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는… 나는 긴 시간이 필요한 사랑을 시작하고 있 다!” 홍보카피의 문구 그대로 <8월의 크리스마스>는 8월에 시작해서 12 월에 끝나는 가슴시린 사랑이야기다. 죽음을 앞둔 30대 남자와 생기 넘치 는 20살 여자의 만남이 전하는 온기는 헤어짐의 슬픔보다 먼저 와서 오래 남는다. <고스트 맘마> <접속> <편지>로 이어지는 멜로영화의 새로운 전 성기는 <8월의 크리스마스>에서 정점을 맞는다. 여기엔 억지로 눈물을 짜 내기 위한 속임수가 없다. 일상의 순간순간이 과거와 현재의 접점으로 다 가올 때 빛바랜 기억은 훈훈한 정서와 여운으로 차곡차곡 쌓이고 문득 옛날사진을 들춰보고 싶은 욕망을 불러일으킨다.
영화는 전적으로 주인공 정원(한석규)의 주관적시점과 객관적시점으로 이 뤄져있다. 변두리 사진관 사진사인 그는 자신의 죽음을 예감한다. 주차단 속을 하는 여자 다림이 정원의 일상에 등장한 것도 그무렵. 그러나 둘의 사랑은 “사랑해”라는 말을 나누거나 품에 안기는 식으로 전개되지 않는 다. 정원을 “아저씨”라 부르는 다림은 그의 주변에 잠시 머물렀다 사라 지곤 한다. 팔짱을 끼고 걷는 것만으로도 쑥스러운 시간, 정원은 삶을 마 감할 준비를 시작한다. 한석규, 심은하의 아름다운 사랑이야기로 많이 알 려지긴 했지만 <8월의 크리스마스>는 예쁜 그림엽서 같은 영화가 아니며 <편지>처럼 노골적으로 눈물샘을 자극하지도 않는다. 그렇다고 <접속>의 도회적이고 현대적인 정서에 호소하는 법도 없다. 군산의 한 창고를 개조 해 만든 사진관은 낡고 허술해서 한 10년전쯤으로 돌아간 느낌을 준다. 아이들이 뛰노는 초등학교나 툇마루가 있는 정원의 집 등 <8월의 크리스 마스>의 시공간은 복고적이다. 이명세 영화에서나 볼 수 있을 법한 공간 이지만 인공적인 냄새를 내는 건 또 아니다. 죽음을 앞둔 30대 남자의 시 야에 비친 일상의 공간, 그속에 한 여자가 들어와 가끔씩 감정을 뒤흔들 곤 하는 것이다.
조금 퇴색한 듯 보이는 <8월의 크리스마스>의 시공간은 좀처럼 움직이지 않는다. “가수 김광석의 영정사진으로부터 영감을 받았다”는 허진호 감 독의 말대로 영화전체는 정사진의 이미지를 일관되게 밀어부친다. 카메라 가 움직이는 순간은 극히 제한적이며 인물을 향해 깊이 들어가지도 않는 다. 이런 객관적 거리는 총 110여개의 신에 컷수 250여개로 이뤄진 카메 라의 지속시간에 의해 더 강화된다. 대화를 할 때 일반적 어법은 둘의 표 정을 나눠서 잡는 것이지만 여기선 둘을 함께 잡는 것으로 대신한다. 가 족들의 대화장면에서도 그렇다. 오즈 야스즈로의 다다미 쇼트에 영향을 받은 듯 카메라는 툇마루 낮은 위치에서 등장인물의 모습을 물끄러미 바 라본다. 심지어 갑작스런 엠뷸런스 사이렌소리와 더불어 정원이 병원에 업혀 실려가면서 영화의 종결부를 알리는 극적인 대목에서조차, 카메라는 클로즈업 대신 담너머에서 지켜보며 감정을 절제한다. 물론 이런 관찰자 같은 시선 때문에 관객에게 불친절한 영화가 될 가능성도 있었다. 정원이 어떤 불치병에 걸렸는지, 그가 왜 옛애인을 잊지 못하는지 하는 설명적인 대목들도 과감히 생략해버렸다. 예를 들어 정원이 불치병에 걸렸다는 사 실을 암시하는 도입부의 연결은 텅빈 운동장에서 초등학교 시절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를 회상한다거나 장례식에 갔다와 지친 나머지 다림에게 퉁 명스레 대한다거나 하는 식이다. 갑자기 쓰러져 병원에 실려가고 치료를 받는 부분에서도 상황을 설명하는 장면들은 나오지 않는다. 장면만 정사 진처럼 찍은 게 아니라 연결까지 사진첩처럼 이어나갔다.
