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STORY 전국의 주요 관광도시에 거점을 마련하려는 조직의 계획에 따라 전략참모인 박영준(이성재)이 경주로 급파된다. 10년 전 수학여행을 왔을 때만 해도 학교끼리 맞붙는 패싸움을 구경만 했던 모범생 영준이 이제 전국적 규모를 자랑하는 조직의 중간보스가 된 것. 경주의 토착조직을 접수하려던 영준은 이곳에서 고등학교 동창 최기동(차승원)을 만난다. 10년 전 수학여행 때 학교 최고의 주먹이던 기동은 현재 고등학교 선생님. 오랜만에 만나 영준과 술을 마시던 기동은 학교에서 늘 말썽부리는 주섭(이종수)이 패싸움을 벌이다 경찰서에 잡혀갔다는 연락을 받고 경찰서로 출동한다. 이때 나타난 주섭의 누나 주란(김혜수)은 기동과 영준, 둘의 눈이 번쩍 띄게 만든다. 라면집을 하며 남동생과 함께 사는 예쁜 누나 주란의 마음을 사로잡으려는 기동과 영준의 치열한 경쟁이 시작된다.
■ Review
“그건 한마디루 전쟁이었다.” 누군가 밤새 고스톱친 이야기를 하려고 이렇게 서두를 꺼낸다면 어떤 태도를 보일 것인가? 아마 한바탕 웃거나 ‘참, 싱거운 사람이군’이라고 여기거나 아니면 둘 다일 것이다. <신라의 달밤>은 이런 말투로 이야기하는 영화다. 한 여자의 마음을 차지하려는 두 남자의 다툼을, 이 영화는 ‘전쟁’이라고 과장해서 표현한다. 전쟁을 벌일 만큼 대단한 사랑이 있어서? 그건 아니다. <신라의 달밤>의 삼각관계는 신기루 같은 것이어서 누군가 “왜 둘은 그녀에게 반했나?”라고 묻는다면 “이건 멜로영화가 아니”라는 답변만이 돌아올 것이다. 멜로드라마적 설정을 전면에 내걸고 있지만 이 영화의 정서는 <친구>와 별반 다르지 않다. 어찌하여 그녀 때문에 아옹다옹하던 그들이 두손을 맞잡게 됐을까? 기이한 운명에 휘말려 서로를 배신하고 말았던 <친구>와 상반된 듯하지만 <신라의 달밤>은 주인공을 의리에 죽고 의리에 사는 ‘형님’으로 모신다는 점에서 <친구>의 피를 이어받았다. 다른 게 있다면 이번엔 허풍도 세고 농담도 잘하는 형님이라는 차이다.얼핏 엎치락뒤치락 질서없는 코미디처럼 보이지만 <신라의 달밤>의 설정은 꽤 정교한 구석이 있다. 한축에 모범생과 문제아를, 다른 축에 깡패와 선생님을 그려넣은 그래프는 이미지와 인물이 엇갈릴 때마다 웃음을 유발한다. 예를 들어 말끔한 양복차림에 점잖은 말만 골라쓰는 남자, 그는 깡패이다. 촌스런 주황색 운동복에 입만 열었다 하면 “쉐끼들”을 연발하는 남자, 그는 선생님이다. 이런 식의 불일치로 비롯되는 착각이 <신라의 달밤>에 젖어든 유머의 주성분. 여기에 10년 전 모범생이던 녀석이 깡패로, 학교의 ‘짱’이던 녀석이 선생님으로 변신한 구구절절한 사연을 대신해 현재 시점, 학교의 문제아와 왕따가 등장해 두 주인공의 밝혀지지 않은 과거를 보여준다. 등장인물들의 사연을 설명하기 위해 똑같은 플래시백 기법을 4번씩이나 썼던 <주유소 습격사건>에 비하면 상당한 발전이라 할 만하다.
이야기의 다른 축은 중간보스인 영준이 경주에 내려와 접수한 조직의 몰락과 재건과정이다. 죽은 줄 알았던 토착조직의 보스가 복수혈전을 꿈꾸면서 주란과의 삼각관계로 앙숙이 된 영준과 기동이 가슴깊이 묻어뒀던 의리 한 토막씩을 꺼내든다. 주란이 인질로 잡히자 두 남자는 그녀를 구하기 위해 사지로 뛰어든다. 둘 다 멋진 남자가 되고자 안간힘을 쓰는데 처음엔 영준이 우세하다. 영준은 조직이 위기에 처하자 기동과 주란이 위험해지지 않도록 여인을 포기한다. <카사블랑카>의 험프리 보가트처럼 말이다. 하지만 캐릭터를 깊이 파고드는 데 흥미가 없는 <신라의 달밤>은 영준을 부각시킨 다음 곧바로 기동의 손도 들어준다. 영준이 위험해지자 이번엔 기동이 물불 안 가리고 일당백의 싸움을 자처한다. 둘다 괜찮은 편이지만 차승원이 연기하는 기동은 그가 지금까지 영화에서 보여준 모습 중 최고로 꼽힐 만하다. 지극히 단순하고 욕도 잘하는 선생님 기동은 애들처럼 투정도 부리고 여자 앞에선 엄살도 떨며 가슴 한구석에 의리의 활화산도 간직한 남자다. 폭력적인 담임선생님을 우습게 보던 학생들은 그가 10년 전 전설의 패싸움에서 앞장섰던 선배라는 사실에 감격한다. 차승원을 보는 관객의 시선도 이런 학생들과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다.
