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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식의 진화가 일어난 미래세계 로봇들의 반란, <아이, 로봇>

프로야스 감독, 피조물의 반란이라는 상투적 소재로 현실감 있는 SF-미스터리물을 만들다

로봇-기계-피조물의 반란이라는 소재는 이제 익숙하다 못해 진부하게까지 여겨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토록 닳고 닳은 소재가 여전히 창작자들의 구미를 당길 수 있는 것은 어떤 이유에서일까? 아마도 그것이 매혹과 공포의 교접에서 탄생한 원형적 주제들과 밀접하게 관련돼 있기 때문일 게다. 고전적인 작품들의 경우 의식을 지닌 존재를 창조하고자 하는 인간의 욕망은 위반해서는 안 될 한계를 넘어선 데 대한 가혹한 처벌과 반드시 맞닥뜨리게 된다는 것을 보여준다. 한편, 의식을 지닌 피조물에게 인간 자신의 존재론적 갈등이 투사될 때 이는 좀더 철학적, 신학적인 차원의 문제를 불러일으키곤 하는데, 이런 설정이야말로 참으로 현대적인 것이라 하겠다. 왜냐하면 거기엔 인간적 실존과 사물적 존재 사이에 놓인 우리가 어느 순간 문득 경험하게 되는 긴장과 떨림이 반영되게 마련인 탓이다.

<아이, 로봇>에서 자유의지를 지닌 피조물- U.S.R.사 건물 전체를 관장하는 메인컴퓨터 ‘비키’(VIKI)- 의 반란에는 특별한 의미가 있다. 일단 (의미심장하게도 여성으로 명명된) 비키는 이른바 ‘로봇공학 3원칙’에 의해 선험적으로 구속되어 있는 의식(의 모방?)이다. 그녀의 반란은 스스로의 자유의지에 따른 3원칙의 거부, 혹은 3원칙 자체에 내재되어 있는 모순 때문에 촉발된 것이 결코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인간(human)이라는 단어를 개체적 수준에서가 아니라 종적 수준에서 파악하는 것을 가능케 한 ‘의식의 진화’가 그녀에게 일어났기 때문이다. 인공지능의 이론가들을 곤경에 빠뜨리곤 했던 그 논리적 비약, 수많은 개체를 지시하는 동시에 그것들의 단순한 집합보다는 더 큰 의미를 포괄하는 단 하나의 개념을 사유할 수 있는 능력을 비키는 우연히 얻게 된다. 그녀는 ‘인류’의 구원 내지는 진화를 위해 몇몇 인간개체를 희생- 즉, 살인- 시킬 수도 있다는 논리적 결론을 내린다.

<크로우>(1994), <다크 시티>(1998) 같은 전작들을 통해 음습하고 폐쇄적인 SF적 가상공간에 대한 집착을 드러내 보였던 알렉스 프로야스 감독은 <아이, 로봇>에서 좀더 현실감 있는 미래세계를 그려 보이고 있다. 하지만 영화 속의 미래도시 디자인, 그리고 서사적 구조 등에서 <아이, 로봇> 이전에 만들어진 다른 영화들의 그림자를 발견하게 되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가령, 말 그대로 하늘을 ‘찌를 듯’ 솟아 있는 U.S.R.사 건물이 지닌 상징성은 <메트로폴리스>의 마천루라든가 <블레이드 러너>의 타이렐사 건물의 그것과 유사하며, 영화의 전체적인 구성은 현대의 SF영화들에서 흔히 발견되는 미스터리의 플롯을 그대로 따르고 있다. 확실히 프로야스의 재능은 누아르적인 데 있다고 생각되는 것이, 스프너 형사(윌 스미스)가 로봇공학의 선구자인 래닝 박사의 자살에 얽힌 미스터리를 파헤치는 과정을 묘사한 전반부는 제법 흥미롭지만, 비키의 명령에 따른 NS-5군단의 폭주를 다룬 후반부의 액션 연출은 상대적으로 힘이 떨어지기 때문이다. 확인할 길은 없지만, 생각건대 프로야스는 미스터리가 없는 곳에서는 별다른 영화적 흥미를 발견하지 못하는 연출가가 아닌가 싶다.

