 노부히로처럼 한 이야기를 두개로 나눠놓지도 않았으며, 아핏차퐁 위라세타쿤처럼 서로가 서로에게 은유적으로 간섭하지도 않는다. 그 둘은 싼샤라는 장소의 시간적인 수평적 횡단이다.

“인물이 등장하고 그 인물을 쫓아가는 것은 가장 쉬운 방법입니다. 그리고 그건 내가 가장 잘할 수 있는 방법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나는 곧 그 방법을 버렸습니다. <플랫폼>에서부터 나는 군상을 다루기 시작했습니다. 나는 <삼협호인>에서 두 사람의 두개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습니다. 두 사람은 만나서는 안 되며, 그 둘은 닮아 있는 이야기를 하지만 그 둘은 같은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나는 두명의 자리를 오가면서 그 둘이 함께 살고 있는 시간을 찍고 싶은 것입니다. 그 둘은 함께 살지만 같이 사는 것이 아닙니다. 중국의 외로움은 여기에 있습니다. 두 인물의 관계? 두 사람을 다루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건 키에슬로프스키의 영화입니다. 두 사람이 있고, 그런 다음 두 사람이 스쳐 지나가고, 그리고 두 사람 사이의 어떤 관계가 설명됩니다. 내가 그걸 피해야겠다고 생각한 것은 아니지만 그 방법밖에는 없는 것인가, 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 이야기로 진행하면 그건 내가 <삼협호인>에서 다루려는 주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나는 여기서 인물들이 가진 고독감, 내가 가진 문제를 남이 도와줄 수 없다는 고립, 철저하게 혼자라는 것, 혼자라는 느낌을 주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오히려 두 사람을 등장시킨 다음 서로 아무 관계도 생기지 않으면 그들이 혼자라는 느낌을 더 줄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여기에 있는 것은 현대에 던져진 중국 사람들의 고립감입니다. 우선 이 이야기의 주인공을 싼샤의 외지인 두 사람으로 결정했습니다. 두 주인공 중 한명인 한산밍은 나의 이종사촌 형입니다. 그는 고향에서 실제로 광부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그는 이미 <플랫폼>과 <세계>에서도 광부로 나온 적이 있습니다. 실제로 광산촌은 너무 힘들기 때문에 광부는 대부분 혼자 살고 있고, 그래서 돈을 주고 사는 수가 많습니다. 또 한명의 주인공 셴홍은 남편을 찾으러 이곳에 찾아옵니다. 결혼했지만 서로 다른 도시에서 헤어져 살고 있는 부부들은 언젠가 결정을 해야 할 일과 마주칩니다. 지금 이런 일이 중국에서 매일 비일비재하게 일어나고 있습니다. 나는 <임소요>를 만든 다음 무언가 충분하지 않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느꼈습니다. 중국은 더 빨리 변하고 있었고, 그 안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거기에 적응해야만 했습니다. 산다는 문제. 그래서 더 나아가기 위해서는 개인의 내면, 말하자면 자아의 문제를 다루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이전에는 사회가 개인에게 주는 문제를 다루었다면 <세계>에서부터는 사람에게로 관심을 돌렸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내가 변한 것이 아닙니다. 그 변화는 중국 사람들의 변화에서 온 것입니다. 말하자면 나는 중국의 변화를 담고 있는 것입니다. <세계>의 마지막 장면에서 말합니다. 우리는 죽은 거야? 아니, 우리는 시작하는 거야. 그건 선택입니다. 이제 선택을 의식해야 합니다. 그런데 모든 선택은 개인적인 것입니다. 내가 말하는 개인은 그런 의미입니다. <세계>는 그렇기 때문에 그 이전의 영화들과 다른 것입니다. <삼협호인>은 그것을 더 밀고 나아간 것입니다. <세계>에서 선택을 한다면 <삼협호인>에서는 선택을 하기 위해 (싼샤에) 오는 것입니다. 그건 연장선상에 놓인 것이지만, 동시에 다른 차원으로 올라서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삽협호인>은 <>과 어떤 울림을 갖는다. 11명의 노동자와 11명의 여자 모델들, 남자와 여자, 음과 양, 한산밍과 셴홍. 