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Skip to contents]
HOME > News & Report > News > 국내뉴스
[오디션 특집] “10분간의 떨림, 오디션은 고독이다”

충무로 영화관 ‘오디션 찬가’

어둡고 텅빈 객석과 유달리 명암 대비가 선명하게 느껴지는 무대에 두명의 배우 지망생이 나란히 앉아 있다. 조명 아래의 얼굴은 환하게 웃고 있지만 손에 쥔 A4용지 두장짜리 짧은 대본은 비바람에 놓인 듯 격렬하게 떨린다. 염라대왕처럼 객석 앞자리를 차지한 심사위원들 가운데 한 사람이 어떤 주문을 하는 듯 보인다. 쑥스러운 듯 한 응모자가 어렵사리 말을 꺼낸다. “다리가 너무 후들거려서요.” 순간 웃음이 터지며 극장 안의 팽팽했던 긴장감이 이완된다. 지난 달 30일 서울 남산 감독협회 시사실에서 열렸던 영화 <태풍태양>(제작 필름매니아, 감독 정재은)의 최종 공개오디션 현장의 풍경이다.

천계영의 만화 <오디션>이나, 뮤지컬 배우들의 꿈을 그린 영화 <올 댓 재즈>에서 볼 수 있듯 오디션 현장은 그 자체로 기대와 탄성, 욕망과 좌절이 녹아든 한 편의 드라마다. 이날 참가한 34명의 후보들은 1000명이 넘는 지원자들 가운데 1,2차 오디션을 거치고 최종 ‘시험대’에 오른 선택받은 사람들이다. 이들은 ‘단 한번’의 기회를 잡기 위해 대기실에서 몇줄 안되는 대사가 다 지워지도록 외우고 외운 뒤 무대에 오른다. 그러나 무대에 오른 뒤 대사는 ‘씹히기’ 일쑤고 맑게 ‘톤 조절’을 했던 얼굴은 굵은 땀방울로 순간 젖어버린다.

꿈을 향한 절규…한명만 웃는 ‘드라마’

장애물이나 위험한 설치대에서 인라인 스케이트를 타는 ‘어그래시브 인라인 스케이터’ 청춘들의 꿈과 좌절을 그리게 될 <태풍태양>의 오디션 참가자들은 대체로 20대 초중반의 젊은이들이다. 연기훈련에 필요한 기계체조 동작과 주어진 대사 리딩 외에도 참가자들은 다양한 상황에서의 캐릭터 소화능력에 대한 즉흥연기를 주문받는다.

“소개팅에 나갔는데 상대방이 폭탄이예요. 이 상황을 어떻게 풀어나갈지 연기해보세요.” “길 가다가 아주 맘에 드는 이성을 만났어요. 한번 ‘꼬셔’보세요.” “가장 친했던 친구한테 배신을 당했을 때 느낄만한 분노를 표현해 보세요.”

주문은 거침없이 쏟아져 나온다. 긴장한 배우들의 입에서는 거친 욕이, ‘뻘줌’한 웃음이, 글썽이는 눈물이 시시때때로 흘러나온다. 참가자들은 덤블링 실력으로, 춤과 노래로, 성대 모사 개인기로 만족스럽지 못한 실력발휘를 메꾸고자 주어진 10여 분동안 분투를 한다. 그리고 약속이나 한듯 하나같이 무대를 내려오며 길게 내뿜는 장탄식. 붉게 상기된 얼굴에는 아쉬움의 표정이 역력하다.

불켜져있어도 나는 어두운…

△ 6월30일 서울 남산 감독협회 시사실에서 열렸던 <태풍태양> 최종 오디션 현장.아침에 일어나보니 스타가 돼있더라는 말이 어울릴 만한 꽃미남 꽃미녀 배우들로 즐비한 스크린이지만 어느 누구도 하룻밤에 스타가 되지 않았다. 지금은 쏟아지는 시나리오를 미처 다 읽을 수도 없을 정도로 바쁜 스타급 배우들도 한때는 오디션장을 들락거리며 감독과 제작자의 주문 한마디에 천국과 지옥을 오가는 신참배우들이었다. 10대부터 20대까지 약장수처럼 온갖 프로필 사진을 들고 문턱이 닳도록 오디션장을 들락거렸던 로버트 드 니로가 <대부>의 소니역 오디션에 미끄러진 뒤 <대부2>에서 <대부>의 주인공 비토 콜레오네의 젊은 시절을 거머쥔 건 유명한 일화다.

첫 연출작 <고양이를 부탁해>에서 오디션으로 옥지영과 이은실, 이은주 쌍둥이 자매를 캐스팅한 데 이어 새영화 <태풍태양>에서 주연급 배우까지 오디션을 통해 선발하는 정재은 감독은 오디션을 두고 “연기에 관심많은 젊은이들에게 좀더 넓은 기회를 제공하는 동시에 만드는 입장에서는 짧은 시간에 많은 가능성을 타진해 볼 수 있는 장점이 있다”고 말한다. 신인배우들에게는 고치를 벗고 나비로 날아가는 ‘비상’의 기회이자, 감독과 제작자에게는 구석에서 반짝거리는 숨은 보석을 발굴하는 금광이 바로 오디션이다.

“다듬어진 기술보다 재능을 찾아라”

오디션은 충무로에서도 서서히 스타탄생의 구조적 창구로 자리잡아 가고 있다. 인터넷 ‘얼짱’에서 스크린의 히로인으로 등극한 <여고괴담 3: 여우계단>의 박한별이나 지난해 최고의 유망주로 꼽힌 <장화, 홍련>의 임수정, <올드보이>의 강혜정은 모두 오디션이 발굴한 ‘보석’들이다.

