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9회 칸영화제가 5월28일 막을 내렸다. 개막작 <다빈치 코드>로 불길하게 시작했던 칸영화제는 유럽의 거장인 페드로 알모도바르와 켄 로치, 아키 카우리스마키, 난니 모레티의 영화를 중반 이전에 공개하고도 약세를 만회하지 못했다. 고른 호평을 받았던 켄 로치의 <보리를 흔드는 바람>가 황금종려상을 수상했지만, 많은 이들이 그럴 바엔 켄 로치의 이전 영화들이 황금종려상을 받았어야 했다고 불평하고 있다. 눈에 띄는 걸작이 없는 가운데 최대한 공감을 얻으려 애쓴 것처럼 보이는 칸영화제를 되돌아보고, 수상은 하지 못했지만 칸영화제의 취향을 넓혀주었다고 할 만한 수작 세편을 소개한다. 어둡고 아름다운 지하 미궁을 창조한 판타지영화 <판의 미로>와 마리 앙투아네트를 역사적인 맥락에서 떼어놓고 탐구하여 찬반 격론에 휩싸인 <마리 앙투아네트>, 정치영화의 선동성과 탈옥영화의 긴장감을 함께 지닌 <부에노스아이레스 1977>이 그것이다. 축제는 끝났어도 영화는 남아 있다.
수상결과
황금종려상 <보리를 흔드는 바람>(켄 로치) 최우수상 <플랑드르>(브루노 뒤몽) 감독상 알레한드로 곤잘레스 이냐리투(<바벨>) 남우주연상 자멜 디부즈, 새미 나세리, 로슈디 부아질라, 베르나르 블랑칸(<토착민들>) 여우주연상 페넬로페 크루즈, 카르만 마우라, 롤라 두에나스, 블랑카 포르티요, 요하나 코보, 추스 람프레아브(<볼베>) 각본상 페드로 알모도바르(<볼베>) 심사위원상 <붉은 길>(안드레아 아놀드) 황금카메라상 <있나 없나?> 코르넬리우 포름보이우
이보다 더 안전한 선택이 있을까. 5월28일 폐막한 제59회 칸영화제는 가장 예측 가능한 방식으로 상을 분배했다. 칸 경쟁부문을 여덟 번째 찾은 켄 로치의 <보리를 흔드는 바람>에 황금종려를 안겼고, 브루노 뒤몽의 <플랑드르>에 심사위원 대상을, 알레한드로 곤잘레스 이냐리투의 <바벨>에 감독상을, <볼베>의 페드로 알모도바르에 각본상을 안겼다. <볼베>에 출연한 여배우들의 연기가 좋긴 했지만 그중 몇몇이 더 돋보였음에도 불구하고 페넬로페 크루즈, 카르만 마우라, 롤라 두에나스, 블랑카 포르티요, 요하나 코보, 추스 람프레아브 모두에게 여우주연상을 공동 수상했으며 남우주연상 역시 <토착민들>의 다섯 남자배우들에게 공동으로 돌아갔다. 남녀주연상을 무더기 공동시상한 데 대해 <리베라시옹>은 “여자들과 외국 이민자 후세들을 위한 보상이냐”, “심사위원들이 너무 게으른 게 아니냐”라고 빈정거리며 탐탁지 않은 시선을 보냈는데, 뿐만 아니라 “뒤몽은 존경받았고, 알모도바르는 평가절하되었으며, 빛바래고 불만족스런 수상자 명단의 최고 연장자인 영국인은 월계관을 받았다”는 헤드라인으로 수상결과를 차갑게 일갈했다. 결국 이번 칸영화제는 수상 결과에서조차 큰 놀라움을 안기지 못한 채 막을 내렸다.
“올해가 최악, 걸작 없었다”
“칸영화제에 대한 기억을 아무리 되짚어 올라가봐도, 올해가 최악이었다.” 한편의 영화에 두개의 상을 안기는 경우는 둘 중 하나가 연기상일 때에 국한한다는 칸영화제의 규정에도 불구하고 <엘리펀트> <우작> <야만족의 침략> 세편의 영화에 두개씩 상을 몰아주었던 2003년에 이미 칸영화제는 ‘흉작’으로 기억되었지만, 그 일은 올해로 잊혀질 것이 분명하다. “일단, 올 칸에는 걸작이 전혀 없었다. 언제나 걸작이 있었다는 뜻은 아니지만 그래도 미래의 걸작이 될 영화를 한두편은 볼 수 있었는데”라고 운을 뗀 <버라이어티>의 싸늘한 칸 결산 기사에 이의를 달기가 힘든 것이 사실이다. 칸영화제 수상결과에 대한 불만은 상을 받아서는 안 될 영화들이 받았다는 데 있는 게 아니다. 문제는 일곱번이나 들러리를 서야 했던 켄 로치 감독에게 황금종려상을 주어야 마땅한 영화는 <보리를 흔드는 바람> 이전에 이미 있었다는 것, 알모도바르에게 노른자위를 뺀 상들만 두루뭉술하게 건넸다는 것이다.
