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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가 된 단편소설 [3]
김혜리 박은영 김현정 2005-03-22

치정에 관한 두 가지 명상

단편집 <호출> 중 <거울에 대한 명상>, <엘리베이터에 낀 그 남자는 어떻게 되었나> 중 <사진관 살인사건> 김영하 지음

영화 <주홍글씨> 변혁 감독

<주홍글씨>는 각각 다른 소설집에 실린 김영하의 단편소설 두편을 하나로 모은 영화다. 스릴러와 치정의 기록. 변혁 감독은 영역이 다른 이 소설들이 서로를 반사하는 거울과도 같다는 점에 주목했고, 그 안의 욕망을 건져내어, 한 남자가 겪는 두 가지 사건으로 각색했다. <사진관 살인사건>은 <주홍글씨>의 기훈이 수사하는 사건에 토대를 제공한 소설이다.

일요일 오후 사진관에서 살인사건이 일어난다. 최초 목격자이자 용의자는 살해된 사진관 주인의 아내인 경희. 강력반 형사인 ‘나’는 남편보다 한참 어리고 육감적인 경희에게 호기심을 갖게 되고, 다른 남자가 있었던 자신의 아내를 떠올린다. 그녀는 권총으로 위협당한 애인이 오줌을 지리고 도망간 뒤에 예수에게만 미쳐 지내고 있다. <사진관 살인사건>은 김영하의 소설답게 간결하고 건조하고 구태여 모든 걸 설명하려 들지 않는다. 그것은 미스터리를 해명하는 <주홍글씨>와는 가장 다른 점이다. 그러나 형사가 살인사건 위에 자신의 사생활을 포개보는 구조는 본래 소설 세편을 모티브로 하려 했던 <주홍글씨>가 여기에서 싹트지 않았을까 짐작하게 하기도 한다. <사진관 살인사건>과 함께 이중의 구조를 짜가는 소설은 <거울에 대한 명상>이다.

이기적이고 자아도취 증세가 있는 남자는 대학 시절부터 섹스를 해왔던 여자 가희를 만나 산책을 하다가 장난삼아 들어간 폐차 트렁크에 갇히고 만다. 어쩌면 가희는 일부러 트렁크를 닫았을지도 모르겠다. 남자는 체념과 분노를 오가다가 가희가 털어놓은 진실, 그녀의 친구이자 남자의 아내인 성현이 숨기고 있는 진실을 듣게 된다. 김영하의 초기 단편인 <거울에 대한 명상>은 거울의 이미지를 곧이곧대로 서술하곤 해서 <사진관 살인사건>보다는 거친 느낌이다. 그러나 지리멸렬한 관계와 위장을 벗고 드러나는 진실은 면도날 자국처럼 깊고 날카로운 상처를 남기고 간다.

복수의 화신이 여협객으로

단편집 <요재지이> 중 <협녀> 포송령 지음

영화 호금전의 <협녀>

“사람은 반드시 집안에 협녀가 있어야만 연동(戀董)을 두어도 탈이 없을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당신이 사랑하는 수놈은 당신의 암놈을 좋아해서 넘보는 일이 생길지도 모르니까.” 포송령이 <협녀>에서 하고 싶었다는 이야기는 좀 생뚱맞다. 호금전의 <협녀>를 보면, 원작 <협녀>는 무협지여야 옳을 듯하지만, 그렇지가 않다.

먼저 <협녀>가 온갖 귀신과 정령이 넘실대는 기서 <요재지이>의 한 단편이라는 사실을 되새겨야 한다. 홀어머니를 모시고 가난하게 살던 주인공 고생은 그림을 그려달라며 찾아온 소년을 희롱하고 애인으로 둔다. 그러다 옆집 처녀에게 관심을 갖게 되는데, 병든 노모와 함께 산다는 여인은 무례하게도, 도움을 받고도 감사할 줄 모른다. 어느 날 여인은 고생을 받아들이고는, 이번 한번뿐, 이라고 못 박지만, 그 다음엔 먼저 유혹한다. 이때 고생의 애인이었던 소년이 훼방을 놓자, 여인은 그를 따라가 비수를 던지는데, 쓰러진 소년은 사람이 아니라 백여우였다. 얼마 뒤에 여인은 고생에게 아들을 안겨주고 할 일을 했다며 떠나려 한다. “주머니 안에 무엇이 들었소?” “원수의 대가리입니다.” 여인은 복수를 위해 때를 기다린 것이고, 남자와 잠자리를 한 건 대를 이어주려는 보답의 의미였다. 상냥하지 않고, 정에 연연하지 않고, 의지하지 않는 여성 무사가, 300년도 훨씬 더 된 고전 속에서 튀어나왔다는 건 믿기 힘든 일이다. 호금전이 이 이야기에서 빌려온 것도, 이 매력적인 여성 캐릭터뿐이다.

