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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르영화, 이래서 어렵다 - <주홍글씨>와 <썸>

미스터리 장르공식 활용한 <주홍글씨>와 <썸>, 무엇이 문제였나?

우리가 장르 공식을 취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이 이야기를 짜기가 더 수월하기 때문에? 아니면 대중에게 더 손쉽게 어필할 수 있기 때문에? 한마디로 더 만만하기 때문에? 놀랍게도 많은 사람들은 이런 수사적 질문에 긍정적인 반응을 보인다. 적어도 좀더 대중적인 것일수록 다루기 쉬운 것이라는 미신은 많은 사람들에게 당연한 상식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듯하다. 하지만 과연 그런가?

추리 장르의 공식을 위반한 <주홍글씨>

하나씩 따지기는 쉽다. 예를 들어 가장 정통적인 장르물들은 대부분 특정 소수의 열성팬들에 의해 사랑받을 뿐 대중적인 인기가 없는 경우가 많다. SF나 추리물 장르에서 메가톤급 베스트셀러를 쓰는 사람들은 로버트 포워드나 프리먼 윌슨 크로프츠처럼 폐쇄적인 순수장르 작가들이 아니라 마이클 크라이튼이나 시드니 셸던처럼 장르의 주변에 서서 대중적인 감수성에 호소하는 일반 작가들이다. 마찬가지로 ‘일반 작가들’의 장르물들은 대부분의 경우 전문 작가들의 작품에 비해 밀도가 떨어지는 경우가 많다. 장르물은 그 특성상 기존 테크닉과 규칙에 대한 깊은 이해가 필요하게 마련인데, 많은 작가들은 대부분 그걸 아주 만만하게 보기 때문이다. 이른바 하이브리드나 슬립스트림 소설류에서 성공을 거둔 순수작가들은 예외적일 정도로 장르에 대한 전문적인 깊이가 있는 사람이다. 토머스 핀천, 커트 보네거트 주니어, (그리고 아마도)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같은 사람들은 웬만한 장르 독자들이나 일반 평론가들보다 그들이 경계선을 탐구하는 영역에 대해 더 잘 알았다.

변혁의 <주홍글씨>를 보고난 뒤 가장 먼저 궁금해지는 건, 과연 작가/감독이 이 영화가 도입한 ‘추리물’이라는 장르를 어느 정도 존중했느냐는 것이다. 질문에 들어가기 전에 간단한 정리를 해보자. 너새니얼 호손이 쓴 동명소설의 부정확한 역제를 제목으로 쓰고 있는 이 영화는 김영하의 두 소설, <거울에 대한 명상>과 <사진관 살인사건>의 모티브들을 따와 하나의 이야기로 묶은 것이다. 여기서 한석규가 연기한 주인공 형사는 <거울에 대한 명상>에 속한 불륜 이야기와 <사진관 살인사건>에 속한 살인사건 이야기를 번갈아 오간다.

<주홍글씨>에서 가장 분명한 특징은 영화가 장르물의 외양을 취하고 있지만 될 수 있는 한 그에 속한 모든 공식들을 위반하고 있다는 것이다. 영화의 형사 주인공은 사건의 진상을 파헤치는 데 별다른 관심이 없고 꼭 연결될 것 같던 형사의 사생활과 살인사건은 끝까지 연결되지 않은 채 남는다. 일반 관객에게 이런 선택들은 굉장히 불만족스럽다. 장르가 약속한 기대를 전혀 충족시켜주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식의 접근법을 새롭거나 도전적이라고 할 수 있을까? 그렇다고 할 수는 없는데, 원래 공식과 기대의 파괴는 장르 내에서 시작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외부 작가들이 장르 공식을 가지고 실험을 시작할 때, 이미 장르 내부에서는 실험이 끝난 뒤이게 마련이다. 특히 고도로 형식화된 미스터리 장르의 경우는 더욱 그렇다(E. C. 벤틀리의 <트렌트 최후의 사건>은 미스터리 장르의 전성기가 본격적으로 시작될 무렵인 1920년에 나왔다). 그렇다면 이런 시도를 했다는 것 자체만으로 전문 장르팬들에게 어떤 긍정적인 예술적 자극을 주는 건 어렵다. 물론 장르 밖에서도 쉽게 인정받기는 쉽지 않다. 공식과 기대의 파괴는 장르 밖에서도 이미 거의 공식화된 선택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의도 자체보다는 의도를 어떻게 구현했느냐를 따질 수밖에 없는데, 이 영화는 그게 변변치가 않다. 따로 떼어놓고 보면 별 문제가 없는 두 이야기는 번갈아 진행되는 동안 서로의 힘을 까먹는다. 특히 퍼즐 미스터리와 스릴러의 힘이 낭비되는 과정은 심각할 정도로 따분하다. 여기서 공식과 기대는 예술적인 통제하에 파괴되는 것이 아니라 그냥 게으르게 방치된 상태에서 가능성을 날려버린다. 형식상 ‘강력계 형사’로 설정된 남자주인공의 직업이 의식적으로 부여된 캐릭터의 요란한 자기 과시적 측면과 그렇게까지 잘 연결되지 않는 것도 문제라면 문제이다. 그가 폭력적인 세계에서 남성적 과시를 하고 싶다면 별 문제가 없지만, 첼리스트와 재즈 가수가 개입된 삼각관계 속에서는 뭔지 모르게 설득력을 잃는 듯하다.