주요 수상작들인 켄 로치의 <보리를 흔드는 바람>, 브루노 뒤몽의 <플랑드르>, 라시드 부샤렙의 <토착민들>은 각각의 방식으로 전쟁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부샤렙과 로치의 영화들이 역사를 결말짓는 두편의 프레스코화와 같았다면 뒤몽의 영화는 명상적인, 전쟁에 관한 전쟁영화였다. 단 네편의 영화를 만든 뒤몽은 데뷔작인 <예수의 삶>이 97년 황금카메라상을, <휴머니티>가 99년 최우수상과 남녀주연상을 받은 데 이어 이번에 최우수상을 다시 수상함으로써 칸이 사랑하는 감독으로 확고히 자리매김했다. 폐막식이 끝난 뒤 있었던 기자회견에서 심사위원장인 왕가위는 <보리를 흔드는 바람>가 만장일치의 결정이었음을 밝혔다. 켄 로치는 “많은 영화들이 팝콘을 즐기기 위해서가 아니라 진지하고 정치적인 주제를 다루기 위해 만들어진다는 사실은 흥분되는 일이다”라고 수상 소감을 밝혔다. 여우주연상을 공동수상한 페넬로페 크루즈는 “페드로 알모도바르가 여배우들뿐 아니라 모든 곳에 있는 여성들을 위해 한 일에 감사한다”며 기쁨을 감추지 않았다.
조용한 칸, 불운한 칸
변론조차 불가능할 정도의 영화들과 상영 중단이라는 최악의 상영사고, 발견이라고 할 수 있는 영화들 속 예년보다 15%도 넘게 관객이 증가한 감독주간 부문에 관한 논평에서 <버라이어티>는 다시 한번 봉준호의 <괴물>을 언급하면서 “공포물로서, 그리고 만듦새에서 <죠스>와 <에일리언>에 비교될 만한 놀라움과 완성도를 보여주었다”고 치켜세우는 것을 잊지 않았다. 주목할 만한 부문 시선상을 받은 왕차오의 <럭셔리 카>는 평단의 이견이 엇갈리는 상황에서 유일하게 수상작 명단에 이름을 올린 아시아영화로 기록되었다. 온라인 매체의 증가로 기자 아이디 신청 건수가 20%나 늘었다는 보도가 있었지만 올 칸영화제는 그 어느 때보다 조용한 해였다는 분석도 이어지고 있다. 관중이 줄어들었고, 영화에 대한 환호나 논란 역시 적었으며, 마이클 무어나 라스 폰 트리에서처럼 영화 안팎으로 소란을 일으킨 감독도 없었다. 영화제 초반에 칸 마켓을 침체시킨 주범으로 거듭 지목받은, 딱한 리처드 켈리의 <사우스랜드 이야기>가 재편집될 것이라는 루머만이 폐막식을 앞둔 크루아제트에 조용히 퍼졌을 뿐이다.
2006년의 칸은 그저 불운했을는지도 모른다. 예측대로 데이비드 린치와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 우디 앨런, 스티븐 소더버그, 모흐센 마흐말바프, 브라이언 드 팔마가 칸을 찾았다면 어땠을까. 영화의 완성시기에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는 영화제의 풍향계가 예측 불가한 영화의 완성시기와 완성도 문제를 비켜갈 방법은 재능있는 신인의 발굴뿐이라는 사실은, 60돌을 한해 남겨둔 칸영화제에 커다란 숙제로 남을 것이다. 개막작 <다빈치 코드>를 포함해 미국 블록버스터영화를 비경쟁 부문에 대거 불러모은 것이 영화제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가 역시 칸영화제가 숙고해야 할 문제다. “제59회 칸영화제는 영화제 열람에 올라서도 안 되며, 칸은 지금부터 비아그라, 멜라토닌, 당근 주스, 인삼을 투여받아야 한다”는 <리베라시옹>의 전무후무할 처방전을 받은 칸영화제의 앞으로 1년은 가혹하고도 긴 시간이 될 것이다.
