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의 온도를 반영하지 않는 것은 없다. 우리가 생각하고 만드는 것은 저절로 영화속에 반영된다. 어떤 예술이건간에 지금 세상의 감각과 온기를 그대로 지니게 된다. 우리 모두는 세상에 대해 책임감이 있다. 모든 영화는 정치적이다.” 올해 베를린 영화제는 기자회견장에서 갈채를 받아낸 로버트 알트먼의 잠언을 그대로 실천하고 있는듯 하다. 심지어 <버라이어티>로부터 <S 포 쏘리>(S for Sorry)라는 야유를 받는 등 악평에 시달린 <V 포 벤데타>마저도 어떤 면에서는 ‘급진적인 블록버스터’라고 일컬을 수 있을만한 작품이었다. 물론 이 영화를 초청한 집행위의 마음 한구석에는 두가지 생각이 있었을 테지만. 첫째, 나탈리 포트먼을 레드 카펫에 세우고 말겠다는 집념. 둘째, 지하철을 이용해 런던 국회의사당을 폭파시키는 해피엔딩의 블록버스터라면 영화의 질에 관계없이 욕도 덜 듣고 영화제의 체면치례도 할 것이라는 욕심.
<관타나모로 가는 길>(영국)
3년전 <인 디스 월드>로 황금곰상을 받아냈던 마이클 윈터바텀은 또다시 피와 폭약냄새 가득한 소년들의 실재 기행문을 들고 베를린을 찾았다. 5명의 무슬림 영국 소년들이 친구의 결혼을 위해 파키스탄으로 여행을 간다. 세상에 대해 무지한 전형적인 영국 청소년들은 그저 어떤 동네인지 보고 싶다는 이유로 미군의 폭격 경고에도 불구하고 아프가니스탄으로 향한다. 여행은 곧 지옥이 된다. 폭탄은 3명을 제외한 소년들의 사지를 찢어발기고, 탈레반군들 사이에서 살아남은 생존자들은 미군의 포로가 되어 쿠바의 관타나모 기지에 수용된다. 그들은 2년이 넘도록 알카에다라는 거짓자백을 받아내려는 미군의 짐승같은 학대를 견뎌낸 후에야 석방된다. 영화는 사실을 재현한 극영화 중간중간에 실재 인물들의 인터뷰를 삽입하며 관객을 더러운 인권유린의 현장으로 데려간다. <관타나모로 가는 길>의 훌륭한 점은 정치영화로서의 강렬함 뿐만 아니라 다큐멘타리와 허구를 뒤섞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 무엇인지를 모범적으로 보여준다는 사실이다. 대부분의 기자와 비평가들은 다시 한번 이슈를 영화제에 공급한 윈터바텀이 또 하나의 황금곰을 서재에 추가하리라 기대하고 있는 중. 다만 <타게스슈피겔>은 “영화가 제공할 수 있는 모든 형식을 멋지게 섞어내며, 영상을 통해 분노하게 만들고 생각하지 않는 다른 감독들을 흔들어 깨우는 작품”이라고 호평을 보내면서도 적극적으로 옹호할 수만은 없다는 입장이다. “윈터바텀의 미학적 수단들은 너무나 관객에게 직접적이기 때문에 프로파간다의 작용을 한다.” 하지만 <관타나모로 가는 길>이 주는 메세지가 변태적인 폭력에 시달리는 지금 세상에 무엇보다도 필요한 것이라는 사실마저 부정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시리아나>(미국)
영화제 초반에 가장 큰 호응을 얻어냈던 작품은 비경쟁부문에 출품된 스테픈 개한의 <시리아나>였다. 봅 해리스는 중동에서 CIA의 밀정을 펼치는 암살전문 CIA 에이전트. 그가 중동을 헤메고 다니는 동안 야심으로 가득한 변호사 베넷이 부패한 석유회사들의 대형합병을 조사하고, 유럽에서는 에너지 분석가인 바이런 우드가 석유 국가의 왕자에게 고용된다. 한편 오일필드(한국말로 고쳐주세요. 생각이 안나요)에서는 파키스탄으로부터 온 젊은이가 점점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에게 감화되기 시작한다. 감독은 마치 레이어 케익을 만들듯이 여러 인물을 중심으로 다층적 이야기를 쌓아가고, 그 속을 다시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듯 석유회사와 CIA와 산유국 사이의 탐욕스런 생태학적 공생관계의 지도를 그려낸다. 기자회견에 참석한 감독은 “예술가에게 정치적인 의무감을 요구할 수는 없다. 다만 지금은 문명이 충돌하는 시기다. 현재의 상황속으로 점프해 들어가고 싶은 욕망은 어떤 예술가에게나 있을것”이라고 말했다. 물론 그런 욕망이 가장 거대한 사람은 조연으로 인상적인 연기를 보여준 조지 클루니가 아닐까 싶다. 그는 “워터게이트 이후 처음으로 보통의 미국인들이 정치에 대해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미국인들은 매 30년마다 완전히 정신이 나가버리지만, 또 결국엔 정상으로 돌아온다. 그것이 내가 미국인임을 자랑스러워 할 수 있는 이유가 될 것이다”라고 밝혀 기자들의 박수갈채를 받았다.