여기서부터 영화의 문제점은 뒤바뀌게 된다. <주홍글씨>는 고정된 장르를 적극적으로 활용하거나 파괴한 영화 대신 미스터리 장르 공식과 아트하우스 영화의 공식을 맥없이 흉내낸 영화처럼 보인다. 영화의 예술적 논리는 서 있다. 주제 자체도 글로 써서 올릴 만큼 분명하다. 작가/감독이 이 영화를 이성적으로 변호하거나, 비평가들이 개별 요소들을 가지고 장난치는 데엔 아무런 문제가 없다. 하지만 이런 상호교류는 굳이 영화라는 중간매체 없이 보도 자료만 가지고도 충분히 구현될 수 있는 것이다.

문제는 <주홍글씨>라는 영화 자체가 이 개념과 논리에 어떤 실체도 부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능력있는 배우들과 스탭들이 아무리 열심히 뛰어도, 감독이 아무리 시간과 공간을 뒤섞는 ‘명장면’을 만들어도 영화는 그냥 공허하고 어색하다. 후반부에 나오는 <밤이 기울면>의 어설픈 인용처럼, 영화는 자기 과시적이고 딱딱한 스타일을 갖춘 매력없는 빈 껍데기에 불과하다. 차라리 공식을 기술적으로 따른 성실한 스릴러였다면 이런 텅 빈 느낌은 없었을 것이다. <주홍글씨>에는 추상적인 개념과 아이디어만 존재할 뿐 예술적 실체는 없다.

소재에 대한 이해없이 모던한 척하는 <>

장윤현의 <>이 그의 전작 <텔미썸딩>보다 확실하게 나은 점이 있다면 그건 장르를 다루는 성실함에 있다. 적어도 이 영화는 자기가 처음부터 끝까지 관객을 뒤흔들 만큼 똑똑하다는 착각은 하지 않는다. 주어진 설정은 단순하고 명쾌하다. 영화는 이 명쾌한 설정을 자신이 할 수 있는 한도 안에서 구현하려 한다. 이 ‘명쾌한’ 설정은 기존 공식에 의해 처음부터 완벽하게 정의된 종류는 아닌 것처럼 보인다. <>에는 두 가지 장르가 공존한다. 마약을 뒤쫓는 형사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비교적 전통적인 형사물과 기시감과 예지 능력을 내세운 초현실적인 모험담. 하지만 이런 것도 이젠 <X파일>식 장르라는 딱지가 붙은 서랍 안에 분류할 수 있다.

이 설정에서 조금 독특해 보이는 건 영화가 끝까지 주인공의 예지 능력을 설명하려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주인공의 예지 능력은 처음부터 끝까지 영화의 플롯을 끌어가지만 정작 영화는 이에 대한 논리적인 설명을 하지 않고 주인공들 역시 그 기원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다. 스토리텔러의 의무를 방치하는 것 같지만 정작 결과는 나쁘지 않다. 일단 억지 설명에 따른 논리적 파국이 없다. 설명의 부재는 영화에 나쁘지 않는 신비스러운 분위기를 부여하기도 한다. 하긴 이 정도로 단순하고 익숙한 설정에 특별히 새로운 설명을 붙이는 건 어려웠을 것이다. 나머지 부분에서 영화는 비교적 상식적인 형사물의 스토리를 따른다. 스토리를 펼치는 기교는 그렇게까지 좋은 편은 아니다. 설명이 상당히 비경제적이고 산만한 편이라 종종 관객은 이들이 관련된 사건의 구체적인 정체가 무엇인지 궁금해할 것이다. 하지만 중반 이후 그런 호기심은 그냥 사라진다. 결국 이 모든 사건들은 액션과 설정을 위한 맥거핀으로, 그 사건이 어떤 종류의 것이건 전체 스토리에 큰 영향을 끼치지는 않기 때문이다.