전작 <주유소 습격사건>으로 익히 알겠지만 김상진 감독의 코미디는 품위나 격조에 개의치 않는다. <신라의 달밤>도 마찬가지여서 논리적 허점을 파고들자면 하나둘이 아니다. 토착조직 보스한테 예비군훈련 통지서를 전하는 장면이 왜 들어갔는지, 영준의 오른팔은 어째서 기동을 찾아가 영준이 위험하다는 걸 알리는지, 마지막 패싸움에 전혀 엉뚱한 인물들이 왜 끼어들었는지, 하는 질문들을 그의 영화는 아주 손쉽게 눈감아버린다. 대신 그는 만화의 컷이 비약하듯 앞뒤 정황을 찬찬히 살피기 전에 정신없는 국면으로 이야기를 몰고 간다. 처절히 싸우던 영준과 기동이 쓰러진 채 두손을 잡는, 낯간지러운 장면이 클로즈업될 때도 태연하기 이를 데 없고, 어색한 사투리 억양도 애써 고치려한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도 웃긴 걸 보면 순발력으로 승부하는 코미디 감각이 그만큼 대단한 건지 엄숙주의를 비웃는 극단적 저돌성이 힘을 발휘하는 건지 헷갈린다.
<신라의 달밤>에서 <투캅스>의 흔적을 발견하기란 어렵지 않다. 만나기만 하면 으르렁대던 두 남자가 위기에 직면하자 힘을 합치는 이야기 구조가 그렇다. 같은 구조 안에 90년대 <투캅스>가 부패로 물든 사회상에 대한 풍자로 채운 여백을, 2001년 <신라의 달밤>은 삼각관계와 패싸움과 사나이 정신으로 메운다. 그건 적이 사라진, 아니 적에 대한 관심이 없어진 시대의 증거일까? 전쟁의 결과에 대한 물음에 <신라의 달밤>은 이렇게 답한다. “그게 중요하냐?… 그건 그냥 그 자체로 의미가 있는 거야.”남동철 기자 namdong@hani.co.kr
<신라의 달밤>의 조연들 "영화의
다시다, 혹은 미원"
<주유소 습격사건>처럼 <신라의 달밤>도 떼지어 나오는 조연들이 한가닥씩 한다. 주란의 남동생 주섭으로나온 이종수는 <짝> <세상끝까지> 등의 TV드라마로 낯익지만 군대를 갔다오느라 한동안 모습을 볼 수 없었다. 그가 맡은
주섭은 왕년의 주먹이던 기동의 고등학교 시절을 연상케 한다.
반면 이동통신 CF로 얼굴이 알려진 김영준은 모범생에서 조직의 중간보스로 변신한 영준의 과거다. 주섭 패거리에게 당하기만
하는 왕따 학생으로 등장, 주섭의 일거수일투족을 선생님에게 고자질하지만 조직폭력배가 되는 엉뚱한 꿈을 꾸기도 한다.
영준의 조직에 당한 뒤 치사한 복수를 꾀하는 경주 토착조직 보스 마천수로 나오는 이원종은 <인정사정 볼 것 없다>와 <반칙왕>으로낯익다. <인정사정 볼 것 없다>에선 형사로, <반칙왕>에선 박상면과 연습게임을 하는 레슬러로 등장했는데 배역의 비중면에서
<신라의 달밤>이 가장 크다. 다소 어설픈 억양을 구사하는 다른 등장인물에 비해 사투리 구사도 자연스럽고 코믹연기도 잘 어울린다.
영준을 체포하기 위해 안달하는 늙은 형사는 극단 목화 소속 배우인 조상건이며 예비군훈련 통지를 전하는 군인은 노이즈로 가수활동을 했던 김학규.두 조직을 한 차례씩 배신하는 인물은 <주유소 습격사건>에 나왔던 연극배우 출신 유해진이며 영준 조직의 충직한 오른팔로 나온 배우는
<비천무>에서 철기십조의 조장으로 나와 깊은 인상을 심어준 이한갈이다. 유해진은 <무사>, 이한갈은 <성냥팔이 소녀의
재림>으로 조만간 다시 스크린에 등장할 예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