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세계가 경악한 120일간의 감금실화!
자유를 향한 그들의 외침!!지금부터, 그들의 비상이 시작된다.
인간임을 잊었던 120일간,
1977년, 부에노스 아이레스. B리그 축구 팀의 골키퍼인 클라우디오는 영문도 모른 채 납치된다. 부에노스 아이레스 교외의 을씨년스러운 집, ’아틸라’에 감금당한 클라우디오는 심문과 구타, 굴욕과 배신이 난무하는 살아있는 지옥에서의 생활을 시작하게 된다. 제멋대로 광적인 규칙들을 종해놓고 정신적, 육체적으로 잔인한 폭력을 가하는 악몽 같은 세상. 그 상상을 뛰어넘는 고통이 존재하는 곳에서 클라우디오와 그의 친구들은 생존을 위한 조용하지만 격렬한 투쟁을 시작한다.
단 한번의 기회!
감금된 지 4개월(약 120일), 사형 선고가 확실해 보이자, 클라우디오와 3명의 친구들은 목숨을 건 탈출을 시도하기에 이른다. 폭풍우가 몰아 치던 어느 날 밤, 창문을 열고, 옷을 홀딱 벗은 채, 텅 빈 공간 속으로 뛰어 내린 네 명의 청년들... 지금부터 그들의 자유를 향한 거침없는 이야기가 펼쳐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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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상황! 충격실화!!
1977년 부에노스 아이레스의 여름은 실로 끔찍했고 끝이 없을 것만 같았다고 한다. 실제 주인공, 클라우디오 템부리니와 기예르모 페르난데스 공동원작의 자서전을 바탕으로 연출된 <부에노스 아이레스 1977>은 전세계적으로 놀라운 파장을 일으켰다. 사실감 넘치는 충격적 영상과 실화에 바탕을 둔 4명의 탈출은 1977년 당시에도 굉장한 사회적 이슈로 논란을 일으켰지만 30년이 지난 지금에도 여전히 화제가 되고 있다. 칸 영화제에 출품된 후, <부에노스 아이레스 1977>의 감독과 스텝들은 아르헨티나의 대통령에게 불려가 몇 시간 동안이나 경고와 원망의 소리를 들어야 했다고...
* 이야기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스토리 외에, 가장 끌렸던 부분은 수갑을 찬 4 명의 청년들이 홀딱 벗은 채로 사나운 폭풍우가 몰아치는 날 새벽에 평생을 좌지우지 할지도 모르는 생 지옥 같은 곳에서 탈출하기 위해 뛰어가고 있는 이미지였습니다.”
영화의 필수적 요소는 바로 거기에 있다. 완전하게 나체인 4명의 젊은이들이 상처 입고, 공포에 질린 채 폭우를 맞아 가며, 목적지도 모른 체 정처 없이 달려가는 것. 이 장면으로 영화를 시작했고 탈출장면은 이스라엘 아드리안 캐타노 감독이 받았던 치욕스러운 감동이 관객들에게 그대로 전달되도록 하기 위해 그들이 수감되었던 지옥과 같은 곳을 다시 재현해 놓아야만 했다.
이스라엘 아드리안 캐타노 감독의
세 번째 칸 영화제 초청 상영작
이스라엘 캐타노 감독의 첫 장편영화, <볼리비아(Bolivia)>(2001) 이 후 그는 ‘2000년대 아르헨티나의 가장 주목 받는 감독’ 그리고 ‘인권 이야기를 적나라하게 펼치는 감독’으로 평가 받고 있다.
<볼리비아(Bolivia)>(2001)
볼리비아에서 부에노스 아이레스로 이주한 청년, ‘프레디’의 이야기를 담은 영화, <볼리비아>는 외국인 노동자로써 받는 멸시의 시선을 참으며 힘든 일을 하지만, 가족을 아르헨티나로 데려올 꿈에 젖은 프레디의 눈물 어린 생활기를 보여준다. 영화는 75분의 작은 아르헨티나 영화였지만 2001년 칸 영화제에 애초에는 초청작 중 한 편으로 상영되기로 했으나 뜻밖에 ‘젊은 비평가상’을 수상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붉은 곰(A Red Bear)>(2002)
사랑하는 가족과 어쩔 수 없이 헤어진 채 억울한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힌 한 중년 남자의 눈물 어린 가족 상봉기를 다룬 두 번째 장편 작 <붉은 곰>은 상업적으로도 인정받은 이스라엘 아드리안 캐타노 감독의 작품이다. 역시, 2002년 칸 영화제의 감독주간 상영부문에서 소개된 바 있다.