<>의 진짜 문제는 장르 공식의 활용에 있지 않다. 여전히 자잘한 문제점이 드러나긴 하지만 장윤현은 할 만큼 했고 그 성과도 적지 않다. 24시간이라는 제한된 시간을 활용하는 시간 설정은, 비슷한 상황을 다룬 TV시리즈 <24>와는 달리 오히려 드라마를 질질 끌지만 그래도 해볼 만한 시도였으며 설정이 서스펜스를 만들어내지 않는 것도 아니다. 지나친 감상주의가 치밀한 두뇌 게임의 가능성을 대부분 날려버리지만 그것도 개인의 취향문제라고 우길 수 있을지 모르겠다. 반전이 놀랍지 않다는 비판은 의미가 없다. 원래부터 대단한 반전을 의도한 영화가 아니었으니. 이 정도는 의무적인 국면 전환으로 받아들일 만하다.

영화의 가장 큰 문제는 <주홍글씨>와 다를 게 없는 허세이다. <주홍글씨>가 장르 공식을 ‘세련되게’ 파괴하며 지적 과시를 시도했다면 <>은 극단적으로 모던한 스타일과 쿨함을 추구한다. 현대 서울의 모습을 피사체로 잡은 이 영화의 시대 배경은 실제로 약간의 근미래이다. 테크놀로지의 측면에서 특별히 발전된 부분은 없지만, 영화는 마치 SF라도 되는 양 이 시대의 쿨하고 차가운 분위기를 의도적으로 과장한다. 이런 태도 자체는 흥미로운 예술적 시도로 이해될 수 있고 실제로 어느 정도까지는 그렇게 먹힌다. 하지만 이 시도는 의미있는 예술적 성취에 이르지는 못한다. 현대와 근미래의 경계선에 서 있는 <>의 서울은 인조인간이 돌아다니는 구체적인 미래인 <블레이드 러너>의 로스앤젤레스보다 존재감이 떨어진다. 영화는 디지털 시대를 정의하는 현대성의 외피를 잡아내려 시도하지만, 할리우드의 <원초적 본능>류 영화들과 필름누아르 영화들을 열심히 흉내내려고 시도했던 전작 <텔미썸딩>이 그랬던 것처럼 겉핥기로 끝나고 만다. 영화는 그렇게 복잡하지도 않은 디지털 시대의 감수성을 충분히 이해도 못하는 것 같다. 디지털 정보들을 둘러싼 너무나도 아날로그적인 액션 접근법이 그를 증명하는 예이다. 남은 건 영화를 만드는 사람들이 보기에 쿨해 보이는 현대적 이미지의 결합인데, 이미 현대사회의 일부가 된 일상의 테크놀로지와 감수성을 변형없이 극도의 쿨한 대상으로만 이해한다는 건 결국 다루는 소재가 무엇인지 잘 모른다는 말이다. 아무리 번지르르하게 꾸민다고 해도 소재에 대한 깊은 이해가 없다면 영화는 얄팍해질 수밖에 없다.

<>의 허세가 언제까지 먹힐지는 알 수 없다. 아마 영화의 미래적인 외피는 조금 오래갈 것이다. 디지털카메라의 화소 수가 올라가고 인터넷의 접근성이 높아져도 영화가 만들어낸 이미지의 현대성은 꽤 수명이 길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점을 고려한다고 해도 <>이 언젠가 의도하지 않은 캠피한 과장으로 받아들여질 날이 올 것이다. 어느 정도 세월이 흐른 지금 복고적인 90년식 로맨스로 읽혀지는 <접속>만큼 <>이 세월에 저항할 만한 무언가를 갖추고 있는 것 같지는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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