하지만 그것은 좀더 깊고 넓은 파문을 불러일으킨다. 광산촌에서 온 광부와 간호원, 노동자와 블루칼라. 노동 인민과 전문교육을 받은 지식인 분자. 그들의 두개의 선택. 중국의 자본주의. 물론 이런 것들은 지아장커가 줄기차게 다루어온 것들이다. 그러나 지아장커의 영화를 잘 알고 있는 사람들, 혹은 이미 <세계>까지 본 사람들일지라도 <삼협호인>을 보면 어리둥절한 순간과 마주하게 된다. 이를테면 영화가 시작한 다음 39분. 옥상에서 한산밍은 무심하게 강을 내려다보고 있다. 그때 영화는 거의 동일한 프레임, 동일한 날씨, 동일한 제스처로 이제 막 싼샤에 도착한, 그래서 우리가 영화에서 지금 막 처음 보는, 셴홍이 대낮에 하늘을 가로 질러가는 UFO를 본다. 혹은 그런 다음 그날 밤 그녀가 머물고 있는 왕동민의 집 앞에 있는 기이하게 생긴 폐허가 된 건물이 갑자기 우주로켓처럼 밤하늘을 향해 불꽃을 내면서 발사된다. 이 알 수 없는 초현실주의적인 장면들. 혹은 마술적 리얼리즘이라고 부르고 싶은 비루한 현실 속의 낯선 현상들. 어쩌면 마음속의 신기한 풍경.

“싼샤에는 매일 많은 배와 사람들이 오가고 있습니다. 그걸 옥상에서 보고 있으면 내가 마치 무협소설에서 나오는 강호에 와 있는 것 같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말하자면 <삼협호인>은 내게 일종의 무협영화입니다. 그들은 마음속에 칼을 하나씩 안고 다니는 것입니다. 그들은 복수를 하기 위해서 이곳에 온 것이 아니라 그들 자신의 감정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싼샤에 온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영화는 중국의 전통문화와 맞닿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느낌을 따라가면서 이야기가 점점 다른 쪽으로 가고 있었습니다. 나는 마지막에 다시 중국의 일상으로 돌아왔습니다. 그 이전에는 이미 주어진 삶을 따라야 했지만 지금 중국은 자기가 결정을 해야 합니다. 그건 자기의 삶의 어느 순간을 칼로 내려치는 것입니다. 내가 말하는 무협소설은 그런 의미에서입니다. 그렇게 주인공들은 자신의 삶을 스스로 결정해야 합니다. 이것은 중국의 새로운 삶입니다. <삼협호인>에서 싼샤에 도착하자마자 주인공이 마주치는 마술 쇼는 중국의 일상입니다. 모든 것이 미국 달러로 바뀌는 마술 같은 상황. 그 안에서 살아가는 인민들. 지금 중국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마음을 사실주의적으로 찍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왜냐하면 이 마술적인 상황의 사실주의란 초현실주의적인 방법을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그건 현대 중국의 생활방식 때문입니다. 그걸 정확하게는 초현실주의가 아니라 사실주의의 ‘후-현대화’(postmodernization)라고 말해야 할 것이다. 나는 여기서 일부러 두 사람을 같은 모습으로 찍어서 연결시켰습니다. 두 사람이 같은 모습으로 보이는데, UFO가 지나갈 때 한 사람은 보고 다른 사람은 보지 못합니다. 그때 그들은 세상에 대해서 철저하게 혼자인 것입니다. 혼자일 때조차 그들이 느끼는 혼자라는 외로움은 혼자 안의 혼자인 것입니다. 물론 UFO라는 설정이 가능했던 것은 여기가 싼샤이기 때문입니다. 싼샤는 기후가 이상합니다. 맑은 날씨에 비가 오고 갑자기 구름이 몰려옵니다. 그걸 보고 있으면 상당히 신비롭다는 생각을 불러일으킵니다. 그러다가 문득 저기 UFO라도 날아가는 것이 아닐까, 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삼협호인>에서 UFO는 특별한 상징적 의미가 아닙니다. 나는 어떤 이미지가 상징적인 의미를 갖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내 영화에서 상징적인 장면이란 없습니다. 그건 감정입니다. 그건 말 그대로의 고독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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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역 김필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