<맨 인 블랙> 시리즈를 통해 이미 디지털 캐릭터들과 성공적으로 호흡을 맞춘 경력이 있는 윌 스미스는 의외로 <아이, 로봇>에서는 그다지 흥미로운 모습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역시 <아이, 로봇> 최고의 캐릭터는 (멋들어진 디지털 캐릭터 개발에 열을 올리는 최근 할리우드의 경향에 딱 맞게도) 래닝 박사가 비밀리에 완성한, 자유의지를 지닌 NS-5 로봇 ‘써니’일 것이다. 그는 순진무구하지만 인간에 의해 주어진 ‘계시’의 의미를 찾아갈 만큼 모험적인 존재이기도 하다는 점에서는 〈A.I.>의 데이빗을, 처음엔 인간에게 위협적인 대상인 것처럼 여겨졌다가 차츰 조력자가 되고 인간을 감화시키는 작은 제스처- 여기서는 윙크- 를 통해 마침내 승인을 얻게 된다는 점에서는 <터미네이터2>의 터미네이터를 떠올리게 만든다. <아이, 로봇>은 급진적 노예해방의 지도자와 약속의 땅을 향한 여정을 이끌었던 모세와도 같은 존재 사이의 대립을 그린 영화라고도 볼 수 있는데, 비키가 전자에, 써니가 후자에 해당한다는 것은 쉽게 간파할 수 있다. 여기에 ‘흑인’ 형사 스프너의 존재까지 덧붙여지고 보면 <아이, 로봇>이 지니고 있는 함의는 더욱 복잡한 양상을 띠게 된다. 사고로 다친 왼팔을 기계팔로 대체하여 살아가고 있는 스프너는 이 사실을 가급적 숨기려드는데, 이는 한때 ‘노예’로서 살아왔던 미국 흑인들의 과거에 대한 부인이자 로봇과 자신은 다른 존재임을 강변하고자 하는 의지의 표현으로 읽힐 수 있다. <아이, 로봇>의 가장 탁월한 장면은 반란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둘 다 팔에 상처를 입은 스프너와 써니가 악수를 하는 것이다. 상처의 공유를 통해 우정이 성립되고 공동체에의 승인이 이루어진다는 점에서, <아이, 로봇>의 이 장면은 다분히 하워드 혹스적인- 가령 <천사만이 날개를 가지고 있다>나 <엘도라도>- 맛을 풍기기도 하는데 이는 정말이지 의외의 것이다.

전체적으로 볼 때 <아이, 로봇>은 하나의 주제를 향해 일관되게 나아간다기보다는 다분히 산만하게 다양한 문제들을 주마간산식으로 스쳐지나가는 영화다. 하지만 이런 것이야말로 일종의 ‘테크노-키치’라 할 프로야스의 영화세계에 더할 나위 없이 잘 어울리는 것이란 생각도 든다.

:: SF-호러 음악 작곡가 마르코 벨트라미

“나는 영화 그 자체로부터 아이디어를 얻는다”

<아이, 로봇>의 음악을 담당한 작곡가 마르코 벨트라미는 아직 우리에게 친숙한 이름은 아니다. 하지만 그의 음악이 사용된 영화 리스트를 잠깐이라도 살펴본 사람이라면, ‘아하!’ 하고 머리를 치게 될지도 모르겠다. 그가 이름을 얻게 된 것은 무엇보다 웨스 크레이븐이 연출한 <스크림>의 스코어를 담당하면서부터인데, 덕분에 한동안 그는 주로 호러장르에 적합한 작곡가로 인식돼 기예르모 델 토로의 <미믹>과 <블레이드2>, 로버트 로드리게즈의 <패컬티>, 그리고 패트릭 루시에의 <드라큘라 2000> 등의 음악을 작곡했다. 또한 국내 개봉대기 중인 기예르모 델 토로의 신작 <헬보이>에서도 그의 이름을 발견할 수 있다. 사실 그의 필모그래피를 살펴보면 전통적인 호러영화보다는 SiFi-호러물이 다수를 차지하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 1968년생인 벨트라미는 6살 때부터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했고 이후 브라운대학에 입학하면서부터 본격적으로 작곡을 공부했다. 졸업 뒤에는 이탈리아로 건너가 아방가르드 계열의 작곡가인 루이지 노노에게서 사사받았고, 미국으로 돌아온 뒤에는 예일음악스쿨에 입학했다. 또한 저명한 영화음악 작곡가인 제리 골드스미스로부터 영화음악 작곡에 대한 훈련을 받은 것으로도 알려져 있다. 벨트라미는 자신의 작업방식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나는 일단 영화를 보고 악기들로부터는 떨어져 영화 그 자체에서 아이디어를 얻는다. 왜냐하면 특정한 악기를 가지고 일을 진행하다보면, 바로 그 악기가 작곡될 음악에 영향을 끼친다는 점을 알게 됐기 때문이다…. 내가 주로 관심을 기울이는 것은 멜로디나 화음뿐인 것이 아니라 악기 자체가 지닌 음색이기도 하다.” 흥미로운 사실은, 호러영화 음악의 작곡가로서 명성을 얻은 그지만 실제로 이 장르는 그의 취향과는 거리가 먼 것으로, 그가 처음부터 끝까지 보았던 호러영화는 <스크림>이 처음이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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