만약 일상에 관한 섬세한 묘사가 없었다면 완전히 방향을 잃었을 테지만 허진호 감독은 여기서 신인감독이 흔히 범하는 오류를 피해간다. 정원이 아버지에게 비디오 켜는 법을 가르쳐주는 대목, 정원은 “전원을 켜고 이 렇게 채널 4번을 누르시면 되요”라고 반복해서 얘기하지만 늙으신 아버 지는 그걸 제대로 해내지 못하고 몇번씩 되풀이해 가르치던 정원은 벌컥 화를 내고 만다. 그리고 자신이 죽은 다음 혼자 남을 아버지를 위해 비디 오 작동법, 현상기 작동법 같은 것을 메모로 남긴다. 울음소리를 막으려 이불을 뒤집어쓴 채 소리죽여 흐느끼는 아들의 방 밖에서 들어가려다 망 설이는 아버지의 그림자를 잡은 장면의 울림도 그런 것. 남녀가 등장해 사랑을 나눌 때 흔히 볼 수 있는 떠들썩함 같은 것도 그래서 찾아볼 수 없다. 정원과 다림의 ‘좋았던 한때’는 낙엽쌓인 밤길을 걷는 대목과 다 림이 친구에게 정원이 들려준 얘기를 전할 때 나직하지만 여운이 긴 파장 을 전한다. 말하자면 감독은 일상의 소중함을 잡아내는 방법을 아는 것이 다. 참으로 소중한 미덕이지만 장르영화의 유행에 밀려 자리를 내줬던 일 상의 리얼리즘이 복권되는 순간이며 배창호나 이명세 이후로는 맥이 끊기 다시피한 멜로물의 감수성을 잇는 시도. 죽음이라는 소재의 무게를 버텨 낼 수 있던 것도 이런 시선 덕분일 게다.
<비트> <모텔 선인장> 등을 제작한 우노필름이 만들고 일신창투에서 총제 작비 16억5천만원을 투자해 배급하는 <8월의 크리스마스>는 상업영화의 감성과 예술영화적 어법이 만나는 보기드문 조화를 보여준다. 물론 한석 규, 심은하가 아니라면 애당초 불가능했을지도 모른다. 한석규의 선한 인 상과 심은하의 청순한 매력은 전에 없이 빛나며 이처럼 관조하는 영화에 상업적인 포장을 입히는 데도 결정적인 기여를 한다. 어쨌든, 유행에 따 르지 않는 소박한 이야기로 삶의 건강한 정서를 일깨우는 영화를 만난다 는 것은 반가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시간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허진호 감독 인터뷰
-영화를 아주 건조하게 찍었다는 생각이 든다. 그게 하나의 스타일인 거 같기도 하고.
=절제를 했다는 말을 많이 하는데 그건 내가 감정을 표출하는 방법을 잘 몰랐기 때문에 그랬을지도 모른다. 오버하는 느낌이 들 때가 많다. 정원 이 손가락으로 유리창 밖 다림을 가리는 장면 같은 데서 그런 느낌이 든 다.
-절제라고 표현해도 상관없을 거 같다. 예를 들어 클로즈업이나 카메라움 직임, 커트 같은 걸 자제한 거 아닌가. 정원의 독백도 네 번밖에 안 나오 고.
=시나리오 들고 처음 유영길 촬영감독과 얘기할 때 유 감독 생각도 나랑 비슷했다. 인위적인 거 없이 가자는 원칙이었고 카메라가 뭘 보여주기 위 해 앵글을 옮기거나 크게 잡거나 하는 것은 피했다. 객관적으로 보여주고 싶었다. 특별히 무엇을 의도하거나 피할려고 한 게 아니다.
-정서적인 부분에 많이 호소하면서도 억지로 감정을 짜내는 식은 피한 거 같은데.
=실제 죽음을 준비하는 사람들 인터뷰를 했는데 3∼4개월쯤 앞둔 사람들 은 10이면 7∼8명은 차분해지고 착해진다고 들었다. 그런데서 영화가 영 향을 받았을 거다. 정원이란 인물을 밝게 그린 것도 그렇다. 물론 밝은 면만 있는 건 아니지만 관조적인 느낌으로 가고 싶었다.