<부에노스 아이레스 1977>
물론 이전에도 몇 편의 TV시리즈와 단편영화들을 연출한 바 있지만, 단독으로는 총 3편의 영화를 연출했고, 3편의 영화 모두 칸 영화제를 비롯한 세계적인 영화제에서 인정받은 이스라엘 아드리안 캐타노 감독. 이미 초창기 2편의 영화가 기대이상의 성공적인 평가를 받았고, 최신작 <부에노스 아이레스 1977>로 드디어 제 59회 칸 영화제 장편영화 경쟁부문에 초청되기에 이른다. 이제는 ‘아르헨티나 영화의 빛’과 같은 존재가 되어버린 캐타노 감독의 매력을 <부에노스 아이레스 1977>로 확인할 수 있다.
배우들의 연기 투혼
‘연기를 위해 몸바쳤다!!’
벌거벗은 연기를 위해서 살을 찌우고 빼기를 무리하게 했던 4명의 남자주인공. 영화의 시작에는 젊고 활발한 청년의 인상을 심어주기 위해 살을 찌웠고, 영화의 촬영이 진행도리 수록 살을 무리하게 빼서 뼈대만 앙상하게 남은 불쌍한 몰골을 가진 젊은이가 되기도 했다. 배역에 충실하기 위해 부단한 노력은 영화의 시작부분과 마지막 부분에 고스란히 나타나는데,, 이토록 살을 찌우고 빼기를 반복한 이유는 벌거벗고 고문을 당하고 벌거벗은 채로 길거리를 뛰어다녀야 하는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야 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나의 연기인생 중, 가장 강렬한 작업이었다!!” 라고 거침없이 말하는 배우들에게 박수를!!!
악마의 영혼이 드리운 거대한 저택 – ‘아틸라’
약 1만에서 3만 여명(정확히 몇 명인지 확인이 불가능 하다)의 아르헨티나 청년들이 끌려간 곳은 ‘아틸라’라고 불리우는 거대한 세레 저택. 마치 악마의 영혼이 드리운 듯 스산하다. 현실감 있는 영화를 위해 ‘아틸라’를 찾아 헤매던 제작자와 감독은 최대한 실제 아틸라에 가까운 느낌을 자아내기 위해 가장 많은 노력과 고민을 기울였고, 끝내는 ‘아틸라’를 만들기로 결심했다.
“가장 어려웠던 점은 그 집을 발견하는 것이었죠. 모든 면에서 사실과 일치하고, 영화적 필수 조건과 역사적인 사실성을 똑같이 충족시켜 줄 수 있도록 우리가 만든 그 집 말입니다. 우리가 5주 동안 촬영한 이 집을 관객들이 실제처럼 믿게 하기 위해 미술 감독과 무대 디자이너들이 정말 엄청나게 공을 들였습니다. 실제 아틸라와 매우 흡사한 집에서 촬영하는 것은 배우들에게도 또한 매우 중요했습니다. 리허설과 촬영이 진행되는 동안 각자 배우들이 자신의 캐릭터에 몰입할 수 있는 이상적인 배경을 제공하는 것 말입니다.”
“<부에노스 아이레스 1977>을 제작하는 데에 끊임없는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전적으로 사방이 막힌 공간에서 촬영하면서, 배우들의 연기과 공간의 구조, 조명으로부터 나온 결과를 신뢰하는 것 말입니다. 이 감옥으로부터 두려움, 심한 불안감, 노이로제 등을 만들어 내는 것이 쉬운 일만은 아니었죠.”
오늘도 누군가를 납치한 그들의 암호가 들려온다. “아틸라 나와라! 새장에 새를 잡았다, 둥지로 돌아간다..”
Special Tip
NEVER AGAIN
(역사적 배경)
1976년 3월 24일, 구테타를 일으킨 군대가 남편이 죽은 후, 공화국의 대통령을 역임했던 이사벨 페론의 정부를 폐지시켰다. 국가적인 제도의 재확립(National Reorganization Process)라는 이름 아래, 국가적 안보주의 정책에 입각하여 에밀리오 마세라, 올란도 아고스티, 호르게 라파엘 비델라가 통치하는 법령-군인 정부는 엄격한 군대식으로 아르헨티나의 문제점들을 제거하기로 결정을 내린다. 모든 국가적 권한들은 무효화되고, 의회와 지역 의회도 즉석에서 해산된다.
‘모든 민주주의적 자유가 억압된다’는 것은 곧, 정치적 정당 활동이 비합법적이 되고, 언론은 가혹한 검열을 받아야만 한다는 의미를 내포한다. 의회의 멤버들은 그들의 의무에서 해방되고, 대법원의 멤버들 역시 해산되었다. 그리고 이 모든 주요 국가석상에 군 정부의 신임 받는 사람들을 배치했다.
