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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8회 칸영화제 중간 결산 [2] - 거장들의 신작 ①

칸이 내민 6장의 보증수표

구스 반 산트부터 짐 자무쉬까지 - 거장들의 복귀작들 <라스트 데이즈> <히든> <아이> <만달레이> <어떤 폭력의 역사> <망가진 꽃들>

우선 이름값에 걸맞지 않게 답보상태를 보인 감독은 <진실이 있는 곳>의 아톰 에고이얀이다. 그는 자신의 캐나다-아르메니아인으로서의 정체성을 따라 역사의 퀼트를 짰던 전작 <아라라트>에서 한 발짝 후퇴한 결과를 내놨다. 한편, 해상 밀입국자들의 인권을 이탈리아 소년의 눈으로 본 <한번 태어난 이상 숨을 곳은 없다>의 마르코 툴리오 조르다나는 안이한 휴머니즘으로 일관할 뿐 아니라, 형식적으로도 갈팡질팡한다. 말할 것도 없이 범작이거나 실패작이다. 조용하게 자신만의 영화를 건설해온 두기봉과 고바야시 마사히로가 있지만, 작품의 힘으로 나머지 거장들을 넘어서지는 못했다.

반면, 구스 반 산트, 미카엘 하네케, 다르덴 형제, 라스 폰 트리에, 데이비드 크로넨버그, 짐 자무시는 전작에서 사용했던 형식을 다듬고, 그 일부에서 영감을 얻어 확장하고, 유사 연작을 만들고, 실제로 연작을 만들고, 같은 개념을 다른 차원의 방식으로 다루고, 자기 스타일의 원류로 되돌아가면서 깊어진 모습을 보인다. 아직 허우샤오시엔의 <최호적시광>, 빔 벤더스의 <돈 컴 노킹>, 아모스 지타이의 <프리존>, 홍상수의 <극장전>이 상영되지 않았지만, 수상여부와 상관없이 거장들의 복귀를 대변하고 보증하는 감독목록은 이들 여섯이다.

구스 반 산트 최고의 걸작 <라스트 데이즈>

<라스트 데이즈>

구스 반 산트의 이름이 맨앞에 놓이는 것은 크게 문제의 여지가 없다. 구스 반 산트는 <제리>와 <엘리펀트>를 거치며 확실히 자기의 형식을 새로 깨달은 것 같다. 믿기지 않을지 모르지만 <라스트 데이즈>에 비해 <엘리펀트>는 예습이나 습작에 불과하다. 이미 <엘리펀트>를 만든 구스 반 산트가 27살에 자살한 위대한 로커이자 시대의 아이콘인 커트 코베인의 마지막 나날들을 평범하고 전형적인 전기영화로 만들 것이라고 예상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반대로 그의 심정과 시간이 이토록 압축적인 이미지의 아포리즘으로 탄생할 것이라고 예측하지도 못했다. <라스트 데이즈>는 커트 코베인의 실제 삶에 대한 일지를 서술하기보다, 그 시절에 그가 느꼈을 법한 심정을 플롯과 이미지와 음악을 통해 은유적으로 치환하려는 시도로 가득 차 있다. 그리고 성공한다.

가령, 영화는 주인공 블레이크(배우 마이클 피트의 얼굴과 차림새는 커트 코베인의 재림을 보는 듯한 착각에 빠질 정도로 비슷하게 생겼지만 영화 속 그의 이름은 블레이크다)가 약에 취한 듯 흐느적거리며 거대한 늪지대와 숲속을 헤매는 것으로 시작한다. 이 장면은 커트 코베인의 행적을 재현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곳을 헤매고 다니는 것은 커트 코베인의 심정이고, 그건 그의 감정상태를 묘사하기 위한 영화적 설정이다. 이런 식으로 구스 반 산트는 블레이크를 둘러싼 장소와 그를 방문하는 사람들과 그것들에 반응하는 행동을 통해서, 실제로 커트 코베인이 피하고 싶고, 경계하고, 두려워하고, 숨기고 싶었던 것들, 그리고 동시에 어쩔 수 없이 부딪치며 살아가야만 하는 슬픈 심정을 세심하게 재구성한다. 블레이크는 처절하게 노래 한곡을 부르고는 잠을 자듯 죽는다. 자신의 시체 위로 혼령이 된 블레이크가 일어나 나체로 하늘을 기어오르고, 텔레비전에서는 커트 코베인의 자살 당시 뉴스들이 흐른다.