-처음에 정원이 초등학교에서 나는 소리를 듣고 잠에서 깨고 나중에도 초 등학교 운동장이 자주 등장하는데 그 이유는 뭔가.
=초등학교 운동장에서 첫번째 독백이 나오지만 그는 운동장에서 죽음이란 것에 대해 처음 생각해봤다. 정원은 그때 느꼈던 죽음에 대한 정서를 간 직하고 있고 그래서 그의 심상으로 표현하고 싶었다. 죽음에 대해 처음 생각했을 때가 누구에게나 있을 것 같다. 가끔 들어가는 인서트들은 정원 이 느끼는 심상인 것이다.
-영화의 출발점이 ‘죽음’인데 죽음에 대해 어떤 생각이 들었나.
=죽어가는 사람을 다룬다는 게 쉽지 않았다. 시나리오 쓰다가 중간에 포 기할까 생각하기도 했는데 죽음 자체가 고통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 살아가는 일상이 죽음으로 시간이 제약된다면 일상이 달라보일 거 같았 다. 그걸 고통이나 두려움으로 볼 수도 있겠지만 일상적인 이별로 볼 수 도 있다.
-정원과 다림의 성격과 직업은 어떻게 설정했나.
=사진사나 주차단속원이나 의미를 갖고 시작한 건 아니다. 사진사는 출발 자체가 자기 영정사진을 찍는다는 것에서 나와서 그런 거고 죽어가는 사 람 주변에도 가족이 있고 친구가 있고 일로 찾아오는 손님들, 그리고 여 자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사진사와 접할 수 있는 부분 중에 자연스럽 게 주차단속원이 나왔다. 실제로 딱지뗀 경험도 있는데 재밌는 직업 같았 다.
-한석규, 심은하 두 배우의 연기에 대해선 무엇을 주문했나.
=한석규에겐 인물이 밝았으면 좋겠다고 했고 심은하는 자기 모습을 담은 자연스러움을 요구했다. 특별히 뭘 하라고 했다기 보다 이러저런 걸 하지 말라고 하는 정도였다.
-박광수 감독 연출부 출신인데 신기하게 영화에 사회적 맥락이랄까 사회 정치적 이야기랄까 하는 게 전혀 없다.
=정서에서 출발했기 때문에 다른 이야기를 넣는다는 걸 배제했다. 지금 이야기도 많은데 그러고 싶지 않았다. 개인의 감정, 정서에 집중해서 오 해를 살만한 건 없앴다. 이 영화에선 개인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어떤 면에서 관객에게 불친절한 영화이기도 하다. 생략도 많고.
=다 설명하고 갈 필요는 없다고 봤다. 영화를 보면서 발견해가는 게 재밌 을 거 같았다. 설명을 해야 될 때 못 했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처음 제목은 <즐거운 편지>였는데 어떤 연관이 있나.
=황동규의 시 <즐거운 편지>를 사랑에 대한 시라기보다 기억과 세월의 변 화에 관한 시로 읽었다. 그런 느낌을 주고 싶었다. 세월이 지나면 사라지 고 변한다는 거, 시간에 대한 얘길하고 싶었던 거다. 옛날 얘기 하는 게 많이 나오는 것도 그렇고 옛날 여자도 있고. 왜 누군가를 사랑하면 그게 변하지 않을 거 같은데 금방 잊어버리고 담담해지고 그러지 않나.
-영화의 배경이나 여러가지가 옛날 같은 분위기를 풍긴다.
=내가 30대고 주인공도 그렇고 해서 그럴 거 같다. 지금 시대 문화에 대 해 잘못 느끼고 취향이 좀 30대쪽으로 치우치는 건지도. 하지만 지금도 충분히 그런 정서나 배경을 가질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지금 20대도 공 감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닐까.
-선호하는 스타일이 있을 거 같다. <비정성시> 같은 영화를 좋아할 거 같 은데.
=특별히 스타일을 쫓아가진 않았다. <비정성시>는 물론 좋아한다. 오즈의 영화도 좋고. 이번 영화는 내용상 이렇게 찍고 싶어서 그런 거다. 다음에 다른 영화를 찍을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