<존과 제인>(인도)
아심 아흘루왈리아의 다큐멘타리 <존과 제인>은 일찌감치 포럼 부문 최고의 화제작으로 떠올랐다. 이미 토론토 영화제에서 가장 높은 관객평점을 받았던 이 작품은 봄베이의 콜센터에서 일하는 인도인 직원들의 삶을 통해 세계화의 이면을 그려낸다. <존과 제인>이 소개하는 직업은 제3세계 국가에서 미국의 고객을 상대로 통신판매를 하는 이른바 ‘아웃소싱 폰 세일즈’다. 그런데 괴이한 일이 발생하기 시작한다. 미국인 고객을 상대로 하루종일 전화를 하던 인도인 직원들이 점점 미국화 되어가고 급기야는 가상현실속의 아메리카(Virtual America)에 살기 시작한 것이다. 가장 무시무시한 순간은 카메라가 정체성에 완벽한 혼란을 겪고 있는 직원들의 일상을 비출 때다. 나오미라는 이름의 소녀는 머리를 금발로 염색한 채 “태어날 때부터 금발”이었다고 말하며 자신만의 미국에서 살아간다. <존과 제인>은 느슨하게 기록된 다큐멘타리지만 카메라가 비추이는 대상의 기괴하고 슬픈 초상으로 인해 압도적인 풍자정신을 잃지 않는다.
실망스러운 기대작들
<인비저블 웨이브즈> <소립자들> <뉴 월드>
<인비지블 웨이브즈>는 펜엑 라타나루앙의 전작인 <라스트 라이프 라스트 러브>의 세계가 어쩌면 전적으로 아사노 다다노부와 크리스퍼 도일의 몫이 아니었는지 되돌아보게 만드는 영화다. 내연 관계에 있던 두목의 아내를 죽이고 타이로 피신한 야쿠자(아사노 다다노부)의 행보를 그리는 이 작품은 탐미적인 크리스토퍼 도일의 시선에도 불구하고 전작 <라스트 라이프 라스트 러브>가 지녔던 부유하는 듯한 쓸쓸함의 공기를 되살리지 못하고 만다. 독일 언론의 기대를 모았던 오스카 뢰흘러의 <소립자들>도 실망스러운 작품. <스크린 인터내셔널>은 “각색이 불가능한 소설을 주제넘게 각색하는 시도가 얼마나 어리석인 일인지를 증명하는 작품”이라고 평하며 자체적인 별점 평가에서도 최악의 점수를 던졌다. 베를린의 탄식을 가장 깊게 자아냈던 영화는 테렌스 맬릭의 <뉴월드>였다. 맬릭의 신작은 여전히 시적인 독백과 몽환적인 화면으로 가슴을 잡아채지만 <황무지>와 <씬 레드 라인>이 자아냈던 정서적 환기에는 이르지 못한다. 비평가들은 귀환한 거장의 실망스러운 작품에 최소한의 존경을 표하기도 포기한 모양이다. <버라이어티>는 “오랜 기다림의 값어치가 없다”고 투정을 부렸고, <타게스 슈피겔>은 놀랄 정도로 혹독하게 영화를 비난했다. “멜릭은 신대륙 정복에 관한 정치적으로 풍요로운 재료를 가지고서 흥미진진한 시나리오를 쓸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는 존 스미스와 포카혼타스의 러브스토리에 완전히 빠져 괴상한 영화를 만들어냈다. 모차르트 음악에 맞추어 14살짜리 여배우의 몸을 쉴새없이 훑어내리는 것은 멕시코 고급 창녀의 모습을 비추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식민지 시대의 소프트 포르노라고 감히 말하겠다.”
여전히 굳건한 거장의 귀향
로버트 알트먼의 <프래리 홈 컴패니언>
“이것은 미국인의 유년기, 순진했던 시절로 돌아가는 영화다. 나에게 이 작품은 모든 단계의 미국적 휴머니즘을 증언하는 것과 같은 작품이다.”(메릴 스트립) 게리슨 케일러의 전설적인 동명 라디오 쇼를 소재로 한 로버트 알트먼의 37번째 장편 <프래리 홈 컴패니언>은 30년간 지속되어온 쇼가 마지막 공개방송을 벌인다는 가정하에 만들어진 영화다. 알트먼의 카메라는 수많은 인물들 사이를 분주하게 왔다갔다하며 감정의 실타래를 엮어내며, 죽음과 삶에 대한 따스한 시선을 거두지 않는다. 사실 이 작품을 <야전병원 매쉬>나 <숏컷>의 위치에 올려놓는 관객은 거의 없을 것이다. 하지만 미국인이 아니라면 완벽하게 이해하기 힘든 정서를 지닌 이 영화가 공감대를 끌어내는 데 성공했다면, 그것은 조용하게 과거를 돌아보는 노년의 거장이 보여주는 자기 성찰의 기운 덕택이다. 현재까지 공개된 <스크린 인터내셔널>의 별점도 가장 좋은 편에 속한다. 다만 황금공상의 가능성에 대해서는 “유쾌하긴 하지만 황금곰을 받아갈 만한 영화는 아니”라는 반응이 지배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