<라스트 데이즈>는 <엘리펀트>에 이어 감정의 이미지를 훌륭하게 포착한다. 그것을 시간의 다면성으로 재조합한다. 아마도 여기에 이르러 구스 반 산트가 <엘리펀트>를 거치며 얻은 자기 형식의 개념을 알아차릴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바로 ‘실재의 잔영’을 다루는 것이다. 만약 <라스트 데이즈>가 커트 코베인에 관한 영화라는 사실을 모를 경우, 또는 커트 코베인을 모르는 사람이 이 영화를 볼 경우 어떤 반응이 나올 것인가? 구스 반 산트는 <엘리펀트>에서 컬럼바인 총격사건을 영화화한 것이 아니라 컬럼바인 총격사건의 잔영을 영화화했던 것이다. 그래서 인과율이 성립할 수 없었고, 또 해석이 없다는 비판도 감수해야 했다. 이것이 최근 구스 반 산트가 실제했던 사건이나 인물을 다룰 때 활용하는 방법론이다. 그 실제 대상의 재현에 매달리지 않고, 오히려 그것이 남긴 잔영을 파고들어 구조화를 시도하기. <라스트 데이즈>를 볼 때 이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그러므로 커트 코베인의 마음을 외부의 풍경으로 그려내어 한편의 영화로 만든 <라스트 데이즈>는 ‘커트 코베인의 마지막 나날들에 대한 인상’이라고 부제를 붙이는 것이 가능하다.

별점 1위 미카엘 하네케의 <히든>

<히든>

이번 영화제 최고의 문제작으로 주목받는 미카엘 하네케의 <히든>은 끔찍하고, 무시무시한 윤리극이다. 영화가 시작하면 특별할 것 없는 어느 집 앞 풍경이 보인다. 그 화면 위로 오프닝 크레딧이 모두 깔리고, 그것이 지워지고 나서도 한참이 지나도록 카메라는 꿈쩍을 할 줄 모른다. 도대체 뭘 보여주고 싶은 건지 묻고 싶을 때쯤 어디선가 서서히 인물들의 대화가 들려오기 시작한다. 그런데 화면에는 목소리의 임자가 없다. 그리고 이제 도대체 어디서 나는 소리냐고 묻고 싶을 때쯤, 갑자기 화면은 일그러지고 뒤로 감긴다. 이때서야 알게 되는 것은 우리가 본 영화의 첫 장면이 영화 속 주인공들이 보는 비디오테이프의 내용이라는 것이다. 자기 집 앞을 찍어서 보낸 이 테이프 화면을 보며 프랑스 중산층이자 텔레비전 문학 프로그램 사회자인 조르주는 아내와 함께 공포에 질린다. 이 처음 시작은 앞으로 보게 될 이미지와의 싸움을 알리는 신호이기 때문에 중요하다. 앞으로 이 영화에서 어떤 장면이 등장하더라도 그 내용이 우리가 보는 무엇인지 아니면 그들이 보고 있는 것을 우리도 역시 따라 보고 있는 것인지는 다음 장면으로 넘어갈 때까지 미정이라고 알려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영화가 가진 한계, 관객이 갖는 수동적인 시선의 권력을 미카엘 하네케는 교묘히 이용하면서 이 영화가 ‘어디에도 없는 자의 시점’에 끌려가는 영화가 될 거라고 당당히 선언한다.

테이프는 다시 반복해서 배달된다. 그걸 보여주는 방법은 처음과 같다. 조르주는 문득 어린 시절 함께 살다가 자신의 계략으로 쫓겨난 알제리인 입양아 마지드의 뒤늦은 복수극이라고 믿고 그를 찾아가 그만두라고 협박한다. 그런데 그가 마지드를 협박한 장면 또한 녹화되어 다시 배달된다. 사태는 점점 더 심각해지고, 어린 아들이 하루 동안 실종되는 사건이 생기자, 조르주는 마지드와 그의 아들까지 경찰에 신고하여 잡아넣는다. 하지만, 그들 부자는 자신들이 한 짓이 아니라고 끝까지 결백을 주장한다. 조르주는 믿지 않는다. 어느 날 경찰에서 풀려난 마지드가 조르주를 집으로 부른다. 거기에서 드디어 충격적인 일이 벌어진다.