호금전의 <협녀>에는 원작소설의 동성애 코드와 여우에 홀리는 것 같은 초현실적인 에피소드는 존재하지 않는다. 옆집에 사는 정체불명의 처녀는 권력을 쥔 자들을 위협하는 현상수배범으로, 주인공은 밤마다 외출하는 여인의 뒤를 밟다가, 그녀가 대단한 무공의 소유자라는 사실을 알게 되고, 그녀를 돕기도 한다. 그 유명한 대나무 숲 결투신과 인해전술을 펼치는 요새 전투신은 원작에서는 단 한줄의 암시도 없는, 순수한 상상의 산물이다. 생전에 인정받지 못한 작가 포송령은 “진정 나를 알아줄 이는 꿈속에서나 만날 수 있는 귀신들뿐이런가”라고 탄식했다 하는데, 그의 저서 <요재지이>는 훗날 중국의 8대 기서로 꼽혔고, 그중 <협녀>와 <섭소천>(<천녀유혼>)이 영화로 만들어졌다.

중년 깡패를 치유하는 한통의 편지

단편집 <철도원> 중 <러브레터> 아사다 지로 지음

영화 <파이란> 송해성 감독

파이란은 하얀 난초(白蘭)라는 뜻이다. “칸 파이란, 좋은 이름이구먼, 나무아미타불.” <철도원>의 원작자이기도 한 아사다 지로는 그처럼 아무렇지도 않을 수 있었던 한 여자의 죽음으로부터 중년 깡패의 마음을 씻어주는 편지 한통을 써내려갔다. 러브레터, 사랑의 편지. 송해성 감독은 <러브레터>의 짧은 줄거리만 듣고도 가슴속에서 뭔가 뜨거운 것이 올라왔다고 회상했다.

사십줄의 깡패 고로는 포르노숍 단속에 걸려 유치장에 수감되었다가 막 출소했다. 일자리를 찾던 고로는 예전에 취업을 위해 돈을 받고 위장결혼해주었던 중국 여인 파이란의 시신을 인수하라는 연락을 받는다. 그는 대가로 받은 50만엔을 경마로 날린 뒤에는 그 여자를 생각조차 해본 적이 없다. 그러나 고로는 기차 안에서 파이란이 보낸 편지를 읽고, 인력소개소 직원 사토시로부터 그녀가 얼마나 예뻤는지 들으면서, 본 적도 없는 여자에게 연민을 느끼기 시작한다. <러브레터>에서 파이란은 서툰 일본어로 적은 편지에만 흔적이 남아 있는 희미한 여인이다. 창녀로 일하면서도 성실했고, 돈 때문에 위장결혼한 고로를 진짜 남편으로 여겼고, 입원한 지 며칠 만에 혼자 죽은 파이란.

송해성 감독은 소설을 거의 그대로 옮겨다놓으면서도 젋고 가엾은 파이란에게 일상과 대화와 표정을 부여했다. 창녀 대신 세탁부가 되어, 파이란은 하숙집 주인에게 웃어 보이고 자전거로 세탁물을 배달한다. 최민식이 제안했다는 <강재의 오후> 대신 <파이란>이 제목이 된 건 그 때문이 아닐까. 고로는 불길에 바싹 마른 유골을 무릎에 놓고 울 수 있었지만, 파이란은 아무것도 할 수 없었기 때문에. 내리막만 거듭해온 중년 깡패에게 무게를 싣는 <러브레터>보다 바닷가에서 장난치는 파이란의 모습도 담은 <파이란>은, 한겨울 바닷바람처럼 눈을 아리게 한다. 모처럼 더운 눈물을 쏟았던 강재가 비정한 폭력에 목이 졸려 발버둥치는 마지막 모습, 그 눈에 맺힌 눈물 또한 정성과 마음을 쏟은 각색을 돋보이게 하는 대목이다.