이제는 최고스타가 된 송혜교도 문을 두드렸던 <여고괴담>1편과 <여고괴담>2편, <고양이를 부탁해>와 <장화, 홍련>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젊은 주조역 여배우들을 오디션을 통해 찾아낸 오기민 프로듀서(마술피리 대표)는 전쟁같은 주연배우 캐스팅난에서 오디션이 가지는 의미를 긍정적으로 평가한다. “폴란드에서 <이방인>을 찍을 때 이름이 잘 알려진 유명배우들도 오디션을 보러오는 것을 보고 매우 놀랐다. 우리의 오디션 문화는 아직 그 정도로 활성화되지는 않았지만 한 줌밖에 안되는 유명배우의 캐스팅에 허덕이는 현실에서 오디션이 배우 발굴에 매우 유용한 기능을 하는 것은 분명하다.” 물론 오디션이 모든 캐스팅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아니다. 오 피디의 제작 목록에서도 볼 수 있듯이 오디션을 통해 주연급까지 캐스팅이 가능한 건 이십대 초중반의 젊은 이들을 그리는 영화에 제한되는 한계가 있다. 신인이건 중견이건 나이든 배우의 경우는 스스로 오디션에 나서기를 꺼리는 경우가 많고, 제작자의 입장에서도 이미 ‘뛸만큼 뛴’ 상태에서 알려지지 않았다면 배우로서의 성과에 한계를 보인 것이라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박한별, 임수정…송혜교도 오디션파

물론 젊은 배우를 대상으로 하는 오디션이라고 쉬운 작업은 아니다. 오 피디는 <여고괴담>1편을 찍을 당시 3천여 명의 배우지망생들을 오디션했다. 전라도를 배경으로 아빠를 찾는 아이의 이야기를 그릴 <아이스케키>를 제작중인 명필름 제작부는 지금까지만 전라도 지역 초등학생 2500여 명을 카메라테스트하는 대규모 오디션 중이다. ‘맨땅에 헤딩하기’식 고충보다 더 힘든 건 돈을 대는 투자사의 기대와 ‘압력’일 때가 많다. 투자사는 확실하게 돈이 되는 검증된 유명배우를 선호하기 때문에 오디션을 하는 제작사는 투자사와도 줄다리기를 해야 한다.

그럼에도 기성배우들의 ‘공급’과 제작편수의 ‘수요’가 터무니없이 불균형한 충무로 현실에서 오디션은 배우수급 구조의 숨통 튀우기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주연급을 스타 캐스팅하는 제작사라도 주요 조역들은 오디션을 통해 캐스팅하는 방식으로 오디션은 거의 모든 영화에서 널리 활용된다.

주연 모시기 사실상 전쟁이었다

재작년 만들어진 캐스팅 전문업체 엔터파워는 거의 매주 공개 또는 비공개의 오디션을 열고 있다. 제작 준비중인 영화사의 대리 역할로 오디션을 진행하는 이 곳은 언론과 배우지망생들의 소모임인 인터넷 카페, 에이전시, 연기학원과 학교 영화과 등에 오디션을 홍보해 참가자를 모집한다. 이 회사의 홍석호 대표는 “오디션이 꽃미남 미녀들이 아닌 실력있는 배우지망생들에게 사실상 유일한 출구가 된다”고 말한다. <색즉시공> <낭만자객> 등을 통해 비중있는 조역으로 성장한 신이를 발굴한 홍 대표는(그가 신이를 낙점해 <색즉시공> 오디션에 보냈다) “연기수업을 통해 다듬어진 기술보다 다듬어지지 않더라도 순간 번득이는 재능을 찾는 것이 오디션의 첫번째 역할”이라고 말한다. 오디션을 통한 배우 등용이 늘어날수록 외모지상주의를 벗어나 다양한 개성의 배우들이 자신의 자리를 찾아갈 수 있다는 것이다.

캐스팅에서도 ‘권력이동’ 조짐

오디션이 늘 성공하는 것만은 아니다. 80년대에 이미 <장군의 아들> 대규모 공개 오디션을 통해 박상민과 신현준이라는 초짜배우를 스타로 등극시켰던 임권택 감독의 <춘향뎐>을 통해 조승우는 스타로 발돋움했지만 주연 여배우는 아직 이렇다할 후속작을 내지 못하고 있다. 임상수 감독은 최근 준비중인 신작영화에서 주연급 여배우 두명을 공개 오디션으로 물색했지만 결국 포기하고 기존 여배우를 캐스팅하기로 결정했다.

배우가 존재하면서 어떤 식으로든 늘 있어왔던 오디션이지만 인터넷 시대에 오디션은 보다 진화된 형태로 변해가고 있다. 한 예로 네티즌들이 자체 오디션을 하는 형태인 ‘얼짱’문화는 <여우계단>의 박한별의 경우처럼 배우 캐스팅의 캐스팅 보트를 감독, 제작자 등이 가지고 있던 선택의 ‘권력’을 일반인으로 확장하는 데 기여한다. <와이키키 브라더스> <버스, 정류장> <욕망> 등에서 오디션을 진행해왔던 명필름의 심보경 이사는 “이전에는 오디션의 과정과 결과가 일방통행이었다면 최근 네티즌의 의견이 적극적으로 개진되는 개방적인 인터넷 문화와 오디션 문화가 접점을 이루면서 배우 오디션의 개념이 조금씩 외연을 확장하고 있는 것같다”고 말했다.