<히든>에서 이 테이프를 누가, 왜 보내는지에 대한 설명은 끝까지 없다. 경악의 장면까지 치닫기 위한 조건이나 다름없기 때문에 특별히 이유가 있을 필요도 없다. 그러나 만약 영화가 이 충격의 정점에서 끝났다면 <히든>은 잘 만든 사기극이 되었을 것이다. 물론 언제나 얄팍한 충격요법이 하네케의 영화에는 항상 있지만, 그래도 영화를 그 강도의 고조점에서 끝내지 않는다는 것이 근래 하네케 영화에 대한 일종의 믿음이라면 믿음이다. 아마도, <늑대의 시간>을 본 사람이라면 <히든>이 그 영화의 마지막 엔딩신을 확장하여 만든 영화 한편이라는 사실을 금방 알게 될 것인데, 누구의 것인 것 같기도 하고, 또는 어떤 인칭 시점도 아닌 것 같은 그 모호한 시점의 위치. 그 시점이 도화선이 되어 <히든>을 비윤리에 대한 고발장으로 만든다. 짧은 시간 안에 머리와 눈을 휘어잡는 영화가 유리한 영화제에서 충격요법은 언제나 주목을 끄는 한 방법이다. 그래서 <히든>은 현재 경쟁작을 대상으로 별점을 매기는 영미권과 프랑스 언론 양쪽 모두에서 1위를 달리고 있다.

다르덴의 ‘인간 구제’ 연작 <아이>

<아이>

다르덴 형제는 이번 영화에서도 역시 실망을 안겨주지 않는다. <아이>에서 주인공 소년 브루노는 장물을 팔아넘기거나, 가끔씩 물건을 훔쳐서 근근이 살아간다. 그러다가 브루노는 어느 날 갑자기 아기 아빠가 되어버린다. 여자친구 소니아는 너무 좋아하지만 브루노는 돈에 욕심이 나서 자신의 아기를 누군가에게 팔아버린다. 그 충격으로 소니아는 혼절하고, 뒤늦게 잘못을 깨달은 브루노는 다시 아기를 데려온다. 하지만, 소니아의 마음은 이미 돌덩이처럼 굳어버린 뒤고, 아기를 되갖고 갔다는 이유로 브루노는 폭력배들의 금전 협박에 시달리기까지 한다. 그 협박을 모면하기 위해 날치기를 해서 돈을 구하려고 하지만, 경찰에 쫓기는 상황까지 간다. 브루노는 결국 철창신세가 된다. 정말 무엇을 해도 되는 일이 없이 절망은 점점 더 가까이 온다.

다르덴 형제는 쓸모없어 보이거나, 희망이 보이지 않는 인간들의 절망을 영화에 담는다. 그들이 하는 일이라곤 주인공들의 등뒤를 졸졸 쫓는 것이다. 그러나 끝내는 그 단 한명까지 살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영화의 구조를 갖고 간다. 미카엘 하네케의 영화에서 인물 중 하나가 죽어야만 그때부터 진짜 윤리와 비윤리에 대한 문제를 묻는 것이 가능해지는 것과 반대로, 다르덴 형제는 죽을 것 같은 상황까지 가더라도 끝내 그 주인공을 구제의 문턱 앞에까지 되돌려놓는 것이 자신들이 할 수 있는 영화적 윤리의 최선이라고 늘 생각하면서 모든 귀결을 마련한다. 면회장에서 만난 브루노와 소니아가 서로를 부둥켜안고 오열하는 것으로 영화는 끝난다. 슬프지만 그것은 희망이다. <약속> <로제타> <아들>이 그랬던 것처럼 <아이>도 크게 다르지 않다. 이를테면, 영화는 어느 순간 시작해서 언제 끝났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격렬한 호흡의 감동으로 몰아친다. 그것이 언제나 이상할 정도로 평범한 절망 속에 기적 같은 희망의 전조를 심는 다르덴 형제의 방식이다. 작품의 수준에서 <아들>보다는 못 미치지만, 이 영화는 다르덴 형제의 영원한 인간 구제의 연작 중 하나라고 말해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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