‘사라진’이라는 용어는 집과 일터에서 사로잡힌 국민들을 의미하기 위해 사용된다. 납치가 당연하다는 듯이 체포를 하고, 사라지는 사람들의 숫자는 엄청나게 커졌다. 1만 명에서 3만 여명에 이르는 사람들이 1973년에서 1983년까지 정확히 10년 동안 사라졌는데, 수 백 명의 비밀 감옥에서 태어난 아기들과 아이들은 여기에 포함하지 않은 숫자이다. 이 아이들은 부모 곁을 떠나 군대나 그들의 친척들에게 가명으로 입양되었다. 이 아이들의 대다수는 그들의 가족을 아직도 찾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1982년 4월 2일, 군 정부는 대서양 남부에 위치한 포크 랜드 섬(영국 통치령)을 점령한다. 승리는 군이 잃어버렸던 특권을 다시 잡고, 권력을 유지할 수 있도록 했다. 하지만, 영국 정부의 대응이 신속했고 때문에 아르헨티나는 수 백 명의 사상자를 내고 2달 후에 항복하고 만다. 이 패배는 군 정부의 몰락의 시작을 알리는 것이고, 1983년 10월 30일, 급기야 투표를 감행하도록 강요당한다. 급진파 당원인 라울 알폰신이 투표의 52% 지지를 받으면서 대통령에 당선되고 1983년 12월, 6년간의 대통령으로서의 임기가 시작된다.
독재 정부 시절 인권 유린에 대한 조사 위원회는 1985년 “Never Again”이라는 타이틀이 분명하게 주어진 보고서를 통해 국민들에게 공개된다. 사회는 군에 의해 저질러진 몸서리치는 범죄들을 알고 공포에 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 많은 재판 후에 죄인들은 집행되지 않는다. 1986년 군 정부 후에도 여전히 군으로부터의 압력이 여전히 존재하고 있고, Full Stop이라는 법은 군에 대항하는 절차들을 중지시킨다. 그리고, 1988년 6월, 민간인 진압에 모든 책임이 있는 죄수들을 사면시킨다. 1989년 11월, 메넴 대통령은 전반적인 사면을 선포한다. “Mothers of the May Square”(5월의 광장 어머니들)의 저항에 귀 기울이지 않는다.
네스토 키르츠네르가 대통령이 되고 난 후에 군 정부의 죄인들을 보호하던 악법이 폐지되고, 죄인들은 실형을 선고 받는다. 쿠데타 28주년을 기리기 위해, 네스토 대통령은 군 독재 시절 끔찍한 짓을 저지른 장본인인 육군 사관 학교를 방문해, 공포스러운 군 정부 시절 첫 번째 대통령과 마지막 대통령의 초상화를 내리라고 총 사령관에게 명령한다.
부에노스 아이레스 ‘5월 광장’의 어머니들은 지금도 여전히 머리에 하얀 띠를 두르고 구호를 외친다.
“잊지도 않을 것이며 용서하지도 않을 것이다.”
이스라엘 아드리안 캐타노 (감독)와의 인터뷰
Q:<부에노스 아이레스 1977>은 어떤 영화 인가요?
부에노스 아이레스 1977은 공포를 설명해 주고 있지만, 공포를 유발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극단적인 상황에 처한 수감자들 사이의 관계에 대한 이해를 돕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 영화는 70년대 아르헨티나의 군 독재 정부 시절 지옥 같은 불법적인 구금 장소에 갇힌 수감자들의 이야기입니다.
Q:어떤 계기로 이런 ‘조금은 위험한’ 소재의 영화를 만들 발상을 하셨나요?
초기 군 독재 정부 때 저는 어린 아이였습니다. 그래서 군인들과 그 때 당시 대통령들에 의해 단속된 군에서 쓴 책들을 가지고 있었죠. 군 독재 정부가 자리를 잡아 가는 동시대에 살고 있었습니다. 오늘날, 세월이 흐른 후에, 제 안에 뿐만 아니라, 저와 같은 세대 사람들 안에 어느 정도 그 것이 뿌리를 내리고 있는지 알고 있죠. 굉장히 많은 영향을 받았습니다. 이 나라에는 여전히 수 많은 과거의 산물들이 현존하고 있습니다.
내내 두 명의 각본가, 에스테반 스튜덴트, 훌리앙 요욜라와 함께 클라우디오 탬부리니의 자서전, [Pase libre - la fuga de la Mansion Sere]을 원작으로 한 각본을 써내려 갔죠. 우리가 이미 알고, 듣고, 본 적은 있지만, 직접적으로 밀접하게나 또는 멀리서라도 고문을 경험한 적이 없는 입장에서 스토리에 접근해 나갔습니다.
Q:어떻게 자료를 수집하고 이야기를 발전시킬 수 있었나요?