쿨함을 무너뜨리는 용기

단편집 <조제와 호랑이와 물고기들> 중 다나베 세이코 지음

영화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 이누도 잇신 감독

다나베 세이코의 소설에는 양가감정이 공중에 정지된 순간을 즐기는 성숙한 여자들이 나온다. 그들은 결별을 예감하면서도 동반자살을 결심한 커플처럼 절정을 음미하고, 누구나 동정할 만한 상황에서 묘한 감미로움을 맛본다. 이 단편집의 작품들은 대개 영화로 치면 정지 프레임에서 이야기를 멈춘다. <조제와 호랑이와 물고기들> 역시 조제와 츠네오가 세상에 알릴 필요없는 둘만의 신혼생활을 유지하는 동안 소설을 끝낸다. 몸이 부자유스런 조제는 세상의 악의에 민감하다. 고압적으로 몰아붙이거나 호흡 곤란을 일으키는 것이 그녀가 세상에 대응하는 방식이다. 하지만 태평한 츠네오가 그녀에게 와주었다. 안아줄 츠네오가 있어서 조제는 무서운 호랑이도 보러갈 수 있게 되고, 업어줄 츠네오가 있어서 수족관의 물고기를 보러 여행도 간다. 그러나 조제는 속지 않는다. “츠네오가 언제 떠날지 알 수 없지만, 곁에 있는 한 행복하고, 그것으로 족하다고 생각한다. 조제는 행복에 대해 생각할 때, 그것을 늘 죽음과 같은 말로 여긴다.” 이어진 단편 <사랑의 관>에 인용된 시는 조제와 츠네오에게 붙여도 손색이 없다. “말로 다할 수 없는 둘만의 사랑이었네/ 우리 누운 관 위에 풀이 피어나는 날에도/ 이 사랑 아는 이 없으리.”

이렇게 끝난 원작의 1년 뒤를 캐묻는 일에는 ‘쿨함’을 무너뜨릴 용기가 필요하다. 그러나 각본가 와타나베 아야는 쿨한 멋보다 아직 젊은 조제와 츠네오가 긴 생을 어떻게 살아갈지 질기게 묻는 것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이해한다. 이 점을 빼고라도, 원작소설을 빙산의 일각으로 보고 조제와 츠네오에게 가족과 친구, 내밀한 기억, 미래를 자연스럽게 만들어 선사한 와타나베 아야의 각색은 굉장하다. 원작에서 추론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라 뭔가 살아 있는 것이 개입한 듯, 자유로우면서 정확하다. “원작의 궁극적 메시지를 파악한 다음, 캐릭터의 개성을 인식하고 그들에게 자극받아 맹렬히 쓴다”는 것이 각본가가 밝힌 작업방식. 이누도 잇신 감독에 따르면, 시나리오가 원작에서 그대로 갖다 쓴 단 한마디의 대사는, 츠네오와 첫 섹스를 나눈 조제의 감상이다. “나, 좋아. 당신도, 오늘 한 것도 다 좋아.”

스티븐 킹

공포소설 밖에서도 재능 발휘한 호러의 킹

스티븐 킹은 차가운 손이 발목을 잡을까봐 무서워서 이불 밖으로 다리를 내밀고 자지 않는다. 어린아이 같지만, 세상에 무서운 게 없다면, 무서운 이야기를 쓰지 못할 것이다. 아르바이트하던 창고의 지하를 겁내던 십대 시절을 기억하기 때문에 그는 커다란 쥐들에게 먹히는 <철야근무>를 내놓을 수 있었다. 백주대낮에 경고도 없이 습격해오는 공포. 킹은 미국 남부의 뜨거운 햇살이 떠오르는 소설들 속에 환해서 더욱 음산한 유령과 괴물들을 풀어놓는다.

대부분의 공포영화가 상영시간이 짧다는 사실을 떠올린다면 단편이 원작인 경우가 많은 것도 이상하진 않을 것이다. 킹의 대표적인 단편 <옥수수밭의 아이들>은 시리즈를 양산할 정도로 인기있는 소설이었다. 네브래스카주의 고속도로를 달리던 버트와 비키는 어린 남자아이를 치어 죽인다. 그들은 병원을 찾기 위해 가장 가까운 마을 개틀린으로 향하지만 그곳은 오래전에 버려진 듯 텅 비어 있다. 무슨 일이 일어났던 걸까. 마을을 둘러싼 옥수수밭은 살아 있는 것처럼 아이들을 지배하고 살인을 사주하고 제물을 요구한다. 순진무구한, 괴물 같은, 아이들. 영화로는 실패한 <옥수수밭의 아이들>은 스토리 자체가 지닌 매혹 덕분에 끈질기게 후일담을 남겨왔다.

<맹글러> 또한 평범한 사물에 위협받는 호러다. 맹글러는 시트나 커튼 같은 대형 세탁물을 다리는 기계다. 부품에 이상이 없고 작동도 잘되는 이 기계에 자꾸만 사람들이 빨려들어가 죽기 시작한다. 시트처럼 납작해진 채로. 사건을 조사하던 경찰 헌튼은 공장에서 일하던 마을 처녀가 실수로 상처를 입어 맹글러에 피를 떨어뜨린 적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토브 후퍼는 신문 한구석 기사에서 소재를 얻었을 법한 이 소설을 너무 과장해서 앙상해진 영화 <써스펙트>로 각색했다. 후퍼가 유일한 패자는 아니다. <부기맨> <가끔 그들이 돌아온다> <트럭> 등은 모두 바로 곁에 있는 듯한 괴담이지만 영화는 외면받았다. 바짝 마른 킹의 책장에서 질척한 핏물을 퍼올리기란 쉽지 않은 일인 듯하다.