감독상 수상작 <바벨>
마음의 경계, 몸의 언어로 소통한다
신은 하늘까지 닿는 바벨탑을 세우는 인간들에게 분노해 그들이 서로 다른 언어를 쓰도록 만들었다. 바벨은 분쟁의 씨앗이 되었던 셈이지만 <아모레스 페로스> <21그램>의 알레한드로 곤잘레스 이냐리투는 그 단어를 희망으로 사용했다. “창세기를 떠올리자 바벨이 이 영화의 메타포가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모두 다른 언어를 가지고 있지만 영혼의 중심을 공유하고 있다고 믿는다.” 그처럼 아시아와 아프리카, 아메리카에 흩어져 있는 <바벨>의 인물들은 고통스러운 단절을 거쳐 소통의 단서를 건져올린다.
모로코 사막에서 양을 치던 소년들이 장난으로 멀리서 달리고 있던 버스를 향해 라이플을 발사한다. 그 총알은 버스 안에 있던 미국인 관광객 수잔(케이트 블란쳇)에게 맞는다. 수잔과 남편 리처드(브래드 피트)는 시골마을에 고립된 채 앰뷸런스를 기다리지만 그 기다림은 무한처럼 지속된다. 라이플의 원래 주인(야쿠쇼 고지)은 아내가 죽은 뒤로 마음을 닫은 딸과 문제를 겪고 있다. 농아인 치에코는 아버지를 찾아온 경찰에 관심을 갖는다. 수잔과 리처드의 멕시코인 가정부 아멜리아는 아들의 결혼식에 참석해야 한다. 베이비시터가 오지 못하자 아멜리아는 아이들을 데리고 멕시코 국경을 넘는다.
이냐리투는 세개의 대륙을 오가며 지리적인 국경이 아닌, 마음이 갈라놓은 경계에 주목했다. 리처드와 수잔은 같은 버스 안에서도 냉랭하고, 아멜리아는 백인 아이와 있다는 이유로 경찰에 의심받고, 몸으로 소통해야만 하는 치에코는 이해받지 못한다. 그럼에도 이들은 결국 상대의 목소리를 알아듣게 된다. 이냐리투는 “몸의 언어야말로 진정한 커뮤니케이션이고 희망이다. 그것은 가장 인간적인 대화의 방법”이라고 말했다. 스페인어와 영어와 일본어와 수화를 쓰지만, 사람들은 서로의 어깨를 안아주며 언어의 본질에 다가가는 것이다.
남우주연상 수상작 <토착민들>
공적을 빼앗긴 승자에 대한 기록
역사는 패자를 기억하지 않는다고 한다. 그러나 승자라고 하여 반드시 역사에 기억되는 것은 아니다. 제2차 세계대전 때 프랑스의 해방에 결정적인 공헌을 했던 북아프리카 식민지 군대는, 가장 위험한 전투에 투입되었기에 부상자와 사망자가 프랑스 군대보다 많았지만, 역사에서 사라져버렸다. <토착민들>은 백인 연합군에 공적을 빼앗긴 그 군대의 기록을 복원하는 영화다. 알제리계 프랑스 감독인 라시드 부샤렙은 1943년 알자스 지방에서 복무했던 식민지 군인들을 만나고 자료를 조사해 이 영화의 시나리오를 썼다. 그리고 코미디언으로 유명한 자멜 드부즈와 <택시>의 주연이었던 사미 나세리 등 알제리계 배우들은 제작비를 투자받기 위해 적극적으로 나섰다고 한다.
한쪽 팔을 못 쓰는 알제리 청년 사이드는 조국 프랑스를 해방하자는 구호에 고무되어 자원입대한다. 그와 같은 부대에 있는 상병 압델카데르는 알제리인도 노력만 하면 장교가 될 수 있다고 주장하지만, 성격이 불같은 야시르는 그 말을 믿지 않는다. 그들이 프랑스의 해방 지역에 들어서던 날 메사우드는 아름다운 프랑스 여인을 만나 사랑에 빠진다. 이 군대를 이끄는 하사관 마르티네즈는 어머니가 북아프리카 출신이라는 사실을 아무도 모르게 숨기고 있다.
식민지 군대의 자취를 따라 노르망디와 얼어붙은 동부전선을 떠돌던 <토착민들>은 알자스에서 벌어진 참혹한 전투를 보여준다. 압델카데르는 돌아가고 싶어하는 사병들의 소원과 수적으로 불리한 열세를 무시하고 알자스로의 행군을 강행한다. 공로를 인정받을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섯명의 군인이 목숨을 걸고 지켰던 마을에서, 프랑스 국기를 꽂고 사진을 찍는 이들은, 뒤늦게 들어온 프랑스 군인들이다. 압델카데르는 헛된 꿈을 꾸었던 것이다. 부샤렙은 영화 마지막 장면에 프랑스는 아직도 알제리 군인들에 대한 보상금 지급을 거부하고 있다는 자막을 덧붙여 그들의 전쟁이 아직도 계속되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