오로지 재구성과 조사를 통해서 스토리의 주제를 알고 있는 누군가가 들려 주는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스톡홀롬에 있는 클라우디오 탬부리니 집을 방문했습니다. 그리고 세레 맨션(아틸라)을 탈출한 4명의 수감자 중 한 명인 기예르모 페르난데스의 협력도 받을 수 있었죠. 이러한 만남은 극본을 쓰는데 아주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습니다.
Q:어떤 이야기에 특히 중점을 두고 영화를 연출하셨는지?
원작의 내용에 충실하고 싶었습니다. ‘생존’ 말입니다. 공포 영화처럼 소름 끼치는 무서움 속에서 살아 남은 사람들의 스토리 말입니다. 가장 매력을 느꼈던 부분은 그런 지옥 같은 곳에서 탈출한 생존자들의 이야기라는 것입니다. 적어도 제가 아는 한, 군 독재 정부에 대해 자세히 묘사할 필요는 없었지만, 간단한 뼈대를 만들어 그 안에서 주인공들의 탈출의 의미와 원동력을 관객들이 이해할 수 있을 정도는 되어야 했죠.
Q:영화의 비주얼이 거칠고 사실감 있는데요, 특별히 신경을 쓰신 부분이 있나요?
가장 미적인 결정을 하는데 가장 우선 적이었던 부분은 강렬하지 않은 색조를 가지고, 높은 대조적 이미지를 보여 주는 것이었습니다. 끝까지 우리는 “bleach 접근법” 기술(촬영하는 동안 bleaching을 피하는 과정)을 통해 이미지가 불분명한 짙은 흑 빛을 띠고, 다듬어 지지 않은 질감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나서, 손에 들고 사용하는 카메라(핸드헬드 촬영기법)로 촬영을 했는데, 이것은 사상가 들의 감정을 관객들에게 전달할 수 있도록 영화를 선명하고, 대담하게 만들어 주었습니다. 촬영 감독과 프로덕션 디자이너들과 밀접하게 작업하여 톤과 색조에 있어서 정확성을 가져다 주었고, 그 환경을 재창조하고, 우리가 추구하는 것을 표현하는데 있어서 훨씬 효과적이었습니다.
또 다른 미적인 선택은 “Split Fields”의 사용인데, 이 기법은 우리가 한 등장 인물을 클로즈업 하고, 동시에 몇 미터 떨어져 있는 또 다른 인물에 초점을 맞출 수 있도록 해줍니다. 관객들이 화면상의 모든 인물들에게 동시에 관심을 갖도록 하는 것이죠. 짧은 초점 길이를 사용하는 것은 무엇보다 ‘아틸라’에서의 처음 장면들, 탈출 하는 장면에서 배우들의 표현력을 확대시키는데 효과적이었고, 따라서, 관객들이 주인공들이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보여주는 내적인 긴장감을 느낄 수 있도록 해 주었습니다.
Q:관객이 이 영화를 어떻게 받아들이길 바라시나요?
어떤 의심도 없이, 실제 사건을 바탕으로 영화를 만드는 것은 매우 특별하죠. 무엇보다 그 때 당시 운동권이었던 사람들이 영화관에 앉아서, 관객으로서 자신들의 이야기를 관람할 거라는 사실을 알 경우에 말입니다. 그들과 그들의 가족들의 표정을 보는 것이 굉장히 만족스러웠습니다. 영화가 끝나고, 자리를 뜰 때, 막 끝난 영화를 ‘진심으로 인정한다’라는 표정 말입니다.
모든 지옥과 같은 곳들은 사실, 완전하게 상상하는 것이 불가능하고 또한 추상적인 본질은 설명하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그래서 4명의 주인공들이 우연히 만나는 것에 초점을 맞추었죠. 서로 알게 되고, 점차 그들의 캐릭터들이 들어 나면서, 그 지옥과 같은 어둠 속에서 한 줄기 빛이 보이기 시작하는 겁니다.
Q:어떻게 <부에노스 아이레스 1977>과 같은 ‘광기’를 생각해 낼 수 있었을까요?
부에노스 아이레스 1977은 부패를 보여주는 스릴러물이지만, 이 부패는 잘 구성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부패는 의심 없이 명령을 따르는 사람들로부터 생겨나는 것이죠. 이 영화는 극심한 고통이 어떻게 인간을 사라지게 만드는지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육체적으로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정신적으로 말이죠. 그리고, 어떻게 그런 광기 어린 곳에서 탈출하고자 하는 단순한 사실 자체가 미친 짓이 되는지에 초점을 맞추었습니다.
배우와 스탭
감독
출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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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라우디오 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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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고 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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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예르모 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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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예고 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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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스코 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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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본
이스라엘 아드리안 캐타노
에스테반 스튜던트
줄리안 로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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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작
K&S 프로덕션
20세기폭스 아르헨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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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급
유레카 픽쳐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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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입
유레카 픽쳐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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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식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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