그래서인지 킹이 원작자로 이름을 올린 영화들은 호러영화가 아닌 경우에 오히려 성공적이다. 스티븐 킹은 사계절을 테마로 삼아 네편의 중편소설을 썼다. 그중에서 <리타 헤이워드와 쇼생크 탈출>은 <쇼생크 탈출>로, <시체>는 <스탠 바이 미>로, <파멸의 시나리오>는 <죽음보다 무서운 비밀>로 각색됐고 모두 수작이라는 평가를 얻었다. <시체>와 <파멸의 시나리오>는 모두 성장의 한 대목을 포착한 중편소설. 킹은 벽장이 지옥 입구처럼 보이던 꼬마 시절뿐만 아니라 모르는 것투성이인 세계 또한 지옥과 비슷하던 성장기도 잊지 않았나보다.

<쇼생크 탈출>

<죽음보다 무서운 비밀>

필립 K. 딕

SF영화의 현재를 창조한 작가

필립 K. 딕은 그의 부재와 SF영화의 현재를 연결해 추리해보게 만드는 작가다. 이미지의 영토를 넓히면서 미래를 내다보기도 했던 <블레이드 러너>는 심장과도 같은 질문을 필립 K. 딕의 소설 <안드로이드는 전기양의 꿈을 꾸는가?>에서 가져왔고, 그 질문은 또다시 <공각기동대>로 확장되어 테크놀로지의 존재를 고민하는 중심추가 되었다. 그가 없었다면 우리는 누구를 통해 미래를 경계할 수 있었을까. 가상의 기억을 캐내거나 사라진 자아를 의심하거나 죽은 영혼의 권력마저 조롱하는 필립 K. 딕은 20년 전에 죽었지만 여전히 마르지 않는 샘물처럼 비판 섞인 상상력을 공급하고 있다. 그 상상력은 너무도 엄청나서 단편을 각색하는 것만으로도 신기하고 급박한 SF영화를 만들어내는 데 부족함이 없을 정도이다.

스티븐 스필버그의 <마이너리티 리포트>는 아마도 가장 극단적인 모델일 것이다. 미래를 보는 예언자가 있어 범죄자가 죄를 짓기 이전에 체포명령이 내려진다. 이 간단한 전제는 안과 밖을 구분할 수 없는 뫼비우스의 띠가 되어 독자 혹은 관객을 혼란에 빠뜨린다. 인간에게는 의지가 있는데, 나비가 날갯짓만 해도 폭풍이 이는데, 어떤 변수도 고려하지 않고 체포하는 게 올바른 일인가. 아직까지는 결백한데 내가 감옥에 갇히는 걸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인가. 예언에 개입할 수 있다면 옳은 결론에 도달할 수도 있을까. <마이너리티 리포트>는 거대한 감시기관을 갖춘 권력과 그 안에 포박된 개인을 가차없는 농담으로 조롱한다. 필립 K. 딕의 또 다른 매혹은 그것이다. 그는 무한한 시간을 대상으로 승부하면서도 불우하게 살았던 작가답게 스스로의 거대함을 냉소한다.

그 때문에 그의 단편을 각색한 영화들은 역설적으로 비극적이고 장대한 경우가 많다. 작가에겐 농담이었어도 읽는 이에겐 묵직하다. 근육질 SF영화라 할 만한 <토탈 리콜>이 그런 경우다. 아놀드 슈워제네거가 연기한 퀘일은 음모에 맞서 지구를 구하는 영웅이다. 그러나 소설 속의 퀘일은 화성여행의 가상기억을 심으려다가 알고보니 화성에서 활약한 요원이었고, 말도 안 되는 기억으로 과거를 눌러보자 마음먹어 지구 전체를 구출했다고 가짜 기억을 만들었는데, 앗 진짜 구했었구나, 라는 식이다. 그처럼 경쾌하지 않았다면 필립 K. 딕은 마음속에 품은 우주에 짓눌렸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정말 짓눌려서 심장마비로 죽었던 걸까?

그는 또한 정적인 자아와는 다르게 몇 문장만으로도 수십만달러를 들어야 하는 액션을 묘사하곤 했다. <페이첵>의 제닝스는 비밀공장에 잠입했다가 시간거울을 통해 미래를 보았던 2년 전 자신이 쥐어준 도구를 사용해 그곳에서 탈출한다. 몇 페이지에 불과하지만 액션의 장인인 오우삼이 매혹될 정도로 규모는 만만치가 않다. 얇은 종이 위에 세계를 창조한 작가. 필립 K. 딕은 현재를 투영한 미래소설을 써서 캐고 들어갈수록 새로운 차원이 펼쳐지게 만든 놀라운 예언자다.

<페이첵>

<마이너리티 리포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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